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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떨이로 팝니다!
미국인이라면 ‘실직한 비숙련 노동자는 오직 자신만을 탓할 수 있다’는 말을 다들 인정한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면, 숙련 기술을 습득했어야 했다. 현대 산업국가가 항상 숙련 노동자와 고학력 노동자를 원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검토 또한 필요하다. 미국은 숙련 노동자든 비숙련 노동자든, 모든 노동자가 필요하다. 뇌 외과 의사가 중요하듯이 미화원도 중요하다.
하지만 미국은 어떤 영역에서도 노동자를 낳지 못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숙련된 자국 노동자를 구할 수 없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이들의 불만을 그대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이들이 정부에게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을 점검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런 요청 대신,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이민자 할당 수를 늘려달라고 의회를 압박한다.
이런 행동은 기업들이 스스로를, 더불어 자신들의 고용 관행을 고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이하게도 현대 산업국가에서 숙련 직종에 고용하겠다고 데려오는 이민자들은 주로 인도, 동남아시아, 중동,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제3세계 국가에, 모범 교육기관으로는 유명하지 않은 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컴퓨터산업 노동자를 유입시키기 위해 이민자 할당 수를 늘리자는 의견이 제기될 때마다, 그 지역의 신문사에는 편지가 쇄도한다. 미국에서 컴퓨터공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석박사이지만 직장은커녕 면접 기회도 얻지 못한다. 이들은 실리콘밸리의 경영진들이, 고용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있는데도 싼값으로 일할 사람을 원한다고 말한다. 미국으로 이주해온 외국인들은 보통 미국인 급여의 절반 내지 3분의 2를 받는다. 또한 이주민 고용조건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이처럼, 일거리를 수출해 실업률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또다시 국내의 다른 일터에 외국인을 들여와 실업률을 올리고 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일거리는 수출하고 노동자는 수입하다니 합리적인 중상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에서 유명 기관 중 하나인 워싱턴 D.C의 한 싱크탱크는 세계무역 연구기관으로서, 여기의 구성원 및 대변자에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두 대표도(최근에 대통령이었던 이를 포함해) 포함되어 있다. 이 단체는 미국이 수출한 일거리 덕택에 미국 시민이 전체적으로 10만 달러 내지 100만 달러, 평균 17만 달러의 이득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미국인의 일자리 하나를 외국에 수출하지 않고 자국에 ‘보존’하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물품을 외국에서 생산해 들여오면 그것을 더 값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배배 꼬인 논리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미국 소비자가 얻는 이득은 노동자 재교육과 재배치 비용, 실업 상태에 지급되는 생활 보조비의 여섯 배나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제 미국인들은 모든 일거리를 해외 시장에 팔자는 캠페인을 시작해야 한다. 심지어 모두가 생활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더라도, 받을 수당을 생각하면 이를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자동화 역시 계속되는 위협이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수출품도 하나씩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일자리부터 팔아야 할까? 물론 우리의 수출 계획은 NAFTA와, GATT를 이은 WTO의 조항에 맞추어 수립되어야겠지만, 나는 워싱턴 D.C의 싱크탱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일부터 먼저 팔라고 제안하고 싶다.
누군가의 존재에 값을 매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발생하는 가족, 지역사회, 지방의 경제적·문화적 손실에 값을 매길 수 있겠는가? 중서부의 방대한 지역이 사양 산업 지대로 쇠락했을 때, 고통을 겪은 것은 노동계급만이 아니었다. 원하는 곳 어디서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매우 부유한 계층을 제외하고는 육체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 모두의 삶이 피폐해지고 불안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금전적 가치 외에 잃어버린 진짜 가치를, 사양 산업 지대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이 치른 진짜 대가를 알지 못한다.
일자리 창출 계획, 즉 누군가 일을 계속하게끔 일자리를 만드는 계획들은 계속 비난을 받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계획들이 아예 폐기되었으면 한다. 현재 미국에서 노동과 일자리의 개념은 그 본뜻을 잃어버린 듯하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노동이란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 활동이자 세상에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일자리는 사람들이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유지하는 중요한 것이기에 세계적으로 일자리를 조성하고자 하는 노력은 숭고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건 죄일 수 있다.
