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어원
약 1000년 전에 사용하던 고대 독일어에는 ‘노력’, ‘완강함’, ‘추구’ 등의 뜻을 가진 ‘chreg’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몇백 년이 지나는 동안 그 말에서 ‘kriec’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고, 이는 둘 혹은 여러 집단, 민족, 국가가 서로 무장하고 싸운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독일어 사전에 실린 ‘전쟁’Krieg의 말뜻도 비슷하다. 단순하게 말해서 전쟁은 혹은 여러 나라나 서로 다른 시민 집단 사이에 발생한 갈등을 무기와 무력을 동원해 해결하려는 행위이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정파의 목적은 폭력 투쟁으로 갈등을 해결해 우월한 위치에 도달하는 것, 즉 승리하는 것이다. 전쟁에서는 승리를 위해 계획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고 이것이 상대방의 부상과 사망을 초래한다.
“전쟁은 여러 나라의 정부와 정치인들이 더 이상 대화를 통해 평화로운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이들 나라는 무기와 군대를 동원해 폭력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쟁의 여파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 게르트 슈나이더, 『청소년을 위한 정치 사전』(2009) 중에서
달콤한 전쟁의 추억
전쟁은 승리한 쪽이든 패배한 쪽이든 전쟁에 뛰어든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전쟁에 열광한다. 한 친구의 늙은 아버지는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까지 초롱초롱해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2차 세계 대전 때 폭격기 조종사였던 친구의 아버지는 레닌그라드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일을 떠올릴 때면 양팔을 벌리고 비행하는 동작까지 선보이면서 감격에 겨워했다. 평상시에는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이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할 때 내는 살인적인 소리까지 흉내 내곤 했다.
친구의 아버지에게는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였다. 전우애와 위대한 조국에 대한 애국심, 처음 맛보는 성공으로 충만한 시기였던 것이다. 거의 아흔을 바라보는 친구의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 추억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전쟁에서 맛본 승리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자신이 어떤 범죄 집단을 위해서 일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찬반 토론 -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전쟁 찬성론자[이하 ‘찬성’]: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모든 갈등은 항상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되었으니까요.
전쟁 반대론자[이하 ‘반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은 완전히 미친 짓이고,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물일 뿐입니다.
찬성: 하지만 인류 역사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습니다.
반대: 바로 그런 생각이 문제입니다. 항상 있어 왔다는 이유로 전쟁을 용인할 수는 없습니다.
찬성: 인간의 삶은 갈등의 연속이고,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싸우는 무자비한 투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싸우지 않는 사람은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한 이후로 줄곧 그랬습니다.
반대: 두 번의 세계 대전이나 숱한 전쟁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원자폭탄 피해자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찬성: 지구가 평화로운 에덴동산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요?
반대: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인간의 이성과 인간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그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전쟁은 연대감과 관용을 없애 버립니다. 인간의 모든 가치를 말살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성: 그것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동경일 뿐입니다. 평화주의자가 바라는 경건하지만 유아적인 이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대: 현실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전쟁을 바라지 않습니다.
평화주의Pacifism
이 말은 ‘평화를 실현하다’, ‘평화를 이루다’라는 뜻의 라틴어 ‘파치피쿠스’pacificus에서 유래했으며,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기본 입장을 나타낸다. 평화주의자는 양심에 따라 모든 형태의 폭력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래서 자기 나라가 공격받더라도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방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평화주의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펼친 마하트마 간디는 대표적인 평화주의자다. 간디는 식민 통치국인 영국의 강압에 폭력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그들의 학대를 묵묵히 감수했다. 이러한 평화주의 사상은 1970~1980 년대 평화 운동을 통해 대중에 보다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찬성: 저는 갈등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기쁨과 평화가 넘치고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도 없는 사회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반대: 우리는 지금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갈등이 항상 존재할 거라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갈등이 있다고 해서 서로 머리통을 붙잡고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찬성: 인간이 뜻을 하나로 모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죠. 대부분은 이성적이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고 너무나 쉽게 유혹당해서 함성을 지르며 싸움터로 달려 나갑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익명의 대중을 선동해 익명의 대중을 상대로 싸우게 하면 모두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그러한 예가 무수히 많았습니다.
