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건축가
흔히 잡초를 일컬어 ‘제자리를 벗어나 자라는 왼갖 식물’이라고 규정한다. 잡초란 인간의 이해관계로 보아 부정적인 가치를 지니는, 즉 원하지 않는 식물로도 정의한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식물이 자라는 때와 장소의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는가?
씨앗이 여물어 가는 밀밭에 떨어지는 겨자씨는 제자리를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어린 사탕무 밭에 푸른 마법 융단을 깔아놓은 듯 쑥쑥 자란 잡초도 제자리를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땅의 생산력을 유지시키고 있다면, 그 식물은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백해무익하게 보이는 잡초들, 덩굴옻나무와 가납새꽃, 새삼류 등은 모두 특정한 상황에서만 해가 된다. 비름과 같은 것은 너무 빽빽이 자라서 제 자신과 함께 농작물의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볼 때, 야생식물은 땅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농작물에도 유익하다.
이런 사례의 하나로 비름은 오히려 감자 사이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시켜서 감자 뿌리가 튼튼히 자라게 한다. 또한 토마토 밭이나 양파 밭 혹은 옥수수 밭에서 산발적으로 자라는 털비름과 흰명아주 그리고 방가지똥도 마찬가지다. 모든 경우에 잡초는 농작물에게 골칫덩이라기보다는 보호식물로서의 역할을 한다.
동남아시아에는 밭두렁을 따라 자라고, 점차 밭 안으로 뻗어나가다가 결국 밭두렁을 뒤덮고 마는 야생식물이 있다. 어떤 야생식물이라도 번식력만큼은 그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말레이인들은 이 식물의 연한 꼬투리를 맛있게 먹으면서도 이 야생식물이 유해한 잡초라고 고집스럽게 말한다. 그들은 논이나 야채밭 근처에 이 잡초가 얼씬도 못하게 막기 위하여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말레이 반도에서 자라는 이 잡초는 미국산 동부cowpea의 선조식물이다. 말레이 원주민들에게 듣기로는 이 잡초가 자라는 곳에서는 항상 최고의 농작물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생각 속에서는 이 야생식물이 한낱 잡초일 뿐이었다.
자연은 가끔 사람들에게 야생식물의 긍정적인 가치를 깨닫게 하기도 한다. 식민의 시대 이전에 한 탐험대가 아마존 강을 따라 오랜 기간 항해한 후에 시간을 몇 주 단축시킬 요량으로 육로를 이용하여 목적지까지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
나 규모가 작은 탐험대는 밀림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여러 날을 헤매던 어느 날 탐험대는 우연히 끝도 안 보이게 자란 넝쿨식물을 발견하였다. 그 식물에는 아주 탐스러운 열매로 채워진 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탐험대는 열매를 먹고 싶었지만, 밀림에서 함부로 따서 먹으면 안 되는 주의사항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몹시 배가 고팠다. 고심 끝에 그들은 제비뽑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열매를 먹어볼 희생자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가장 널리 애용하는 콩이 발견되었다.(흔히 부르는 콩은 콩, 팥, 땅콩 따위의 동양중심 작물과 녹두, 강낭콩, 동부, 완두 따위의 남미, 아프리카, 유럽 중심의 것이 있으며, 이 글에서는 후자를 의미한다.) 콩은 현재 세계 각지에서 주요한 식품일 뿐만 아니라 자라는 곳마다 땅을 기름지게 개선해주고 있다.
나는 식물이 거의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한 남부 중국의 한 산중턱에서 야생 초본식물을 채집하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를 기억한다. 그녀는 작은 밭을 비옥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보잘 것 없는 잡초를 찾기 위하여 바위를 오르고 가파른 언덕을 따라 돌아다녔다. 길 안내인의 말에 의하며 이 아주머니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잡초를 찾고 있는데 그도 잡초의 정체나 용도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머니가 밭으로 가져온 그 풀들을 살펴 보았다. 그것들은 세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엉겅퀴 종류 2~3종, 양귀비 비슷한 식물, 박주가리 그리고 대극속 식물 따위였으며, 미처 알지 못하는 식물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야생식물들이 중국 아주머니의 가난한 살림살이에 보배였다는 점이다. 잡초는 그녀의 가족을 부양하는 데 꼭 필요한 땅을 비옥하게 해주고 있었다.
