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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커지는 사회문제의 중요성
살다 보면 우리의 모든 힘을 필요로 하는 때가 오다. 그것을 느낄 때 우리는 환상을 버리고, 최고의 지성과 에너지를 동원하여 결정을 내리고 행동해야만 한다. 인민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지성과 열정이 필요한 때가 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런 시기에 들어선 것 같다. 지금까지 인류는 대응하지 않으면 파멸할 수 밖에 없는, 마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문제들에 수없이 봉착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크고 복잡한 문제들이 생긴 적은 없다. 사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금세기[19세기] 마지막에 중대한 사회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 시대의 특징인 물질적·지적 진보의 결과다.
사회의 발전과 종種의 발전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최하등 동물의 경우, 부위별 차이가 거의 없고, 욕구와 능력이 단순하며, 움직임이 자동적이고, 본능이 식물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이들 중 일부는 너무나 동질적이어서 몇 토막 내더라도 토막 난 부분들이 살아 움직인다. 하지만 고등동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각 부위는 별도의 기능을 갖고서 다른 부위들과 상호 관계하는 기관organ으로 발전하며, 새로운 욕구와 능력이 생긴다. 고등동물이 식량을 확보하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등동물보다 훨씬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다. 만일 물고기, 새, 야수 등이 폴립polyp[자포동물이 한때 취하는 체형]보다 지능이 높지 않다면, 그것들은 탄생하자마자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법칙―조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면 더 큰 능력과 힘이 주어지지만 욕구와 위험도 증가하고 따라서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게 된다는 법칙―은 자연계의 모든 곳에서 관찰 가능하다. 동물 등급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인간이 나온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직된 존재다. 그런데 더 큰 능력을 발휘하려면 다른 동물들에게 없는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지능이 없으면 인간은 아예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은 피부가 너무 얇고, 손발톱이 너무 잘 부러지며, 달리기, 산 오르기, 헤엄치기, 구멍 파기 같은 활동에 너무 서툴다. 만일 다른 동물들보다 더 높은 지능이 없다면, 인간은 추위에 얼어 죽거나,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거나, 야수의 본능만 있으면 되는 싸움에 뛰어난 다른 동물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지능은 자연계의 계층구조에서 고등동물로 올라갈수록 높아지지만,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오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인간의 지능은 동물의 지능에 비해 월등하게 높아서, 양자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라기보다는 종류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오면 본능, 즉 무의식적인 지능이 의식적인 이성으로 바뀌며, 하나님에게서 온 듯한 적응력과 발명력은 연약한 인간을 자연계의 왕으로 만든다.
동물 등급의 사다리는 인간이 끝이다. 인간보다 등급이 높은 동물은 없으며, 게다가 동물로서의 인간은 지금껏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향의 진보가 시작된다. 종의 발달이 끝나는 곳에서 사회의 발전이 시작된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그 결과, 문명인과 미개인 사이에는 고등동물과 바위에 붙은 굴oyster 사이의 간격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나게 큰 간격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방향의 진보가 이뤄지는 곳에서는 항상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 진보하는 문명이 미래의 인간들에게 어떤 지식과 능력을 부여할지에 대해서는 상상이 불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법칙―인간이 끝인 진보에서 발견되는 법칙―은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이 진보에서도 그대로 관철된다. 한 단계 진보할 때마다 훨씬 더 높은 지능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회가 시작되면 사회적 지능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지능을 통합하여 여론이나 공적 양심, 그리고 공적 의지를 형성하며, 법률·제도·행정 등으로 표현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지능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개인들 간의 관계가 점점 더 밀접해질 뿐만 아니라 중요해지고, 사회조직은 점점 더 복잡해져서 새로운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야만상태의 가족은 먹을 식량과 입을 옷을 스스로 생산하고, 자기 집을 스스로 짓고, 이동할 때는 스스로 운반수단을 마련한다. 이와 같은 독립성을 현대 도시 주민들의 복잡한 상호 의존성과 비교해보라. 현대인들은 야만인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물자들을 더 확실하게 마련하지만, 이는 수천 명이 협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대인들에게 마실 물과 전깃불을 보내는 것은 정교한 기계시설인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동과 주의를 필요로 한다. 현대인들은 야만인들로서는 믿기 어려운 속도로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긴다. 철로가 끊어진다든지, 기관사가 술에 취한다든지, 전철원轉轍員[선로 전환기를 조작하는 사람]이 부주의하다든지 할 경우, 그들의 목숨은 끝장이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력을 사용하는 일도 개인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난다. 노동자는 큰 기계의 일부가 되는데, 문제는 그 기계가 노동자의 능력이나 예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원인들 때문에 언제라도 멈출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복지는 모든 사람의 복지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고, 개인은 점점 더 사회에 종속되게 된다.
