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리와 나는 오순도순 텔레비전을 봤어요.
갈색 동물 두 마리는 곁눈질로 서로를 훔쳐보았죠.
그날 어느 팀이 우승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 재미있고 편안한 시간이었어요.
갈색 동물을 키우니까 정부에서 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칭찬이라도 해 줄 것 같았지요.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대로 순순히 따르기만 한다면,
언제까지나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거리에서 마주친 한 아이가 떠오릅니다.
아이는 자기가 키우던 흰색 강아지를 어른들이 죽인 것을 보고 슬피 울고 있었어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모든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것은 아니란다. 갈색 강아지를 찾아보렴.”
그러면 그 아이도 눈물을 그쳤을 거예요.
갈색 강아지를 키우다 보면 그 아이도 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알게 될
그러다 보면 옛날 강아지 따위는 금세 잊어버리겠죠.
그런데 어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갈색 옷을 입은 군인들이 나를 잡으러 온 거예요.
갈색 고양이를 키우고 있으니까 평화롭게 살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다행스럽게도 군인들은 우리 동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가 누구인지 잘 몰랐어요.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죠.
마침 나는 샤를리네 집에 가고 있던 참이었어요.
샤를리네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내 심장은 철렁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현관문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고,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계단에 떡 버티고 서서 몰려든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어요.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척하다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요.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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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일상을 누리는 것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라고 합니다. 일상을 누리는 것이 곧 평화이니까요. 일상이란 밥 먹고 옷 입고 노는 일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누가 조종한다면 무척 혼란스럽겠지요? 우리가 원하는 일상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내가 좋아하는 개나 고양이를 기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옷 색깔이며 머리카락 길이며 치마 길이 등을 법으로 정해 그 기준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모두 처벌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아마도 모두 어이없어 하며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라고 아우성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 정한 머리카락과 치마 길이에 따라 사람들을 처벌했지요. 1970년대에 벌어진 일이니 아주 오래전의 일도 아닙니다. 그때 남자들의 머리카락은 귀를 덮거나 옷깃까지 닿도록 기르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무릎 위로 15센티미터 이상 올라가는 짧은 치마를 입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거리에 나가면 경찰에게 붙잡혔지요. 그래서 경찰을 보면 도망가는 젊은이가 많았습니다. 이런 일은 개성을 죽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갈색 아침》은 어느 날 갑자기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서 일상을 누리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로지 갈색 털을 가진 고양이나 개만 길러야 한다는 법이 생겨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갈색 고양이를 제외하고 그 밖의 고양이는 다 죽여야 한다는 법이 생기고, 이어서 갈색 개만 남기고 나머지 개는 다 죽여야 한다는 법도 생깁니다. 털이 갈색이든 얼룩무늬든 모두 똑같은 고양이고 개인데 말이에요. 어이없고 황당무계한 일입니다.
이렇게 독재 정부는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입니다. 사람들의 평안한 일상을 깨뜨리려는 것이지요. 정부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뭘까요? 일반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불어넣어서 자기들 입맛에 맞게 시민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서입니다. 그 결과 신문 이름에도 갈색이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커피를 주문할 때 자기도 모르게 “갈색 커피 한 잔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어느새 모든 말에 ‘갈색’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것입니다. 경마 게임에서 돈을 건 갈색 말이 우승하자, 정말 갈색이라면 뭐든지 좋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어느 순간부터 ‘갈색법’에 적응하게 됩니다. 정부의 행동에 도리어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하지만 독재 정부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예전에 갈색이 아닌 다른 색깔의 동물을 키웠던 사람들까지도 처벌합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정부는 누군가가 과거에 갈색이 아닌 동물을 기른 사실을 어떻게 알까요? 독재 정부는 그런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이웃을 조사합니다. 이웃은 이웃의 사정을 잘 알테니까요.
독일의 독재 정권인 나치 치하에 살았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의 시가 떠오르는군요.
나치가 유대임을 잡아갈 때 / 나는 유대인이 아니어서 모른 체했고
나치가 가톨릭을 박해할 때 /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서 모른 체했고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가둘 때 / 나는 당원이 아니어서 모른 체했고
나치가 노동조합원을 잡아갈 때 / 나는 조합원이 아니어서 모른 체했지
그들이 막상 내 집 문 앞에 들이닥쳤을 때 / 나를 위해 말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남이 박해를 당할 때 모르는 체하고 침묵하면 결국은 나도 박해를 당하게 된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그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이 이미 아무도 없겠지요. 그러니까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독재자가 못살게 굴면 침묵하지 않고 저항합니다. 독재자에게 그런 사람들은 눈엣가시 같은 아주 성가신 존재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자신의 손발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나치의 학살 주범이었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도 그런 사람이었지요. 아이히만은 아주 평범하고 성실하기 짝이 없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무지막지한 학살의 주범이 되었을까요?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조직의 명령에만 따랐습니다. 그가 한 번이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이건 아니야.”라고 말했다면 나치의 손발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갈색 아침》에 등장하는 일화는 단순해 보이지만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일상이 깨지는 것은 곧 평화가 개지는 일이라는 의미를 새기게 합니다. 나라끼리 벌이는 전쟁만이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독재 정부도 세상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지키기 어려운, 아니 지킬 필요가 없는 악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합니다.
독재 정부는 일상을 못 누리게 합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지요. 그럼 일상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독재자는 자기가 다스리기 편하도록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기를 원합니다. 개성 있게 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갈색 아침》을 읽고 나면 누구든 독재 정부가 왜 나쁜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박상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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