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초 庚桑楚
간섭에서 벗어나 마음의 매듭을 풀다
잡편 중의 ‘ 잡雜’ 자는 반드시 폄하의 뜻을 내포하는 것만은 아니다 . 후세 사람들이 장자의 이름에 기탁했건 안 했건 간에 『장자 』 속에 끼여 지금까지 전해올 수 있게 된 것은 시운에 빌붙고 지극한 정으로 고준담론을 했기 때문이다 . 본 장은 세상 물정에 대한 , 개인적인 잡념에 대한 , 마음속의 악마와 마음속의 매듭에 대한 묘사가 독창적이다 . 스스로 똑똑한 척하거나 다정한 척하기 싫어하고 , 남을 위해 일시적인 시비 판단으로 순절한다거나 , 명목상으로는 상반되지만 실제로는 서로 순응한다든가 , 벌레는 벌레가 되고 , 하늘이 될 수 있지만 사람은 반드시 완전한 사람이 된다고는 할 수 없다든가 , 천하를 새장으로 삼기 때문에 참새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등의 내용은 독자들이 읽다가 책상을 치며 감탄해 마지않는 신선한 표현들이다 .『장자 』를 읽으면 지혜가 늘어나고 , 마음이 편안해지고 , 기가 다스려지고 , 정신이 들며 눈이 즐겁다 . 마치 높은 산에 오른 듯 , 수많은 봉우리를 보듯 , 푸른 망망대해를 어루만지듯 , 맑은 바람에 목욕을 하는 듯하다 . 멋진 장주莊周! 정말 장자에 걸맞은 글이다 .
똑똑한척 , 다정한척하지마라
老聃之役有庚桑楚者, 偏得老聃之道, 以北居畏壘之山, 其臣之畫然知者去之, 其妾之挈然仁者遠之; 擁腫之與居, 鞅掌之爲使. 居三年, 畏壘大穰. 畏壘之民相與言曰: “庚桑子之始來, 吾灑然異之. 今吾日計之而不足, 歲計之而有餘. 庶幾其聖人乎! 子胡不相與屍而祝之, 社而稷之乎?”
노자의 제자 중에 경상초라는 사람이 있었다 . 노자의 도道를 깊이 깨달은 그는 외루산畏壘山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이것이 곧 도를 깨달으면 은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 사람을 숨어 살게 만드는 것 , 그것이 바로 도의 힘이다 . 하인 중에도 무슨 일을 하든 확실하게 해내는 부류가 있다 . 이들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천한 사람의 지혜다 ). 이처럼 무슨 일에든 능한 사람을 경상초는 집에서 내보냈다 . 또 시녀와 시첩 중에는 항상 제 잘난 듯 인仁이니 의義니 하며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다 ( 아녀자의 인이다 ). 경상초는 이러한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었다 . 결국 다소 우둔하지만 듬직한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그중에는 힘들어도 그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상초가 외루산에서 기거하는 3년 동안 그곳의 수확이 풍성해졌다. 외루산 주민들은 말했다 .
“경상초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놀랐지 뭔가, 다른 세계 사람인가 싶었지!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말이야, 그가 이곳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하루하루 따져보면 크게 드러나는 것이 없어. 그가 대단한 힘을 발휘했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1년을 두고 전체적으로 따져보니 그가 일으킨 변화나 힘이 상당했다는 걸 알게 됐지! 이런 사람은 성인이나 다름없어! 우리는 왜 그를 이 지역 왕으로 받들어 모시지 않는단 말인가?”
재미있는 점은 이 위대한 경상초는 어딜 가든 좋은 기운을 몰고 다니는 풍운아라는 것이다. 경상초는 두 부류의 사람을 싫어했다. 하나는 지나치게 사리에 밝은 사람, 즉 스스로 영리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인의도덕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 다시 말해 찔끔거리기 좋아하며 괜히 마음 아픈 척, 다정한 척하는 인간이다. 왜일까? 전자는 일을 하기엔 뭔가 부족할뿐더러 빈 수레만 요란하고 괜히 일만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후자는 진부하고 겉만 번지르르하며 거짓된 인의를 설파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이들은 모두 시치미를 떼고, 천박하며, 말이 많아 사람을 성가시게 한다. 공연히 트집잡기를 좋아하며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는 점도 재미있다고 할 만하다.