게다가 새로운 위험도 등장한다. 야만사회는 토막이 나도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를 닮았다. 반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는 고도로 조직된 동물과 비슷하다. 긴요한 부분이 상하거나 하나의 기능이 제거되면 사망한다. 야만인의 마을이 불태워지고 사람들이 추방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도 자연에서 직접 생존물자를 구하는 데 익숙한 야만인들은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고도 문명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자본, 기계, 분업에 길들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빼앗기고 자연 가운데 내던져질 경우,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공장제도factory system하에서는 신발 한 켤레를 만드는 일에 값비싼 기계의 도움을 받는 60명 정도의 사람이 협력한다. 그런데 60명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발 한 켤레를 혼자서 만들 수는 없다. 이것은 모든 생산 부문에서 나타나는 경향이다. 심지어 농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세대 농부들 가운데 도리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지금 농촌 여성들 가운데 양모로 외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다수의 농민들은 심지어 자기가 먹는 버터도 만들지 않고 자기가 먹는 채소도 기르지 않는다. 분업이 발달하면 생산력은 엄청나게 증가하지만, 개인은 필요한 물건 중에 몇 가지―혹은 심지어 한 가지의 일부―만 생산하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반면에 사회조직은 더 민감해진다. 원시 마을 공동체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다른 마을들에 재앙이 덮칠 때 그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여느 때처럼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도달한, 밀접하게 결합된 문명사회에서는 어느 한 곳에서 전쟁이나 기근 혹은 경제위기가 발발하면 다른 곳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원시 공동체라면 쉽게 극복할 충격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
과거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격렬한 갈등이 오늘날의 문명사회에서 발생할 경우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해보면 놀랍기 짝이 없다. 증기기관과 기계의 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고도로 문명화된 국가들 간의 전쟁은 인민 간의 갈등이나 계급 간의 갈등이라기보다는 군대들 간의 대결로 변했다[사람보다는 무기가 더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흥분이 최고조에 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면 파리코뮌Paris Commune의 투쟁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1870년 이후 사람들은 석유보다 훨씬 파괴적인 물질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니트로글리세린 조금을 상수도관 밑에서 폭발시키는 짓을 몇 번만 하면 대도시 하나를 사람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철교나 터널 몇 개를 폭파하면 티투스Titus[로마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로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었다]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보다 기근이 더 빨리 확산될 수 있다. 가스관에 공기를 주입하면서 성냥불을 붙이면 모든 거리가 파괴되고 모든 집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30년 전쟁은 독일의 문명을 일보 후퇴시켰지만, 그와 같이 격렬한 전쟁이 지금 일어난다면 독일을 거의 파괴해버릴 것이다. 파괴적인 힘이 엄청나게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조직이 훨씬 더 취약해졌다.
