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관점
영성의 관점: 디팩(Deepak Chopra)
밖을 보는 자는 꿈꾸는 자이고, 안을 보는 자는 깬 자이다. ─ 카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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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에서 레너드와 나는 인간 존재의 큰 물음들을 놓고 논쟁을 벌일 텐데, 여기서 나는 영적인 대답을 내놓는 일을 맡았다. 사제로서도 아니고, 특정 신앙인으로서도 아니고, 바로 의식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렇게 하면 독실한 신자들, 곧 매우 인격적인 신을 믿는 갖가지 신앙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세계의 지혜 전통들은 인격적인 신을 배제하지는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렸을 때 그런 신을 숭배하도록 교육받지 않았으나, 그렇게 교육을 받으셨던 내 어머니는 평생을 날마다 라마 신전에서 기도하셨다). 아울러 지혜의 전통들에는 모두 비인격적인 신이 포함되었다. 그것은 우주를 이루는 원자 하나하나에, 우리 존재의 실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는 신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유일무이한 참신앙―무엇이 되었든―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신자들은 마음이 거북해진다. 그러나 비인격적인 신이 위협이 될 필요는 전혀 없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이제 사랑 자체를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사랑의 얼굴이 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분명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사랑이 존재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랑이 존재하리란 사실을 알 것이다. 이 간단한 예에 인격적인 신과 비인격적인 신의 차이가 있다. 신자라면 신에게 무슨무슨 얼굴을 입힐 수는 있겠으나―이건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인 선택 문제이다―만일 신이 어디에나 있다면, 사랑, 은총, 자비심, 정의를 비롯해 신에게 귀속시키는 모든 신적 속성들이 창조가 미치는 곳 어디에나 무한히 뻗어 있을 것임을 여러분이 보았으면 한다. 이런 관념이 모든 주요 종교들에 공통적으로 있는 가닥임은 놀랄 일도 아니다. 더 높은 의식 덕분에 위대한 현자들, 성자들, 각자들이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은 과학이라면 위협감을 느끼겠으나 그 자체로는 완전히 타당하다.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진 의식이해는 너무 일천해서 여기서 왈가왈부하기는 어렵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해보자.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얼 의식합니까?” 그러면 아마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는 방과 여러분을 둘러싼 풍경, 소리, 냄새를 먼저 묘사할 것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러분이 가진 기분, 여러분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들, 피상적인 생각보다 깊은 곳에 자리한 숨은 걱정이나 욕망까지도 아마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면 여행은 그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갈 수 있다. 그 여행은 여러분을 ‘저기 바깥’에 있는 대상이나 ‘여기 안’에 있는 느낌과 생각이 아닌 어떤 실재로 데려간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그 두 세계가 한 가지 존재 상태, 곧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에 자리하는 한 가지 존재 상태로 합쳐진다.
하지만 이제 모순을 하나 만나게 된다. 서로 반대인 두 실재(현실에서 빵 한 덩어리를 굽는 것과 꿈에서 빵 한 덩어리를 굽는 것 같은 식의 반대)가 어떻게 똑같다고 판명될 수 있단 말인가? 개연성이 없을 것 같은 이런 시각은 고대 인도의 경전인 『이샤 우파니샤드Isha Upanishad』에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다. “저것은 완전하고, 이것도 완전하다. 이 온전함은 저 온전함이 비춰진 것이다. 이 전체가 저 전체와 합쳐지면 남는 것은 전체뿐이다.” 얼른 보면 이 문구는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저(것)’이란 순수한 의식 상태이고 ‘이(것)’이란 가시적 우주임을 깨달으면 해독할 수 있다. 둘 다 그 자체로는 완전하다. 이는 지난 네 세기 동안 가시적 우주를 탐구하면서 만족감을 느꼈던 과학에서 우리가 배운 바이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관에서 보면 모든 창조의 바탕에는 숨은 전체가 있으며, 궁극적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비가시적인 전체이다.
