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기억의 뒤얽힘
윤여일
화제를 옮겨서 ‘감정 기억’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첫날에도 잠시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론적 올바름이 간과하는 감정이라는 요소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지적에 따르면, 좌파와 우파의 대립 구도에서는 좌파가 이론적 비판 방식을 택하는 반면, 우파는 내적 동질성을 지향하며 심정에 호소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런 구도에서 상호 충격이나 접촉의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렇다면 좌파가 이론적으로 올바른 비판을 하더라도 우파의 영향력을 감퇴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감정 기억’이라는 화두를 꺼내신 데는 이렇듯 불모한 대립 구도를 해소하려는 모색도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한 사회 내부의 정치적 대립만큼이나 한 사회와 다른 사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감정의 골을 생산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감정 기억’ 문제를 제기하셨다고 보입니다. 자칫 감정, 심경에 관한 비이론적 서사가 범할지도 모를 폐쇄성, 국수성, 배타성을 경계하여 감정을 그대로 한 집단의 것으로 추인하지 않고, 감정이 지닌 비논리성을 부정적이라고 치부하지도 않으면서 거기서 사상의 소재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 기억의 의미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아 선생님의 글을 통해 추적해보았습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의 각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 기억’은 엄밀한 심리학적 용어가 아니다. 일반론적 개념이라기보다 특히 전쟁 기억의 성질을 가리킨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개념을 사용한 적이 없지만, 그는 전쟁에 관한 기억을 논할 때 분명히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의 문제를 중시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러한 감정 기억을 직접 다루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개인의 차원에서 떼어내 사상사의 대상으로, 그리고 사상의 에너지로서 신중히 다루는 데 힘을 쏟았다.
여기서 다케우치 요시미를 언급하고 계시기에 저는 ‘감정 기억’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구하고자 다케우치 요시미가 전쟁에 대해 자신의 소회를 꺼낸 대목을 들춰보았습니다. 우선 중국에서 패전을 맞이한 경험을 8년 후에 되돌아보며 그때의 심경을 기록한 「굴욕의 사건」에서 그는 8월 15일에 “희열, 비애, 분노, 실망이 뒤섞인 기분”을 맛보았다고 말하며, “당시 심경은 오늘의 내게 아직 발로 밟아본 일 없는 황야처럼 끝없이 펼쳐진다”고 토로합니다. 한편 「근대의 초극」에서는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글을 두고 이렇게 말한 대목도 있었습니다. “전후에 일어난 전쟁책임론을 원한?증오?분노?경멸로 그 발상의 형태를 분류한다면 이것은 분노의 형태를 대표한다.” 즉 전쟁책임론의 유형을 원한?증오?분노?경멸이라는 감정의 성분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오독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정 기억의 성찰이란 이처럼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지기 쉬운, 그리하여 즉흥적인 충동의 대상이 되기 십상인 사건에서 감정의 결을 속속들이 살피고 그것을 역사의 복잡한 구도와 접목시켜 간과하고 있던 사상의 계기를 움켜쥐려는 시도인 듯합니다. 여전히 엉성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만, 좀처럼 새로운 조어를 내놓지 않는 선생님께서 감정 기억이라는 표현을 꺼내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하셨는지 이 자리를 빌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습니다.
쑨거
저는 감정 기억이라는 표현을 특정 시기, 특정 사건과 마주하였을 때 사용했습니다. 저 자신은 ‘감정 기억’이라는 표현을 그다지 일반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윤여일
선생님 책에 관한 서평을 조사하면, 특히 『아시아를 말한다는 딜레마』의 경우가 그러한데요, 여러 서평자들은 ‘감정 기억’이라는 표현을 중시했습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외견상의 정치적 대립 가운데 공백으로 남아있던 영역을 선생님께서 감정 기억을 화두로 꺼내 문제로서 부각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감정 기억’이라는 표현이 논의의 중심을 이루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습니다. 그 표현은 제게도 울림을 갖습니다. 하지만 역시 감정과 기억이 겹쳐진 표현이기에 이해하기가 어려우며 또 그만큼 중요한 문제 설정을 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쑨거
‘감정 기억’이라는 말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일본사상의 특수한 맥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은 중일전쟁을 외면하지 않고 중국인의 ‘감정 기억’과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줄곧 고민해왔습니다. ‘감정 기억’이 한 시기 화제가 된 것은 그런 맥락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 상황을 두고 제가 쓴 글도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니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겠죠.
