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출(天出)명장,
천출(賤出)명장
금강산 육로 관광이 실시되기 한 해 전이었던 2002년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속초에서 설봉호를 타고 공해 쪽으로 나와 북한 지역으로 올라가서는 북한 장전항으로 이동하는 항로를 이용했다. 장전항으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금강산 큰 바위(치마바위)에 붉게 새겨진 ‘천출 명장’이라는 글씨였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대략 글자 하나의 길이와 폭이 가로는 20미터 정도이고 세로는 30미터 정도이고 파 들어간 깊이는 2미터 정도라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은 것이 생각난다. 작업을 위해 동원된 인원과 장비도 트럭 몇 백 대라던가……. 아무튼 그 규모를 생각하면 엄청난 사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쪽 기준에서 보면 자연 경관에 그렇게 큰 글씨를 새겨 놓았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입항할 때 우리 측 방문 가족들 모두 저마다 한 마디씩 논평을 했다. 그때 이 글씨에 대한 우리 직원의 부주의 때문에 일어났던 해프닝을 소개한다.
2004년 4월 초,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서였다. 첫째 날 행사였던 단체 상봉과 만찬, 둘째 날 오전의 개별 상봉도 무사히 끝나고 남북이 함께하는 오찬 시간이었다. 이산가족들은 가족 단위로 한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전날부터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서먹함도 많이 가시고 모두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북의 지원인원과 보장성원들도 즐겁게 한자리에 모였다. 제각각 이산가족들의 만남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우울한 감정에 대해서, 또 이번 행사 동안에 있었던 특이한 일, 남과 북의 가족생활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가 점점 깊어 갔다. 즐거운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오찬 장소는 어느새 떠나갈 듯 시끌벅적해졌다. 그런데 이때 우리 통일부의 L 선생이 무심코 한 말이 문제가 되어 그날 밤 우리측은 물론 북측도 호된 시련을 겪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의 발단이 된 내용은 우리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북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문제가 되는 사안이었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우리 측 L 선생이 무심결에 아무런 의미 없이 ‘천출명장’이라는 단어에 대해 언급했다. ‘천출’이란 단어가 우리 사전에서는 ‘천한 출신賤出’이란 뜻인데, 왜 금강산 치마바위에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고 새겨 놓았느냐,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등의 말을 불쑥 꺼낸 것이었다. 물론 금강산 바위에 새긴 ‘천출명장’이라는 글은 ‘하늘에서 낸天出 명장’이라는 뜻이다. L 선생 역시 그 말뜻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농담을 한다는 것이 그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북측 보장성원이 상부에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북한 측은 그 즉시 행사를 일단 중지시키고는 당사자를 데려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무슨 의도로 그런 발언을 했느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상봉 행사는 없을 것이다, 당국 차원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등등,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그날 밤, 밤새도록 우리 상황실은 대책 회의를 하면서 남북 연락관이 접촉을 하고 북한 측의 응답을 기다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우리 측 지원단장인 H 국장은 혹시나 해서 내게 L 선생을 보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L 선생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찾아가니 그는 불안에 떨며 혼자 쓸쓸하게 앉아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잘 해결될 것이라고, 좋은 경험을 하지 않았느냐고 위로했지만, 젊은 L 선생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우리 측 단장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겠다는 공식적인 사과를 하는 선에서 이 일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다음 날, 작별 상봉장에서 만난 북측 보장성원들은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듯이 다가와서는 저마다 한 목소리로 L 선생을 비난하면서 무슨 저의가 있는지, 통일부 직원이 맞기는 맞는지, 남쪽에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탐문을 했다. 나는 새내기가 경험이 없어 그런 실수를 범했다고, 아무런 저의 없이 그저 조심성이 없어 실수를 했다고, 상대방의 실수를 너그럽게 덮어 주는 것도 같은 민족끼리의 미덕이 아니겠냐고 대답을 하면서 화제를 바꾸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남과 북이 만나는 곳에서는 항상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남북이 함께 행사를 진행할 때는 마치 손에 달걀을 쥐고 달리기를 하는 심정이랄까, 늘 불안하다. 이 사건은 통일부 직원은 물론 북한을 방문하는 우리 국민들을 대상으로 방북 유의사항을 교육할 때 언급하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이 일을 겪고 얼마 지난 뒤 인터넷에서 그 사안에 대해 언급한 글을 접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북한이 보인 반응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무시하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비난하고 있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북한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남북 사이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런 사안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기독교인이나 불교 신자 앞에서 예수나 석가모니를 폄훼하거나 비하한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예의와 양식이 부족하다는 범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 일을 겪으면서 느끼고 배웠던 교훈은 이것이었다. 내 생각, 내 뜻을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상대방의 문화와 생활, 가치관 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고려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반세기 이상 등을 지고 살아오면서 괴리된 각자의 삶을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엮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밤나무 단지
조성 사업
남북 간 교류·협력 사업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동안 가장 큰 의미를 두고 꼭 실현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갖고 추진했던 사업이 북한 밤나무 단지 조성 사업이었다. 밤나무 단지 조성 사업은 북한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함으로써 북한의 산림녹화를 꾀하고 밤나무 과실을 북한 주민의 대체 식량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에서 펼친 사업이었다. 밤나무 묘목 생산을 위한 기술과 아울러 비닐하우스, 비료, 농기계 등의 자재를 우리 측 교회를 비롯한 민간단체 등과 연계하여 지원함으로써, 남북의 주민이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여 민족 공동체 복원에 기여하자는 목적과 취지를 담고 있었다.