이와 비교했을 때 경상초 선생은 우둔하고 굼뜬 사람, 힘들게 일하는 자들과 어울리기를 원했다. 똑똑한듯하지만 어리석고, 어진 듯하지만 어질지 않으며, 똑똑한 척하고 인의를 외치는 사람보다 많이 생각하지도 않고 마음을 쓰지도 않는 사람과 잘 지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자는 일찍이 야무진 사람보다는 모자란 사람을, 성격이 무른 사람보다는 칼 같은 사람을, 다정한 사람보다는 다소 냉정한 사람을, 대단한 군자 한 명보다는 모자란 소인小人 열 명을 고용한다는 원칙을 인정했다. 아니, 그렇다면 뭔가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자생존과 배치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적어도 ‘거짓된 우수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열등한 것’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인류가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과거 몇십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조사 대상자들은 무엇이든 이해하는 사람, 분명하게 판단하는 사람,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 걸핏하면 인의 도덕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경상초의 견해를 지지했다. 많이 아는 사람보다는 다소 어리숙한 사람을, 두루 선을 베푸는 사람보다는 자신만을 위하는 소인을,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보다는 남의 지시에 따르는 사람을 선호한 것이다. 오호라! 편협한 주인들이여, 당신들이 이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찌 진정한 인재가 나올 수 있겠는가?
다정한 척하는 만 명 중에서 명철하고 진정으로 덕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사람들을 신물 나게 만드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루로 계산하면 부족하고 1년으로 계산하면 남는다는 말이 이곳의 국민 소득 상황을 설명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딘가 의심스럽다. 이 시점에서 국민소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갑작스럽다. 아마도 경상초 선생에 대한 평가로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말은 바른말이지,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상초의 업적과 장점은 눈에 띄지 않을뿐더러 때로 부족한 점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중화 문화가 중시하는 것은 전체이고 모호한 숫자들이다.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모두 그저 그럴뿐 누군들 얼마나 다르겠는가? 하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그것은 아마 설사 구체적인 덕행, 공적, 저서가 없어도 수준이 높고, 기상이 드높으며, 경위가 분명하고, 포부가 크면 자신의 주변 넓은 영역까지 좋은 영향을 끼쳐 수확을 풍성하게 하고 생활을 여유롭게 해서 장수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庚桑子聞之, 南面而不釋然. 弟子異之. 庚桑子曰: “弟子何異於予? 夫春氣發而百草生, 正得秋而萬寶成. 夫春與秋, 豈無得而然哉? 天道已行矣!吾聞至人尸居環堵之室, 而百姓猖狂不知所如往. 今以畏壘之細民而竊竊焉欲俎豆予於賢人之間, 我其杓之人邪! 吾是以不釋於老聃之言.”
경상초는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매우 언짢았다. 제자들이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자 경상초가 말했다.
