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무엇이 서울음식인가
황교익
2003년 서울시에서 ‘서울의 전통음식점 발굴지정’ 사업 공고를 내었다. 그 지정 대상을 보면 “지역의 식재료와 고유의 조리방법을 써서 한국음식의 맛과 향을 이어 가는 친환경 음식점”이라 되어 있었다. 서울시의 사업이니 ‘지역’이라는 범위를 대한민국 전체를 상정한 것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서울의 식재료’와 ‘서울 고유의 조리방법’을 지정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업은 ‘서울에 있는 한국 전통음식점 선정 사업’이라기보다 ‘서울의 전통음식을 내는 음식점 선정 사업’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시의 이 공고를 보고 과연 서울의 식당에서 팔리고 있는 서울의 전통음식에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궁중음식, 설렁탕, 빈대떡, 민어탕 정도는 옛 문헌에도 있는 것이니 곧장 떠올랐지만 그 다음의 목록은 쉬 작성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근대화 이후 서울 곳곳에서 발생한 ‘동네 음식’이 눈에 들었다. 장충동 족발, 신림동 순대, 신당동 떡볶이, 을지로 골뱅이, 마포 돼지갈비, 왕십리 곱창 같은 것들이다. 대체로 서울의 서민이 먹는 음식이다. 서울시에서 이런 음식을 내는 식당들을 선정할까 의심이 들었는데, 결과는 그 의심을 현실화하였다. 서울시에서 내놓은 결과물은 ‘서울시 선정 자랑스런 한국음식점’이었고 한정식집, 한국전통음식점, 쇠고깃집, 횟집 등이 주로 선정되었다. 위생과 규모 등도 감안한 것이겠지만, 내 눈에는 ‘서울시 공무원 접대하기 좋은 음식점 목록’으로만 보였다. 서울시는 이 자랑스런 한국음식점 선정 사업을 매년 지속하고 있다.
서울은 한성이 아니다
서울은 조선시대 왕가가 있었던 도시이다. 왕족이 사는 궁궐이 있었고, 그 왕족에 빌붙어 사는 양반과, 그 양반의 수족 노릇을 하는 중인과 상민, 노비들의 공간까지를 성으로 둘러 한성이라 하였다. 한성 담장 안에 살았던 인구는 조선 중후기 기준으로 20만 명 수준이었다. 한국인은 서울이라 하면 조선의 이 한성을 먼저 떠올린다. ‘500년 조선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도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맥락에서 보자면 2010년대 현재의 서울은 조선시대의 한성과 큰 관련이 없다. 서울의 중심부에 궁궐과 사대문, 성곽 등 조선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문화란 집단의 구성원이 지닌 사유와 행동 그리고 생활의 한 양식으로, 서울은 한성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구성원들로 채워져 있어 한성의 문화적 전통을 서울이 잇고 있다고 볼 근거는 매우 희박한 것이다.
조선의 한성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이 되었고 그 면적과 인구를 급격히 늘려 1942년에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가 되었다. 물론 많은 일본인도 함께 살았고, 그들의 생활문화가 곳곳에 이식되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물러난 자리를 귀환동포와 탈농자들이 채웠다. 한국전쟁 중에는 잠시 인구가 줄기도 하였지만 1950년대에 2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개발연대인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은 그때까지와는 또 다른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서울의 면적이 크게 넓어졌고 한반도 남쪽의 인구를 급속히 흡입하였다. 서울 인구는 1960년대에는 400만 명을 넘겼고 1970년대에는 800만 명에 이르렀다. 1980년대 중반 드디어 인구 1000만 명의 거대도시가 되었으며, 서울의 주변 도시를 포함한 수도권의 인구로 계산을 하면 2010년대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에 이른다. 이 거대도시 서울의 범위와 이곳에 살고 있는 구성원의 성격을 보자면 조선시대 한성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서울음식이라 하면 서울 ‘전통’음식부터 떠올린다. 또 그 전통은 조선에 닿아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서울음식 중에 일부 그런 음식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이 현재 먹고 있는 서울음식 중에 조선에도 있었던 음식은 별로 없다. 또 조선에 있었다 하여도 지금은 식재료와 조리기구가 바뀌어 그 맛과 스타일이 크게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음식이 있었고 대한민국에는 서울음식이 있다고 그 경계를 갈라 보는 것이 현재 서울 사람들이 먹고 있는 서울음식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음식과 관련되는 서양의 격언 중에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음식에는 그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음식이 인문학적 고찰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생각을 서울의 음식에 적용하면, 서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살피면 서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인문학적 작업을 위해서는 먼저 서울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유와 행동 그리고 생활의 양식을 파악하는 일이 우선일 것인데, 최근 100년 이내에 이 서울이 변화해 온 것을 보면 그 구성원의 사회문화적 성격조차 종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복잡하여 어디서부터 이 작업의 가닥을 잡아야 하는지 난감해지게 된다. 심하게 말하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그 구성원들로 문화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의심이 들기까지 한다. 그러니 과연 서울음식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음식, 그러니까 서울의 문화적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는 음식이 존재하기는 하는가부터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서울 사람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서울음식이란 게 없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해 버리면 이 책은 기획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서울음식이란 대체 무엇이지?’ 하는 정도의 화두를 가지고, 혹 서울의 여러 음식에서 서울이 문화공동체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을 동력으로 하여 서울음식을 취재하고 이렇게 책으로 엮게 된 것이다.