단순한 사회에서는 주인과 하인, 이웃과 이웃이 서로 알고 접촉하며 산다. 그런 접촉이 위기 때 사회를 단결시킨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분위기가 사라지는 추세다. 런던에서는 한집에 사는 사람들이 옆집에 사는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바로 붙은 방에 사는 세입자들이 서로 완전한 남남이다. 시민 충돌이 일어나서 당국의 질서유지 기능이 마비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엄청난 수의 주민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폭력을 일삼는 군중으로 변모할 것이다. 그들에게 단결과 연대의 정신은 없다. 결국 런던은 일군의 도적떼들에 의해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런던은 가장 큰 대도시지만 다른 대도시들도 있다. 런던에 타당한 이야기는 뉴욕에도 타당하며, 인구수가 수십만 명대에서 수백만 명대로 꾸준히 늘고 있는 많은 도시들에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이처럼 엄청난 수의 인간이 모인 곳, 하지만 지옥에 있던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있던 나사로 사이에 놓여 있던 것과 같은 큰 구렁텅이가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있는 곳, 그곳이 현대 문명의 중심이다. 그곳은 사막보다 더 외로운 곳이고, 부와 빈곤이 각축하는 곳이며, 지근거리에 살면서도 한 사람은 흥청대고 다른 사람은 굶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다. 큰 충격이 발생해서 복잡하고 취약한 사회조직을 뒤흔든다든지 경찰관이 곤봉을 내팽개치거나 빼앗긴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면, 큰 깊음의 샘들the fountains of the great deep이 터지며[성경 창세기 7장 11절에 나오는 표현으로 노아의 홍수 때 땅속에 있던 큰 물줄기가 터져 올라온 것을 묘사한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혼란이 찾아온다. 현대 문명은 강해 보이지만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사막과 숲 속이 아니라 도시 빈민가와 시골 길가에 옛날 훈족이나 반달족을 닮은 야만인들이 기거하고 있다.
문명인의 내면에 여전히 야만인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옛날에 압제를 자행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 피에 굶주린 듯 분노하여 작은 다툼에도 죽기 살기로 싸웠던 사람들, 도시를 불태우고 제국을 파멸시켰던 사람들, 그들은 본질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사회가 진보하면서 지식과 부드러운 매너와 세련된 취향이 축적되고 공감능력이 커졌지만, 아직도 인간은 가죽 옷을 입고 돌 하나로 맹수와 싸우던 때와 마찬가지로 분노로 눈이 멀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경향은 과거에 그렇게 자주 파괴적인 분노로 불타올랐던 격정에 불을 붙일 우려가 있다.
현재 문명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급속한 변화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19세기 유럽에서 비로소 인간은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시작한 것 같다. 도구를 이해하고 자신의 힘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했던 변화의 움직임이 돌연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엄청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처럼 급속한 진보는 생산방법과 물질적 생산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산업의 변화는 사회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이고 결국 정치적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어린아이가 자라면 옷이 몸에 맞지 않게 되듯이, 사회가 진보하면 기존 제도는 새로운 사회에 맞지 않게 된다. 진보하는 사회에서 사회문제를 제대로 처리하려면 전보다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다. 진보와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더 그렇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급속한 변화가 큰 주의를 요하는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처에서 확인 가능하다. 문명세계 곳곳에서 위험과 폭력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신조信條가 죽어가고 믿음이 변하고 있으며, 보수주의의 영향력은 점차 소멸하고 있다. 미국의 민주제건 유럽의 군주제건, 정치제도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어떤 형태든, 대중 사이에 불안감과 비통함,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맹목적인 노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선동가들의 가르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열이 날 때 맥박이 빨라진 탓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은 낡은 병 속에서 새 포도주가 발효되기 시작한 상황이다. 범선帆船에다 대양을 오가는 일급 증기선의 엔진을 달면, 엔진이 작동하는 순간 범선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모든 사회관계를 급속히 변화시키고 있는 새로운 힘은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조직과 정치조직들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증가하고 있는 필요와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맞추어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분별력, 애국심, 인간애, 종교심 같은 감정들은 한결같이 우리에게 그 과제를 맡으라고 촉구한다. 