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냉전 시대, 군사 대국화와 총보수화를 넘어
거품 경제가 꺼지다
1973년, 중동 전쟁의 발발과 함께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가격을 일제히 인상했다. 석유 파동oil shock이 발생하자 석유를 전량 수입하던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 경제가 악화되면서 55년 체제 이후 20여 년간 지속돼 온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은 막을 내렸다. 오일 쇼크로 인해 생산 비용이 증가하자 기업들은 정부에 세금 감면을 요구하는 한편, 몸집을 줄이기 위한 경영 합리화, 자동화라는 명분 아래 임금 삭감을 시도했다. 경제 위기를 틈타 노동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이 후퇴하는 듯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 회복력은 놀라웠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경제 성장이 주춤하자, 중화학 공업 중 부가 가치가 낮고 공해가 많이 발생하는 철강, 화학 분야를 한국 등 다른 지역으로 옳기고 기술 집약적 첨단 산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고도화함으로써 1970년대 말에는 불황을 극복하고 완만하고 안정적인 성장 추세를 회복했다. 소니의 전자 제품, 도요타와 닛산의 자동차, 캐논과 니콘의 카메라는 전 세계를 장악하며 승승장구했다.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휴대용 음향 기기 ‘워크맨’이 탄생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80년대 말경에 이르러 일본 경제는 세계 1위인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절정에 이르렀다. 선진공업국을 따라잡기 위해 달려온‘주식회사 일본’은 어느덧 선두의 자리에 올라섰고, 이제 다른 나라들을 견인하고 선도하는 위치가 됐다.
그러나 일본은 선도자로서의 청사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방향을 잃은 일본은 ‘재財테크’에 몰두했다. 1980년대 중반, 재정과 무역 부문에서 심각한 적자로 고생하던 미국은 달러에 대한 엔화 가치를 올릴 것을 일본에 강력히 요구했다.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했고, 그 결과 일본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해외 시장에서 일본의 경쟁력이 약해졌다. 일본 정부는 경기 침체를 막고 어려움을 겪는 수출 기업에 도움을 주고자 저금리 정책을 폈다. 금리가 낮아지자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고, 사람들은 쉽게 대출을 받아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 사회 전반에 투기 심리가 만연했고, 무분별한 주식 투자와 부동산 구입은 당시 일본 사회에 유행처럼 번졌다. 경제 호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투기에 나섰다. 너도나도 땅과 집을 사고, 공장을 지었다. 돈이 토지와 주식으로 흘러 들어가 땅값과 주가는 전례 없이 폭등했고 투기가 과열됐다. 기업들은 해외로까지 진출해 미국의 고층 빌딩과 회사 들을 사들였다.
세계는 이런 일본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거품은 곧 꺼졌다. 1991년에 이르러 일본의 호황은 주춤하더니 1992년 하반기에는 국민총생산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대출을 받아 샀던 땅과 주식의 가격이 연일 폭락했다. 수입이 줄어들자 소비가 줄고, 소비가 줄자 공장이 멈추고 실업자가 늘어났다. 수입이 감소하면서 다시 소비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10년 넘게 지속됐다. 경제 성장률이 10여 년간 0에 가까웠던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른다.
메이드 인 재팬의 신화는 계속된다
거품 경제가 붕괴된 이후 일본의 불황은 심각했다. 공장의 활기찬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졌고 국내 인건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많은 공장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금융 기관은 대출 정지를 선언했고 기업은 더욱 어려워졌다. 경영 합리화를 위해 무리하게 투자했던 설비와 인원을 정리하는 ‘구조 조정’이 일반화됐다. 오랫동안 일본 사회를 지탱해 온 종신 고용의 종말이었다.
