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프랜치와 은혜의 집
“얘들아, 너흰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단다! 염소, 개, 당나귀, 토끼와도 친구가 될 수 있어. 물론 사람들하고도 친해질 수 있지. 그런데 때로는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울 수도 있어.”
프랜치가 우리에게 들려준 말이다.
프랜치는 종종 이렇게 아냐와 플리치 자매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아냐는 이번 가을에 5학년이 되었고,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학교에는 프랜치처럼 말하거나 프랜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냐의 동생 플리치는 이제 겨우 2학년이지만 아는 게 많다. 그런데도 가끔은 똑똑한 플리치도 프랜치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아냐와 플리치 자매의 부모는 “프랜치는 꿈꾸는 소녀 같아!”라고 말하곤 했다.
프랜치가 처음 나타난 것은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침 7시, 아냐는 빵에 꿀을 발라 먹고 있었고, 플리치는 체육복 가방을 찾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트럭 한 대가 아냐네 부엌 창문 앞을 지나가더니 거의 허물어진 이웃집 앞에 멈췄다. 그것도 하필이면 빗물이 고인 웅덩이 위였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가볍게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은 빗물 웅덩이 안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본 아냐와 플리치 자매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 엄마는 아이들이 점심으로 먹을 버터 바른 빵을 가방에 넣어 주고 있었다. 트럭 운전자가 옷에 묻은 흙탕물을 탈탈 털며 웅덩이 밖으로 나왔다. 아냐와 플리치 자매는 그제야 트럭 운전자의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어? 여자네! 어떻게 여자가 저렇게 큰 차를 운전할 수 있지”
플리치가 여전히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왜 못 하는데”
아냐가 버럭 화를 내는 척하며 시비를 걸었다. 평소처럼 꼬투리를 잡아 동생이랑 티격태격 말싸움을 할 기세였다. 그때 갑자기 트럭 밖으로 개들이 펄쩍 뛰어내렸다. 털이 복슬복슬 하고 키가 큰 개, 털이 매끄럽고 비쩍 마른 개, 그리고 너무 작 아서 하마터면 보지 못할 뻔한 개까지 모두 세 마리였다.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니”
엄마가 부엌 창가로 다가와 딸들을 옆으로 살짝 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집 앞에서는 흥미로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먼저 키가 크고 빼빼 마른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무릎까지 오는 초록색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개들이 이리저리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그 사람이 바로 프랜치였다. 프랜치는 이웃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 그곳은 원래 오래된 농장이었는데, 워낙 허물어지고 여기저기 부서져서 ‘폐가’라 불릴 정도로 낡은 집이었다. 그래서 라우터바흐 마을 사람들은 이 농장을 아주 보기 흉한 골칫거리로 여겼다. 반쯤 주저앉은 지붕, 깨진 유리창, 낙서로 가득한 지저분한 벽. 그리고 농장 진입로와 건물 뒤 여기저기 나 뒹구는 녹슬고 낡아 빠진 침대, 구멍이 숭숭 난 빈 깡통, 부서진 오토바이 등 농장은 매우 더럽고 지저분했다. 게다가 밤이면 술 취한 사람들이 문에 오줌을 쌌고,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이 농장 담벼락에 씹던 껌을 붙이는 등 농장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그래도 농장 안까지 들어가서 더럽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안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가면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농장을 포기해서 ‘누군가 이 농장을 다시 활기차게 만들 수 있을 거야.’ 같은 희망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완전히 헐어 버리고 예쁜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해!”
아냐와 플리치의 아빠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건축가인 아빠는 매일 ‘저기에 어떤 건물을 지으면 좋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내 “가족 여행을 온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아담한 별장이나 멋진 호텔을 지었으면 좋겠다.”라는 결론을 내었다. 사실 라우터바흐 마을은 아주 조용해서 휴가를 보내기에 좋은 곳인데도 아직 이런 건물들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곳에 프랜치가 이사를 온 것이다.
“프랜치는 너무 빼빼 말랐어!”
엄마가 말했다. 아냐는 날씬한 프랜치를 보고 엄마가 샘이 나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동생 플리치가 태어난 후 더 불어난 엄마의 뱃살은 더 이상 빠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엄마가 뱃살이 쪘다고 놀리거나 흉을 보지 않았다. 가족 들은 엄마가 울룩불룩 뱃살 주름이 잡히건 어쨌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유독 엄마만이 자기 뱃살을 무척 보기 싫어했다. 그래서 엄마는 자기보다 마른 사람을 질투하곤 했다. 확실히 엄마 말대로 프랜치는 정말 말랐다. 하지만 매우 튼튼하고 힘이 셌고 손도 무척 컸다.
