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처음으로 마르카의 집에 가던 날, 여자애 방에 들어가 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더욱 심장이 두근두근 난리를 부렸다. 작은 방에, 벽에는 사진이 몇 장 걸려 있고 화장품 몇 개가 거울 앞에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 책, 종이 그리고 음반과 잡지 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마르카의 어머니는 우리 엄마보다 정리 정돈에 신경을 덜 쓰는 게 분명했다. 어느 것 하나를 밟지 않고 발을 내딛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큰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에서 마르카의 기타 옆에 일자로 누워 자고 있었다.
“오스카, 브라이언을 소개할게. 브라이언, 여긴 오스카야. 내가 이미 말했지.”
브라이언은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마르카가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나도 머리에 떠올랐던 몇 구절을 종이 귀퉁이에 적어 놓은 게 있었다.
“첫 번째 단어는 부정확해.”
마르카가 자신 있게 말했다.
“첫 구절도 마찬가지야. 글을 써 본 사람이면 다 알 거야!”
나는 그녀의 말은 무엇이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우리는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단어를 찾고, 고치고, 첨가하고, 지우면서, 수백 번 뒤로 돌아왔다. 두세 구절을 갈겨 쓴 다음, 다시 적절한 말을 찾곤 했다. 마르카는 첫 페이지를 찢어 작은 공 모양으로 뭉친 다음 브라이언에게 던졌지만, 브라이언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를 깨우려면 더 큰 무언가가 필요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 그동안 써 놓은 것을 다시 검토했고 어감이 괜찮은 몇몇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계속했다.
그리하여 조금씩, 단어 하나하나, 한 줄 한 줄이 더해지면서 우리의 구절들은 형태를 갖추어 갔다. 구절들은 서로 화답하듯이 포개졌다. 우리는 한 사람이 한 것을 다른 사람이 한 것과 결합했는데 나중에는 어느 부분을 누가 썼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표를 찍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밤이 내려와 있었다. 브라이언은 여전히 자고 있었고 우리는 녹초가 되었다.
우리는 탈진한 채로 행복감에 젖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미지의 영역을 끝없이 탐험한 다음 마침내 땅에 안착한 여행자들처럼. 나는 뭔가를 쓴다는 게 이토록 지치는 일이란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과물이 우리 눈앞에 있었다. 마르카가 열띤 목소리로 다시 읽은 몇십 줄의 글. 마지막 단어는 거의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내 생각엔 좋은 것 같아.”
조금 이따가 그녀가 말했다.
“제목을 붙여야 할 텐데.”
“그곳에.”
나와 그녀가 동시에 제안한 제목이었다.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린 방금 필리핀 게임을 한 거야. 소원을 빌어야 해.”
마르카가 말했다.
“필리핀 게임?”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걸 말했을 때 하는 게임이야. 각자 소원을 빌고 다음 날 상대방에게 먼저 ‘안녕 필리핀’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소원이 이뤄지는 거야. 잠깐 내 소원 좀 생각해 보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마르카도 같은 걸 소망하기를 바랐다.
어쨌든 ‘그곳에’는 좋은 제목이었다. 마르카는 기타로 몇 개의 화음을 퉁기면서 다시 한 번 가사 전체를 소리 내어 읽었다.
어울리는 멜로디, 그걸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가사와 잘 맞고, 자연스러워야 하며 오로지 그 노랫말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주어야 했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수십 번 시연해 보았고 작품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다. 마치 퍼즐에서 각 조각이 결국에는 다른 조각들과 맞물리게 되는 것처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양이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자이언트 맥스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마르카의 어머니는 밤마다 집에 올 때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 살찐 브라이언은 그때가 고양이의 하루 중 가장 신 나는 시간이란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시선이 마르카의 눈길과 마주쳤다. 우린 그 상태로 헤어질 수 없었다.
“오스카, 바래다줄게.”
마르카는 자기 엄마의 볼에 급히 뽀뽀를 한 뒤 말했다.
나는 마르카의 어머니가 우리가 그 애 방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져 쭈뼛쭈뼛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얼버무렸다.
그 모습에 마르카의 어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더욱 빨개졌다. 추위가 우리를 덮쳤다. 걸으면서 우리의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고 우린 거기에 도취했다. 단어들은 우리 입 앞에서 작은 수증기로 응결되었다가 추위 속으로 흩어졌다. 이따금 차들이 더럽혀진 눈덩이를 튀기면서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차 안으로 운전자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난방을 최고치로 올리고도 방한 의류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모습에 우리는 까닭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리에 이르렀다. 마르카가 갑자기 한복판에 멈춰 섰다. 발아래로 강물이 얼음 밑에서 숨죽이듯 조용히 흘러갔다.
“너 제프와 제레미가 떠난 날 생각나? 엄마가 오셨을 때 우린 그때 정확히 이 장소에 있었어. 그때 뭔가 말하려고 했잖아. 그게 뭐였어?”
마르카는 내 허를 찔렀다. 다시 한 번 나는 머릿속까지 빨개졌고 한심하게 횡설수설했다.
“난…… 난 모르겠는데. 잊어버렸어. 그건…… 그건 틀림없이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었을 거야.”
이런, 내가 따귀를 벌지 싶었다. 그런데 마르카의 손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분명히 그렇지 않았는데.”
차 한 대가 지나가자 눈이 부셨다. 마르카는 내 입술 가장자리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내일 봐, 오스카!”
그녀는 달려갔다.
“내일 봐, 오스카! 진짜 훌륭해, 우리 노래 말이야! 난 밤새도록 우리 노래를 생각할 거야.”
