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또 다른 《비글호 항해기》를 기대하며
(...)
소로의 시대 이후로 새와 곤충, 그리고 일반적인 자연사 관찰 기록 방식이 여러 형태의 문서로 발표되었다. 스케치와 기본적인 관찰 방식을 소개하는‘자연 관찰 일지’작성법에 대한 책도 최근에 많이 나왔다. 일부 도감은 관찰 노트를 작성하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기도 한다. 신중한 자연사학자는 관찰 노트를 작성할 도구를 고를 때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관찰 내용을 기록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 대답은 노트를 작성하는 사람의 특성에 따라, 기록의 필요성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책이 그 주제에 대해 저마다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열두 개의 목소리를 담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연구 기록 방식은 현장에서 발생하는 공통된 변수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꼼꼼하게 기록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심지어 다윈의 탐사 일지를 보면 그가 사실과 이론, 자료와 설명 사이에서 얼마나 고심하고 숙고하며 기록을 작성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가 비글호 항해에서 쓴 동물학 관련 기록의 초고가 되는 메모장을 보면 설명 내용이 매우 묘사적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다윈이 관찰한 많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윈은 그 가운데 서로 연결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보면서 (앞서 예로든 바닷가 도마뱀의 진화에 대한 다윈의 생각이 보여 주는 것처럼) 진화의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중에 다윈의 이른바 적색 메모장Red Notebook과 같은 기록들은 점차 관찰에서 이론으로 내용이 바뀐다. 다윈이 이 메모장을 쓰기 시작한 것은 비글호 항해가 끝날 무렵이었다. 그 메모장에서 다윈의 관심사는 단순히 현지 탐사에서 관찰한 것을 기록하는 것에서 진화의 기초적인 원칙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옮겨 간다. 이는 나중에 이어지는 연구에서 구체화된다.
오늘날에도 자연 현장을 탐사하는 과학자들은 여전히 이러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기록하기 위해 애를 쓴다. 관찰 노트에 담긴 정보의 형태는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연구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몇 가지 느슨한 범주로 다이어리, 일지, 데이터, 일람표로 나눌 수 있다. 다이어리에는 식사와 지출 내역, 다른 사람과의 만남처럼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다. 일지에는 기상 상황, 날마다의 이동 상황과 지리적 위치, 식물과 동물에 대한 기본적인 관찰 내용이 들어간다. 데이터는 기본적인 행태 관찰, 사실적인 기록, 실험 결과를 포함한다. 일람표는 수집되고 관찰된 것들의 목록을 말한다. 이 범주들은 그 사이의 경계가 서로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관찰 노트가 얼마나 다양한지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체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는 분야에서는 생물 종과 수집물에 대한 정보를 목록으로 정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밖의 다른 생태 정보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 연구와 같이 좀 더 경험적인 연구 분야에서는 관찰 노트의 내용이 주로 실험 설계와 데이터 중심으로 구성된다. 고생물학 분야의 필드 노트는 관찰 대상과 관련된 특정한 사실과 위치에 대한 기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필드 노트를 어떻게 하면 사실과 이론, 데이터, 설명을 응축시켜 일관된 기록 형태로 만들지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한다.