“엄마, 프랜치는 항상 무얼 해야만 하잖아요. 그래서 튼튼하고 손이 커야 해요.”
“어머, 얘! 나도 그래.”
엄마는 아냐에게 보란 듯이 손을 쫙 펴 보였다. 하지만 아냐는 엄마와 프랜치를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하는 일은 프랜치가 하는 일과 전혀 달랐고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니까.
프랜치가 해야 할 일
- 농장 진입로에 쌓인 잡동사니와 고물 치우기
- 울타리 다시 세우기
- 창고 고치기
- 새는 지붕 고치기
- 안쪽 벽 페인트칠하기
- 바깥 벽 페인트칠하기
- 개 사료 구하기
엄마가 해야 할 일
- 은행 고객과 상담하기
- 돈 벌기
- 집 안 청소하기
- 정원 가꾸기
- 아냐와 플리치 돌보기
- 숙제 검사하기
- 살 빼기 운동하기
엄마가 해야 할 일은 정말 많다. 하지만 엄마의 일은 손이 크다고 해서 도움이 되거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게다가 아냐와 플리치를 돌보면서 개 세 마리까지 기른다면 그건 엄마에겐 너무 힘든 일이다.
한번은 프랜치가 개들을 데리고 은행에 간 적이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었는데 하필 엄마가 일하는 지점이었다. 당연히 문제가 생겼다. 은행 안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작은 개는 한쪽 구석에 놓인 고객용 의자 뒤로 숨고, 키가 크고 털이 복슬복슬한 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요리 조리 돌아다녀 흰 대리석 바닥을 온통 개 발자국 투성이로 만들었다. 세 번째 개는 출입문 바닥에 엎드려 앉아 컹컹 큰 소리로 짖어 대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은행 지점장이 화를 안 냈을까? 당연히 길길이 날뛰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때 엄마가 나서서 화난 지점장을 간신히 달랜 덕분에 프랜치는 아무런 문제없이 통장에서 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쥐꼬리만큼 적은 돈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조금인데요”
은행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진 플리치가 물었다. 그러나 엄마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건 고객의 비밀이라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엄마는 프랜치에 대해서도 말하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본래 아냐네 가족은 한자리에 모이면 항상 프랜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아빠가 “프랜치! 또, 또, 또, 프랜치! 제발 좀 그만할 수 없어? 그 여자와 개들, 그것 빼고 할 이야기가 그렇게 없어”라며 화를 냈다. 그래서 프랜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그 후 프랜치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건 아빠였다. 농장에서 일하는 프랜치를 보고 “저 여자는 왜 저렇게 힘들게 일을 하는지 몰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말에 아냐네 가족은 다 함께 창가에 서서 프랜치네 농장을 바라보았다. 프랜치는 농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이것저것 뭔가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닥치는 대로 깨작깨작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돈도 없다면서 뭘 하려는 거야? 저 집을 고쳐서 어디다 쓰려고 저러지? 농장을 수리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나 몰라. 저건 한마디로 미친 짓이야!”
“아휴! 프랜치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었잖아요. 아무래도 프랜치에게 조언을 좀 해야겠어요.”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프랜치에겐 조언이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번에 은행을 들른 이후로 프랜치는 두 번 다시 은행에 가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프랜치가 큰 꽃다발을 들고 아냐네 집에 찾아왔다. 새로 이사왔 다는 인사를 하러 온 거였다. 프랜치는 아냐네 식구 모두와 악수를 했다. 아냐네 부모는 폐허나 다름없는 농장을 고쳐서 무얼 하려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아직 서먹서먹한 사이라 물어보지 않았다.
아냐와 플리치는 프랜치가 데리고 온 개들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매는 무릎을 꿇고 개들을 쓰다듬고 귀여워했다. 특히 작은 개가 마음에 들었다. 너무 작아서 기니피그처럼 생겼는데 무척 신이 났던지 플리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반 면 털이 매끄럽고 비쩍 마른 개는 자매를 피해 자꾸 뒷걸음질을 쳤다.