영성은 수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있었으며, 그 연구자들은 뛰어났다. 바로 의식의 아인슈타인 같은 이들이었다. 과학의 원리들처럼, 그들이 내놓은 결과는 누구라도 재현해보고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성이 약속하는 미래―지혜, 자유, 성취가 있는―는 신앙이 몰락해가는 시대를 따라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실재는 실재다. 단 하나만 있을 뿐이고, 영원히 있다. 이 말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안쪽 세계와 바깥쪽 세계가 만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혁명적인 발견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이들은 실재와 마주해서 일상의 까다로운 문제들을 다루거나(과학), 수동적으로 뒤로 물러서서 일상을 넘어서 있는 영역을 명상하거나(종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미래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우리는 이렇게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교의 더욱 깊은 근원인 영성은 실패하지 않았고, 가장 발전된 과학 이론들과 부합하는 대답들을 내놓으며, 과학과 마주할 태세를 갖췄다. 사람의 의식이 과학을 창조했는데, 얄궂게도 지금 과학은 자신의 창조주인 의식을 몰아내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의지가지없이 위축된 과학보다 더 나쁜 것이 우리에게 남겨질 게 확실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황폐한 세계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런 세계가 도래했다. 우리는 무례한 무신론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무신론을 신봉하는 자들은 종교가 미신이고 착각이고 날조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의 진짜 표적은 종교가 아니라, 바로 내면 여행이다. 나는 신에 대한 공격보다는 그보다 훨씬 음험한 위험, 곧 유물론의 미신이 더 마음에 걸린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보기에 실재는 반드시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전체적인 접근이 산산조각나고 만다. 물리적인 세계만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과학은 그 세계를 파서 데이터를 캐내는 게 옳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유물론 미신이 무너진다. 우리는 오감을 가진 덕분에 ‘저기 바깥에’ 숲이며 강이며 원자며 쿼크 같은 대상들이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자연이 지극히 작아지게 되는 물리학의 최전선에서는 물질이 조각나서 사라져버린다. 여기서는 측정 행위 자체가 우리가 보는 바를 바꿔버린다. 모든 관찰자는 자기가 관찰한 것과 따로 있지 않고 함께 엮여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이미 영성이 알고 있던 우주이다. 이 우주에서는 수동적인 관찰이 물러나고 능동적인 참여가 들어선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창조라는 옷감을 이루는 부분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 막대한 힘과 자유를 얻게 된다.
과학은 순수한 객관성을 결코 이루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주관적인 경험의 가치를 부정하면,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들, 이를테면 사랑, 신뢰, 믿음, 아름다움, 외경심, 경이감, 자비심, 진리, 예술, 도덕, 그리고 마음 자체를 모두 내치는 셈이다. 신경과학 분야에서는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뇌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뇌(인공지능 분야의 전문가인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의 표현을 따르면 ‘고기로 만들어진 컴퓨터’)가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를 화학적으로 결정하고, 우리가 어떻게 자라고 살아가고 죽을지를 유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림은 나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다. 마음을 내치면 지식과 통찰에 이르는 관문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레너드와 내가 큰 수수께끼들을 놓고 논쟁해나갈수록, 위대한 현자들과 각자들은, 물을 것이란 단 하나뿐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바로 ‘실재란 무엇인가?’이다. 실재란 원인과 결과를 통해 엄격하게 작동하는 자연법칙들이 낳은 결과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우리의 세계관이 전쟁을 벌일 만한 까닭은 충분히 있다. 실재란 가시적인 우주로 국한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한다. 우주는 텅 비고 의미 없는 공허에서 만들어졌든가, 그렇지 않았든가 한다. 실재의 본성을 이해하기 전까지, 여러분은 여섯 장님이 코끼리의 몸 한 부분씩을 붙들고 코끼리를 묘사하려고 하는 우화 속 장님과 같다. 다리를 붙든 장님은 이렇게 말한다. “코끼리는 나무와 매우 비슷하구나.” 코를 붙든 장님은 이렇게 말한다. “코끼리는 뱀과 매우 비슷하구나.” 이런 식이다.