어느 연구 분야든 노트에 정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는 연구 목적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연구 목적의 폭이 광범위한 경우에는 자유롭게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표준화와 일관성이 필요하다. 일지 같이 묶음 형태로 구성되는 정보도 있지만 탐사 카드나 데이터 용지 형태로 기록되는 정보도 있다. 오늘날 기술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데이터를 다양한 형태로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인지는 여전히 연구자의 생각과 장기적인 연구 목표에 달려 있다. 현장에서 관찰한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때 나타나는 긴장 관계는 어떤 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할 때 만들어지지만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이어리와 일지 정보는 일일 기재 형식이지만, 데이터와 실험 기록은 오랜 기간에 걸쳐 불규칙하게 수집되기 때문에 일기 형식의 기재 사항과 맞지 않을 수 있다. 다윈은 작은 메모장과 일기를 동물과 지리 관련 탐사 내용을 기록하는 전용 노트와 함께 지니고 다녔다. 이 책의 저자들은 자유롭게 기록하는 일기 형식에서 전용 다이어리와 일지, 일람표형식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기록 방법을 보여 준다. 대개는 간편하게 수첩을 들고 다니며 그날그날 짧게 메모해 두었다가, 다윈이 한 것처럼 나중에 정식 일지에 내용을 보완해서 탐사 기록을 옮겨 적는다. 오늘날 현장 과학자들은 현장에서 수집한 정보를 통합하기 위해서 조지프 그리널Joseph Grinnell의 추종자들이 쓰는 전통적인 필기 방식에서 현대식 관계형 데이터베이스relational database 방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기적 해법을 따른다.
현장 탐사 연구자들은 관찰 노트의 내용과 구성의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과 관련해서 기록의 궁극적 가치가 무엇인지 고려해야 한다. 인간의 기억은 일시적이어서 무엇이든 써 놓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현장에서 바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관찰 노트를 작성하는 것에는 기회비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순간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대개는 노트를 정리하는 것보다 실험을 하거나 표본을 만들거나 잠자는 것이 더 우선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기록할 수는 없기 때문에 노트를 정리하는 데 어느 정도 수준에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지 정해야 한다. 이는 현지 조사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통합된 필드 노트 없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일부 저명한 현장 과학자들이 있었던 것은 맞다. 다만 필드 노트를 작성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일지는 어떤 정보가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현장에서의 관찰 노트 작성이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 거기에 기록되는 정보의 가치 때문만이 아니라 기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윈의 동물학 관련 관찰 노트에 실린 채집 목록은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채집했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과학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의 관찰 기록은 그가 나중에《항해기》를 쓸 때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관찰 노트에 담긴 기록은 그것을 작성한 과학자 자신뿐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필요한 정보다. 실험 설계와 이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나 실수를 밝히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고 중대한 발견을 하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위치 관련 데이터는 앞으로 몇 백 년 뒤에 특정한 생물을 발견하려고 할 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어떤 정보가 미래에 필요한 정보가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기록된 정보가 현장 탐사 연구의 바탕이 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실험 노트가 중요한 것처럼, 관찰 노트는 현장에 나가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다. 관찰 노트의 내용이 이렇게 중요한 가치가 있음에도 사람들은 기록하는 행위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거나 그것이 주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다윈의 관찰 노트에 담긴 정보들이 하나같이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정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노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윈이 전에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관찰한 것을 상세하게 옮겨 적다 보면 잠시 멈춰서 생각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 성공이든 실패든 날마다 실험 과정을 기록하는 것은 그날그날의 작업이 연구 과제의 기본 목표와 이론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솔직하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각종 실험과 성과, 관찰 내용을 설명하고 기록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 과정에서 꼼꼼히 검토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연구자에게 유익한 작업이다. 어느 연구 분야든 기록은 과학의 공통된 특징이다. 예컨대 다윈이 바다이구아나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동물학 관련 필드 노트를 작성하면서 바다이구아나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시간의 기회비용과 기록의 가치에 대한 딜레마와는 대조적으로, 현장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또 다른 문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디지털 매체의 등장은 관찰 노트의 작성을 더욱 쉬우면서도 복잡하게 만들었다. 