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정치, 수탈 없는 경제, 평화통일 공약 걸어
1955년 12월 22일 죽산은 동지들과 함께 ‘(가칭)진보당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죽산과 서상일·박기출·이동화·김성숙 등 12명 발기인의 명의로 취지문과 강령 초안도 만들었다. 그러나 창당은 뒤로 미뤄졌다. 다음 해1956 5월에 실시될 정부통령선거 때문이었다. 죽산과 그의 동지들은 대통령 입후보자를 내서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음으로써 당의 역량과 조직을 확대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1956년 새해에 들어 우선 서울역 앞 양동에 당사무실을 마련했다. 남산다리 밑 북서쪽에 있는 2층짜리 벽돌건물이었다. 여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대부분 죽산계열 인물들, 서상일계 인물들로 조직을 위하여 뛰는 사람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신문기자와 정보원 들이었다. 정보원들은 경찰, 군특무대, 미 대사관 촉탁, 미군 정보부대 촉탁 등 다양해서 헷갈릴 정도였다.
3월 말 인사동 중앙예식장에서 입후보자 결정을 위한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 신도성이 죽산에게 간곡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선생님, 혁신정당에 정권이 돌아올 시기는 아직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진보주의의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굳이 선생님께서 대통령후보가 되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동암東庵(서상일의 아호) 선생께서 대통령후보를 맡겠다고 하니 선생님은 부통령을 맡아주십시오.”
죽산은 그 사전조정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요. 집권시기가 성숙되지 않았어요. 꼭 그래서가 아니라 동암이 선배이시니까 그분이 나서셔야지요.”
그러나 죽산계열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열의 주축을 이루는 함경도 출신 멤버들은 죽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덤비는 강성强性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서상일에게 표가 없다고 완강하게 죽산의 출마를 주장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서상일이라는 이름으로 받을 수 있는 유권자들의 표는 적었다. 죽산은 난처했으나 투표에 동의했다. 추진위원회는 결국 투표를 했고 죽산을 대통령후보, 서상일을 부통령후보로 내기로 결정했다. 결과가 이렇게 되자 서상일은 태도가 달라졌다. ‘평생 정치교육자로 여생을 봉사하겠다’고 선언하고는 부통령후보직마저 사양했다. 그 자리에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중에 ‘조봉암은 대통령병 환자’라고 비난했다. 결국 그 일로 양쪽 계열은 분열했다.
그날 오후 6시에는 선거대책위원회를 열어 대통령후보로 죽산을 추대하고 추진상임부서를 결정했다. 혁신진영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김두한, 그리고 죽산의 사위인 이봉래도 조직부와 선전부에 이름을 올렸다.
기자들이 몰려와 죽산을 둘러쌌다. 바로 그날 민주당과 무소속 의원 들이 모여 선거에서 자유당과 맞서려면 야당연합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를 한 때문이었다.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죽산에게 쏟아졌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일은 없으나 충분히 고려할 점이 있습니다.”
죽산은 그렇게 말을 아꼈다. 창당을 뒤로 미루고 우선 선거체제를 갖춘 진보당으로서는 불리한 일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는 물밑 접촉만 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4월 7일 오전 9시, 윤길중 사무장은 666명의 추천장을 첨부해 죽산의 대통령후보 등록을 마쳤다. 이날 죽산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야당연합전선은 정치적 원칙이 합치된다면 가능합니다.”
등록마감 결과 대통령후보는 이승만(자유당)·신익희(민주당)·조봉암(진보당추진위) 3인, 부통령후보는 이기붕(자유당)·장면(민주당)·박기출(진보당추진위) 등 8명이 되었다. 각 진영은 선거유세로 들어갔다.
4월 13일 죽산은 입후보자의 정견을 싣는 『동아일보』의 「나는 이렇게 하련다」 시리즈에 자신의 정견을 기고했다. 책임정치의 수립, 수탈 없는 경제체제의 실현, 평화적 통일의 성취, 이렇게 세 가지였다.
야당후보 단일화의 여론은 점점 더 커져서 헌정동지회의 절충과 조정으로 4월 25일 명륜동 김홍식金洪植 의원의 집에서 죽산과 해공 신익희의 영수회담이 열렸다.
“의장님, 대구 피난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과 국회를 버리고 혼자 탈출한 것에 분개하며 대폿집에서 술을 한 말 여섯 되나 마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죽산의 말에 해공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나는 그때부터 죽산이 나라를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했지요.”
두 사람은 그런 말로 시작해 두 시간 동안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대통령후보 단일화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신익희(왼쪽)와 죽산(오른쪽). 죽산은 19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해공 신익희 선생을 단일후보로 밀고 사퇴할 예정이었다. 『죽산 조봉암 전집』에서 인용. |
죽산은 민주당이 집권공약에 진보당의 기본정책 세 가지, 즉 책임정치의 구현, 수탈 없는 경제체제 확립, 평화통일 추구를 반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걸 받아주시면 저는 후보사퇴를 해도 좋습니다. 대신 의장님은 단일후보로서 어떤 압력이나 비상사태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셔야 합니다.”
