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시성의 동시성
우리가 받았던 학교 교육을 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잘 보이시나요? 브라질에서 원주민들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가 경찰에게 쫓겨나는 장면입니다. 아마존 밀림 지역에 불을 질러 땅을 만들고 원주민들을 쫓아내고는, 거기 땅에다 콩이나 옥수수를 길러서 소나 돼지에게 먹일 사료를 만든다고 하지요.
그런데 저 사진을 보세요. 제가 미국 여행 가서 찍어온 건데, 미국 사람들은 이러고 살아요. 아기를 안고 경찰 방패 앞에서 자기 땅을 지켜야 하는 원주민과 그 결과로 생산된 것들을 주체할 수 없이 먹어 초고도 비만이 된 사람들. 미국인 10명 중에 6명이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는 과체중이고, 10명 중의 2명이 질병 수준의 비만을 앓고 있다지요. 양쪽 모두 불행합니다. 이게 각각 다른 시대의 모습이 아니라 한 시대에 벌어지는 일이고, 또한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음 쪽의 사진은 영화 촬영 장면이 아닙니다. 케냐에서 실제 벌어지는 일입니다. 마사이 부족과 칼렌진 부족 간의 토지 분쟁인데, 인상적인 것은 활을 들고 전투를 치르고 있어요. 왜 활을 들고 있을까요? 네, 무기가 다 떨어져버려서 그렇다고 합니다. 18세기 때 조선시대의 모습이 지금 재연되고 있는 거지요. 아래 사진은 콩고 내전으로 피난하는 가족의 모습입니다. 슬프지요. 자전거 한번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30년 전에 타던 것과 같은 자전거입니다. 확실히 우리와는 시대가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말이죠, 이 사진은 우리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컨대 그 아래 사진의 콩고 내전은 정말 끔찍한 참사인데요, 이 분쟁의 근원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도 나오지만, 다이아몬드이거든요. 다이아몬드가 보석으로만 쓰이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쓰는 휴대폰, 컴퓨터, 디지털카메라에도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쓰거든요. 콩고 내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소년병들이 난민촌 소녀들을 집단 강간하기도 하고, 어느 난민촌에는 수용된 난민 중의 40%가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하지요. 전투나 고문 때문에 말입니다. 이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돈 몇 푼 후원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실은 우리가 이들의 끔찍한 고통을 가져온 가해자의 일원이거든요. 전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시대에 편입되어, 그 끄트머리에서 온갖 폭력과 야만과 비참을 몸으로 겪고 있어요.
저는 이런 세계를 지탱하는 데 가장 근간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트럭을 타고 이라크로 넘어와서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합니다. 비누를 갑에 넣거나, 신문지로 물건들을 포장해주거나, 등짐을 져주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이라도 서로 하려고 아우성입니다. 마치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의 아이들 모습 같은데, 2000년대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 한 가족이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아버지는 밀수를 하다가 이라크군이 매설해 놓은 지뢰를 밟아 죽고 맙니다. 둘째인 열네 살 ‘마디’라는 소년은 아주 왜소한데, 희귀병인가 봅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2년 안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나와요. 맏형인 아마드가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근육질 남자 배우의 포스터를 구해왔습니다. 이걸 방에다 붙여놔요. 키가 1미터도 안 되는 왜소한 소년이 이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마디는 이 사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리고 아마드는 학교를 때려치우고는 장작을 패고 등짐을 지면서 돈을 법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동생들이 쓸 공책을 사서는 학교로 와서 전해줍니다. 그런데 동생은 지금 학교에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 대목을 배우고 있어요. 말하자면, 학교를 통해 쿠르드족의 시간이 아니라 근대 산업기술 문명의 시간 속으로 편입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배우게 된 근대 문물의 세계 속에서 쿠르드족은 그야말로 가장 말단에 자리 잡은 꼴찌 중의 꼴찌입니다. 그 운명을 학교 교육이 자각시키는 겁니다. 결국, 라이트 형제를 배우는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아이들은 비행기는커녕 말에게 술을 먹여서 취기로 그 강추위의 산악지대를 건너 밀수를 해서 먹고사는 이 쿠르드족의 비참한 운명을 하나의 ‘당연’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누구나 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신만이 부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학교 교육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자기의 몸으로 자기의 시간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근대 학교 교육이 안겨다주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의무교육의 역사