“도살장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개야. 그래서 사람들을 무서워해.”
프랜치가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플리치가 프랜치를 빤히 쳐다보고는 다시 마른 개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가 얘를 죽이려고 했어요”
플리치가 속삭이듯 물었다.
순간 분위기가 침울해졌고 엄마가 주의를 돌리려고 프랜치에게 커피를 권했지만 소용없었다.
“도살장이 뭐예요”
플리치가 물었다.
“많은 나라에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동물들을 가두는 곳이 있어. 그곳이 도살장이야. 말하자면 동물을 죽이는 공장인 셈이지. 그곳에 갇힌 동물들은 꺼내 주지 않으면 죽게 돼.”
프랜치는 엄마가 권하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대답했다.
“프랜치가 저 개를 그곳에서 데려왔어요”
아냐가 물었다.
“아무래도 이건 어린아이에게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아요.”
엄마가 다시 끼어들었다.
“응. 그곳에서 데려왔어. 그때 저 개 말고도 다른 개도 열 마리나 꺼내 왔어. 다른 개들은 지금 모두 새 가족들과 살아. 하지만 저 개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내가 데리고 있는 거야.”
“이 개들은 이름이 뭐예요”
아냐가 물었지만 그때 프랜치는 벌써 문밖으로 나가고 있어서 아냐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
얼마 후 아냐네 가족은 개들의 이름을 모두 알게 되었다. 베니토, 케노, 크륌멜이었다. 또, 농장에서 프랜치가 뭘 하려는지도 알게 되었다. 프랜치는 농장을 고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동물들을 데려다가 함께 살 집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 농장의 이름은 ‘은혜의 집’이라고 했다. 아냐와 플리치 자매는 ‘은혜’ 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물론 들은 적이 있긴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누군가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애걸복걸할 때 나오는 단어였으니까. 크리스마스 예배 때도 은혜라는 단어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옛날 역사극에서 하인들이 주인에게 “은혜로운 주인님!”이라고 부르짖는 걸 본 적도 있다. 물론 프랜치가 말하는 은혜란 이런 뜻이 아니었다.
“은혜가 뭐냐면 선물 같은 거야.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선물은 죽지 않고 사는 것, 그건 바로 생명이지! 이건 동물한테도 마찬가지일 거야. 안 그래? 나는 동물들을 구해서 여기서 함께 살 거야. 목숨을 잃고 쓰레기 속에 버려지지 않게 말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그런데 동물들에게 은혜를 주기 위해서는 많은 공간이 필요 했다. 그래서 프랜치는 농장에 가득한 쓰레기를 치우며 미친 듯이 일했다. 농장에서 나온 쓰레기로 컨테이너 한 개가 가득 찼다. 잔뜩 우거진 쐐기풀을 뽑고 나무딸기 덤불을 잘랐다. 마른 잡초들을 태우고, 떨어져 나간 창문들은 고쳐 새로 달았다. 또, 얼마 전에는 프랜치가 직접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은 너무 낡아서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고, 심지어 흔들거리기까지 했다. ‘지붕이 폭삭 무너지면 어쩌나? 저러다가 프랜치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며 잔뜩 겁이 난 아냐와 플리치는 지붕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아냐네 부모는 프랜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프랜치가 왜 모든 일을 혼자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일꾼을 구해서 시킬 것이지 왜 저러고 혼자 낑낑대지? 기술자를 부르면 1~2주면 다 끝낼 텐데 말이야.”
아빠가 말했다.
“돈이 없어서 그럴 거예요.”
엄마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리하여 아냐네 부모는 또다시 프랜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참을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다가 바로 이웃에 동물 보호소가 있으면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웃에 동물 보호소가 아니라 슈퍼마켓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지저분한 쓰레기와 오물 냄새가 가득한 동물 보호소 대신에 아주 예쁜 새 건물이 들어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냐네 부모가 딱딱하고 마음이 좁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동물을 좋아했고 다른 사람들과도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친절하고 평범한 이웃이었다. 그리고 이웃이 자기네에게 이익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왜요? 프랜치하고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잖아요.”
아냐의 말이 맞았다. 몇 가지 규칙만 안다면 얼마든지 프랜치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으니까.
