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집 둘레
우리 집! 내 집!
그 한마디에 이내 가슴이 다사로워진다. 집이 어느새 가슴 안에 자리 잡는다.
‘집’은 으뜸으로는 집채, 곧 건물만을 가리킨다. 집채는 안채, 바깥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집채라고만 해도 건물을 가리키는 데 그치고 말지는 않는다. 안채라고 하면 할머니나 어머니의 체취가 스며 있었다. 누나며 누이들의 것도 거기 묻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깥채라면 아버지와 사내 형제들의 낌새가 풍겨오게 마련이었다. 그렇듯이 가족, 집안 식구들의 몸 냄새, 온기며 훈김, 심지어 그들의 말소리며 웃음소리까지도 거기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도 집은 우리들의 또 다른 가슴이었다. 정이었다.
그래서 집은 건물만이 아니라 식솔을 마저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집은 ‘집안’과 서로 맞먹는 말이다. 어려운 말로는 ‘가계家系’고, 집안의 역사며 내력, 가훈으로 일컬어지는 귀한 가르침 말고도 집안 살림살이며, 집안 형편이란 뜻의 ‘가세家勢’ 등 이 모든 것을 통틀어서 한마디로 ‘집’이라고 불렀다. 이런 뜻으로서의 집은 요즘의 흔한 아파트와는 다른 것이다. 어쩌면 집 다르고 아파트 다르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면으로도 집은 아파트와 다르다. 아파트에서는 집채를 말할 형편이 못 된다. 대청마루며 툇마루 같은 마루는 아파트에 없다. 거기에는 뜰이며 마당도 없다. 장독대가 있을 턱이 없고 울타리며 사립이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오늘에 와서 집은 기울고 있거나 그 자취를 지워가고 있다. 온 세상이 나무둥치가 뿌리를 잃은 듯 허전해지고 말았다.
사립짝
초가삼간의 시골집에는 울도 담도 없는 경우가 많다. ‘울도 담도 없는 집’이란 말은 가난하고 초라한, 볼품없는 집을 가리킨다. 집 둘레에 흙담이나 돌담 따위의 담이 서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넉넉한 집이라야 갖출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울이나 울타리는 담과는 다르다. 짚 앞 또는 집 둘레에 처져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울이나 울타리는 담에 비해 초라하다. 좋게 보아 표현하더라도 소박하다. 갈대나 억새나 그런 등속의 풀이 주가 되어서는 엮이고 짜인 것이 울이나 울타리다. 더러는 잔 나뭇가지가 섞이기도 했다. 그쯤 되면 ‘생울타리’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울이나 울타리는 키가 낮다. 풀이며 잔 나뭇가지를 얽어서 세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지나가던 사람의 눈길에 집 안뜰이 다 들여다보이고, 집 안 사람 역시 집 앞으로 누가 지나가는지 단숨에 알아보게 되어 있었다.
“갑돌아, 나와 놀자!” 울 밖에서 누군가 소리치면, 이내 대답이 울 너머로 날아왔다. “그래, 기다려!” 이런 게 울타리의 정겨운 장면이다.
이래서 사실상 울은 명색뿐이다. 집 앞이나 둘레를 가리기는 했지만, 굳이 집 안과 바깥을 가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울은 집 안과 고샅, 그리고 온 마을이 서로 열린 채로 어우러지게 한다. 온 마을 안은 한 공간이 되고 만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울로 해서 다들 서로 ‘우리’가 될 수 있었다.
울에서 아이들은 잠자리를, 그것도 고추잠자리를 잡곤 했다. 이 귀여운 붉은빛의 잠자리는 울에 와 앉기를 즐긴다. 주홍빛 꼬리를 까딱대고 은빛 날개를 팔랑대고 작은 눈알을 어릿거린다. 꼬마가 야금야금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는 다가든다. 살그머니 집게손가락을 내밀어서는 잠자리 눈에다 대고 원을 그린다. 졸음에 겨운 듯…… 잠자리의 눈알이 따라서 돈다. 잠자리가 어지럼을 탄다. 바로 이때, 꼬마는 날렵하게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낚아챈다.