음식을 먹으며 서울 사람이라 생각하기
서울음식을 거칠게 정의하면, ‘서울 사람들이 두루 먹으며, 또 그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이 서울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음식’ 정도가 될 것이다. ‘서울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진……’ 같은 조건을 두지 않은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서울이라는 공간과 그 구성원이 짧은 시간에 조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 한성의 음식이 지금의 서울음식으로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되도록 현재의 서울음식에 대해 집중해 보자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물론 한 음식의 유래가 멀리 조선, 고려, 더 나아가 고조선에까지 닿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음식에 조선, 고려, 더 나아가 고조선의 문화적 전통이 내포되어 있는지, 또 그 전통을 지금의 서울음식에서 찾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일단은 이런 생각을 버려 두는 것이 바를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래도 단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글 중간중간에 ‘전통 잇기’를 시도한 흔적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취재와 집필 편의상 서울음식이라 할 만한 것을 선별할 때의 기준은 서울 각 지역에 몇몇의 식당이 몰려 있는 음식으로 하였다. 그러니까 종로 빈대떡과 설렁탕, 신당동 떡볶이, 을지로 골뱅이와 평양냉면, 동대문 닭한마리, 오장동 함흥냉면, 신림동 순대, 마포 돼지갈비, 왕십리 곱창, 장충동 족발, 성북동 칼국수 등등이 그 취재 대상이 되었다. 음식 선정의 기준은 서울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인가이다. 단지 맛이 좋은 식당이 몰려 있을 뿐인 음식이라면 그게 서울음식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강조하건대, 서울음식이란 ‘서울 사람들이 두루 먹으며, 또 그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이 서울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음식’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은 기획되었고, 또 그 생각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취재와 집필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늘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 책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일리一理의 서울음식이다. 서울음식에서 또 다른 일리를 찾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리가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기쁜 일일 것이다.
오, 소대가리 서울이여!
정은숙
설렁설렁 먹기 좋아 설렁탕이라는데, 이게 그럴싸하다. 설렁탕은 밥을 말아 먹는 국밥의 일종이다. 큰 솥에 잔뜩 고아 놓고 밥에 부어 후루룩 먹으면 그만이다.
이 설렁탕이 오랫동안 서울 사는 서민들이 가장 즐기는 바깥음식이었으며 타지 사람들이 한 번쯤 먹고 싶어 했던 서울의 명물이었다는 사실을, 서울 사람들은 잘 모른다. 1926년 《동아일보》 기사 ‘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 설렁탕과 뚝배기’를 보면 “탕반 하면 대구大邱가 따라붙는 것처럼 설렁탕 하면 서울이 따라붙는다. 이만큼 설렁탕은 서울의 명물이다. 그래서 서울 큰 골목 쳐 놓고 설렁탕 팔지 않는 곳이 없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서울이 경성이라고 불리던 시절, 설렁탕은 그리특별할 것 없이 가장 흔한 서울의 대중음식이었으며 또한 서울을 대표하는 음식의 하나였다.
근대잡지인 《별건곤》(1932년 4월)에 실린 기사 ‘소대가리 경성, 시골학생이 처음 본 서울 재경초 일기’는 당시 설렁탕집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어 흥미롭다.