여섯 장님과 코끼리가 등장하는 우화는 사실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풍유諷諭이다. 여섯 장님은 다섯 감각과 이성적인 마음이다. 코끼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합한 전체성인 브라만Brahman이다. 겉으로만 보면 그 우화는 비관적이다. 가진 게 오감과 이성적인 마음뿐이라면, 코끼리를 결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우화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마는 숨은 메시지가 하나 있다. 바로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코끼리는 우리 앞에 있었다. 우리가 알아주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더욱 깊은 통일된 실재라는 진리이다.
종교가 실패했다고 해서 의식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영성까지 실패할 것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진리를 보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우리가 약속받았던 깊은 힘들을 일깨우게 될 것이다. 시간은 기다린다. 미래는 오늘 우리가 하는 선택에 달려 있다.
과학의 관점: 레너드(Leonard Mlodinow)
내가 보기에는, 인류의 영적 진화가 더욱 진행될수록, 진정한 종교심에 이르는 길은 삶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을 통해 나 있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지식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통해 나 있다는 게 더욱 확실해질 것 같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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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팩은 과학적 설명이 무미건조하고 환원적이라고 느낀다. 그 설명이 사람을 한낱 원자 집합으로 낮추보고, 우주의 여느 대상과 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게 본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많은 나라 중의 하나임을 안다고 해서 우리 고유의 문화를 낮춰 평가하는 게 아니듯이, 사람을 과학적으로 안다고 해서 사람을 낮추보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에 더 가깝다. 감정, 직관, 권위에의 집착―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설명에 대한 믿음을 끌고 가는 특성들―은 다른 영장류는 물론이고, 더 하등한 동물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그러나 오랑우탄은 삼각형의 내각을 추리해내지 못하고, 마카크원숭이는 하늘을 쳐다보며 행성들이 왜 타원을 그리며 길을 가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멋진 추리 및 사고를 할 수 있고, 오직 사람만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이 지구가 어떻게 여기 있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고, 오직 사람만이 우리를 빚은 원자들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인류가 올린 개가는 바로 이해력이다. 우주를 파악해내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꿰뚫어보고,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를 눈에 담아내는 그 능력이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 과학적 이해에서 나온 한 가지 부산물이 바로 자연을 우리에게 이롭게 활용하는 힘, 또는 우리에게 해롭게 써먹는(맞는 말이다) 힘이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사람이 하는 특정 선택들은 인간 본성과 문화에 좌우된다. 사람들은 중력법칙을 이해하기 오래전부터 적의 머리 위로 바위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불타는 석탄의 열역학을 이해하기 오래전부터 하늘에다 오물을 토해냈다.
선을 장려하고 악을 피하도록 하는 것은 조직종교와 영성이 책임진 일이다. 종종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쪽은 과학이 아니라 바로 종교와 영성이었다. 동양 종교들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막아내지 못했고, 서양 종교들도 유럽에 평화를 주지 못했다. 사실 현대 물리학으로 가능해진 모든 핵무기보다, 종교의 이름으로 학살당한 이가 더 많았다. 십자군전쟁부터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선과 사랑의 도구만이 아니라, 증오의 도구로도 쓰였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디팩의 보편주의적이고 평화적인 접근법은 환영할 만한 대안이다. 그러나 디팩의 형이상학은 영적으로 인도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우주의 본성에 관한 시각까지 내놓고 있다. 우주에 목적이 있고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디팩의 믿음은 매력적일 수는 있지만, 과연 옳은 것일까?