우리는 왜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 걸까요?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겁니다. 모두가 다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상식을 한번 의심해봐야 합니다. 미국의 교육자 존 테일러 개토의 『바보 만들기』라는 책에는 이 의무교육의 역사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후발 산업국가였던 프러시아 제국이 보―불전쟁에서 지고 나서, 피히테니 훔볼트니 하는 사람들이 프러시아 제국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며 국민개병제와 의무교육제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죠. 그것을 황제가 받아들여 학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모두가 학교에 가야 된다고 하는 게 너무나 낯선 일이었나 봅니다. 봉건적 사슬에 얽매여 있었지만,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나름의 자치를 누리며 이웃들과 서로 도우며 살 수 있었어요. 다들 각자의 시간과 몸으로 살아가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공장에 집어넣고 하루 종일 똑같은 일을 시키려니 일을 안 해요. ‘러다이트’라고 하는 기계파괴운동이 일어나고, 기계를 부수지 못하면 자기가 신고 있던 신발을 기계에 던져 작업을 방해하는 일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납니다. 이런 건 파업 말고 ‘태업’怠業이라고 하잖아요. 태업을 흔히 ‘사보타주’라고 하는데, 이 ‘사보’sabo가 프랑스말로 나막신이라고 하더군요. 나막신을 기계에 던지는 행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황제와 자본가들은 말을 잘 듣고, 시간 관념이 철저하고, 읽고 쓸 줄 아는 노동자가 필요했던 거죠. 그런 순종적인 노동자를 기르기 위해서 학교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부모를 태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아주 심하게 때려서 사람이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학교에는 ‘훼방금지제도’라는 게 있어서 허락을 받지 않고 질문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지요.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를 철저하게 존중하고 다양한 질문의 가능성, 원천적인 의문을 가지는 질문을 봉쇄하는 것이 학교입니다. 사냥꾼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분방한 사람, 야성의 존재,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학교 교육의 틀 안에서는 ‘문제아’가 됩니다. 이 문제아들을 걸러내기 위해서 학교가 필요했던 겁니다.
반면 황제는 자기 자식들이 그렇게 자라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황제와 귀족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의무교육제도상의 ‘국민학교’Volkshochschule 말고 ‘레알슐레’Realschule가 있었어요. ‘레알’이라는 말 잘 아시죠. 진짜 학교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훈련,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훈련,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가르치고 상상력을 키워주고 하는 공부를 시켰어요.
지금도 이러한 신분제도는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투 트랙two track으로 딱 분리해서 한 트랙만 돌게 하잖아요. 몸을 쓸 생산직은 죽을 때까지 생산직으로 일해야 되지만, 머리를 쓸 관리직은 상무, 전무, 최고경영자까지 오를 수 있죠. 머리와 몸으로 완전히 이원화된 신분제입니다. 군대는 장교와 하사관으로, 공무원 세계는 5급으로 시작하는 고시 합격자와 9급부터 시작하는 말단 공무원으로, 경찰대 졸업생은 경위부터 시작하고 일반 채용자는 순경부터 시작하는, 더 멀리 가면 고등학교도 인문계와 실업계로 나뉘어지죠. 이런 것들이 사실상 신분제입니다.
학교 교육의 역설
기본적으로 학교는 이런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이 학교 교육을 통과하면 어떤 존재들로 빚어지는가?
린다 잉글랜드라고 하는 미군 헌병이 있었습니다. 그이가 한때 전 세계인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죠. 이라크에 파병되어 영창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포로들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학대한 겁니다.