컴퓨터 감지기와 디지털카메라, 마이크 등 각종 휴대용 장비는 순식간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정보는 사람들에게 헛된 성취감을 안겨 줄 뿐이다. 이렇게 얻은 정보는 내용이 응축된 관찰 노트가 아니다. 그러한 데이터는 자연스럽게 통합되지 않은 채 대개 저마다 특수한 사용 기술이 필요한 여러 개의 도구에 분산되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처럼 가공되지 않은 정보는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작성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내러티브가 부족하다. 그런 기록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관찰 노트의 역할이다.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나 발견한 것을 어떻게 기록할지를 정할 때는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제3자가 보더라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관찰 노트를 작성할 때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오늘날 많은 현장 탐사 연구자들은 기록한 것을 디지털 매체로 편집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방법을 찾는다. 탐사 기록에 적용되는 신기술 가운데 자동으로 기록을 복제할 수 있는 전자펜과 디지털 일지 소프트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18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는 데이터와 가상 노트를 컴퓨터로 연결시켜 빠르고 강력한 접속과 검색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필기도구가 전자펜이든 볼펜이든, 필드노트를 작성하는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들은 관찰 노트에 적용되는 기술적 접근 방식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인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은 디지털 관찰 노트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워드프로세서나 디지털카메라로 기록된 정보와 연필로 쓰고 그린 정보 사이에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블로그나 디지털 슬라이드쇼에 관찰 내용을 기록하는 젊은 자연사학자들은 이전 세대들이 기록한 관찰 노트를 보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직접 손으로 쓰면 기록이 더 완벽해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관찰 노트가 어떻게 만들어지든 그것을 만드는 일은 과학자와 자연사학자들에게 지금도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대다수 현장 연구자들의 관찰 대상은 과학의 요소와 자연사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구 목표에 따라 사용하는 수단이 다르다. 진화생물학자 나오미 피어스Naomi Pierce는, 저명한 사회생물학자 베르트 횔도블러Bert Hölldobler가 자신에게 관찰한 것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들을 정량화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실제로 특정한 각종 상호 작용을 조사하기 위해서 현장 탐사에 나서는 것이라면, 데이터 용지와 필기장에 정보를 체계적으로 기록해서 나중에 그것들을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찰을 하거나 새로운 동물이나식물상을 연구하기 위해서 나서는 것이라면, 아무런 형식이 없는 일지에 관찰 내용을 자유롭게 적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다양한 접근 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 좋다고 판정을 내리거나‘진정한’관찰 노트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생각이 없다. 그보다는 이 책이 제공하는 다양한 관점을 통해 연구자들이 자신에게 맞는 관찰 노트를 고르고 여러 가지 기록 방식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열정적인 현장과학자들은 데이터 용지에 기록하는 것 말고도, 다이어리에 정보를 기록하는 것이 엄격한 과학적 승인을 받아야 하는 논문을 쓸 때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는 일지가 어떻게 실험과 생물에 대해서 더욱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시각을 제공하는지, 심지어 나중에 자신들의 현지 탐사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이 개별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지 충분히 고려할 것이다. 아무리 옛날 자연사학자들의 기록 방식을 충실히 따른다고 해도 관찰 정보를 정량화하는 것이 연구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 것이라는 데는 두말할 여지가 없다.
결과적으로 누구든 이 책을 통해서 훌륭한 현장 과학자와 자연사학자 들이 어떻게 탐사 일지를 작성하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체적인 사례들은 그대로 채택하거나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세부적으로 수정해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자연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례에 나오는 방법을 출발점으로 잡을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다양한 연구 분야에 걸쳐 기록에 대한 고유하면서도 보편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또한 자신들의 특이한 버릇이나 남다른 행동, 실제로 겪은 진기한 모험은 탐사 주제를 더욱 폭넓게 해 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를 통해 인간이 어우러진 탐사 현장에서 자연사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연구하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0년 동안 독자적인 양식으로 성장한 관찰 노트의 전통은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탐사의 다양성과 복잡성 때문에 기록의 범위와 수단이 점점 늘어났지만,관찰 노트의 기본적인 역할과 중요성은 바뀌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사례와 생각, 설명은 필드 노트의 귀중한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일 뿐이며, 우리가 자연계에 대해 더욱 정확하고 의미 있는 기록을 꾸준히 남겨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 줄 것이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