독일 남쪽 바이에른의 시골마을을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한 사내가 길가에서 아직 잎이 시퍼런 풀을 자르고 있었다. 그가 쳐내고 있는 풀은 분명 길에서 쓸어 모아 똥거름과 섞일 것이었다. 그 풀들 중에는 쐐기풀, 명아주, 엉겅퀴, 아욱속, 그리고 메꽃류가 보였다. 나는 바로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내가 대학시절에 배운 형편없는 독일어 실력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여 결국은 아담한 그의 농장에까지 초대되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자기 딸을 소개해주었다.
독일 농부는 흔한 잡초들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해로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농부들이 잡초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농작물에 해가 된다고 했다. 그 독일인은 퇴비를 가장 효율적이고 간단하게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헛간이나 축사 또는 길에서 가져온 거름을 차곡차곡 쌓아 거름층을 만들고, 그 위에 잡초층을 번갈아 쌓는 방법으로 계속 거름더미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거름에 양분이 충분한 잡초를 넣어주면 실질적인 비료의 양은 눈에 띄게 많아졌다. 더구나 잡초층은 공기를 통하게 해주면 유기물 분해에 의해 발생하는 열로 거름더미가 건조해지면서 양이 줄어드는 현상을 방지해준다고 했다.
나는 이런 과정을 거친 거름더미를 살펴보았다. 외관상으로는 미국 헛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거름더미와 비슷했다. 거름더미 안쪽은 적당히 부드러웠고 잘 썩어서 질이 아주 좋았다. 나는 이 독일 농부가 로마 가톨릭교도로부터 물려받은 거름제조법을 사용한 것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몇 세기 전 유럽의 가톨릭 수사들은 카토Cato가 가르쳐준 매우 효율적인 농사기법을 알고 있었다.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잡초를 찾아다니던 때, 나는 마른 잡초더미가 밭을 가꾸는 데 있어서 실질적인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농장 아주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밭 주변에 빽빽이 자란 잡초를 베어다 쌓아서 잡초더미가 쌓여 있는 채소밭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는 울타리를 지나 천천히 다가가서 나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을 건넸다.
“그 풀들을 채소밭으로 옮기는 이유가 뭡니까? 그걸 옮기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아마, 그럴 거예요.”
그녀가 웃었다.
“난 생각이 좀 달라요. 채소밭에서 잡초를 태우는 것이 오히려 과학적이란 생각이 들거든요.”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흥미로워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잡초를 태운 재가 야채에 이롭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셨죠?”
“고등학교 때, 대학에 다닐 때 배운 알량한 지식으로 실험을 해보았죠. 생물학 지식을 맛본 사람이라면 식물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시험해보고 싶지요. 그렇지 않아요?”
아주머니와 나는 잡초가 무성한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 지역에서 흔한 풀인 망초, 흰명아주, 돼지풀류, 그리고 엉겅퀴가 눈에 띄었다. 나는 흙을 파서 잡초 몇 뿌리를 뽑았다. 대부분의 잡초가 튼튼한 뿌리조직을 갖고 있었다. 뿌리에 엉겨있는 부드럽고 기름진 흙을 손으로 부수어보았다.
“모든 토양학 지식을 동원해도 인간이 이런 흙을 만들 수는 없어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모든 걸 잡초가 만들어냈어요. 아주머니 야채에 좋은 재를 제공해 준 바로 그 잡초 말입니다.”
그녀는 흙을 한줌 가득히 쥐었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려 떨어뜨렸다. 그녀는 좋은 흙을 판별하는 요령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이 흙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어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다른 땅은 아직도 얼어 있는데 이곳의 흙은 봄에 일찍 따뜻해지거든요. 파종할 때 필요한 흙을 여기에서 얻을 수 있지요.”