우리 부두에서는 다들 밑에서 일하기 꺼리는 주임이 있었다. 컨테이너 선박에는 원뿔고정쇠라는 중요한 장비가 있다. 이 장비는 갑판에 쌓인 맨 위의 컨테이너에 사용하는 것으로, 한 층 한 층 쌓인 컨테이너를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 맨 위 컨테이너의 네 귀퉁이에 있는 홈에 끼우고 내려온다. 그런 뒤 크레인 기사가 다시 컨테이너를 가져와 옆 열에 차곡차곡 쌓으면 또다시 그 귀퉁이에 고정쇠를 끼워 컨테이너들을 위아래로 단단히 고정한다. 이런 작업을 반복해 컨테이너 여섯 줄을 선적하고 나면, 긴 쇠막대와 나선식 죔쇠를 이용해 컨테이너 전체를 갑판에 고정한다.
이 작업들은 만만치 않다. 죔쇠도 무겁고 쇠막대도 무거우며 원뿔고정쇠도 가볍지 않다. 이들 중 일부는 사용하는 장비에 따라 무게가 13킬로그램까지 나가며, 날씨가 사나운 날에는 컨테이너 위로 세 개 이상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반면 작업 속도는 아주 빨라야 한다. 사람들이 컨테이너 위에 올라가 있을 때는 크레인이 멈춰 있으므로, 다들 크레인을 가능한 빨리 컨테이너 운반 작업에 돌려보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고정 담당 선원들은 컨테이너 사이에서 잠깐 쉴 수 있긴 했지만, 쇠막대와 죔쇠를 준비하고 원뿔고정쇠도 분류해야 하는 등 다른 할 일이 많다.
척이라는 이름의 주임은 늘 일을 재촉하고 빠른 처리를 요구했다. 우리는 잠시도 쉬지 못했다. 사력을 다해 컨테이너를 고정한 후에 한숨 돌리며 힘을 비축하려 들면 꼭 그가 나타나곤 했다.
“어이, 자네들! 9번 창구에 고정쇠가 좀 필요할 거요.”
척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후미로 돌아가서 뭘 좀 해야 할 거요.”
“선두 화물창 쪽에 고정쇠 상자가 있어요.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2, 30개 정도 7번 창구 난간에 갖다 놔요.”
그러던 어느 날, 한 고정 조에서 고정쇠를 후미로 나르던 절반의 조원이, 고정쇠를 선두로 나르던 나머지 절반의 조원들과 마주쳤다. 알고 보니 척이 우리에게 시킨 일 중에 많은 것들이 불필요한 작업이었다. 이는 나중에 조원 두 사람이, 척과 회사 관리자가 컨테이너 귀퉁이에서 나누고 있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 확실히 확인되었다. 관리자가 모두 바삐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하자 척이 대답했다.
“네. 저는 모두가 쉬지 않고 일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척은 생산량을 얼마나 늘렸는가가 아니라, 일을 얼마나 시켰는가를 이야기하며 상관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상황이 알려지자 척의 운명도 판가름 났다. 아무도 척과 일하려 하지 않았다. 작업 배분 시간에 척이 맡은 작업은 맨 마지막으로 채워졌다. 다른 일이 없어 척이 담당하는 부두에서 일해야 할 때는 다들 최소한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 사실을 경영진에게 제보한 듯했다. 결국 척은 선박 일을 그만두고 시베리아의 어딘가로 발령이 났다. 그가 거기서 잘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고정 담당 선원들은 잘 지냈으며, 물론 생산성도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일을 필요해서 했을 뿐,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산업화 이전 중세의 농부는 밭을 갈거나 수확할 일이 없을 때는 싹이 날 때까지 쉬었다. 쓸데없이 오전에 땅을 파서 오후에 메우는 건 신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농부들은 공장으로 들어갔다. 공장주는 그들의 여가시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노는 손은 손해이므로 하루에 12시간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이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150년 넘는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고, 마침내 산업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하루 10시간 근무, 다음에는 8시간 근무 그리고 끝내 주5일근무제까지 쟁취했다.