이런 것도 울타리가 간직한 고운 정경 중 하나다. 울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한데 울에는 으레 사립문이 서 있었다. 집 안으로 드나드는 사립문은 하나의 사립짝 또는 두 개의 사립짝으로 되어 있다. 한자로는 ‘柴門(시문)’이라거나 ‘Ξ扉(경비)’라고 쓴다. 시柴는 땔나무나 잡목 따위며 삭정이를 가리킨다. 거기서 시문의 뜻을 능히 헤아리게 될 것이다. 경비Ξ扉는 문이나 출입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립짝으로 된 사립문은 항시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나무 부스러기나 풀 사리로 만들어진 그 모양새 때문일까? 닫고 잠그고 해봐야 손으로 슬쩍 미는 것만으로도 무너지는 게 사립문이다.
그러니 울이 그렇듯이 사립문도 닫았다고 해도 닫혀 있는 게 아니다. 열려 있는 것이다.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웠다. 낯선 사람조차도 헛기침 한번 토하고는 들어설 수 있는 문, 그런 게 사립문이다.
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기 위해 있는 문. 무슨 말인지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디지털 도어록으로 꼭꼭 걸어 잠그고 아파트를 지키는 오늘의 우리로서는 영영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마당
뛰놀고 싶어진다. 씨름도 하고 닭싸움도 벌이고 싶어진다. 여자아이 같으면 어머니나 언니가 알뜰하게 콩깍지를 털고 있는 것도 모른 척하고 오순도순 소꿉놀이를 즐기고 싶어진다. 따뜻한 햇볕이 드는, 저쯤 구석에 있는 외양간에서는 어미 소가 낮잠을 깨다 말고 하품을 내쉬고 있다.
‘마당을 빌린다’고 하면 신랑이 신부 집 마당에서 초례醮禮를, 그러니까 결혼식을 치른다는 뜻이니까, 이 경우의 마당은 깍듯한 예식장이 된다. 그래서 마당은 일터가 되고 놀이터가 되는가 하면, 쉼터가 되기도 했다. 예식장이 되고 잔치판이 되기도 했다. 삶의 텃밭이고 안식의 터전이었다. 전통의 한국인은 마당에 목숨을 맡기고 마음을 담고 살아왔다. 한국인에게 마당은 만능의 공간이었다. ‘마당쇠’라고 일컬어지던 머슴만을 위한 장소가 결코 아니었다.
마당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뜰과 같은 뜻으로 집채 앞뒤의 빈 공간을 가리킨다. 이건 흔히 ‘안마당’이라고 불렸고, 이와 대별되는 ‘바깥마당’은 마을 안의 넓은 터전으로서 온 동네가 함께 누리는 공간이게 마련이었다.
안마당으로는 대문 또는 사립문과 바깥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빈터가 제격이다. 섬돌을 밟고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훤히 내다보이는 공간이다. 대개는 남향 바라지이게 마련인데, 겨울에는 낮 동안에 집 안이 양지바르게 햇살 잘 받고 여름엔 온 집 안에 시원한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기도 해서 대개는 비질로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마당으로 하여 방 안이나 마루에 앉아서도 눈길이 시원하게 틜 수 있었다. 그걸로 집은 닫힌 곳이면서 동시에 열린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이 땅의 집과 공간을 말하게 될 때, 기막힌 장점으로 매우 강조되어도 좋을 것이다. 바깥채의 장지문을 열고 대문을 마주 보고 앉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하늘을 향해 시원히 열린 사람이 된다. 이래서 전통적인 한국인은 방 안에 앉은 채로, 또는 마루에 누운 채로도 ‘열린 사람’일 수 있었다. 이것은 아파트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이런 점 말고도 안마당은 무슨 일거리를 위해서도 큰 쓸모가 있는 공간이었다. 그냥 종일 비어 있는 일은 좀체 없었다. 여인네들이 마당질한 곡식 낟알을 말리는 일 말고도, 남정네들의 타작 터로도 활용되었으니 말이다. ‘마당질’이라면 이삭을 털어서 낟알을 털어내는 일을 의미했으니까, 그게 마당에서 하는 일거리의 대표인 셈이다.