다만 감정과 기억이 왜 묶였는가는 흥미로운 문제제기입니다. 여기에는 기억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깔려 있습니다. 기억은 감정적일까요, 이성적일까요? 그 점에 관해서는 심리학적 분석이 필요할 텐데, 제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곤란한 과제에 초점을 맞춰보죠.
사회학과 역사학에는 구술사 영역이 있습니다. 당사자가 증언하는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이때 증언을 그대로 역사의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현재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사이처럼 전쟁 기억을 둘러싸고 투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결코 추상적으로 다뤄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즉 기억 자체의 신빙성이 문제로 놓입니다. 일본의 수정주의자들은 위안부 증언의 신빙성을 깎아내리고 합니다. 그런 움직임은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신빙성을 제대로 입증하려면 우리는 기억의 성질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때 감정이 기억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객관적으로 사고해봐야 합니다.
가령 중국인이 난징대학살의 희생자가 30만 명이라고 주장할 때, 그 수치에는 감정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보통의 중국인이 30만 명이라는 수치를 고수하는 까닭은 거기에 분노가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하고 있으니 수치가 크면 클수록 분노를 담기에 적절하겠죠. 그런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비슷한 감정은 한국 사회에도 다른 형태로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경우 감정의 강도에 따라 상징의 크기가 정해집니다. 하나의 기억 속에는 여러 감정이 잠복해 있는데, 그 감정을 어떻게 기억의 요소로서 다룰 수 있을까요? 위안부 등 피해자의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정치적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의 양심에 관한 몹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감정 자체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 그때 감정의 사실성을 표현하려면 역사학의 힘이 필요합니다. 즉 직관적인 ‘사실성’에 머무르지 않고 감정이 지닌 ‘사회성’에 근거하여 그것을 불가시한 사실로서 확인해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확인 작업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진행되어야겠죠. 그러나 이성적 작업도 감정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한다는 전제 위에서 실시되어야 합니다. 감정과 기억의 관계성은 역사학을 대할 때 제게 한 가지 기본적인 사고거리입니다.
감정 기억을 계승한다는 것
윤여일
선생님의 「사상으로서의 아즈마 시로 현상」, 「중일전쟁」, 「다문화 공생의 ‘문화정치'」, 「세계화와 문화적 차이」 등의 글을 보면 난징대학살 ‘30만’ 희생자를 두고 중국인과 일본 사회가 반응하는 양상의 차이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30만’이라는 수치는 중국인에게는 난징대학살이라는 감정 기억의 상징이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마보로시파’*뿐만 아니라 난징대학살을 부인하지 않는 보통의 일본인조차 ‘30만’이라는 수치는 과장되었다며 수치의 정확함을 따져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잠시 말씀해주셨지만, 이 장면에서 선생님께서는 ‘수치’가 얼마나 타당한지를 따지기보다 ‘30만’이라는 수치를 둘러싼 논의의 배후에 자리 잡은 ‘감정 기억’의 문제를 주목하셨습니다.
* 마보로시파(まぼろし派). 난징대학살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일파를 일컫는다.
