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글
성性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아메바와 위대한 수학자인 폴 에르디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 잠시 인용되는 수학계의 전설인 폴 에르디쉬는 하루에 3시간만 자고, 19시간을 수학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그는 커피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먹지도 않았고, 제대로 잠을 자지도 않았다.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숫자였고, 숫자만 봐도 배가 불렀으며, 숫자만이 행복이었다. 그런 천재와 단세포 동물인 아메바의 유사성은 과연 무엇일까? 혹은 과학자 아이작 뉴턴, 여성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 탐정 셜록 홈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만약 아메바와 그들의 공통점이 ‘무성애’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아메바는 무성 생식을 한다. 정확히 말해 아이작 뉴턴, 폴 에르디쉬, 에밀리 브론테 등의 성적 지향성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평생 독신이었고, 성적인 접촉도 거의 없었으며 자신의 일에만 매달렸던 인물로 알려졌을 뿐이다. 만약 무성애의 정의가 ‘성적 욕망의 결핍’이라면 평생 동안 성적 욕망과 무관했던 그들은 ‘무성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적 욕망이 결핍된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그것이 ‘무성애’라는 특정한 성 범주로 등장한 것은 2000년부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무성애의 현대 역사에서 데이비드 제이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무성애’라는 단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아메바라는 단어밖에 없었던 시절에 무성애 웹 사이트를 열었다. 그는 무성애 교육 네트워크인 ‘에이븐’의 창시자이며 사람들에게 무성애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흔히들 인간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행복의 조건에는 섹스가 필수적이라고 간주해 왔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성욕이 없다는 것은 비정상이며 치유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데이비드 제이는 섹스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에게 무성애는 정신 의학적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그런 편견을 없애기 위해 정치적인 개입이 필요한 새로운 운동이었다.
여성은 남성을 사랑하고, 남성은 여성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였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성애는 이제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여러 성애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성애가 없는 무성애까지 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LGBITT(레즈비언, 게이, 양성, 간성, 트랜스섹슈얼, 트랜스젠더 등)라고 불리는 무수한 성애의 범주도 등장한다. 19세기의 독일 성 과학자 폰 크라프트 어빙Richard von Krafft Ebing은 120가지가 넘는 성도착Psychopathia Sexualis을 언급했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 성적 도착이 아니라 성적 정체성으로 간주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만약 무성애가 성욕의 부재 상태이거나 혹은 성욕의 억제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현상이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이유로든 문화적 이유로든 독신과 금욕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나는 누구에게도 성적 매혹을 느끼지 못합니다.”라고 광고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가며 “당신뿐만 아니라 나도 성욕이 없거든요.”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당신이 섹스를 하든 안 하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마당에 그게 무슨 대수라고 피켓까지 들고 공개하느냐고 면박을 받기 일쑤이다. 또 그것은 신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퀴어 운동의 또 다른 모습으로 간주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성욕이 없어 행복하다면서 성애가 없는 성애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 자체가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고 조근조근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이 책의 저자인 앤서니 보개트Anthony F. Bogaert는 무성애를 포괄적으로 연구한 캐나다 성 과학자로, 무성애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무성애의 핵심적인 정의로 4가지를 말했다. 첫째, 성적인 매혹Sexual Attraction이 없다. 둘째, ‘지속적인 성 충동의 결핍’이다. 셋째, 성적 파트너와 배타적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넷째, 자신이 성행위의 주체라는 관념이 없다. 즉 무성애자는 성적 이끌림의 관계에서 주체적인 측면이 상실되어 있다. 달리 말해 ‘나는 누구에게 성적으로 이끌린다.’라는 문장에서 주체이자 주어인 ‘나’가 없다. 이처럼 무성애는 ‘없다.’라는 것이 특징이다. 무성애자에 대한 다양한 정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 이끌림과 성적 매혹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성애에 관한 최소 정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성애, 그거 뭐 간단하군.’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무성애를 정의하는 것이 생각만큼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을 동성애자라고 정의하면 정말 간단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와 흡사하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종종 일어나는 성폭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어쩌다가 남성과 성행위(특히 군대는 성욕을 해소할 곳이 없으므로)를 했지만, 자신은 결코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동성애를 혐오하기까지 한다. 어떤 남성은 결혼을 했으며 자녀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가끔씩 남성과 성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을 동성애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반면 여성과 섹스를 하면서도 자신의 성 정체성은 동성애라고 말하는 남성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성행위를 하느냐보다는 어떤 성적 대상에게 매혹되느냐가 더욱 중요해진다. 이처럼 성적 행위가 한 사람의 진정한 성적 욕망과 매혹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무성애자의 경우에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살면서도 자신은 불감증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도 있다.