해공은 껄껄 웃었다.
“당연하지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굴복 안 해요.”
죽산은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정권을 잡을 경우, 조병옥과 김준연은 지난날 민주대동운동을 저해한 사람들이므로 거국내각에서 배제하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민주당과 진보당 추진위원회의 단일후보 결정을 위한 입후보자 4자회담이 중국요릿집 아서원에서 열렸다. 1925년 4월 17일, 이것이 조국광복의 길이라는 염원으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던 그곳이었다. 죽산은 러닝메이트인 박기출과 함께 아서원에 갔는데 민주당 측 장면 부통령후보가 오지 않았다.
죽산이 대통령후보를 양보하면 민주당이 부통령후보를 양보해야 할 것이라 오지 않은 것이었다. 죽산은 고민에 빠졌다. 정권교체와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여망을 따르자면 대통령후보를 무조건 단일화해야 하는데 어찌할 것인가. 그는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미 약속한 바이니 대통령후보를 의장님께 양보합니다.”
이날 죽산과 해공은 세 가지 밀약을 맺었다.
첫째, 진보당은 창당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 5월 초까지 유세를 계속한다.
둘째, 그 기간 막후교섭을 통해 민주당은 진보당 측 조건을 수락하고 진보당은 후보 사퇴를 할 수 있는 당내 분위기를 조성한다.
셋째, 5월초 신申·조曺 회담을 열고 공동성명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발표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 뒤 막후교섭에서 두 사람의 단일화 결정 최종 회담을 5월 6일 전주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그 후 막후 접촉에 양쪽 모두 호감을 갖고 있는 서상일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죽산은 5월 1일 일단 진보당의 선거공약 10장을 발표했다.
첫째, 진보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유엔 보장하에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통일을 성취한다.
둘째, 외교를 쇄신하고 집단안정보장의 확립에 의하여 국방문제를 해결하고 군비부담을 경감한다.
셋째, 집권자가 국민 앞에 책임지는 정치체제를 확립한다.
넷째, 서민생활에 대해서 정부가 가지고 있는 유해무익한 간섭, 허가제도를 일소한다.
다섯째, 행정기구를 대폭 감소시키고 공무원의 생활을 완전히 보장한다.
여섯째, 종래의 대중적 수탈정책을 폐지하고 생산 분배 소비에 걸친 종합적인 연차 계획경제를 수립하여 법령화한다.
일곱째, 농촌고리채를 일정기간 지불 유예케 하고 현물세를 폐지하고 자율적인 농민협동조합을 조직한다.
여덟째, 노동자의 자유로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한다.
아홉째, 상이군경 유족 등의 생활을 국가적으로 보장한다.
열째, 교육이 완전한 국가보장제를 실시하고 학제를 개혁하여 연한을 단축한다.
민주당이나 자유당의 공약과는 현저하게 차별되는 민주적인 공약이었다. 특히 통일정책은 ‘반공으로써 국토의 통일을 완수한다’고 한 자유당이나, ‘국력의 신장과 민주우방과의 제휴로써 국토를 통일한다’고 한 민주당에 비해 훨씬 전향적으로 나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의 신념인 사회민주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죽산과 진보당진보당 추진위원회은 일단 선거전에 돌입했다.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과 이양구 동양맥주 사장이 자금을 댔다. 인천 부평의 토호 출신으로 토건업을 하고 있던 심계택도 자금을 댔다.
당 간부들이 추렴한 금액도 컸다. 죽산이 약수동에 작은 셋집에 살면서 수년 간 준비한 돈이 약 1,000만 원, 의사로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박기출 부위원장이 낸 돈이 약 700만 원, 그리고 그때그때 당 간부들이 얼마씩 냈다. 안경득 중앙당 상무위원은 부인이 친구들에게서 꾸어 온 돈 800만 원을 냈다. 그러나 선거비용은 턱없이 부족해서 벽보도 제때에 못 붙이고 운동원들은 점심을 막걸리로 때우기도 했다.
대선후보 신익희 서거로 이승만과의 단독대결
5월 5일, 선거 판도를 뒤바꾸고 죽산의 생애를 뒤흔드는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해공 신익희가 유세를 위해 호남으로 가던 중, 이날 새벽 5시 경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절명한 것이었다. 이날 전주에서 유세를 하고 광주로 가서 다시 유세를 한 다음 전주로 돌아와 죽산과 만날 예정이었는데 과로로 급서한 것이었다. 죽산으로서는 후보 사퇴도 할 수 없고 저절로 이승만 박사와 맞서는 단독후보가 되어버렸다.
죽산과 진보당 수뇌부는 이를 절호의 기회가 아니라 위기로 받아들였다. 이영석 선생의 『죽산 조봉암』에는 신도성 의원의 회고가 실려 있다.