“뭐가 그리 이상하단 말이냐? 봄에는 햇볕의 따뜻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갖가지 초목이 움트고, 가을이 되면 모든 과일과 곡식들이 한껏 여문다. 봄이든 가을이든 어떤 근거도 없고, 계시를 받은 것도, 누가 손을 대어서 된 것이 아니잖느냐? 이는 봄과 가을이 자신이 원하고 행해서가 아니라 그저 천도天道(자연의 도)가 거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듣기로 도성道性과 도행道行이 경지에 오른 지인至人은 작은 집에서 조용히 성실하게 살아가도, 백성들은 제멋대로 유유자적하며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 외루산 사람들이 모두 수군거리며 나를 치켜세우고 떠받들려 하고 있으니, 이는 내가 무언가 잘못하였거나 부자연스러운 역할을 한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어찌 이렇듯 자신을 과시하며 풍운아나 신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라겠느냐! 이것이야말로 나의 스승님이신 노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단락의 논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듯싶다. 하늘의 도天道, 자연의 도는 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근원이지만 개인의 의도적인 행위와 덕행은 그 역할이 매우 제한적인 것이다. 봄에 초목이 움트고 가을에 과일이 여무는 것이 계절에 따라 그리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라고 하는 이 말은 억지스러운 감이 있다. 사계절의 변화는 당연히 하늘의 도이기 때문이다. 지인至人은 지인됨을 행하고, 백성은 백성됨을 행한다는 이런 관점은 오히려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누구에 비해 덕이 높단 말인가? 높다 해도 그것은 본인의 일이다. 또 누가 누구에 비해 무지하다는 것인가? 무지한 것 역시 무지한 자의 권리다. 스스로 덕이 높다고 여기는 사람은 지인至人, 성인聖人, VIP이며, 이상주의적이고 이타주의적인 사람으로 민중의 생활 방향을 바꾸고 디자인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필연성도 없다. 이러한 설은 일찍이 장주莊周의 책에 쓰여 있으니 충분히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참고로 원문의 “백성들은 제멋대로 유유자적하며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百姓猖狂不知所如往”에서 ‘창광猖狂’은 자유를 의미하는데, 자유로우면 ‘창광’해진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부지소여왕不知所如往’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백성들이 일정한 방향이나 목표없이 자발적으로 다양한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백성들이 지인至人의 향하는 바를 모르고, 또 위대한 지인들의 목표와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이들의 위대함에 방해를 준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지기소여왕知其所如往’ 역시 매우 흥미로운 뜻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즐겨 보는 인터넷 동영상 중 미국의 유대계 가수 겸 연기자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의 영화 삽입곡 「추억The way we were」이 있다. 언젠가 한 번은 그녀가 무대에 올라와 노래를 부르기 전에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어요 (You don’t know where are you going, until you have been)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중국 속담에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라는 말이 있는데, 스트라이샌드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가보기 전에는 누구도 모른다”. 이 말은 『장자』의 정서와 소크라테스의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지인至人은 작은 집에서 조용히 성실하게 살아간다至人尸居環堵之室”는 중화 문화에서 강조하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제갈량諸葛亮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해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는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숨어 지냈는지를 먼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지인은 역사, 사회, 정치, 권력 등과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 이러한 은닉의 문화 전통은 아마도 당시 사회 조건의 열악함, 지식인이 갖는 선택지의 단순화(다양한 선택 가능의 결핍)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弟子曰: “不然. 夫尋常之溝, 巨魚無所還其體, 而鯢鰌爲之制; 步仞之丘陵, 巨獸無所隱其軀, 而狐爲之祥. 且夫尊賢授能, 先善與利, 自古堯舜以然, 而況畏壘之民乎! 夫子亦聽矣!”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큰 물고기는 일반 물구덩이에서 몸을 돌리기 어렵지만 미꾸라지나 작은 물고기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큰 맹수는 작고 낮은 언덕에서 몸을 숨길 수 없으나 여우는 적당한 곳을 찾아 숨을 수 있습니다. 일찍이 요순堯舜시대부터 어진 이를 존경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선한 사람을 추앙하고 그에 합당한 녹봉을 주느라 고심했는데 외루산 일대의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스승님께서는 부디 모두의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작은 물고기와 작은 짐승의 민첩성과 적응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설마 경상초에게 미꾸라지나 여우를 닮으라고 하는 뜻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다. 지나치게 잘난 척하지 말고, 좀 더 부드러움과 적응력, 민첩성과 편의성을 갖춰 너무 아둔하고 고되게 생활하지 않았으면 하는 뜻으로 스승님께 올리는 권고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庚桑子曰: “小子來! 夫函車之獸, 介而離山, 則不免於網罟之患; 呑舟之魚, 碭而失水, 則螻蟻能苦之. 故鳥獸不厭高,魚鱉不厭深. 夫全其形生之人, 藏其身也, 不厭深. 而已矣. 且夫二子者, 又何足以稱揚哉! 是其於辯也, 將妄鑿垣牆而殖蓬蒿也. 簡髮而櫛, 數米而炊, 竊竊乎又何足以濟世哉! 擧賢則民相軋, 任知則民相盜. 之數物者, 不足以厚民. 民之於利甚勤, 子有殺父, 臣有殺君, 正晝爲盜, 日中穴阫. 吾語汝, 大亂之本, 必生於堯舜之間, 其末存乎千世之後. 千世之後, 其必有人與人相食者也!”