이런 자세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적 학문 원리는 역사의 ‘객관진리성’이다. 그 반대편에 살아 있는 인간의 감정이 있다. 이런 역사관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먼저 감정 기억이 상실된다. 감정 기억의 상실은 역사의 긴장감과 복잡성을 거세하고 역사 전체를 통계학으로 대체할 수 있는 죽은 지식으로 변질시켜버렸다. 이런 죽은 지식의 역사야말로 현재의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아주 쉽게 이용당하기 마련이다.(「중일전쟁」)
선생님께서는 일본 사회가 ‘30만’이라는 ‘상징적’ 숫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사실로서가 아니라 중국인의 고통에 접근하겠다는 태도로서 말이죠. 만약 난징대학살은 지어낸 이야기라거나 “30만은 정확하지 않다”는 주장이 일본 측에서 나온다면, 그럴 때마다 “상징을 지킨다”는 중국인의 감정은 증폭되기 마련이고, 이렇듯 대항 구도가 지속되면 중국인의 ‘상징’ 지키기와 일본인의 ‘사실’ 추궁은 점차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중국인은 피해자 30만인이라는 하나의 숫자에 근거해 일본인 중에서 친구와 적을 가른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런데 이런 대항 구도가 지속되면 상징은 점차 내용을 잃어간다. 죽은 자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한 관심과 동정, 살아남은 자의 애도는 점차 세간의 관심에서 밀려나 상징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망각은 이미 사회 속으로 번지고 있다”(「다문화공생의 ‘문화정치’」)고도 지적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중국인이 ‘30만’이라는 상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는 중국 사회에서 까다로운 문제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에게 ‘30만’이란 숫자는 중국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감도를 시험하는 기제가 되겠지만, 그 상징이 중국인에게는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형해화하는 쪽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식민시기를 기억하는 한국인에게도 다른 양상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징후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가령 저는 식민시기와 한국전쟁에 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지만, 직접적인 체험은 물론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체험을 기억함으로써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집단에게 주어진 기억과 감정을 전해 받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이 배인 기억이라면 사람들에게 균질할 리 없고, 진정 그 감정을 느끼려면 특히 체험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요.
쑨거
그것은 ‘감정 기억’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혹은 사회적 감정을 계승하는 것이죠. 계승되지 않는 기억은 기억일 수 없습니다. 역사란 사실 인류의 기억입니다.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도 자기 나름의 기억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기억을 역사화하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아무개의 감정이나 기억이 간단히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한국인의 감정, 한국인의 기억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이루는 ‘감정 기억’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윤여일
사건을 체험하지 않았거나 체험했더라도 당사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 사건에 대해 지니는 감정도 ‘감정 기억’으로서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체험자가 아니라 저처럼 젊은 세대가 가진, 때로는 미디어가 제공한 기억과 감정까지 포함해 선생님은 ‘감정 기억’을 사고하고 계신 건가요?
쑨거
이 질문은 혼란스럽군요. 당신은 무엇을 묻고자 하는 것이죠? 이를테면 광주항쟁의 체험자는 아니지만 사건에 관한 기억을 갖고 있고 감정도 품고 있는 경우, 그 ‘감정 기억’에 정당성이 있느냐는 물음인가요, 아니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감정 기억과 당사자의 감정 기억을 동등하게 대해야 하느냐는 물음인가요?
윤여일
후자입니다.
체험의 일반화
쑨거
그렇군요. 동등하게 대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추상적으로 답한다면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동등하죠. 그러나 그 안에는 방금 제가 말한 문제가 잠복해 있습니다. 당사자든 방관자든 기억의 성질에 따라 기억은 역사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인지 여부가 관건은 아닙니다. 기억의 성질이 중요합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전쟁 체험의 일반화」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이런 논점을 제시했죠. 만약 체험이 그저 한 개인의 체험으로 매몰된다면 그 체험은 체험으로서 가치를 지니지 못하며 일반화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일반화’란 역사가 된다, 혹은 역사로 이어진다고 풀이해볼 수 있습니다. 개체의 체험은 개체의 체험인 상태로는 역사의 기억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당사자의 기억이 당사자가 아닌 사람 혹은 후세대에 힘입어 되살아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것이 기억의 역사화에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체험자가 아닌 사람들이 당사자들과 협력해 기억을 일반화하는 작업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구술사의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여일
거기서 ‘체험의 일반화’란 단일서사로 개별적 차이를 뭉뚱그리거나 굴곡을 고르게 만들어, 가령 집단의 성원이 비슷한 감정을 갖는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죠?