성적 쾌락을 중심으로 말할 때 아무런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성애자라고 할 수 있을까? 무성애자는 성욕을 느끼지 못하므로 자위를 안 하지 않을까? 무성애자는 생리학적으로 성적 흥분을 느끼지 못할까? 성욕과 식욕이 비례한다면 성욕이 없는 무성애자에게 비만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술이 성적 욕망을 승화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성욕이 없는 무성애자는 예술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유머가 성적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라면 성적 긴장을 느낄 이유가 그다지 없는 무성애자는 유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혹은 영화 《셰임Shame》의 주인공처럼 원나잇을 하고, 자위를 하고, 포르노도 보며 다양한 성적 활동을 하지만, 자신의 성행위와 감정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마치 방관자처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은 무성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성애가 ‘사람’에게 성적인 매혹을 느끼지 않더라도 ‘사물’에 성애를 느낄 수는 없는 것일까? 어린 시절 성적인 접촉에 노출되거나 학습할 기회가 없었다면 성에 대해 무지해서 무성애자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성폭력과 같은 트라우마가 성을 기피하게 만들었을까? 저학력에다 빈곤층이어서 성적으로 사회화될 기회가 적은 제3세계에서 무성애자가 많이 발견되었을까?
무성애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무성애의 정의에서 성적 행위보다 성적 매혹의 대상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야말로 무성애에 관한 최소한의 정의일 따름이다. 이처럼 무성애에 관한 논의는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21세기에 이른 지금 우리는 어디를 둘러봐도 섹스 담론이 온통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성 충동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저자가 언급했다시피 타이거 우즈의 섹스 스캔들이 터졌을 때 전 세계는 13분 동안이나 멈춰 있었다고 한다. 월 스트리트의 증권 거래소 직원들이 우즈의 기자 회견 장면을 보려고 일시에 일손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사람들은 ‘나’와 ‘남’의 섹스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는 정력제라고 하면 거머리, 지렁이, 하다못해 바퀴벌레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코뿔소의 뿔이 정력제라고 하여 코뿔소가 멸종 단계에 이르기도 했다.
이처럼 성욕 과다 사회에서 성욕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장애자로 취급받는다. 이 말은 무성애는 장애이고 치료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진화 생물학에서 말하다시피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유전자의 전달을 거부하는 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들의 존재는 진화론자들에게는 난해한 숙제인 셈이다.
무성애자는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진화 생물학적인 관점에 도전하는 자들이다. 동성애, 무성애자들은 적어도 유성 생식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성애를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지구 상에서 자연적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전 세계, 어떤 문화에서든지 동성애, 무성애자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모계를 통해 유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동성애 인구가 7~8%라면 무성애자는 대략 1%로 추정한다.
동성애, 양성애에다 무성애까지 있다고 한다면, 이성애‘만’이 과연 자연스러운 질서일까? 자연의 왕국인 동물의 세계는 어떨까? 양들의 실험을 통해서 본다면, 양들에게도 이성애, 양성애, 동성애, 무성애가 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흔히 성욕이 강한 남성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짐승들도 언제나 발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성적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도 있다. 동물의 세계가 자연의 질서에 지배받는다고 본다면 이성애‘만’이 자연의 질서라는 것은 허구인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그렇다고 무성애자가 낭만적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육체적 관계가 배제된 소위 ‘플라토닉 러브’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이 있다. 그런 낭만적인 감정 또한 성적 매혹을 느끼는 대상에 따라서 한없이 복잡하게 분류된다. 사람에서부터 사물에 이르기까지 성적 욕망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은 그야말로 무한하다. 그렇다면 과연 무성애라는 범주가 제대로 정의될 수가 있을까.