하지만 아직 일본의 저력은 남아 있었다. 고난의 10년을 거치면서 기업들은 이전까지의 방식과 문화를 변화시키려 노력했고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전통적으로 강했던 제조업에다 미국이 주도해 온 신기술을 접목해 고가의 제품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디지털 가전 분야에서 ‘신3종 신기’라고 불리는 디지털 카메라, 디브이디 레코더DVR, 고화질 텔레비전 등이 등장해 소비를 되살리기 시작했다.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는 도요타를 비롯해, 카메라폰을 처음 개발한 샤프, 세계 게임 시장의 강자 소니, 세계 복사기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후지 제록스, DVD 플레이어를 개발해 가전제품 명가로서 명예 회복을 노리고 있는 파나소닉, ‘마법의 돌’이라 불리는 무선 주파수 인식칩RFID을 개발한 히타치 등은 세계 경제의 불황 속에서도‘메이드 인 재팬’의 명성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일본은 로봇 분야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역할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일본의 사이버다인 사는 인간의 신경을 통해 관절 역할을 하는 ‘입는 로봇’을 현실화했다. 일본 기업들은 기술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계 로봇 시장의 60퍼센트를 점유했다. 이에 힘입어 일본 정부는 로봇 산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적극 지원하고 있다.
군사 대국화를 지향하며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다
1980년대 미국은 군비 확충을 통해 ‘강한 미국’을 실현하려고 함으로써 소련과 새로운 냉전 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대립 지역에서 소련군을 철수하면서 긴장을 완화했다. 미소 간의 긴장 완화는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다음 해 독일이 통일됐다. 뒤이어 동유럽마저 자유화되면서 냉전은 마침표를 찍었다. 냉전의 종식은 아시아에서 반공을 발판으로 경제 성장을 해 온 일본에 새로운 역할을 요구했다.
미국은 재정 적자가 심해지자 일본에 군사비를 분담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국민 총생산 1퍼센트 이하로 제한돼 있던 일본의 방위비가 늘어나게 됐다. 나아가 미국은 일본이 적극적으로 세계 분쟁 지역에 개입할 수 있도록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지지했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역시 세계 각 지역에 투자한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군사력을 갖춘 강한 국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에 일어난 걸프 전쟁은 군사 대국화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했다. 일본은 걸프 전쟁에 130억 원의 비용을 지출했음에도 불구하고‘피와 땀을 흘리지 않은 국제 공헌에 불과하다.’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군사력 없는 경제 대국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닫게 됐다.
군사 대국화 추진의 밑바탕에는 15년 가까이 지속된 장기 불황도 자리 잡고 있었다.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평화헌법이라는 기둥도 흔들렸다. 긴 불황의 여파로 일본인은 자신감을 상실했고 일본의 미래는 매우 불안해졌다. 목표를 상실한 국민 앞에 새로운 일본의 청사진으로 제시된 군사 대국화는 일본의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국가주의를 내세운 우익 세력은 군사 대국화의 길목에서 일본을 강하게 묶을 수 있는 정체성과 명분이 절박했다. 역사 교과서 왜곡은 이러한 정체성 찾기의 일환이었다. 일본의 우익 역사 교과서에서는 전쟁 당시 일본이 저지른 범죄 행위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헌법 개정 시도 또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극우 세력은 전쟁 포기 조항을 담고 있는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군사 강국을 이뤄야 비로소 힘 있는 국가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영토 분쟁을 늘리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적으로 참배하자 국제 사회의 비난이 쏟아졌다. 야스쿠니 신사는 본래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바쿠후 군과 싸우다 죽은 이들을 ‘호국의 신’으로 기리기 위해 도쿄에 건립된 신사였다. 야스쿠니靖國란 이름에는‘나라를 평안히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현재 246만여 명의 전몰자들을 안치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쇼와 덴노가 직접 신사 참배를 하면서 군국주의의 상징이 됐다.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은 신사에 합장된 뒤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으로 국민의 추모를 받았다. 야스쿠니 신사는 덴노를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를 떠받치는 시설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은 ‘다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종전 후 미국은 야스쿠니 신사를 단순한 종교 시설로 이용하도록 했지만 전몰자 추모 기능까지 막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의 관리 밑에 두어 공식적으로 추모하자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더니 급기야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을 안치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익 세력은 ‘A급 전범은 연합국의 일방적인 규정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야스쿠니 신사는 전몰자 추모 시설의 대표 장소가 되면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됐다. 