서울 명물 설넝탕이 어떠한 것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콩멍석만 한 김 서리는 가마 속에 소대가리가 푹 솟아 있다. 그 옆에는 죽어서도 악착한 희생을 당하였다는 듯이 소 해골바가지 서너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또 한편에는 신사 양반들이 모지라진 숟가락으로 뚝배기 바닥을 달그락달그락 긁으면서 국물을 훌훌 마시며 하는 말씀, “어- 이제 속이 풀리는군!” 소대가리 삶은 물 먹어 저렇게도 좋을까. 서울의 모든 것이 다 좋으나 설넝탕만은 악인상을 준다. 무심결에 외쳐지는 소리. 오- 소대가리 서울이여!
“소 해골바가지 서너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라는 것을 빼놓고는 지금의 설렁탕집과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모던한 대도시 경성을 꿈꾸었을 인텔리 시골 총각의 눈에는 쇠대가리 삶은 허연 국물로만 보이는 설렁탕과 너저분한 설렁탕집 풍경이 그리 탐탁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냉소적인 독설이 돋보이나, 아직 서울의 맛을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던가. 언제부터인가 서울 뒷골목 설렁탕집에서 “모지라진 숟가락으로” 뚝배기 바닥을 긁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옛 생각에 겸연쩍이 웃지는 않았을까.
한편 이보다 몇 년 전(1929년 9월)에 나온 같은 잡지의 기사 ‘경성 명물집’에서는 설렁탕을 “값이 싸며 맛으로도 영양으로도 상당히 가치가 있다”고 평한다. 설렁설렁 먹는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 한 끼라도 먹으면 기특하게 힘이 나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설렁탕을 대하는 서울 사람들의 정서는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에서 병든 아내가 인력거꾼인 남편 김첨지에게 먹고 싶다며 사 달라고 하였던 것도 설렁탕이었다. 값싼 설렁탕 한 그릇 제대로 살 수 없었던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경성의 가난뱅이 김첨지. 돈벌이가 좋았던 어느 운수 좋은 날, 술 한잔 걸친 김첨지는 요즘 들어 더 쿨룩거리던 아내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방 안에는 미친 듯이 죽은 아내의 얼굴을 비비며 중얼대는 김첨지의 말이 공허하게 퍼질 뿐이었다.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 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오, 소대가리의 서울이여! 운수 없던 그날의 설렁탕이여!
잠배설렁탕의 전설을 찾아
전일에는 南門(남문) 밖 紫巖(잠배)설넝탕을 제일로 쳐서 동지섣달 추운 밤에도 10여 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여름날에 貞陵(정릉) 물마지나 악바위골 藥水(약수) 먹으러 갔듯이 爭頭(쟁두)를 하고 갔었지만은 지금은 시내 각처에 설넝탕집이 생긴 까닭에 그것도 時勢(시세)를 잃었다. 시내 설넝탕집도 數(수)로 치면 꽤 만치만은 그중에는 鍾路里門(종로이문) 안 설넝탕이라던지 長橋(장교)설넝탕, 샌전 一三屋(일삼옥)설넝탕이 전날 잠배설넝탕의 勢道(세도)를 繼承(계승)한 듯하다.
- 《별건곤》(1929. 9), ‘경성 명물집’ 중에서
위의 글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가 서울 사대문을 들락날락하면서 허기진 배를 채웠을지도 모를 그때 그 시절, 사대문 안팎으로 잘나가는 설렁탕집을 소개하고 있다. 여름날 물맞이를 하려고 서울 여인네들이 정릉계곡에 앞다투어 모여들었듯이, 설렁탕 한 그릇 먹으려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모여들었다는 ‘잠배설렁탕’의 존재가 사뭇 궁금하다. 잠배紫巖란 보랏빛의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남문 밖이라고 했으니 남대문 바깥쪽 언저리인 서울역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글 속의 잠배설렁탕과 이름이 흡사한 ‘잼배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서소문동 시청역 9번 출구 가까이에 있다. 1933년 서울역 뒤편인 잠배골에서 설렁탕집을 처음 시작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몇 번 이사를 다니다가 1974년부터는 이곳에서 계속 설렁탕을 끓여 오고 있다. 위 잡지에 등장하는 잠배설렁탕과 어떤 관계인지 묻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았나 보다. 3대째 사장인 김경배 씨(47)의 아내 윤경숙 씨(41)에게 “같은 설렁탕집이냐”고 묻자 “맞다”라는 대답이 바로 나온다. 그러나 잡지는 1929년에 발간되었고 잼배옥은 1933년에 문을 열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다.
