2. 집은 최소한의 인권이다
집과 인권은 어떤 관계일까?
“어린이와 청소년도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1989년 유엔(UN)은 ‘어린이 청소년 권리 협약’을 채택하고 세계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존엄한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어엿하게 대우받고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권리 협약’ 내용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2조 어른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결정을 내릴 때 우리에겐 우리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어른은 우리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제14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고, 우리 자신의 종교를 정할 권리가 있다. 부모님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어야 한다.
제16조 우리는 사적인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제19조 아무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해쳐서는 안 된다. 어른들은 우리가 매맞거나 무관심 속에 내버려지게끔 놔두지 말고 우리를 보호해 줘야 한다. 우리의 부모님에게도 우리를 해칠 권리가 없다.
제27조 우리는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등을 주어야 하고, 만일 부모님이 어렵고 힘든 경우에는 나라에서 부모님을 도와주어야 한다.
제31조 우리에겐 쉬고 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가 1991년 비준한 유엔 아동권 협약 27조 3항에서도 국가는 아동을 양육하는 부모나 보호자를 돕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마련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때요, 여러분은 유엔이 보장한 어린이와 청소년의 인권을 제대로 누리고 있나요? 여기서 말하는 인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본적 권리를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人이라면 누구나 갖는 권리權利 즉, 인권人權입니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당연한 권리이자, 인간다운 삶의 출발점입니다.
1948년 유엔 총회는 ‘세계 인권 선언’을 채택하고 모든 국가는 국민의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그 이래로 대다수 나라는 헌법에 세계 인권 선언의 기본 정신을 반영하여 국민의 인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1948년 헌법 제정 당시부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국가의 의무로 삼고 있습니다.
인권은 크게 두 분야로 나뉩니다. 하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인간의 생명과 자유, 안전을 지킬 권리로 자유권이라 부릅니다. 고문이나 체포·구금·추방당하지 않을 자유, 사상과 양심·종교의 자유, 언론·집회·시위·결사의 자유,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재판을 받을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자유권과 함께 인권을 구성하는 중요한 권리가 바로 사회권입니다. 사회권이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를 말합니다. 의식주와 의료 등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일할 권리나 노동 삼권, 휴식과 여가를 누릴 권리, 교육받을 권리, 문화를 누릴 권리, 사회 보장을 받을 권리 등이 사회권에 속합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권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으로 쟁취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헌법에 국민의 기본권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인권 보장과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투쟁이 있고 나서야 점차 지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권과 집 문제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바로 사회권 즉,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관련이 깊습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게 있을까요? 매우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기초적인 조건은 바로 의식주 즉, 인간 생활의 3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또 잠자고 쉴 집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면 다른 어떤 것이 잘 보장돼 있다 해도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집 문제와 관련된 인권은 바로 인간다운 주거 생활을 누릴 권리 즉, 주거권housing rights입니다. 지붕과 벽, 창문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이 최소한 인간답게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주거 생활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권리가 보장돼야 할까요? 유엔 사회인권 위원회는 1991년 발표한 논평에서 적절한 주거 보장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일곱 가지가 지켜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쫓겨나지 않는 집, 위생적인 집, 비싸지 않은 집
첫째, 살던 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에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 참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재개발이 이뤄지던 동네에서 적절한 대책을 요구하던 세입자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큰불이 났기 때문이지요.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은 건설 업체와 재개발 조합이 세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보상금이나 이주 대책도 세워 주지 않고 법 절차까지 무시해 가며 한겨울에 폭력을 동원해 쫓아내려 한 데 있습니다.
유엔이 보장하고 있는 주거권에 따르면 용산 참사의 경우와 같이 세들어 살던 사람을 강제로 내쫓는 일은 금지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허용된다면 인간다운 주거 생활은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집주인이 전월세금을 올려 주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선택하라며 사실상 세들어 사는 사람을 이사 가도록 하는 일 또한 인간다운 주거 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같은 집에서 적어도 10년은 계속 살 수 있도록 제도를 고치고 정책을 펴야 할 의무가 국가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 건강하고 위생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적절한 주거 기반 시설과 서비스를 갖춰 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닐하우스촌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은 자기 집에 주소지를 두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의 주소지가 친척집으로 돼 있어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먼 학교에 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전기나 수도조차 제대로 공급해 주지 않아 근처에 있는 전봇대에서 전기를 끌어 와 쓰는 바람에 화재 위험도 크고,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는 등 위생 상태도 좋지 않은 형편입니다.