하지만 이 안마당 말고도 전혀 다른 마당이 있었다. 그것은 대개 동네 바깥에 있는 공터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깥이라고는 해도 영 한데는 아니었다. 마을 고샅에 들어서기 전, 그 들목에서 지나치게 되어 있는 공터야말로 본격적인 마당인 셈이었다. 이건 ‘마을 마당’이라고도, 또는 ‘바깥마당’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마을 마당’은 동네 어귀의 두서너 집에 에워싸이다시피 한 공간이라서 바깥이라고는 하지만 아늑하기로 치자면 더할 나위가 없는 터였다. 그곳은 마을 공동의 광장이었다. 공중 운동장인가 하면, 공중 유희장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의 집회장이기도 했다. 국회, 아니 마을 사람들의 ‘촌회村會’가 개최되는 의사당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마을 마당은 다용도·다목적의 유용한 공간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제집 안마당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도 마을 사람들은 이웃이 되고 한 동아리가 될 수 있었다.
이래서 마당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공동체의 장場이었다. 광장廣場의 본래의 뜻이며 구실을 제대로 고루 갖춘 터전이었다. 어른들은 마을에 일이 생길 적마다, 중론이 필요할 적마다, 이 마당에서 모임을 가지고 토론하고 의논했다. 혹 마을의 운이 사나워 범법자나 인간 윤리를 어긴 개망나니가 생기면 어떤 벌을 줄까, 어떻게 처벌하고 응징해야 하는가를 두고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당은 영락없는 법정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런 진지한 공간이던 마당은 어느새 훌쩍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어른들은 거기서 윷판을 놀았다. 그에 질세라 꼬맹이들은 그들대로 마당을 놀이터로 삼았다. 사내애들은 그곳을 술래잡기의 본거지로 삼았고, 거기서 씨름판을 벌이는 한편, 자치기 따위의 놀이로 흥청댔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뜀질하면서 납작한 돌을 차고 노는 ‘시차기’를 즐기다 말고는 줄넘기로 재미를 누리기도 했다.
두 여자아이가 마주 보고 갈라서서는 줄잡이를 맡는다. 긴 고무줄이 아니면 동아줄이나 새끼줄을 맞잡고는 위아래로 빙빙 돌려댄다. 다른 아이들은 돌아치는 줄 새를 비집고는 뛰고 또 뛰었다. 줄잡이는 줄을 돌리는 장단에 맞추고, 뜀질하는 축은 뜀질하는 장단에 맞추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뛰어라, 뛰어라. 토끼처럼 펄쩍펄쩍!
강동강동! 강동거려 놀아라!
줄에 걸리면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게 껑충껑충 뛰어라!
이런 투의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의 줄 돌리기며 줄타기는 더 한층 신명을 돋운다.
또는 다른 방식으로 줄 놀이를 하기도 했다. 두 여자아이가 마주 보고 앉아서는 줄을 쌀랑쌀랑 땅바닥에 대놓고는 좌로 우로 번갈아서 흔들어댄다. 슬쩍슬쩍 흙먼지가 이는 것과 아울러서 다른 아이들은 움직이는 줄을 넘어서며 오락가락 춤을 춘다. 물론 노래 장단에 맞추어 무용을 하다시피 한다.
그런데 이게 뭐람? 난데없이 심술꾸러기 사내아이 한두 녀석이 끼어든다. 그냥 끼어드는 게 아니다. 줄을 잡아채거나 짓밟으면서 훼방을 놓는 게 아닌가! “이 녀석, 쳐 죽일 녀석!” 여자아이들이 제법 강단 있게 대들면 심술쟁이는 냅다 줄행랑을 놓았다. 그걸 놓칠세라 여자아이들도 치맛바람도 거칠게 그 뒤를 쫓곤 했다. 이런 소란만큼이나 놀이판은 갖가지 신바람을 피우게 된다. 훼방질도 도망질도 뒤쫓아 잡으러 가는 것도, 이런 것들은 또 그것대로 또 다른 ‘마당의 놀이판’이었다.