알고 보니 그녀의 대답은 작고한 저널리스트 홍승면의 음식에세이 《백미백상 2(꿈을 끼운 샌드위치)》에 실린 “6.25 때까지만 해도 남대문 밖에서는 서울역 앞 동자동의 ‘잠배옥’이 손꼽혔다”라는 문구를 두고 얘기한 것이었다. 노포의 경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개업 연도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있을 수 있다.
점심시간, 오피스가의 뒷골목에 위치한 까닭에 넥타이 부대들이 잼배옥에 삼삼오오 모여든다. 예전처럼 값이 싸지는 않지만 ‘진국’을 들이켜는 데 그들은 점심 값으로 8,000원을 기꺼이 치른다. 배추김치, 깍두기, 볶은 김치, 세 종류의 김치가 담긴 스테인리스 통이 식탁 위에 놓이고 잠시 후 검은 뚝배기에 담긴 누릿한 설렁탕을 종업원이 무심히도 놓고 간다. 종종 다진 파를 넣으니 그제서야 색감이 입맛을 돋운다. 첫입에 특유의 향이 느껴졌지만 먹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게 뒷맛이 달다. 남대문을 둘러싸고 전차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1920년대 그 시절 잠배설렁탕의 맛 또한 이러하였을까. 억지스럽게도 나는 자꾸 이곳에서 그 맛을 느끼려 한다.
가게 한 면에 1974년 재개업 당시의 흑백사진이 붙어 있다. 그 사진 속에서 ‘연회방 완비’라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가게 주변에 기업, 공공기관, 언론사 등이 많았던 까닭일 것이다. 수육을 내던 설렁탕집은 1970~80년대 직장인들의 회식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이곳에는 1920년대의 전설의 맛보다는 ‘경제발전’을 외치던 1970년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심 속 직장인들의 기를 보충해 준 뜨끈한 국물의 맛이 있다는 것이 더 맞다.
한 세기를 이어 온 맛, 이문설렁탕
선술집이든 국밥집이든, 옛날에는 그렇다 할 이름이 없었다. 그저 지명이나 주인네의 생김새, 출신지를 따 식당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앞의 《별건곤》 기사를 보면 ‘잠배설렁탕’을 젖히고 새롭게 부상하는 신생 설렁탕집으로 ‘종로이문 안 설넝탕’을 들고 있다. ‘이문里門’이란 세조의 명으로 마을 입구마다 위치한 방범초소로, 그 부근까지 아우르는 지명이다.
운종가로부터 대사동(인사동)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종로이문은 인사동 222번지로 옛 화신백화점 뒤쪽에 있었다. 예부터 이곳에는 이문이라는 상호를 붙인 음식점이 많았다. 서울 사대문 토박이라면 이 정도 이야기에 떠오르는 음식점이 하나 있을 것이다.
구한말 문을 연 이문옥은 지금은 자취도 없고 그 골목 안으로 더 들어간 과녘빼기에 이문식당이라는 설렁탕집이 일제시대에 문을 열었다. 이 이문식당은 이문설렁탕이라고 이름을 바꾸며 지금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 《동아일보》(1993. 7. 29) 기사 ‘서울 재발견 장국밥집 140년 전에 첫선’ 중에서
100년이 넘는 세월을 담아 한국 최고最古의 식당으로 알려진 ‘이문설렁탕’이다. 잡지 속 ‘종로이문 안 설넝탕’은 혹 이곳인가? 1904년에 문을 연 것으로 알려진 이문설렁탕은 옛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 뒤쪽 이문里門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심 뒷골목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흙벽 한옥 설렁탕집이었다. 거대한 종로타워가 생기면서 그 모습이 생뚱맞아지긴 했지만, 옛 주막 같은 정취가 남아 있어 좋았다. 그러나 종로 뒷골목을 뒤집어엎는 개발로 인해 가게는 견지동으로 옮겨 가고 곧 철거될 한옥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먹는 맛에 또 다른 맛을 보태던 세월의 멋을 다시 느낄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100여 년 동안 이곳의 문지방을 드나든 사람들의 얘기를 하자면 끝이 있겠는가! 중절모에 양복을 빼입은 건장한 신사가 몇 명의 사내들을 이끌고 전차가 방금 지나간 종로대로를 건너 화신백화점 뒷골목으로 향한다. 그들이 들어가 자리 잡은 곳은 바로 이문설렁탕. 그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김두한이구먼” 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종로의 주먹세계를 평정한 ‘장군의 아들’ 김두한. 그는 청년 시절 잠깐 일한 연이 있는 이곳에 종종 식솔들을 데리고 와 설렁탕을 즐겼다고 한다. 어디 김두한뿐이겠는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부통령 이시영, 국문학자 이희승, 남로당 당수 박헌영 등 현대사의 내로라 할 인물들이 종로 거리를 바쁘게 왕래하면서 이곳을 찾았다.