무성애가 주는 긍정적 측면은 다양하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과 섹스가 얼마나 광기를 유발하는지 말이다. 반면 무성애 상태야말로 지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상태다. 잠시 동안이나마 고요한 무성애 상태를 경험해 본 자들은 그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수한 종교들이 왜 그토록 금욕을 장려했겠는가? 사제들에게 결혼을 금한 것은 금욕을 위해서였다. 성욕이 없는 상태를 정화의 순간이며 맑은 영혼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칭송했다면 무성애야말로 가장 칭송받아야 하는 상태이지 않을까? 그런데도 왜 무성애는 질병으로 취급될까
무성애가 인구의 1%라는 극소수이기 때문에 비정상적일까? 통계상 희귀하다는 것만으로 그 자체가 병리적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던 천재 수학자폴 에르디쉬는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희귀한 천재다. 그렇다면 그는 병리적인 상태일까? 음악, 예술 분야에서 천재적인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라. 한 사회에서 소수의 비율을 차지한다는 이유로 그런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차별하며 비인간적인 취급을 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짓이다.
신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부각되었던 게이 혹은 레즈비언의 동성애 운동과 퀴어 운동은 무성애와 서로 연대할 수 있는가? ‘퀴어 이론’에서 보여 주다시피 동성애자는 자신을 퀴어로 보는 것에 저항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오랫동안 투쟁해서 얻어 낸 것을 다른 집단에 넘겨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사회적 낙인, 사회적 수치를 자긍심으로 바꾸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고, 힘들게 싸워 얻어 낸 결과물에 다른 집단이 무임승차하도록 결코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성애는 이미 주류 문화에 어느 정도 편입된 반면 무성애는 아직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
현재 ‘우리’는 성 정체성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가 아니라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말은 자아에 대한 근본적 질문, 즉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과 성 정체성이 곧장 연결된다는 뜻이다. 성적인 커밍아웃은 단지 사회적 금기를 해체하려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일까’라는 근원적 질문과 직결되어 있다. 이런 운동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유령이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이 인정해 주길 바란다.’라는 것이 시위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적 수치이자 얼룩이 아닌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고,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가지고 싶은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소망이다. 또한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갖는다는 것과 자신의 정체성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공적인 언어를 갖는 것은 곧 공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성애를 제4의 성애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은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지구는 넘쳐 나는 인구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다 성욕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무성애를 일종의 질병이자 정신병으로 간주하는 것은 에이븐 회원들의 주장처럼 과도한 편견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동성애, 전과, 학력, 인종 등과 관련한 포괄적 차별 금지 법안을 입법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번 포괄적 차별 금지법은 차별을 금지하는 기존의 법들보다 적용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이는 성별과 장애 유무는 물론 병력, 나이, 언어, 전과 경력, 출신 국가, 인종, 피부색, 출신지, 신체 조건, 혼인 여부, 종교, 사상, 학력,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차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안은 국회에 상정되기도 전에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의 격렬한 반대로 철회되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사회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이 가장 큰 반대 요인이었다.
우리는 글로벌 시대를 외치지만 글로벌한 의식을 갖기에는 아직 멀었다. 이런 사회에서 무성애가 비가시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다면 물론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적 소수자들은 다수자들의 그늘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자긍심을 갖기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의 작품보다 커밍아웃한 동성애 감독으로 더 잘 알려진 김조광수는 동성 연인과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접촉 가설에서 주장하는 내용처럼 무성애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과 보다 많이 접촉하게 될 때, 그들만의 괴물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괴물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괴물과 만나게 될 때, 우리 혹은 그들이라는 엄격한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로 인해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폭이 넓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희망과 소망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성애자들이 성 정체성을 누릴 수 있는 공간 또한 조만간 열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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