디팩은 과학이 생명을 “본질적으로 유물론적”으로 본다고 비판한다. ‘유물론적’이라는 말을, 디팩은 과학자들이 오로지 물건들과 물건을 소유하려는 욕망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뜻이 아니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기구로 탐지하고,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현상만을 다룬다는 뜻으로 쓴다. 디팩은 과학이 연구하는 가시적인 또는 탐지 가능한 우주를, 절대적으로 우월하면서도 비가시적이고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 가시적인 모든 것들의 근원인 “초월적인 영역”과 대비한다. 디팩은 과학이 이 영역을 받아들여야만 한계를 넘어서 성장할 수 있고, 세계를 구하는 일을 거들 수 있다고 열정적으로 논한다. 그러나 그런 영역이 과학의 한계를 넓힐 수 있다고, 인류를 도울 수 있다고, 또는 고대의 현자들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논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지금 치즈버거를 먹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여러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다른 영역에서는 그 치즈버거가 실은 필레살filet mignon 스테이크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을 알고 싶을 것이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당신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여기에 답을 해야지만 믿음은 소원 빌기식 사고 수준을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디팩이 자기 말에 설득력을 싣고자 한다면, 이 물음들이야말로 그가 반드시 마음을 쏟아야 할 도전 과제가 될 것이다.
디팩의 말대로, 진짜 쟁점은 앎이고,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이다. 디팩은 과학이 “주관적 경험의 가치”를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만일 어느 과학자는 헬륨 원자를 “꽤 무겁다”고 서술하고 또 어느 과학자는 “내가 느끼기에는 가볍다”라고 적었다면, 과학은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정밀한 객관적 측정과 정밀한 객관적 개념을 쓰는 데에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과학자들이 그 측정과 개념이 “사랑, 신뢰, 믿음, 아름다움, 외경심, 경이감, 자비심” 등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확실히 하려 한다고 해서, 삶의 다른 영역에서까지 그 자질들의 가치를 내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과학자들도 종종 직관과 주관적 느낌을 길잡이로 삼지만, 검증이라는 또다른 단계가 있어야 함을 인식한다. 과학은 관찰, 이론, 실험이 서로 고리를 이루면서 나아간다. 이론과 경험적 증거가 조화를 이룰 때까지 그 고리는 반복된다. 그러나 개념들을 정밀하게 정의하고 실험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이 방법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과학적 방법에서 결정적인 것이 이 요소들이고,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 또는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도 이 요소들이다. 디팩은 예수가 과학자였다고 말한다. 정말 그랬을까? 예수는 아마 개체군 표본을 수집해서, 뺨을 맞은 뒤에, 개체군 표본의 절반을 향해서는 반대쪽 뺨을 대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오른쪽 훅을 야무지게 먹여서 바닥에 뻗게 한 다음, 서로 다른 두 접근법을 썼을 때의 효력에 대해 통계를 수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팩이 예수를 과학자라고 부른 걸 두고 내가 반대하는 게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나중에 이 책에서 펼칠 더 실질적인 맥락에서 중요해지는 문제 가운데 하나인 용어의 사용 문제와 만나게 된다. 곧, 과학적 문제를 논의할 때에는 용어를 느슨하게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쟁을 벌일 때 말을 부정확하게 쓰기 쉬운데, 이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논쟁의 골자는 종종 그런 말들의 어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이 완벽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디팩은 과학이 결코 순수한 객관성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맞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과학에서 쓰는 개념들은 사람의 뇌가 착상해낸 개념들이다. 뇌의 구조, 사고 과정, 감각기관이 다른 외계인이라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우리와 똑같이 타당하게 문제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쓰는 개념과 이론들에 모종의 주관성이 있다면, 우리가 하는 실험에도 주관성이 있을 것이다.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실험들을 보면, 실제로 과학자들에게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려 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고픈 데이터에 설득을 당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맞다. 과학자는 물론 과학도 잘못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과학적 방법을 의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가능한 한 꼼꼼하게 과학적 방법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된다.
역사를 보면 과학적 방법이 유효함을 알 수 있다. 과학자도 사람일 뿐이기에, 새롭고 혁명적인 생각들에 처음에는 저항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새 이론이 예측한 것들이 실험으로 확증된다면, 그 이론은 금방 주류가 된다. 예를 들어보자. 1982년에 로빈 워런Robin Warren과 배리 마셜Barry Marshall은 헬리코박테르 필로리Helicobacter pylori균을 발견하고, 이것이 궤양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당시 과학자들은 스트레스와 생활습관이 소화성 궤양의 주원인이라고 단단히 믿던 터라 두 사람의 연구를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험을 더 해본 결과 두 사람의 주장은 입증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에 이르러, 헬리코박테르 필로리가 십이지장궤양의 90퍼센트 이상, 위궤양의 최고 80퍼센트까지 일으키는 원인임이 입증되었으며, 결국 워런과 마셜은 노벨상을 수상했다. 만일 디팩의 주장이 참이라면, 과학은 그도 포용할 것이다.