그렇지만 현행 일본 헌법은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하고 있어서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다시 신사를 공식적으로 참배했을 때 국내외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슷한 일이 영토 관련 분쟁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1996년, 일본이 센카쿠 열도에 등대를 설치하자 이곳을 댜오위다오 열도라고 부르며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던 중국이 거세게 항의하여 일본과 중국 간의 관계가 악화됐다. 2010년에 센카쿠 열도 주변에서 조업 중이던 중국인 어부가 일본에 체포되자 중국과의 관계는 더욱 얼어붙었다. 이에 중국 정부가 일본 관광을 금지하고 중요 원자재의 일본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압박하자, 일본은 즉각 어부를 석방함으로써 분쟁을 최소화했다. 일본은 일청 전쟁 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타이완과 그 주변의 센카쿠 열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으나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이를 미국에 양도했다. 그 후 1972년 미국에서 센카쿠 열도를 돌려받았으나 당시 중국과의 수교 문제로 소유권을 분명히 하지 않고 넘어가면서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2012년에는 중국 항공기가 센가쿠 열도 상공에 진입하자 일본이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며 자위대 소속 전투기를 발진시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이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주변 국가들과 자주 충돌하는 배경에는 일본 내에서 강화되고 있는 우익 세력의 팽창주의가 있다. 우익 세력은 민족과 국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명분 아래 영토 확장과 해양 자원 확보를 위해 상대국과의 충돌도 불사하고 있다.
55년 체제가 끝나고 총보수화 분위기가 만들어지다
1990년, 쇼와 덴노가 사망했다. 뒤를 이어 황태자 아키히토가 즉위하면서, 연호가 쇼와에서 헤이세이平成로 바뀌었다. 국민들은 연호처럼 일본이 평화롭기를 바랐지만 정치인들의 행동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93년, 계속되는 정치 부패,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 등으로 위기감을 느끼던 자민당 의원 일부가 탈당하여 신당을 창당했고, 총선거에서 야당이 과반수를 얻으면서 새로운 야당 연립 내각이 성립했다. 이로써 자민당 단독 정권에 의한 38년간의 장기 집권이 끝이 났다. 그러나 새로 집권한 야당 연립 내각 역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자, 이념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였던 사회당과 자민당이 연합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사회당과 자민당의 정책상 가장 큰 차이점은 일미 안보 조약과 자위대 문제에 대한 입장이었는데, 사회당이 입장을 바꾸어 이 두 조항을 합헌으로 인정했다. 오랫동안 비동맹, 비무장, 자위대 위헌을 당의 기본 방침으로 삼아 온 사회당의 일대 전환이었다. 이로써 각 정당 사이에는 정책의 본질적 차이점이 사라지고 총 보수화 현상이 나타났다.
2009년 이후 다시 야당인 민주당 연립 내각으로 정권이 넘어갔다가 2012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여 중의원 전체 480석 가운데 자민당이 과반에 해당하는 294석을 확보하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내각제 정치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요소를 품고 있다. 중의원과 참의원 양쪽을 통과한 법률안은 자동적으로 법률로서 확정되지만, 양쪽의 의견이 불일치할 경우에는 중의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자민당과 민주당 어느 쪽도 중의원에서 3분의 2를 확보하지 못하면, 중의원 다수당에서 선출되는 수상(총리대신)은 참의원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6년의 임기가 보장되는 참의원은 총리의 해산권 밖에 있기 때문이다.
위기의 터널을 빠져나오는가 싶던 일본에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은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위기에 직면한 일본이 어떻게 이를 극복해 나갈지 지금 세계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
시민운동, 일본의 보수화를 견제하다
일본 사회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교과서 문제 등으로 우경화된 듯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운동을 통해 일본 정부의 보수화 경향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에는 8,000여 개의 다양한 시민 단체가 있고, 정부나 기업과 관계없는 순수 비영리 조직도 약 60만 개에 이른다.
일본 시민운동에는 두 가지 전환점이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1960년대 안보 투쟁이었다. 안보 투쟁은 일미 신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 개입 가능성과 의회의 비민주적 태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이는 정부의 독단에 항의하는 민주화 운동이자,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 운동, 그리고 고도성장 과정에서 심각해진 환경오염을 막자는 환경 운동이기도 했다.
