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서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 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 이상국의 시 「그늘」의 첫 행.
가을 엽서
바람에 쓸리는 나뭇잎을 보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네
빛 고운 이 낙엽 나라
가을은 얼마나 깊은가
아름다운 이 세상 보았으니
그대 향한 이 마음과
좋은 시 한편 쓰는 일 말고
무엇이 나에게 더 남아 있겠는가
책
책이 죽어나가고
서점이 문을 닫았다
내가 잘 아는 작가 한분이
집에 있던 책을 들고 나와
천원짜리 한 장을 얹어준다
천원어치만 읽어달란다
정가가 구천원인데
천원어치만 읽어달란다
보아야 할 눈도 더 이상
들어야 할 귀도 없는 세상
작가들이 잠잠해지면
돌들이 일어나 외칠 것이다*
* “그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외칠 것이다.”(누가복음 19장 40절)
후꾸시마
큰 지진이 있었다
땅이 그토록 심하게 흔들렸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사람 대신 성낸 물결이 벌떡 일어섰다
후꾸시마는 후꾸시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해 뜨기 전 바다에서 불기둥이 솟더니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뭍으로
고래들이 거대한 몸을 던져 익사하는 것이
지난밤 꿈에 보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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