경상초가 이에 말하였다.
“자네, 이리 와보게. 마차를 한입에 삼킬 만큼 큰 맹수도 산림을 떠난다면 결코 사냥꾼의 그물에 걸릴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요, 배를 삼킬 만큼 큰 물고기도 파도에 밀려 물을 벗어난다면 작은 개미 때문에 궁지에 빠져 큰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와 맹수는 산이 높다 해서 꺼리지 아니하고, 물고기와 자라는 물이 깊다고 꺼리지 않는다. 자신의 형체와 본성을 잘 보호하는 사람이 자신의 몸을 숨기기에 능한데 어찌 산이 높고, 물이 깊다고 싫다 하겠는가?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두 임금에게 어찌 찬양하고 드날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보겠는가? 요와 순 두임금은 온갖 잔꾀를 부려 세상의 선과 악,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구별했으니 그야말로 제멋대로 벽을 부수고 그곳에 쑥갓이나 잡초 따위를 심는 격이다. 또 머리카락 한 올씩 잡아 빗질하거나 쌀알을 세어 밥을 짓는 격이 아닐 수 없다. 눈곱만 한 일에 있는 대로 따지고 잔소리하는 것이 어찌 세상의 이치와 정치에 합당하겠는가! 현명한 인재를 등용한다면서 사람들 간의 경쟁을 유발시키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상해와 손상을 입힐 것이다. 지혜 있는 자를 믿고 자리를 맡기는 방법은 백성들이 서로 심술부리고 계략을 쓰게 만들어 거짓과 사기 행각을 빚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일 처리 방식은 결코 백성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없다. 사람은 사리私利와 관련된 일이라면 본래 관심이 많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리를 위해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가 하면 한낮에 강도질을 하거나, 대낮에 다른 사람의 집 벽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 내 자네에게 말하건대 천하대란의 싹은 이미 요순시대부터 비롯되었고, 그 결과와 영향이 독으로 남아 천 년이 지난 후에도 흘러넘치고 있다. 천 년 후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광경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깊숙이 숨지 않으면 생명조차 보존하기 어려우므로 반드시 깊숙이 잘 숨어야 한다는 도리를 재차 말하고 있다. 그런 후에 현명한 인재 등용과 지혜 있는 자의 임용을 비롯해 가치와 규범을 확립하는 위험성이 천 년 후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인간의 이론이 체계화될수록,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단호할수록, 규범이 명확해질수록, 신념이 강렬해질수록 자신과 다른 사람의 투쟁도 참혹해지기 마련이다.
루쉰魯迅은 과거 중국의 문화 본질이 식인食人 문화라며 맹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장자』에서 언급한 ‘식인’설은 중국의 옛 서적 중에서도 비교적 일찍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면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의 인위적인 추구, 규범, 가치 인식은 나쁜 결과를, 그것도 아주 나쁜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꿔 생각해보자. 그 어떤 추구와 규범, 가치관도 없다면 이보다 더 나았을까? 아니면 더 나빴을까? 예를 들어 아주 낙후된 지역이 있다면 그 사회는 비록 과도한 경쟁이나 의견 충돌은 없겠지만, 반면에 엄청난 미신, 어리석음, 낡은 풍습은 아주 많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하백이 해마다 한 번씩 처자와 결혼해야 강물의 범람을 막을 수 있다는 ‘하백취부河伯取婦’ 이야기라든가, 사람을 죽여 하늘에 제사를 드린다는 이야기나, 산 사람을 그대로 순장한다는 이야기로 인해 여자, 어린이, 노인을 학대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그런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이런 삶을 그대로 수긍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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