쑨거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윤여일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광주항쟁의 증언록을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증언록은 같은 사람을 몇 년마다 인터뷰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읽어가던 중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언자들의 증언이 점차 닮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증언자마다 구술하는 사건도 달랐고, 사건의 내러티브도 달랐습니다. 현장에 있었더라도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소식을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지인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따라 사건을 회상하는 내러티브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회상하는 방식이 점차 닮아갔습니다. 더구나 사건의 의미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도 비슷해졌습니다. 특히 훗날의 구술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광주항쟁의 의미를 정리하는 주된 개념으로 정착합니다. 그러나 광주항쟁 직후의 발언에서는 그런 개념어가 그다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훨씬 날것의 진술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광주항쟁이라는 표현 자체가 사건에 대한 여러 명명법 가운데 우위를 점해 정착된 결과물이며, 이미 기억이 사회화된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미디어였습니다. 미디어가 만든 내러티브를 체험자들이 자신의 기억 위에 덧씌우는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미디어에 노출된 체험자들은 미디어의 내러티브에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증언록을 보면서 체험자의 말이 점차 헐거워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체험을 꽉 감싸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체험담을 꺼내는 경우에도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미디어를 통해 전해들은 타인의 것도 뒤섞입니다. 사건 당시에는 체험자마다 이질적이고 복잡한 감각을 지녔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자 일종의 내러티브에 기억이 점차 회수되어가는 것입니다. 한쪽에서 보자면 기억의 변질이며, 다른 한쪽에서 보면 기억의 사회화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일반화란 이 경우와는 의미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쑨거
그렇습니다. 균질화가 아닙니다. 일반화란 공유할 수 있다는 의미죠. 당신은 무척 중요한 문제를 꺼냈습니다. 말하자면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분석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얼마간 이론적 축적이 이루어졌지만, 저는 다른 방향에서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기억은 만들어집니다. 감정 기억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당신의 분석 이후에도 여전히 남겨지겠죠. 사회적으로 생각한다면 만들어지지 않는 역사의 기억은 없습니다. 주류 이데올로기가 통제해 만들어지는 기억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기억도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사실 그대로’의 기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고 탐구가 멈춰서는 안 되겠죠. 절대적인 객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되도록 기억을 정확히 기록하려는 노력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여러 발굴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먼저 감정은 언제나 기억과 망각을 좌우합니다. 감정의 요소에 따라 기억과 망각의 관계도 항상 변합니다. 오늘은 기억하고 있지만 내일이 되면 싫은 감정에 밀려나 잊게 될지 모릅니다. 혹은 오늘 생긴 감정에 의해 원래 기억에는 없던 요소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덧붙여 그런 것이었다고 믿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기억의 신빙성을 의심할 뿐이라면 불충분합니다. 오히려 기억과 감정의 관계를 분명히 따져 물어야 합니다. 즉 기억이 ‘거짓’임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이 변화하는 흐름을 분석해 거기서 진정한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능력이 그다지 발달해있지 않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려고 기성의 표현을 빌려오곤 합니다. 더욱이 사건의 당사자더라도 회고할 때는 유행하는 이데올로기를 ‘원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해보았자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죠. 이데올로기의 유용(流用)에는 여러 방식이 있으니 일괄적으로 ‘이용’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건은 자기 혼자서 기억을 완성할 수 없음을 인정하여 기억의 진위 문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구성 과정을 탐색하는 것이겠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가령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수’는 문제의 초점이 되더라도 유일한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