그 말을 들으니 인디언 거주지에서 보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종종 사냥을 좋아하는 박물학자를 따라 숲과 언덕을 돌아다녔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눈보라 치는 날 사슴을 잡으려면 인가에서 얼마쯤은 떨어져 있는 잡초 밭으로 몰아야 해. 잡초 밭은 가장 추운 날에도 따뜻하거든. 사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어린 시절 그곳에서 보냈던 봄날을 회상하면서 나는 다른 곳보다 그곳의 땅이 더 따뜻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잡초가 우거진 골짜기의 흙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내가 고른 잡초 밭에는 주로 단풍잎돼지풀이나 망초가 자라고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흔한 1년생 돼지풀이나 엉겅퀴, 그리고 박하가 눈에 띄었다. 아직 어릴 뿐 아니라 지질학을 배운 적이 없는 나는 어머니 같은 자연이 특별히 잡초를 사랑해서 땅속 깊이 있던 열을 보내주거나 사슴을 비롯한 다른 야생동물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 골짜기의 흙을 점점 깊이 연구할수록, 나는 바로 망초 그 자신들이 흙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추운 날 사슴이 잡초 골짜기에 몸을 맡기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런 골짜기의 흙은 대부분 썩는 단계의 다양한 식물로 구성된 이상적인 유기질 토양이었던 것이다. 잡초를 부식토로 바꾸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는 박테리아는 매우 활동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잡초 골짜기 같은 최적의 조건에서 끊임없이 많은 열을 만들어낸다. 열은 바로 식물들이 썩을 때 나온다. 그 아주머니는 잡초 밭에서 이 열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야채밭에서 잡초를 태운 재를 통해 또 다른 지혜를 발견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잡초는 강건한 뿌리조직을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더 많은 무기물을 얻기 위해 더 낮은 토양층으로 뿌리를 뻗는다. 식물에게 필요한 무기물은 항상 아래쪽에서 풍부하기 때문이다. 대식가의 특성을 지닌 존재로서 굉장히 많은 무기물을 흡수한 잡초의 뿌리는 그것을 줄기나 잎으로 보내 저장한다. 잡초를 채소밭에서 태우면 재가 된 무기물은 그곳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데, 한창 자라나는 채소는 그것을 쉽게 흡수할 수 있게 된다. 이러저러한 행태로 살면서 잡초는 토양의 충실한 파수꾼이 된다. 농부가 잡초를 지혜롭게 이용할 때 결과적으로 잡초는 농부의 친구가 된다.
어린 시절 내게 잡초는 오랜 적이었다. 그 시절 나는 잡초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벼과 식물은 땅속 깊은 곳에서 영양분을 찾는데,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쌍떡잎식물과 같은 방식으로 토양을 개선시키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두해살이식물과 여러해살이식물 중에도 토양을 개선시키는 종이 있기는 하지만, 토양을 개선시키는 잡초는 대개 한해살이식물이다.
털비름과 명아주의 한두 계통들은 들이나 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부분 이 계통의 잡초들은 함께 자라는 농작물에 유익하다. 까마중류, 꽈리속 그리고 즙이 많은 쇠비름류도 마찬가지다. 도꼬마리류와 쐐기풀속 식물 같은 유독성 야생초도 뿌리를 내리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는 조건에서는 토양을 개선시킨다. 미역취류도 마찬가지다. 매혹적인 이 야생초는 자갈이 많은 땅이나 푸석푸석한 모래땅을 실로 엮듯 올지게 한다. 물이 토양이 씻겨 내는 경사지에서 다른 포복성 풀들과 함께 잘 견디는 쇠비름은 땅을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데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미국에서 토양을 개선시키는 야생초 중에 돼지풀류, 특히 한해살이 돼지풀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어떤 토양에도 현실적으로 잘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망초라고 잘못 불리는 단풍잎돼지풀도 가치가 있으나, 서식지가 한해살이 돼지풀보다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해바라기(뚱딴지 또는 돼지감자)류, 박주가리류, 두세 종의 엉겅퀴, 한해살이 야생나팔꽃, 쐐기풀류, 한해살이 마디풀속 식물이나 야생상치(고들빼기), 그리고 전동싸리를 포함한 많은 야생 콩과 식물도 마찬가지다. 콩과 식물은 모든 야생초 중에서 최고이다. 땅 깊은 곳에서 영양분을 찾아 흡수하는 뿌리조직을 가진 이러한 식물은 보호식물로서의 모성母性 잡초나 윤작시 청초풀거름(퇴비를 부숙시키지 않고 직접 푸른 생존 상태로 사용하는 청초풀거름)으로 쓰일 수 있다. 이 모든 잡초가 토양의 건축가인 셈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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