사람들이 열의를 가지는 이론들을 과학 공동체가 퇴짜를 놓을 때면, 닫힌 마음에서 나오는 아우성이 으레 떠오르곤 한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보면, 과학이 그렇게 이론을 거부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관찰 증거와 충돌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따금 대단히 모호하고 예상치 못했던 방면에서 부상하는 아주 이상한 생각―이를테면 상대성이나 양자 불확정성 같은 생각―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수용되는 일도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실험에 의한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디팩의 영성을 지지하는 자들은 새로운 발견들을 아우르며 자기네 세계관을 수정하거나 넓히는 일에 훨씬 마음이 열려 있지 못하다. 그들은 새 진리를 반기기보다는 옛 관념, 설명, 경전에 매달리기 일쑤이다. 어쩌다가 자기네 전통적인 생각들을 정당화하려고 과학으로 눈을 돌리기도 하지만, 과학이 그 생각들을 뒷받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언제든지 재빨리 과학에 등을 돌려버린다. 과학적 개념들을 가져다 쓴다 해도 너무 느슨하게 사용한 나머지 의미를 변질시켜버린다. 그 결과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타당성을 잃는다.
우주에 관한 모든 물음에 과학이 답을 해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인간 지능의 상한선을 영원히 넘어서 있을 자연의 비밀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다른 물음들, 이를테면 사람의 열망과 우리 삶의 의미에 관한 물음들은 과학과 영적인 관점을 모두 고려해 다양한 관점에서 보는 게 최선이다. 이 접근법들은 더불어 있으면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와 영성의 교리들이 물리적 우주에 대해, 우리가 실제로 관찰하여 참인 것과 모순되는 주장을 할 때에 문제가 생긴다.
디팩이 보기에 모든 것에 이르는 열쇠는 바로 의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의식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과학이 이제야 던지기 시작한 것은 맞다. 우리를 이루는 원자들,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 원자들은 어떻게 힘을 합쳐 사랑, 아픔, 기쁨을 만들어내는 걸까? 뇌는 어떻게 생각과 의식경험을 만들어낼까? 뇌에는 뉴런이 1000억 개가 넘게 있는데, 한 은하계에 있는 별의 수가 대충 이만큼 된다. 별다른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별들과 달리, 보통의 뉴런은 다른 뉴런 수천 개와 이어져 있다. 이 때문에 사람 뇌는 은하계와 별들로 이루어진 우주보다 훨씬 복잡하고 헤아리기가 어렵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는 일에는 큰 도약을 이룬 데 비해 우리 자신을 아는 일에는 기다시피 하는 한 가지 이유도 이것이다. 그렇다고 이게 우리 마음이 설명될 수 없다는 징표일까?