그런데 이 린다 잉글랜드는 인면수심의 괴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언론 보도 기사를 찾아보니, 이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비를 벌기 위해 월마트에서 일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했는지 모범사원으로 뽑혀서 월마트 입구에 사진이 붙어 있었다네요. 대학 학비를 스스로 벌기 위해 자원 입대했고, 동네에서 효녀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아래쪽 사진의 남성은 약혼자인데, 이 사진을 찍을 때 린다 잉글랜드는 이미 임신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뱃속 아기를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결국 이것은 학교 교육의 영향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가 공표한 주州 교육 목표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나라가 문명 세계의 선망의 대상이자 인류의 마지막 희망임을 깨닫게 한다.” 린다 잉글랜드의 행동은 미국인 이외의 사람들, 특히 이라크 점령지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보지 않게끔 부추겨진 선민의식의 발로입니다. 그건 학교가 가르친 거지요. 학교 교육을 십수년간 받으면 이렇게 낮은 사고력과 쓸데없는 애국심으로 가득찬 인물로 빚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배움의 기쁨은 토막 쳐버린 조각 지식들만 어지럽게 걸친 그런 ‘어른 아이’가 됩니다. 대부분은 실패자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덕목, 무책임과 순종적 태도만을 갖춘, 그런 존재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한국 교육의 트라우마
우리는 모두 한국 교육의 불행한 자식들입니다. 한국 교육에서 얻은 트라우마는 평생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사유하고 관계 맺는 것을 끝없이 방해합니다. 아들이 경찰대를 가면 그 부모도 경찰대를 머리에 이고 다니고, 딸이 서울대학을 가면 부모도 머리에 서울대학을 이고 다닙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이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를 제일 궁금해 하고, 자신이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화 중에 자기가 그 대학 출신임을 암시하는 정보를 흘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건 분명 역사적인 배경이 있겠죠. 한국 사회가 식민지와 전쟁을 거쳤잖아요. 그러면서 엄청난 수탈과 압제와 대량 학살과 쿠데타 따위를 겪으면서 극우적 반공사회로 꽉 닫혀버렸습니다.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 말고 다른 삶을 살 수 있게끔 해주는 출구가 사실상 없어져버렸잖아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좋은 삶이란 그냥 좋은 대학 나와서 그럭저럭 사는 것이었죠. 그래서 말이죠, 저도 그랬고, 많은 사람들은 사회가 민주화되고 먹고살 만해지면, 그러니까 민주화와 경제성장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교육 문제는 좀 나아지리라 기대를 했습니다. 저는 198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저는 선생님의 꿈을 키우면서 '내가 선생님이 되어 있을 때는 좀 달라져 있으리라' 믿었고, 그런 기대로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제가 현장에서 겪어보니 제가 다니던 시절보다 아이들의 삶은 훨씬 더 나빠졌습니다. 민주화가 진척이 되면 될수록, 경제성장이 진행이 되면 될수록, 아이들의 삶은 훨씬 더 나빠졌어요. 뭐가 문제일까요?
강의안에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결과'라는 항목을 잡아 놓고 몇 가지 주저리주저리 적어 놓았는데, 물론 이게 우리 교육 현실을 진단하는 중요한 한 측면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 따져보면 신자유주의 시장화 정책은 교육에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근원적인 진단도 아닌 것 같아요. 이런 비유를 한번 들어볼게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지각 직전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이를테면, 8시까지 학교 가는데 7시 50분 정도까지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은 여유 있게 걸어 들어가요. 그런데 55분을 지나고 58분, 59분이 되면 아이들 걸음이 조금씩 빨라져요. 그러다가 8시가 되면 교문을 닫아버리는 학교들이 있단 말예요. 그러면 아이들은 닫기 전에 교문을 통과하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를 합니다. 요컨대, 이 미친 듯한 경쟁은 경쟁의 말기적 증상이라는 겁니다. 교육을 통해 안정적인 삶을 얻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더욱 극악해지는 겁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교문이 스르르 닫히는 7시 59분 아니면 8시 정각 직전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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