현재 생계를 꾸리기 위해 유지하는 주 근무시간은 수십 년간 그대로이다. 하지만 점차 자동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근무시간을 이보다 단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당 노동시간을 물가와 연동함으로써 매년 증가하는 노동생산성을 따라가기 위해 고되게 진행되었던 작업 시간을 이제는 줄일 때도 되었다.
노동자도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 당연하며 합리적이다. 그렇게 되면 노사 교섭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며, 노동자들도 3년마다 의례적으로 벌이는 협상용 파업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물론 경영진들은 예민하게 사회 파국을 운운하며 이 조치에 반대할 것이며, 그 내용은 이전에 우리가 매번 들어온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 반응은 오래전, 노동자들이 12시간의 근무시간을 줄여달라고 처음 요구했을 때 공장주들이 보였던 반응과 아주 흡사하다.
노동생산성, 곧 노동시간당 산출되는 상품 및 서비스의 양은 생산량을 측정하는 일반적인 척도이며, 국가 경제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생산성을 향상해야 한다는 것이 경제학 제1의 법칙이 되었다. 그런데 이 이론에 동의하려면 이 생산성 논리가 끝이 없고 계속 극심한 양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감수하거나 무시해야 한다.
또한 이 논리적 귀결(점점 더 적은 노동자로 더욱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려는 노력)에 수반되는 역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가 실직하고 상품 수요가 감소한다고 치자. 이렇게 시장이 흔들리면 이 생산 양식도 위태위태해질 수밖에 없다. 평균 소득이 줄어든 노동자가 소비를 줄이면 시장이 손상을 입고, 결과적으로 해고가 늘어나면서 제 살 깎아 먹기로 몰락하게 된다. 결국 생계를 위해 일하는 우리 모두는 피부색과 상관없이, 절대적 위치에 있는 권위자에게 우리 삶에 대한 결정권을 맡기는, 경제 체계의 잠재적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샌프란시스코의 제9 연방순회항소법원은 아무리 근속 연수가 많아도 더 적은 임금에 일할 사람이 있을 경우 나이 든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다른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판사들과 워싱턴 D.C의 싱크탱크의 지지를 받는 현 체제는 인간과 사회의 건강 같은 모든 것들보다 이윤의 극대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상황을 초래해왔다.
하지만 내 비판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현재 우리 경제 체계가 실패한 건 평등을 충분히 이루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만일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든 위와 같은 판결들이 누구에게든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었다면, 정의와 조화와 모두의 안녕이 넘쳐났으리라. 어느 누구도 법, 법 집행, 법정 판결에서 면제되지 않았다면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갔으리라. 그렇게만 되면 앞서 언급한 항소법원의 소송에서도, 심사숙고한 판결을 내려줄 더 젊은 판사를 더 적은 비용으로 쓰는 게 왜 불가능하겠는가.
많은 이들이 일자리 감소에 항의하는 것은, 사회의 진보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한다. 진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옛날에 이미 사라져버린 일자리에 대한 향수에 머물러 있거나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면서 땀 흘리는 노동에 대한 숭배를 그만두고, 역사의 편에 서라고 권고한다. 이처럼 노동자의 불만은 과소평가되고, 노동자의 비판에는 대답이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자동화로 많은 육체노동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남은 일거리마저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로 보내는 것은 자동화가 아니며, 이런 ‘진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향수에 젖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역사도, 진보도 이곳 일터에는 없다. 이곳에서는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특권층은 사무직 노동자와 육체노동자를 불문하고 모든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일자리를 중국에 수출하고 그곳에서 생산한 상품을 다시 수입하는 행위는 어떤 경제적 논거로도 뒷받침될 수 없다.
현재 미국은 중국에 대한 국제수지에서 5대 1, 즉 200억 달러 대 1,000억 달러로 적자를 보고 있다. 곧 중국 무역에 관여하는 일부 미국인들이 200억 달러를 대가로 이 나라의 필수적인 일부(1,000억 달러의 부분)를 팔아먹고 있는 셈이다. 이것도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200억 달러를 버는 한 말이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 시간을 단축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 시간을 연장시키며,
기계 그 자체는 노동을 경감하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 강도를 높이며,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예로 만들며,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
- 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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