프랜치와 대화를 나눌 때의 규칙
1. 프랜치는 좋은 대답을 알고 있을 때에만 대답한다.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거나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경우에는 대답하기까지 상당히 오래 걸린다. 그래서 상대방이 입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서 있거나 대답을 빨리하지 않아도 프랜치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어른들은 이런 것을 싫어한다. 아냐도 처음에는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2. 프랜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 개가 죽임을 당하는 일들에 대해 사실 그대로 말한다.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으면 마시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빨 사이에 파슬리가 낀 사람을 보면 이빨 사이에 뭐가 끼었다고 말한다. 누군가 찾아와“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는데 방해가 되는 상황이라면 다른 변명을 하거나“ 다른 때라면 괜찮아요.”라고 둘러대는 대신 “지금은 안 되겠는데요.”라고 솔직히 말해 버린다. 즉, 프랜치는 절대로 핑계를 대거나 변명을 하지 않는다.
3. 프랜치는 종종 아냐와 플리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것에 대해 말한다. 아냐와 플리치가 물어보면 설명해 주긴 하지만 아주 조금뿐이다. 나머지를 더 알고 싶으면 스스로 생각해서 알아맞혀야 한다. 그 건 때때로 매우 어렵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프랜치는“ 인생을 순식간에 망칠 수 있지만 잘못된 걸 바로잡는 건 아주 힘들어”또는“맞서 싸우지 않으면 변하지 않아. 항상 똑같을 뿐이야.”라든지, “매일 그날이 마지막이라 여기고 열심히 살아야 해. 동물들은 그렇게 살아.” 같은 말 을 했다. 아냐네 부모는 이런 말들은 히피*들이나 쓰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냐와 플리치 자매는 히피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자 아빠는“ 꽃의 아이들!”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꽃의 아이들이라, 참 예쁜 말이었다.
* 현실 사회의 제도나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나 전 세계로 퍼졌다.
처음에 아냐는 프랜치의 옷차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특히 프랜치의 머리는 지저분하고 보기 흉했다. 머리카락이 단정치 못하게 헝클어진 데다 삐죽삐죽 뻗어 있었다. 이는 아냐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냐는 머리카락이 몹시 가늘어서, 바싹 마른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해 보이지 않으려면 항상 머리빗으로 곱게 빗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아냐는 다른 것은 몰라도 머리카락에 대해서만은 매우 민감했다. 용모를 단정히 하고 깔끔해 보이려면 조금쯤은 신경을 써야 한다. 머리를 감지 않아 기름기로 덕지덕지 뭉쳐진 머리카락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아냐는 프랜치의 지저분한 머리도 어느샌가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장에서 어떤 동물들을 키우게 될 것인지도 기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은혜로운 사람도 가끔은 머리도 감고 구멍이 없는 셔츠를 입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만일 아냐가 프랜치처럼 구멍난 옷을 입고 학교에 간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아냐를 가난뱅이라고 여길 것이다. 물론 프랜치는 정말로 돈이 없을지 모른다. 아니면 옷을 사는 대신 가진 돈을 몽땅 다른 곳, 이를테면 울타리를 만들 철사, 지붕에 올릴 기와, 페인트를 사는 데 쓰는지도 모른다.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새가 어쨌건 프랜치는 와플을 아주 맛있게 구웠다. 그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그러니까 농장의 방에는 아직도 쓰레기가 가득하고, 천장 아래에는 집채만 한 거미줄이 걸려 있었을 때에도 프랜치는 이삿짐 속에서 와플 기계를 찾아 꺼내서 와플을 구웠다. 달콤한 바닐라 와플이었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맛있었다.
“어쩌면 이 농장에 닭이 생길지도 몰라. 그러면 우리는 매일 신선한 달걀을 얻을 수 있겠지. 그걸로 산더미만큼 많은 와플을 구울 수 있을 거야.”
프랜치가 말했다.
아냐와 플리치는 버터가 잔뜩 묻은 손가락을 청바지에 쓰윽 문질러 닦았다. 자매는 프랜치가 ‘우리’라고 말해 주어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잠시 후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일어났는데 농장에 있는 변기가 막혀서 사용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잡초가 뒤덮인 마당으로 나가 덤불 뒤에 쪼그리고 앉아 소변을 보아야 했다. 쪼그리고 앉은 아냐와 플리치는 ‘나중에 은혜의 집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폈다. 잡초도 없고, 쓰레기도 없고, 진짜 화장실이 생긴 농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냐는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하마터면 쐐기풀에 주저앉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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