2005년 10월, 이 사업의 주관자인 백승인 회장님과 선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60대의 나이였던 백승인 회장님은 통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북한 지원 사업을 위해 15차례 정도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밤나무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기술을 가지고 있어 과거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활동한 경력도 갖추고 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하는 모습이 마치 통합된 우리 민족이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모습 같다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니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실소를 머금었다.
선양에서 평양행 고려항공으로 갈아탔다. 규모나 기내의 편의시설 등을 고려하면 하등급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촌스러운 항공기이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자리를 안내해 주는 접대원(스튜어디스)의 태도도 꾸밈이 없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측은지심이 발동해서일까, 아니면 북에서 태어나야 할 운명이 잘못되어 남쪽에서 태어난 탓일까 그저 고려항공 비행기에 오르면 기분이 좋아졌다.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내 머릿속은 북한의 황량한 민둥산들과 굶주림에 지친 북한 주민들의 얼굴, 한편으로 밤나무 울창한 북한의 산들과 가을에 밤을 추수하며 즐거워하는 북한 주민들의 표정이 겹쳐지면서 미소가 절로 잡힌다. 하지만 잘될까, 하는 의혹 역시 지울 수는 없었다.
처음 백 회장님께서 제출한 북한 밤나무 단지 조성 사업 계획서를 보았을 때 떠오른 생각 역시 두 갈래였다. 이렇게 좋은 사업이 있을 수 있나 생각하면서도 지금의 남북 간 현실에서 과연 이 일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백 회장님께 말하길, 회장님의 뜻만으로는 안 된다, 북한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해야 정부의 지원책도 강구할 수 있다, 북한의 의지는 직접 만나서 들어봐야겠다, 특히 북한의 지방에 우리 측 지원단이 방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북한은 우리 측 인사들이 북한의 지방을 방문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비교적 잘 꾸며놓은 평양이나 개성 같은 대도시에 비해 지방에서는 북한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리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낙관적이고 추진력 강한 백 회장님께서는 “자신 있다.”고 대답하더니, 며칠뒤 북의 초청장을 받아 우리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힘차게 말했다. 갑시다!
평양에 도착하고 나서 백 회장님께서 노인 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박희덕 회장님. 70을 훨씬 넘긴 것 같은 노인이었다. 백 회장님의 말로는 이분 때문에 밤나무 단지 조성 사업이 가능할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자신한다고 말했다.
박희덕 회장님은 재일 교포로 조총련 부의장을 지냈으며 김일성 훈장은 물론 2중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경력이 있는, 북에서 특별히 ‘모시는’ 분이었다. 젊은 시절 두 개의 조국 중 북쪽을 선택했지만, 지금 박 회장님의 마음과 머릿속에는 조국의 통일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대화를 하면서 알 수 있었다. 박 회장님은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마지막 남은 생을 조국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 바치겠다고 다짐했는데 하늘이 도와 백승인 회장 같은 분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또 함께 이 사업을 추진하자고 결연하면서 조국 산하의 녹화를 통해 자연환경을 풍요롭게 하고, 밤이라는 대체 식량으로 북한 주민들이 그런대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더욱이 남쪽의 통일부 과장이 직접 이 사업의 지원가능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북에 왔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위업 달성을 위해 특출한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국가에서 수여하는 명예 칭호이다. '2중'이란 이런 칭호를 두 번 받았다는 의미다.
다음 날 양각도호텔 2층 회의장에서 북측과 사업 협의를 했다. 여러 기관에서 나온 북측 인사들 가운데 특히 국토환경보호성* 관계자들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북한의 확실한 사업 의지는 확인한 셈!
* 우리의 산림청에 해당한다.
