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코페르니쿠스,
지구 대신 태양을 중심에 놓다
1496년, 23세의 청년 코페르니쿠스는 인생을 바꾸어 놓을 책 한 권을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요약Epytoma in almagesti Ptolemei》이다. 그리고 저자는 독일 사람 요한 뮐러로, 라틴식 이름인 레기오몬타누스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요약》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이 젊은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형에 대해 공부하려면 12세기에 무슬림 천문학자들이 아라비아어로 정리한 《알마게스트》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한 책을 공부해야만 했다. 역사를 거슬러 따라가 보면 《알마게스트》는 아라비아어로 번역되기 전에도 라틴어로 정리되어 있었고, 그보다 훨씬 전 프톨레마이오스가 살아 있던 2세기 무렵에는 그리스어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에 유럽에서는 12세기에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알마게스트》의 근대적 개정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여기서 근대적이란 ‘15세기에 맞게’라는 뜻이다. 레기오몬타누스의 스승이던 포이어바흐는 《알마게스트》를 개정할 때 그리스어로 쓰인 원본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었지만 아쉽게도 이루지 못하고 1461년에 죽고 말았다.
죽기 전 포이어바흐는 제자인 레기오몬타누스에게 자신이 못다 이룬 작업을 꼭 하도록 당부했다. 레기오몬타누스는 스승의 뜻을 받들기는 했으나 그리스어 원본을 새로 번역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알마게스트》의 내용을 요약하고, 12세기 이후에 관측한 내용들을 추가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계산 중 일부를 관측 내용에 맞게 수정하고, 이 우주 모형대로라면 달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을 더해 새로운 책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요약》이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레기오몬타누스가 스승의 유언을 그대로 받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나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레기오몬타누스는 생전에 이 책을 출판하지 않고 1476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20년 뒤인 1496년에 《요약》이 출판되어 코페르니쿠스의 손에 운명적으로 들어갔다. 만약 이 책이 레기오몬타누스 생전에 출판되었다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에 깊은 감동을 받아 새로운 우주 체계가 필요하다는 절실한 마음이 들었을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가 아닌 다른 젊은이였을 수도 있다.
1500년, 27세의 코페르니쿠스는 바티칸에 머물면서 다양한 책을 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바티칸 도서관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필사본들이 있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의 책은 일일이 손으로 베껴 만든 필사본들이었다. 《요약》을 본 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가 그리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코페르니쿠스는 아라비아에서 온 다양한 책과 사상을 접하며 이것들을 집대성해서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1510년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형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새로운 우주 모형, 곧 태양이 중심에 있고 행성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도는 지동설의 기본 틀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출판하지 않고 요약본으로 만들어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돌렸다. 이 요약본에는 우주의 중심은 태양 부근에 있으며 지구는 1년에 한 번 태양 둘레를 돌고 하루에 한 번 내부의 축을 중심으로 스스로 돌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구를 비롯해 다섯 개의 행성들이 태양 둘레를 돈다고 되어 있다. 수성과 금성은 지구보다 안쪽에서 돌기 때문에 해가 지거나 뜰 때에만 보이고, 화성과 목성과 토성은 지구보다 바깥에서 돌기 때문에 지구의 공전 방향과 반대인 동에서 서로 움직이는 역행 현상이 보인다고도 썼다. 또 다른 별들이 박혀 있는 수정구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보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어느 것 하나 틀리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공식적이며 대대적인 출판을 꺼렸다. 왜냐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형을 부정하고 새로운 우주 모형을 만들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란, 지동설에서도 행성들의 운동 속도가 달라지는 것에 대해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순전히 우아하다는 느낌 때문에 선택한 원 궤도로는 행성들이 하늘을 빠르게 갔다가 느리게 갔다 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것은 훗날 케플러가 행성의 궤도는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밝혀낸 뒤에야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문제는 행성이 아닌 별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별은 태양계의 바로 바깥쪽에 있는 수정구에 붙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별과 지구의 거리가 가깝다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운동을 할 때 별들이 스쳐 지나가듯이 보여야 한다. 이것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볼 때 가까이 있는 나무가 뒤로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별들은 지구가 전진하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달리는 기차에서 저 멀리 있는 산이 고정된 것처럼 보이듯이 별들 역시 태양계에서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태양계와 별 사이에는 그렇게 큰 빈 공간이 필요할까?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의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왜 신은 태양계와 별 사이에 빈 공간을 두었을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지구가 움직인다면 그것 때문에 바람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또 다른 문제도 생겼다.
‘지구와 다른 행성들은 왜 태양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16세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책의 출판을 미룬 이유다.
