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만에 켠 보일러
2011년 1월 6일
바로 그날이다. 우리 모두가 두려워했던 그 순간. 2011년 1월 6일 새벽 3시 10분.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린다. 이윽고 숨죽인 발자국 소리가 텅 빈 크레인을 깨운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둡다. 작은 손전등 불빛이 안을 비춘다. 직각의 계단이 드러난다. 한 발 한 발 녹슨 계단에 발을 올린다. 그만큼 지상과 멀어져간다. 두려워할 틈도 없다. 동트기 전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마지막 난간에 손을 뻗었을 때 뒷골이 서늘했다. 2003년 그날, 바로 그곳이다. 김주익의 모습이 김진숙(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크레인에 오른 그날부터 김진숙은 129일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주익 씨가 마지막으로 보고 갔던 조합원이 60명이다. 2,500명의 조합원으로 투쟁을 시작해 힘든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크레인 밑에는 60명만 남았다. 2003년에는 조합원이 60명 남는 데 129일이 걸렸는데, 2011년엔 며칠이 걸릴까?’ / 김진숙
김진숙은 1982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으로 대한조선공사(지금의 한진중공업)에 입사했다. 스물한 살이었다. 돈 벌어서 대학 가는 게 소원이었다던 그의 눈앞에 펼쳐진 당시 조선소의 삶은 무척이나 비참했다. 머리가 깨져 바닥에 라면 면발 같은 뇌수가 흩어졌고, 용접 슬래그에 뺨이 움푹 파였다. 눈알에 용접불똥이 튀는 건 예사였다.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주저함 없이 “안 죽고 일하는 게 소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5년만 바짝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서 금의환향하리라 믿었던 김진숙은 쉰둘의 새해를 크레인 위에서 맞았다. 새벽 겨울바람이 거세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침낭과 전기장판, 생수 한 통을 넣은 배낭을 어깨에서 내려놓은 뒤 간신히 난간을 잡고 동이 트길 기다렸다. 누구라도 봐주길 간절히 바라며.
마침내 동이 트자 조합원들이 하나 둘 모이는 걸 보며 제일 먼저 저 길 건너편 초등학교 정문 앞을 봤습니다. 그때 주익 씨는 내가 보였을까. 이곳까지 오지도 못하고 저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다 돌아가곤 하던 내가 보였을까. 그저 무력하게 쳐다보다가 돌아설 뿐인 그 사람이 낸 줄 주익 씨도 알았을까. 그때 주익 씨가 등지고 섰던 하늘은 파란색이었는데 여기 올라와 처음 본 하늘빛은 노란색이었습니다. / 김진숙
김진숙이 위태롭게 85호 크레인에 서 있을 때, 누군가 생활관에서 설핏 잠든 박태준을 깨운다.
“빨리 옷 입어. 올라가삐다.”
박태준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85호 크레인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김진숙이 있었다. 기가 막혔다. 끝내 크레인에 오르고 말았다. 조정실로 오르는 문을 열려고 잡아당겼다. 꼼짝하질 않는다. 안으로 굳게 닫혀 있다.
“김 지도님, 내려오이소!”
내려오라고, 퍼뜩 내려오라고 목이 터져라 불렀다. 하지만 김진숙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산소절단기 선을 들고 뛰어왔다. 정태훈이다. 평소 막역해 김진숙이 ‘태발이’라고 부르는 이였다. 정태훈은 조정실로 향하는 문을 절단해버리겠다며 절단기 가스 밸브를 열었다. ‘씨익’ 하며 엘피가스의 단내가 새어 나왔다. 오른손에 쥔 라이터를 켜려고 할 때였다. 정태훈의 전화가 울렸다. ‘김진숙’ 이름이 떴다.
“그냥 둬라. 계속 그러면 뛰어 내리뿐다.”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가 바닥에 맥없이 떨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은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었다. 김주익을 솥발산에 묻으며 흘렸던 눈물. 다시는 외롭게 동료를 떠나보내지 않겠다며 흘린 다짐의 눈물. 그런데 김진숙이 홀로 올랐다. 땅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걸어 잠근 채. 크레인으로 달려왔던 사내들은 섬뜩한 두려움에 휘감겼다.