긴 세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손님들의 흔적 또한 이문설렁탕의 맛의 깊이를 더하는 또 다른 맛이다. 인이 박여 그리고 그동안의 정에 이끌려 그냥 발길이 이쪽으로 향한다는 백발의 노신사 두 명이 뚝배기를 들더니 남은 국물을 죽 들이켠다. 혼자 와서 설렁탕 한 그릇 후다닥 비우고 나가는 손님의 모습도 자주 보인다. 장터 목로에 앉아 먹던 장국밥처럼 설렁탕 역시 혼자 먹어도 그리 외롭지 않다.
3대째 사장인 전성근 씨(67)에 의하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절반은 젊을 때부터 다니면서 황혼을 맞은 단골들이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왔던 철부지 아들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어린 손자를 이끌고 온다. 서울 어느 동네나 설렁탕집 하나쯤은 있겠지만 굳이 이곳을 찾는 데는 그러한 연유가 있다. 오랜 세월 문턱을 드나들던 사람들에게 이곳의 설렁탕은 차곡차곡 쌓아 온 지난 추억이 함께 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손에 닳고 닳은 식탁 위에 김 오르는 뚝배기가 놓인다. 혀, 도가니, 머릿고기, 양지머리, 지라 등 소의 온갖 부위를 푹 고아 기름을 말끔히 걷어 낸 설렁탕의 빛깔이 너무 뽀얗지 않은 것이 정직하다. 부위마다 삶아 내는 시간이 다르다는데, 말도가니는 4시간, 혀와 머릿고기, 지라는 2시간, 양지머리는 1시간 30분 정도 삶아 낸다고 한다.
‘특’을 시킨 까닭일까, 국수 위에 올려진 까닭일까? 얹어 나온 고깃덩어리가 풍성해 보인다. 함께 온 일본 통신사의 특파원이 내게 묻는다. “국밥은 밥을 마는 것이 맛있어요, 따로 먹는 것이 맛있어요?” 이문설렁탕은 예나 지금이나 밥을 말아 내준다. 나는 답한다. “설렁탕은 밥에 국물 맛이, 국물에 밥맛이 배야 맛있어. 밥을 말아 시큼한 깍두기랑 먹는 게 최고라고!”
설렁탕과 깍두기는 바늘과 실이다. 시원하면서 신맛이 도는 깍두기는 설렁탕의 느끼한 맛을 상쇄해 준다. 설렁탕이 서울의 명물인 것처럼 깍두기도 서울의 명물이었다. 부산의 유명한 설렁탕집 이름이 ‘서울깍뚜기’인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문설렁탕에는 깍두기만 담당하는 조리사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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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지동으로 이전하기 전의 이문설렁탕. 100년쯤 된 2층 목조건물은 재개발로 인해 헐릴 예정이다. |
작고한 저널리스트 홍승면의 《백미백상 2(꿈을 끼운 샌드위치)》를 보면 “나는 살코기만이 들어간 얼치기 설렁탕은 질색이다. 설렁탕의 생명은 국이지만, 건더기는 연골이나 섯밑(소의 혀 밑에 붙은 살코기, 혀밑이라고도 한다)이나 또는 만하, 콩팥 따위의 내장이 들어가야 제격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요즘 설렁탕은 그가 말한 얼치기 설렁탕이 많다. 그러나 이곳은 살코기 외에 만하, 머릿고기, 혀 등이 제대로 들어가 있다. 사실 나는 만하(지라)의 맛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오는 오래된 단골들은 살코기보다 그 맛을 쳐 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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