반대: 당신이 방금 말한 대중은 개별적인 인간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대중은 선한 것과 의미 있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의 문제입니다. 이마누엘 칸트의 저서를 보면 알 수 있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행동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찬성: 모든 것이 그저 이론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의 실제 행동은 이론과는 다릅니다.
반대: 인류는 전쟁을 즐기는 잔혹한 소수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리 인간은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대재앙이나 위기 상황, 억압이 우리를 유혹에 넘어가게 해서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들의 뒤를 따르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전쟁은 인류에 대한 범죄 행위라는 제 명제와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더 확인시켜 줄 뿐이죠.
찬성: 당신은 정말 못 말리는 낙관론자군요. 모든 갈등이 폭력 없이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반대: 전쟁은 불행을 야기할 뿐입니다. 전쟁에는 죽음과 굶주림, 고통과 괴로움이 따릅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만 행동한다면 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성은 우리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니 이성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대화로 타협하는 대신 자기와 같은 사람을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마누엘 칸트 (1724~1804)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이다. 그는 평생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살았고, 그 지역 대학에서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쳤다.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우리 눈에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사물들의 이면에 놓인 기본 원리와 원칙을 캐묻는 학문이다. 1781년에 나온 칸트의 대표작 『순수 이성 비판』은 서양 철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칸트 철학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자주 인용되는 도덕 원칙으로 ‘정언 명법’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어떤 행위가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선일 경우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보편적 원칙에 충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과 언론
오늘날에는 주로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 기사를 통해서만 전쟁을 경험한다. 그러나 아무리 충격적인 영상과 사진들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콩고, 소말리아 등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전달하지는 못한다. 그 모든 일들이 거실에서 편안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우리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데다, 그러한 전쟁의 정확한 배경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분쟁 지역에 파견되었다가 전사한 군인들의 시신이 고국으로 돌아와 장엄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정치인들이 연설을 할 때에만 전쟁은 일시적으로 우리 현실이 된다. 사람들은 전쟁의 비극을 어렴풋이 예감하면서 희생자 가족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평생 전쟁과 파괴를 경험하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
오늘날 전쟁은 우리에게 ‘뉴스거리’일 뿐이다. 화면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무리 참혹하고 비참해도 우리에게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현장에 함께 있지 않고 텔레비전과 인터넷, 라디오, 신문이 전해 주는 소식만을 보고 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어느 정도 걸러진 내용들이다. 언론에 실린 전쟁 묘사가 정말로 사실과 일치하는지, 그것이 조작되거나 특정 세력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론 조작은 독재 체제 아래서 흔하게 이루어졌고, 지금도 발생한다. 히틀러 시대에 광범위하게 행해진 언론 선전이 대표적이다. 1939년부터 신문과 텔레비전, 라디오 보도는 나치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며, 온갖 만행을 최대한 은폐하는 완벽한 기사와 논평을 제공했다. 영웅적인 모습을 담은 화면과 기사,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이 전쟁에 열광하게 하고 그들의 희생정신을 부추기기 위해서였다. 독일의 패배가 이미 뚜렷해진 시점에도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독일 주간 뉴스』에서는 영웅가가 울려 퍼졌고, 해설자는 최후 승리가 곧 다가올 거라며 허튼소리를 떠벌렸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텔레비전이 대량으로 널리 보급되면서 전쟁은 점점 더 언론용 사건으로 변했다. 가령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때는 1964년부터 대규모 기자단과 카메라맨들이 동행했다. 그들은 방해나 검열 없이 전투 상황을 보도할 수 있었다. 매일 수많은 미국 시청자가 자기 나라 군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이나 베트남 시민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증인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텔레비전 전쟁’으로도 치러졌고, 그로 인해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처음 전쟁에 동조하던 미국인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전쟁에 반대하고 거부하는 입장으로 빠르게 돌아섰다.
베트남 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미군은 이후 새로운 결론을 끌어냈다. 그래서 1990~1991년과 2003년에 벌인 1, 2차 걸프 전쟁을 비롯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하고 관리했다. 다시 말해 미군이 선택하고 허락한 기자들만 전쟁을 보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중립적인 보도를 막고 미군에 유리한 기사를 내보내는 식으로 대중에 영향을 미치도록 했다. 일반적인 여론이 전쟁을 정당하게 생각하는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이유에 공감하는지 여부가 언론의 보도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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