오늘날 과학이 의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의식이 과학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근시안적이다. 설사 의식의 기원이 너무 복잡해서 사람의 마음으로 완전하게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이는 의식이 초자연적인 영역에 거한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 의식이 어떻게 생겨났느냐는 물음은 여전히 수수께끼이지만, 의식이 물리법칙에 따라 기능한다는 증거는 우리에게 많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신경과학 실험들을 보면, 피험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 느낌, 감각―이를테면 팔을 움직이고픈 욕망, 제니퍼 애니스턴이나 테레사 수녀 같은 특정인에 대한 생각, 스니커스 초코바를 먹고 싶다는 갈망―은 모두 물리적 뇌의 특정 부위들에서 일어나는 활동에서 유래한다. 과학자들은 ‘개념세포concept cell’라고 부르는 것까지 밝혀냈다. 이 세포들은 피험자가 어떤 개념, 이를테면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 물건 등을 인식할 때마다 발화한다. 이 뉴런들이 바로 세포 수준에서 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것들이다. 피험자가 사진 속 테레사 수녀를 인식할 때마다,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자세를 하고 있는지 상관없이 이 뉴런들은 발화할 것이다. 심지어 글 속에 있는 테레사 수녀의 이름만 봐도 발화할 것이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도저히 풀어내기 어려워 보이는 이 물음에도 과학은 대답할 수 있다. 언젠가 의식의 기원까지도 과학이 설명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과학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그 끝이 어디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미래의 어느 날에 뉴런 우주의 활동으로 마음을 설명해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말하자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정말로 신경세포들 속의 전하를 띤 이온들의 흐름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는 과학이 “사랑, 신뢰, 믿음, 아름다움, 외경심, 경이감, 자비심, 진리, 예술, 도덕, 그리고 마음 자체”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뜻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무엇을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의 가치를 낮추보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우리의 사고 과정들(또는 그 밖의 어느 것이든)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심미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불만족스럽거나 입맛에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그 설명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분간해내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의 설명이 길잡이로 삼을 것은 진리여야 한다. 진리란 우리 귀에 듣기 좋게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히도 현재 과학적으로 완전히 개발된 의식이론이 없기 때문에, 알려진 물리법칙들과 충돌하는 결론으로 부정확한 추리를 해나가기 십상이다. 철학과 형이상학은 MRI 기계나 텔레비전, 하다못해 토스터조차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의식을 설명할 수 있을까? 또는 왜 우주가 우리가 보는 모습대로 있는지 설명해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팩이 우주의식을 설명해나갈 때, 나는 과학의 한 가지 중요한 원리인 회의주의를 견지할 계획이다. 디팩은 자기가 이 논쟁에서 승산이 없는 입장이라고 내게 말한다. 그러나 데이터를 보면 상황이 다르다. 무작위 표본조사들에 따르면, 미국 대중의 45퍼센트만이 진화를 믿고, 76퍼센트는 기적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대선 후보든 더욱 높은 무슨 힘을 믿노라 천명하지 않으면 신뢰를 얻지 못하지만,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후보들은 많았다. 디팩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과학은 현대의 삶을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제대로 가치를 인정 못 받는 하인이다.
과학이 내놓는 답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평생을 바쳐 전자, 뮤온, 쿼크 같은 소립자들을 설명하는 이론을 지치지도 않고 연구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는 그 입자들이 매우 재미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그 입자들을 이해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까닭이 무엇일까? 인간 사고의 역사에서 바로 이 순간, 자연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법칙들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가장 유망한 길을 제공하는 게 그 연구라고 믿기 때문이다. 제네바에 있는 수십억 달러짜리 입자가속기인 대형강입자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를 지은 과학자 1만 명―많은 수가 10년 넘게 이 일에 매달렸다―가운데에는, 긴 시간을 들여 예민한 기구들의 눈금을 맞추고 분광계를 미세 조정하는 일이 썩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지 않은 과학자도 있었을 것이다(비록 많은 수가 그리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데도 그들이 그 일을 한 까닭은 와인버그가 뮤온을 연구했던 까닭과 같다. 사람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여느 동물들과 다르다. 새로운 환경에 던져졌을 때, 쥐라면 한동안 탐험을 하며 마음속 지도를 그리다가, 안전하면 탐색을 멈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물음을 던질 것이다. 내가 왜 이 우리 안에 있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거지? 맛좋은 커피를 마실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이지? 사람이 과학을 공부하는 까닭은 크나큰 우주의 구도 속에 우리 삶이 어떤 식으로 들어맞는지 알고 싶어하는 충동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람됨을 정의하는 자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 답들은 참일 때에만 믿음을 준다. 그래서 독자 여러분에게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종종 마음에 몹시 와닿곤 하는 디팩의 세계관을 곰곰 생각할 때, 우상이 된 칼테크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한 이 말을 명심하라고. “첫째 원리는 바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쉽게 속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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