시민운동이 다루는 이슈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크게 바뀌었다. 공해, 재개발 문제와 같은 쟁점들이 덜 중요해졌고, 그 대신 재활용 운동, 정보 공개 운동, 자치권 확대 운동, 여성·장애인·노인·소수 민족 차별 반대 운동 등이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운동 방식 또한 개인의 참여가 더 늘어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계기는 1995년에 발생한 고베 대지진이었다. 고베 대지진은 재난 상황에서 정부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확인하는 한편, 적극적이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한 자원봉사자들의 힘을 절감한 계기였다. 시민의 활동이 단순한 자원봉사가 아니라 지역 사회 안전망의 근간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얻게 됐다. 이를 계기로 1998년부터 정부는 시민 단체 지원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시민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의 시민 단체들은 막대한 예산이 들지만 실효성이 적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감시하며, 미군 기지 문제, 원자력 발전소 문제 등을 주시하고 있다. 공항과 댐 건설, 핵 발전소와 핵 폐기장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여론을 조직하여 주민 투표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시민 단체들은 미군 기지 문제와 헌법 9조를 지키는 문제를 가지고 전국에서 집회를 열기도 하고 주변국의 시민 단체와 연대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일본의 역할
1990년대 이후 국경을 넘어선 연대의 첫걸음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부터 시작했다. 1990년 11월에 조직된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정대협)는 1992년 제1회 아시아 연대 회의를 열었다. 한국, 타이완, 타이, 필리핀, 홍콩, 일본 6개국이 참여했는데, 일본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행동 네트워크’와 ‘매매춘 문제와 싸우는 모임’이 참여했다. 이후 1998년까지 5회에 걸쳐 개최된 연대 회의를 바탕으로 2000년에는 도쿄에서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이 열렸다. 베트남 전쟁을 재판했던 러셀 법정을 모델로 삼은 이 재판에서는 쇼와 덴노를 포함한 피고인 8명 전원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1980년대부터 일본의 극우 세력이 사실을 왜곡한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동아시아의 올바른 역사 인식 및 역사 교육을 위해 시민 단체들이 연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교과서 바로잡기 운동 본부’라는 상설 연대 기구가 ‘아시아 평화와 역사 교육 연대’라는 단체로 조직됐다. 이 단체는 2002년 3월 난징에서 ‘역사 인식과 동아시아 평화 포럼’ 제1차 대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서 한중일 3국을 아우를 수 있는 교과서를 편찬하기로 뜻을 모았다. 열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회의를 이어 간 결과 2005년 5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라는 이름의 공동 교과서가 동시에 출간됐다.
동아시아에서 환경 문제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환경 단체 간의 연대도 활발해졌다. 이 과정에서 ‘한중일 동아시아 환경 시민 회의’가 조직되어 2002년 도쿄에서 ‘한국, 중국, 일본 지속가능한 동아시아로’라는 제1회 포럼을 개최했다. 제2회 포럼은 서울에서 개최했는데, 생태 공동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한국, 중국, 일본 3국은 경제 글로벌화 과정에서 공동의 과제를 안고 있다. 먼저 안전 보장 면에서 전쟁과 군사적 분쟁, 대립을 막을 수 있도록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이란 과제가 있다. 경제 면에서는 금융 위기, 시장 개척, 실업과 빈곤 해소, 에너지 자원의 절약 등에 대한 공동 대처가 필요하다. 환경 면에서는 기후 온난화, 조류 독감, 공해, 자연재해, 2011년 3월 도호쿠 대지진이 불러온 원전 문제 등에 대한 공동 대처가 필요하다. 정치적 측면에서 영토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공통적 이슈들을 중심으로 시민운동 간의 연대 활동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연대 활동들은 정부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동아시아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평화를 실현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동아시아 냉전 구조의 받침대였던 일미 동맹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이 과거사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로, 만약 이렇게 된다면 일본은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지역 협력과 통합은 단순히 다방면에서 교류가 늘어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여러 나라의 시민 사회에서 공통의 이슈에 대해 상대와 공감할 수 있는 의미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할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정부 수준에서의 정책 결정이 이러한 시민적 이해와 상생의 공감대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때에야 비로소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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