이렇게 안마당은 안마당대로 바깥마당은 바깥마당대로 제 구실을 맡아 했다. 안마당은 가족을 위한 공동의 광장이었고, 바깥마당은 마을 전체를 위한 광장이었다. 그런 중에도 바깥마당의 구실은 특별한 것이었다. 마을 안이 온통 한 덩치가 되고 한 동아리가 되어서 뭉치도록 하는 게 그 구실이었다.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거기서 하나로 어우러졌다. 한마음 한뜻이 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 크고 작은 도시에는 광장이 별로 없다. 혹 있다 해도 그건 그저 텅텅 빈 공터일 뿐.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우러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마음 하나로 뭉치게 되는 그 어우러짐이 이젠 사라져가고 있다.
바자울
‘울도 담도 없는 집’이란, 말 그대로는 ‘울타리도 담장도 없는 집’이란 뜻이지만, 둘러서는 ‘의지가지도 없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지켜주고 막아줄 장치도 수단도 없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치면 옷가지도 하나 걸치지 못하고 알몸인 것과 마찬가지. 그러니 울이며 담, 울타리나 담장은 집 둘레에 처져 있거나 세워져 있게 마련이다.
한데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나 맡고 있는 구실은 비슷하지만 담과 바자울은 많이 다르다. 담이라면 흙담과 돌담이 있는데, 흙담(토담)은 주로 흙으로 쌓아올리면서 군데군데 돌을 섞어 넣고, 돌담은 순전히 돌로만 쌓아올린다. 그러니 돌담은 말할 것도 없고 토담만 해도 굳건하고 단단한 편이다. 하지만 바자울은 풀과 나무로 세운 것이라서 부실하기 짝이 없다. 띠나 갈대 또는 수수깡을 철사로 엮어서 큰 방석 모양으로 네모꼴을 만들면 그걸 울바자 또는 바자라고 했다. 그것들을 다시 또 옆줄로 엮되, 중간중간 대나무나 그 밖의 나무줄기를 세워 엮어서는 뜰 바깥의 집 둘레에다 세우면 그걸로 울바자 또는 바자울이 완성되었다. 그러니 부자들의 기와집을 에워싼 돌담에 비하자면 바자울은 살림이 넉넉지 못한 집의 몫이었다. 초가집 바깥으로 둘러쳐진 바자울은 높지도 실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지막하게 뜰 바깥으로 둘러쳐진 바자울은 고즈넉하고 안온하고 정겹기가 이를 데 없었다. 바자울은 구태여 집 안과 집 밖을 갈라놓지도 않는다. ‘울’이란 말이 한 식구나 일가친척을 두고 쓰이기도 했듯이, 그것은 서로 마음 터놓고 의지해서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예컨대 ‘울이 세다’고 하면, ‘일가친척이 많다’는 뜻이 되기도 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열어놓는 마음의 울이 울바자의 울이며, 울타리의 울과 그 말의 뿌리가 같다는 것에 마음을 쓰고 싶다. 사립짝이나 사립문이 그렇듯이 바자울의 울이 집 안과 바깥, 이 집과 저 집을 갈라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르면서도 서로 열고 맺고 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도시의 콘크리트 벽이며 시멘트 담과는 사뭇 다르다. 그건 악착같이 막고 갈라놓기만 하기 때문이다.
바자울 안으로는 초가집채가 환하게 들여다보였고, 뜰 안과 바깥채의 대청마루가 들여다보이기도 했다. 괭이 메고 지나가는 이웃과 대청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집주인의 눈이 마주치면 서로 빙긋 웃기도 했다. “아침 잡수셨소?” “어디 가는 길이오?” 하고 다정하게 인사말이 오가기도 했다. 때맞추어 지나치던 갑돌이가 마당 건너 안채에다 대놓고는 소리치기도 했다. “꽃순아, 학교 가자.”
그래서도 울바자는 이웃과 이웃 사이에서 ‘울이 센’ 구실을 정겹게 맡아내었다. 한데 그 울은 약해진 게 아니라 이젠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서로 정을 터놓을 울은 이제 없다. 다만 시멘트 벽이, 콘크리트 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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