다리 끝에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나는 내 입술에 그녀 입술의 추억을 간직한 채 안갯속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건 강물 위에 넓게 퍼진 안개 너울만큼이나 가볍고 아련했다.
28
“안녕 필리핀!”
마르카가 저 멀리서부터 나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어제 우리 필리핀 게임 한 거 기억 안 나? 우리 둘이 동시에 ‘그곳에’라고 했을 때 말이야. 내가 이겼으니까 내 소원이 이뤄질 거야.”
짐짓 태연스레, 그녀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비밀이야, 오스카! 내가 그걸 밝히면 절대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소원이 나의 것과 같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근데 말이야.”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어제 집에 가면서 생각한 건데, 우리 노래, 그거 둘이 부르면 더 나을 것 같아. 듀엣으로.”
갑자기 그 야릇한 미소가 소원과 관계된 것이라는 확신이 약해졌다.
“너, 나더러 노래하라는 거야? 난 꽥꽥대는 오리 목소리잖아. 사람들이 도널드라고 할걸.”
그녀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넌 어떨 때 정말 답답하더라! 단 5분 만이라도 네가 하는 것이 모두 꽝이라는 생각 그만둘 수 없어? 너 그거 은근히 즐기는 거 같아! 꽥꽥 오리 목소리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고, 어쩌고저쩌고……. 이 곡은 우리가 함께 쓴 거야. 그러니까 같이 부르든지 아니면 아예 부르지 않든지 둘 중 하나야.”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기타를 조율했다.
“이건 이렇게 시작했어…….”
그녀는 노래하기 시작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따라 들어갔다. 마르카는 몇 소절 뒤에서 노래를 멈추고 내가 다음 절까지 혼자 부르도록 한 다음 나와 함께 다시 불렀다. 우린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할 때마다 가다듬어 서로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기타 위로 고개를 숙인 마르카는 저음부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이라고는 머리카락밖에 볼 수 없었지만 거기에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나는 전날 밤에 그녀가 한 키스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까 만났을 때, 그녀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행동했다. 안녕, 오스카, 친구 사이에 하는 가벼운 포옹, 엉뚱한 필리핀 게임 이야기 그리고 다른 화제. 나는 어
제 일이 꿈이 아닌지 자문해 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 그건 상당히 복잡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통과할 곳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미로랄까.
29
2월
제레미가 그곳에 간 지 53일째 되었다.
형이 부모님께 보낸 편지는 세 통이었다. 그걸 읽으면 형이 무슨 바캉스 클럽에 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내 컴퓨터로 이메일이 와 있었다.
안녕, 오스카.
여긴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집은 지금 오전 열 시겠구나. 하지만 여기가 하루 더 빠르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나는 지금 컴퓨터실이 빈 틈을 타서 자리를 차지했어. 다시 한 번 당부하지만 이건 초극비 사항이니까 부모님껜 절대 얘기하지 마라. 널 믿는다. 내가 여기 온 지 곧 두 달이 되는데 내가 꿈꾸는 건 오직 한 가지다.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엿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
3일 전부터 우리는 북쪽 구역 중 하나에 있는 모든 집을 빠짐없이 수색하고 있어. 반군들이 은신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임무 : 열다섯 살 이상 된 남자는 모두 연행해서 심문할 것.’ 말이야 쉽지. 여기서는 주민증을 가진 사람이 없고 가진 경우에도 그걸 꽁꽁 숨겨. 성인들이야 간단해. 알아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젊은이들 경우엔 누가 열다섯 살 이상인지 알 도리가 있어? 결국 대대장은 150센티미터를 넘는 사람은 모두 연행하라고 명령했지. 우리는 열두세 살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도 험비에 태워 끌고 왔어. 어머니들은 울부짖으며 아이들에게 매달리지. 개머리판으로 그들을 떼어 놓을 수밖에 없어.
우리가 그 지옥을 막 벗어나는가 싶었을 때 대여섯 살 먹은 꼬마, 틀림없이 우리가 연행한 아이의 동생일 텐데, 그 꼬마가 우리에게 돌을 던졌지 뭐냐. 나쁜 의도랄 게 전혀 없는데, 대대장은 만약 봐주면 십 년 후에는 그 애가 통제할 수 없게 될 거라는 거야. 그래서 대대장이 그 애의 따귀를 갈겼는데 어찌나 세게 갈겼던지 그 애가 뒷걸음질하다가 자갈밭에 쓰러졌어.
여기선 애들이 대단해. 우리 나라에서보다 한층 더. 장담하건대, 만약 이 사람들에게 힘이 있었다면 우린 지금쯤 모두 죽었을 거야. 그들의 눈 속에서 증오를 읽을 수 있었어. 그 생각을 하면 사지가 다 떨린다.
우리는 수색 나갈 때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곤 해. 어리석은 짓이겠지만, 나는 마치 부적처럼 네가 준 엠피스리에 매달리지. 누구나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내 생각에는, 엠피스리를 주머니 속에 따뜻하게 품고 있으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어리석지, 안 그래? 하지만 대대장이 그 꼬마의 따귀를 힘껏 갈기는 것을 보고 나서는 또 다른 두려움에 배가 꼬이는 것 같아. 그건 내가 평생 후회하게 될 일을 하도록 언젠가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거야. 하지만 더 나쁜 건 내가 명령을 거부할 용기가 없다는 걸 나 자신이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이야. 그건 내가 군대에 와서 배운 것과 반대되기도 하고.
아직까지 나는 사람에게 방아쇠를 당길 일은 없었어. 어차피 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만 미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곧, 어쩌면 내일…….
문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린다. 이만 마칠게.
오늘도 무사히.
J.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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