경상남북을 거쳐 5월 5일 광주에 도착해 유세를 하고 전주로 가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와 회담할 예정이었다. 5일 광주 근교에 이르렀는데 파출소 앞에 차단기를 설치해 우리 자동차를 막았다. 그때는 연유를 몰랐는데 나중에야 해공海公 서거 때문임을 알았다. 우리가 광주에 도착해 고려호텔로 들어갔더니 호텔 주인이 해공의 서거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시 민주당 관계자들은 진보당이 호남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어 해공에게 호남유세라는 강행군을 시켰다고 얘기했지만 사실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때 막 호남유세를 시작할 참이었고 유세보다는 해공과 회담하고 진보당의 정부통령 후보사퇴를 발표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호텔방에 들어가 사태변화에 따른 대책을 논의했다. 죽산은 ‘후보사퇴가 필요 없게 됐으니 선거운동에 마지막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지금부터는 선거운동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벌써 파출소에서 우리를 막지 않습니까. 이제부터는 대통령 당선이 문제가 아니라 신변의 안전이 염려됩니다. 유세는 나 혼자 할 테니 죽산 선생은 서울로 가서 은신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내 의견이 채택되어 죽산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유세를 계속했는데 군산유세에 나갔더니 청중이 없었다. 이때부터 경찰이 우리들의 선거방해에 나선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죽산은 6일 오후 ‘신익희 선생의 서거는 국가적 민족적 손실이며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그 담화에서 ‘나는 서울서 떠날 때, 해공 선생과 단일후보 실현을 위하여 6, 7일경 재회할 것을 밀약한 바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은신해버렸다.
죽산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두 손에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해공은 왜 대통령 단일후보 결정회의를 목전에 두고 돌아가신 걸까. 65세 노령이긴 하지만 건강한 편이었는데 왜 쓰러진 것일까. 쓰러지지 않고 예정대로 합의해 단일후보로 추대했다면 나는 나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며 시간을 보내고 차기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이제부터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 박사 단독 후보로 놔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심는 일, 그것은 비명에 간 고인이 내게 남겨준 사명이 아닌가.
그는 결국 자신이 대통령 야당 단일후보가 된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서상일을 진보당추진위원회 후보로 앞세우려 했으나 자신이 나서게 된 것도 그렇고 해공이 쓰러진 일도 자신의 숙명이며 세상이 자신에게 주는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제1인자가 되면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조국을 부강하게 만들 자신감이 있었다.
죽산은 자신의 러닝메이트인 박기출 부통령 후보에게 사퇴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그러면 자신과 장면 박사가 야당 단일후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공 신익희가 없는 민주당은 표변했다. 타당 후보는 지지하지 않는다고 공식성명을 냈고 죽산과 사사건건 대립해온 김준연은 조봉암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투표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죽산이 처음 정치 기반을 쌓은 인천에서는 죽산과 장면이 모두 인천 출신이라 둘이 나란히 입후보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결렬되자 아쉬워했다.
대통령선거 포스터. 1956년 5월 5일 해공 신익희 선생이 단일후보를 결정하는 마지막 회담을 앞두고 급서했다. 이에 죽산은 단독후보가 되었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은신했다. 진보당원들은 온갖 탄압 속에 선거운동을 했다. 조호정 여사 제공. |
죽산은 서울에서 은신해버렸지만 선거대책위원회는 선거운동을 계속했다. 그러자 노골적인 탄압이 닥쳤다. 충남반의 박준길, 강원반의 이명하 등은 현지에 내려간 직후 테러를 당하고 유인물을 빼앗긴 채 되돌아와야 했고 경남반의 전세룡은 의령 경찰서장실로 연행돼 경고를 받고 쫓겨났다.
진보당 대구 선전부장 이병희는 납치되어 폭행당하고 실신했다가 살아났다. 청주에서는 권총을 찬 7명의 복면괴한들이 선거사무실을 습격해 벽보와 전단을 탈취하고 운동원들은 무차별 구타했다. 인천에서는 확성기를 매단 선거 운동차를 경찰이 붙잡아 운전수가 선거운동원 등록증이 없다고 차를 억류해버렸다. 운전수는 선거운동 등록이 필요 없다고 규정을 들이대며 따지자 상부에 알아보겠다고 하고는 해 진 뒤에야 풀어주었다. 부산에서는 죽산의 처남 김영순과 당 간부인 김창식이 택시 한 대를 대절해 확성기를 달아 선거운동을 했는데 하루에 열 번도 더 경찰의 검문을 받으며 시달렸다.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되는 가운데 선거 날이 오고 투표가 끝났다. 얼마나 부정선거가 극심했는지 조병옥은 한 달 뒤 국회 본회의에서 ‘제3대 대통령선거에 있어서 내 판단에는 만일 자유 분위기의 선거가 행해졌더라면 이 대통령이 받은 표는 200만 표 내외에 지나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판단합니다’ 하고 발언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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