1539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를 찾아갔다. 레티쿠스는 태양을 중심에 둔 새로운 우주 모형이 매우 혁신적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빠 책을 낼 생각을 하지 않는 코페르니쿠스를 설득해서 태양 중심설을 요약해 출판할 준비를 했다. 신중한 코페르니쿠스는 출판을 여전히 꺼렸지만, 말재주가 좋은 레티쿠스에게 설득당해 책은 곧 출판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레티쿠스가 먼 곳으로 전근을 가 출판을 맡을 수 없게 되는 바람에 루터 교회의 목사였던 오시안더에게 일이 넘어갔다.
진보적이던 레티쿠스와 달리 진보도 보수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던 오시안더는 태양 중심설이 교회의 반감을 살 염려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동의도 없이 태양 중심설은 우주의 모습과 천체의 운동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학적 설명일 뿐이라는 말을 책의 서문에 넣었다. 책은 우여곡절 끝에 출판되었으나 하필이면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직전에 인쇄소에서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실린 다소 비겁해 보이는 서문에 대해 그는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이렇게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1543년 세상에 나왔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지동설이라는 혁신적인 사상을 전파하며 잠자던 유럽의 학문을 깨웠다는 것은 몇 백 년 지나고 나니 그때 그랬다는 말이지, 사실 당시에는 이 책 때문에 사회가 엄청난 충격에 빠지거나 뜨거운 반향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초판 400부가 다 팔리지 않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없었고 학자들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이 책이 사회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싶었는지, 로마 가톨릭교회는 16세기가 다 가도록 이 책과 지동설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르다노 브루노가 나타나 말썽을 부리자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책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 추종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가 부르짖는 태양 중심설이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의 믿음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브루노는 1584년에 출간한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De l’infinito, universo e mondi》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체계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우주론을 펼쳤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우주는 시공간적으로 무한하며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고 태양은 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브루노가 불길 속에서 죽도록 1600년에 화형을 내렸다.
브루노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그의 형을 집행한 후에도 개신교 운동을 주도한 루터교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정도면 태양 중심설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일 처리를 빨리 못 해서인지 1616년에 이르러서야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로 묶어 버렸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이 책을 볼 만한 사람은 다 보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몇 권은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이 책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동의해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사람이 생겨났다.
영국 사람 토머스 딕스는 태양을 중심에 두고 지구와 행성들이 동심원 궤도를 돌기만 하면 수성과 금성이 동틀 녘과 해 질 녘에 나타나는 것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또 지구보다 먼 곳에서 태양을 도는 화성, 목성, 토성의 역행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복잡해 보이는 행성의 운동을 내행성과 외행성의 운동으로 간단하게 구분하는 것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행성들이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순으로 태양 둘레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당시에는 태양과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행성들이 태양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행성들이 늘어선 순서를 아는 것이 왜 어려운지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늘 밤에 나가 하늘을 보라. 그중에 화성, 목성, 토성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단계 통과! 몇 날 며칠을 밤마다 나가 이 행성들의 위치를 열심히 추적했다고 치자. 그 궤적만 가지고 우리에게서, 한술 더 떠 태양으로부터 행성들 중 어느 것이 가깝고 어느 것이 먼지 위치를 정할 수 있을까? 태양에 가까운 것부터 먼 것까지 행성들의 순서를 알 수 있는 것은 천문학자들이 그렇다고 해서이지, 실제로 그 행성들이 그런 순서로 늘어서 있는지를 태양계 밖에 나가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무슬림 천문학자들과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 아니 지구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행성들이 늘어선 순서를 맞힌 것이다. 이것은 누가 뭐래도 엄청난 발견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감명을 받은 딕스는 이 책을 논평하는 형식을 빌려 1576년에 지동설에 관한 책을 영어로 썼다. 만약 딕스가 아니었다면, 영국인들이 라틴어로 쓰인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어떻게 읽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당시 과학의 대중화라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을 한 셈이다. 또한 딕스의 이야기는 다른 세계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면 번역을 활발히 하기 위한 기초가 잘 닦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예다.
딕스는 이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하나 내놓았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달리 우주를 무한하다고 보았다. 태양계 바깥에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펼쳐진 수많은 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태양계를 둘러싸고 있던 투명한 수정구를 과감히 깨자 우주는 무한한 공간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간 의식 또한 무한하게 뻗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뜻에서 껍질을 깬다는 말이 있다. 16세기 인간들의 머릿속에 있는 수정구가 깨진 것은 일종의 도약이었다. 인간들은 무한한 우주에서 빛나는 별 역시 또 다른 태양일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된 것이다.
딕스가 영국에서 영어로 쓴 책으로 지동설을 대중에게 알리고 있을 때 덴마크에서는 한 섬에 거대한 천문대를 짓고 열심히 하늘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관측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수학 이론과 다른 사람들의 관측 자료로 우주의 비밀을 풀려고 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 사람은 오로지 정확한 관측만이 우주의 비밀을 풀 열쇠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귀족 출신에 돈이 많고 열정 또한 많았으며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데다 다혈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티코 브라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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