물론 무모한 개혁은 위험하다. 그러나 맹목적인 보수주의는 더 위험하다. 우리에게 닥쳐오기 시작한 문제들은 매우 심각한 것들이다. 제때 해결하여 대재앙을 방지할 수 있을지 우려될 정도다. 하지만 그 심각성은 그 문제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감하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한 나라뿐 아니라 현대 문명 전체를 위협하는 이와 같은 위험들은 더 높은 단계의 문명이 탄생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전에는 충분했던 상황과 제도로는 이제 사람들의 욕구와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와 권력을 운이 좋은 소수의 수중에 집중시키고 그 외의 사람들을 인간 기계로 취급하는 문명은 필연적으로 무질서를 조장하고 파괴를 초래한다. 그렇지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부자들이 누리는 안락함과 편리함을 모두 누리는 문명, 감옥과 빈민구호소, 그리고 구제단체가 필요 없는 문명을 실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을 강구할 수 있는 사회적 지능이 출현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은 이미 우리 손에 있다. 한쪽에서는 빈곤과 결핍이 문제가 되고 있음에도, 다른 한쪽에서는 생산능력의 과잉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다. 기업가들은 말한다. “우리에게 시장market만 줘보시오. 그러면 끝없이 재화를 공급하겠소!” 그런데 실업자들은 외친다. “우리에게 일자리만 줘보시오!”
사회문제를 처리하는 데 발휘되는 지능이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물질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발휘되는 지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자연과학은 성큼성큼 전진하는 반면 정치과학의 발전은 느리다. 부를 생산하는 기술은 크게 진보했지만 공평한 분배를 달성하는 일에서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지식은 엄청나게 증가했고 산업과 상업은 혁명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는 5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근사한 기계를 만들었지만, 정치적 부패 앞에서는 바보처럼 무력하다. 이스트 강 다리[미국 뉴욕 시의 브룩클린 다리를 가리킨다]는 기계적 기술이 이룩한 최고의 성과다. 그러나 그 다리를 세우기 위해 브룩클린의 유력한 한 시민이 6만 달러를 여행용 가방에 담아 뉴욕으로 가져와서 뉴욕 시 의회 의원들에게 뇌물로 바쳐야만 했다. 그 대단한 다리를 고안해낸 인간의 정신이, 미쳐서 망가진 채로 드러누워 있는 육체 안에 갇혀 있는 꼴이다. 그 육체의 성장은 오로지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다리 위에 수많은 사람이 지나갈 경우를 상정하여 그 무게를 추정하고 그에 맞추어 설계를 정교하게 조정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이 활용되었지만, 그런 기술도 불량 철사가 케이블 안에 섞여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문명이 진보하기 위해서는 사회문제의 처리에 더 많은 지능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지능이라야 한다. 정치를 정치인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다. 또 정치경제학을 대학교수들에게만 맡겨둘 수도 없다. 국민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동할 수 있는 것은 국민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생을 자처하는 한 인사가 어떤 잡지에, 사회를 구원하려면 각 개인이 자기 일에만 신경 쓰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이것은 이기심의 복음이다. 자기가 잘사니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 복음은 부드러운 플루트 소리와도 같다. 그러나 사회 구원, 즉 인간성의 자유롭고 완전한 발전은 형제애의 복음―즉,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회가 진보하면 할수록 각 개인은 모든 사람의 복지에 점점 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회 진보가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연대의 틀 안에서 모든 사람을 점점 더 가깝게 결속시키기 때문이다. 법률과 예의범절을 잘 지키고 자기 가족을 잘 돌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는 가끔씩 언급하는 것 말고는 사회 전체의 복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좋은 시민도 아니다. 시민의 의무는 그것보다는 더 많고 더 어렵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능은 단지 지적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적 감성에서 나오는 생명력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에서 나오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소수의 이기심이건 다수의 이기심이건 이기심을 초월해야 한다. 또 그것은 정의를 추구해야만 한다. 모든 사회문제의 바탕에는 사회적 불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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