유엔은 정부가 이와 같은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주거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부는 주민들이 적절한 주거 공간으로 옮길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고, 주소지를 둘 수 있게 하거나 화재 예방, 위생 환경 시설 등을 갖춰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들의 경제적인 형편에 맞는 집을 제공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살기 좋은 집을 많이 짓는다 하더라도 가격이 너무 비싸서 국민들이 구입할 수 없거나 세조차 들 수 없다면 그림의 떡이라는 이야기죠.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버는 돈에 비해 집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인간다운 주거 생활이 어려운 형편입니다. 집값과 전월세 가격을 적정한 수준으로 낮춰서 보통 사람 누구나 집을 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살 만한 집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변에 매우 많습니다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집이 아예 없어 길거리에서 사는 노숙자겠지요.
넷째, 주거 생활이 최저 주거 기준에 미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최저 주거 기준이란 말 그대로 인간다운 주거 생활을 위해 지켜야 할 최저의 기준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부부는 독립된 침실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 가난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가 한방에서 잔다면 이를 인간다운 생활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또 어린이도 여덟 살부터는 남녀가 따로 잘 수 있도록 방이 충분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만 쓸 수 있는 부엌이나 수세식 화장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 시설이 갖춰져야 합니다. 만약 화장실이 없어 동네 공중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거나, 셋방에 부엌이 없어 주인집이 식사를 끝낸 뒤에야 부엌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죠.
또 식구가 많으면 그만큼 넓은 집에 살아야 합니다. 너무 좁아서 식구끼리 어깨가 부딪칠 정도면 최소한의 주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무너지거나 화재 위험이 있거나, 악취가 난다거나, 장마 때 물이 들어온다든지, 산사태 등의 위험에 노출된 집도 역시 살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최저 주거 기준에 미달하는 집에서 사는 사람이 2010년 기준으로 전체 가구의 12%에 약간 못 미치는 203만 가구로 500만 명에 달한다는 것입니다(2011년 개정된 최저 주거 기준 적용시). 또 129만 명의 아동이 최저 주거 기준 미달의 주거 빈곤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유엔은 최저 주거 기준 미달 가구에 대해 우선적으로 대책을 세워서 주민들의 인간다운 주거 생활을 보장할 것을 각국 정부에 촉구하고 있습니다.
약자에게 편한 집, 멀지 않은 집, 이웃과 함께하는 집
다섯째,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라 할지라도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어야 합니다.
정부가 세놓은 공공 임대 주택 중 문턱 때문에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는 경우가 있어 불편을 호소하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중증 장애를 앓는 저는 문 손잡이에 손이 닿지 않기 때문에 문이 닫히면 꼼짝없이 방에 갇혀 버립니다. 그래서 평생 방문을 닫지 않고 살아요.” 제가 아는 어느 장애인의 이야기인데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도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만 인간다운 주거 생활이 가능합니다.
(반)지하방은 특히 노인들에게 힘듭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관절염 때문에 무릎이 불편한 노인들에게는 큰 고통입니다.
여섯째, 집이 너무 외딴곳에 있어 직장은 물론 보건소, 학교, 어린이집 등을 이용할 수 없다면 문제입니다.
2008년 기준으로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공공 주택의 82% 이상이 서울에서 25km 이상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만큼 출퇴근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더 고달플 수밖에 없겠지요. 정부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일지라도 직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시설을 이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딴곳에 살지 않도록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일곱째, 익숙한 문화가 파괴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개인과 가족이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는 정든 이웃이 있고, 이웃끼리 만들어 온 공동의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재개발로 인해 함께 살던 동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개발이 끝나고 다시 그 동네로 돌아와 사는 비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 만들어 온 이웃 간의 정과 신뢰, 공동체들이 파괴당하는 것이지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이런 일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이웃 간의 익숙한 문화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빼앗는 것으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유엔이 정한 주거권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주거 조건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009년 12월 유엔은 특별히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주거권과 관련해 세 가지를 반드시 바로잡도록 권고했습니다.
첫째, 유엔은 한국 정부에게 노숙자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울 것을 권고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적절한 생활수준을 보장한 후 노숙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최저 주거 기준에 미달하는 조건에서 사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정부 내 부서를 만들고 예산을 확보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셋째, 용산 참사의 경우처럼 살던 사람을 강제로 내쫓는 일이 없도록 대책을 세울 것을 권고했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사는 이웃들에게 ‘집은 최소한의 인권’이라는 유엔의 선언이 하루빨리 보장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