85호 크레인 소식을 들은 김창훈의 아내 김현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올라갔다는데, 그것도 여자가 올라갔다는데, 저 사람이 왜 올라갔지? 나이도 있는 분이……. 내가 올라가야 되는 건데, 우리가 올라가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대신 짊어지고 올라갔다는 그것 때문에 무조건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누가 내 짐을 지고 올라가서 죽어버리면 평생 그 짐을 안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꾹 참고 끝까지 가야지……. / 김현숙
다음 날, 쉰네 살의 이용대도 크레인에 올라갔다. 20년 전 조립과에서 함께 일했던 김진숙을 홀로 둘 수 없었다. 이용대는 크레인 중간층에서 끼니마다 고구마를 올려주고, 김진숙이 잠들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매서운 바람을 피할 곳도 없지만 이용대는 ‘여기’ 있는 게 마음에 편했다. 잠긴 줄 뻔히 알면서도 조정실로 향하는 통로 문을 당겨보기도 했다. ‘이 문 너머에 주익이가 있었고, 이 잠긴 문 너머에 진숙이가 있다. 진숙이를 주익이처럼 보낼 수가 없다.’ 문 앞에 주저앉은 이용대는 이곳에서나마 김진숙의 안녕을 지켜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진숙이랑 당시 조립과에서 같이 일했지. 진숙이가 내 소속 조합원이었다고. 비록 회사에서 볼 때는 해고자 신분이지만 우리는 조합원 신분을 가지고 항상 대화를 하거든. 조합원이 크레인에 올라갔는데 대의원이 모른 척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바로 따라 올라갔지. 회사에서 카메라로 댕겨 찍더니 전화가 오는 기라. ‘이용대 씨 내려오라’ 이거라. ‘왜 거기 올라갔느냐’고. 내려오라 이거라. 당신한테 분명히 안 좋을 게 올 거니까 내려오라대. 그런데 내려갈 수가 없잖아. 어떻게 내려가. 그리고 8일 뒤에 해고통보 받았지 뭐. / 이용대
그날 저녁, 정문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김진숙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김진숙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내들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지난해(2010년) 2월 26일. 구조조정을 중단하기로 합의한 이후 한진에선 3,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잘렸고, 설계실이 폐쇄됐고, 울산공장이 폐쇄됐고, 다대포도 곧 그럴 것이고,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제휴직당했습니다. 명퇴 압박에 시달리던 박범수, 손규열 두 분이 같은 사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400명을 또 자르겠답니다. 하청까지 1,000명이 넘게 잘리겠지요. 흑자기업 한진중공업에서 채 1년도 안 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그 파리 목숨들을 안주 삼아 회장님과 아드님은 정리해고 발표 다음 날 배당금 176억으로 질펀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 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 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스물한 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 하고, 부산 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두 살이 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가장 큰 고비가 남았네요.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면의 밤들. 이렇게 조합원들 잘려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 조합원들의 운명이 뻔한데 앉아서 당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진 조합원들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서 우리 조합원들 지킬 겁니다. 쌍용차는 옥쇄파업 때문에 분열된 게 아니라 명단이 발표되고 난 이후 산 자, 죽은 자로 갈라져 투쟁이 힘들어진 겁니다.
지난 일요일.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습니다. 양말을 신고도 발이 시렸는데 바닥이 참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을 두고 나서는 일도 이리 막막하고 아까운데 주익 씨는, 재규형은 얼마나 밟히는 것도 많고 아까운 것도 많았을까요. 목이 메게 부르고 또 불러보는 조합원 동지 여러분! / 김진숙
‘동지’라는 두 글자가 크레인 주위를 한참을 맴돌다 사라졌다.
쉰둘의 김진숙은 왜 올랐을까? 그것도 85호 크레인에, 땅으로 내려가는 길을 스스로 봉쇄한 채 말이다. 약속이 아닐까. 2003년 이후로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켜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김진숙은 매일 밤을 김주익과 손가락을 걸며 지새웠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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