내가 이번 방북 목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한마디 했다. 밤나무 단지 조성 사업에는 남쪽의 교회, 민간단체 등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측 방문단이 밤나무 단지가 조성될 200여 곳의 지역을 직접 방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번 방북단이 함경남도 금야, 황해도의 배천군에 있는 북한 밤나무 단지 조성 현장에 직접 가 보아야 한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다음 날 저녁, 아리랑 공연을 보러 5·1경기장(김일성경기장)으로 갔다. 동영상을 통해서는 봤지만 현장에서 직접 공연을 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경기장에 들어서니 건너편은 카드 섹션을 하는 북한 학생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고, 양편 축구 골대 뒤쪽에는 북한 주민들이 앉아 있었다. 주석단(VIP 석) 쪽은 남쪽 손님과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 옆자리는 북한 주민들이 관전하는 자리다. 주석단 옆쪽 일반석 자리에 H 선생 등 북측 보장성원들과 함께 자리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는데 박 회장께서 찾는다고 북측 안내원이 전해 주었다. 안내원을 따라서 박 회장님에게 갔다. 박 회장님은 주석단 중앙에 배치된 자신의 옆자리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아니라고, 나는 북측 동무들과 얘기도 나누면서 일반석에서 보겠다고 극구 사양하고 북측 선생들과 함께 앉았던 조금 전의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H 선생이 내게 물었다.
“박 회장님을 어떻게 아십네까?”
“여기 평양에 와서 처음 뵙는 분이에요.”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자, H 선생이 다시 물었다.
“정말입네까?”
H 선생과 옆의 보장성원들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조국에서 널리 알려진 분이라고, 주석님도 직접 만났고 위원장님과도 독대를 했다는 등 칭찬에 여념이 없었다.
아리랑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가지고 온 물병을 들어 한 모금씩 마시자, H 선생이 추운데 웬 물을 자꾸 마시냐고 물었다. 내가 추위를 가시게 하는 물이라고 하면서 건네주었다. H 선생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받아 마시더니 내 어깨를 치며 웃었다. 사실 그곳에 가기 전에 빈 물병에다 북한 소주를 넣어 간 것이었다. 옛날 대학 시절 야구장에 갈 때 써먹었던 기술을 이곳에서도 한번 활용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날씨가 너무 추워 보온용으로도 필요했다.
물병이 북측 보장성원들의 손에서 손으로 도는 사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북한이 자랑할 만했다. 정말 대단했다. 장엄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남쪽이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북한과 같은 집단 사회에서만이 해낼 수 있는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운동장 밖으로 나왔다. 공연에 참여했던 아이들이 종종걸음으로 뛰어서 집으로 향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일정상 다음 날이면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북측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다음 날, 허망한 마음으로 순안공항을 떠났다.
2006년 5월 말, 백승인 회장께서 광화문 청사의 우리 과 사무실을 찾아왔다. 북에서 보낸 초청장을 제출하며 이번에는 틀림없이 북한 밤나무 단지 사업 추진이 가능하다고, 확인을 위해 평양엘 가자고 했다.
베이징공항에서 박희덕 회장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엔 죄송했다고, 이번에는 과장님이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이 사업은 꼭 추진해야 할 사업이라고, 웃으면서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려항공 비행기가 이륙하자 내 머릿속은 밤나무 단지 조성 사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북한 시골 마을에 설치될 비닐하우스, 예쁘게 자라날 묘목, 몇 년이면 밤을 수확하는 것이 가능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북한 지방에 우리 측 지원단이 좋은 선물을 안고 찾아가 함께 나누는 모습이 그려졌다. 신이 났다.
들뜬 마음 그대로 평양 순안공항을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북측 보장성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 방북 길에도 박 회장님 덕분에 특별 대우를 받았다.
다음 날 오전, 북한 관계자들과 회의를 하고 평양 인근의 양묘장을 둘러보고는 오후에 숙소로 돌아왔다. 박 회장님의 비서가 찾아왔다. 함경남도 금야군은 도로 사정이 안 좋고 숙박 시설도 여의치 않아서 하루 이틀로는 어려운 먼 길이니, 우선 배천군만 방문하자고 했다. 좋다고 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배천군은 황해도 남단 최전선 지역이어서 군부대도 많을 텐데, 이런 곳에 가게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이 사업이 실질적인 북한 개방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그날 이후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현지 방문을 떠나자는 소식이 없었다.
평양을 떠나기 전날 오후, 양각도 호텔 로비에서 박희덕 회장님을 만났다. 박희덕 회장님은 로비 소파에 나를 앉히고는 내 앞에 서더니 구두를 벗고는 내게 큰절을 하려고 했다. 황급히 왜 그러시냐고 내가 벌떡 일어나 박 회장님의 손을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박 회장님은, 아니라고,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고, 사죄의 절을 해야 된다고 했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북한 군부를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힘없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조금 더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남북의 문제는 군이 아니라 통일 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결정권을 갖는 때가 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누가 하더라도 이 사업만큼은 꼭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평양을 떠나면서 인근의 산들을 하염없이 자꾸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라와 민족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두 노인의 열정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