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학교
나는 10년 동안 교사로 지낸 뒤, 파블리시의 한 초등학교의 책임자로 발령받았다. 이곳에서 지난 10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교육에 대해 내가 가졌던 믿음들은 체계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그 확고한 믿음들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 믿음들을 실제로 실행하면 실행할수록, 학교 책임자의 구실은 교육적인 노력이라는 사실 또한 더욱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학교 전반에 걸친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교육 공동체의 조직자로서 학교 책임자의 효율성 정도는 교사들이 자신들을 훌륭한 교사로 여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직접 참여할 때 매우 증가한다.
교육은 무엇보다 교사와 아이들이 끊임없이 마음을 나눔으로써 이루어진다. 러시아의 위대한 교육자인 K. D. 우신스키는 학교 책임자를 교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교장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 교사들을 통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즉 교사들에게 교육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교를 운영하는 여러 측면 가운데 한 면에 불과하다. 만일 교장이 교사들에게만 교수법을 가르치고 자기 자신은 아이들과 직접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더는 교육자가 아니다.
나는 학교 책임자로 처음 몇 주를 보낸 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내가 아이들의 관심거리와 취미, 꿈을 그들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마음에 다다르는 길은 꽉 막히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직접 가르칠 수 없다면, 학교 책임자로서 나는 교육자와 교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아이들의 내면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담임교사들을 부러워했는데 그 까닭은 담임교사가 되면 늘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고, 숲이나 냇가로 함께 나가고, 학교 농장에서 일도 함께한다. 아이들은 소풍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손수 만들고, 낚시하거나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야영하는 날들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학교 책임자는 이 모든 활동에서 방관자가 되어 멀찌감치 서 있다. 그는 단지 그런 활동들을 꾸리고, 조언을 해주고, 단점들을 기록해 고쳐 주고, 좋은 것은 장려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금지할 뿐이다. 물론 이런 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책임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적극 참여하는 뛰어난 학교 책임자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의 수업은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는데, 그런 교장 선생님들이야말로 교육과정을 진행하는 진정한 지도자이다.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해가 갈수록 그 믿음이 더 강해졌는데, 학교 책임자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오랜 시간에 걸친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교육자로서 최고 수준의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아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교사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인 아이들과 친밀감을 느끼고 싶었다. 때때로 나는 아이들의 활동 한두 가지에 참여하기도 했다. 완전한 교육을 위해 빠져서는 안 되는 야영이나 소풍 따위의 야외 활동에 아이들이 순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면서 아이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아이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뭔가 인위적인 것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이처럼 부자연스러운 교육 상황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아이들도 내가 저희와 잠깐만 함께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진정한 공동체는 교사가 아이들과 공통 과제를 함께하는 오랜 동무이고, 동료이고, 동지일 때에 태어난다. 공동체에서 얻는 창조의 기쁨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동료 교사들에게 참된 교육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그런 공동체가 꼭 필요했다.
날마다 아이들과 부딪치고 함께 부대끼며 생활하는 것은 생각과 교육의 발견, 기쁨과 슬픔, 각성의 밑거름이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에 창조성 또한 있을 수 없다. 나는 학교의 교장은 아이들 공동체의 지도자이면서 또한 아이들의 동무와 동지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파블리시에 오기 오래전에 이미 이 사실을 확고하게 믿었다. 내가 교사가 되어 처음 몇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난 뒤에, 아이들이 지식과 기술만 익히는 곳은 참다운 학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공부도 중요하다. 하지만 공부가 아이들 삶의 전부는 아니다.
교육과정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할수록, 교사와 아이들이 다양한 관심거리와 취미로 하나가 된 공동체, 바로 그런 공동체의 다양한 정신적인 삶이 진정한 학교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교사는 책상 이쪽에, 학생들은 책상 저쪽에 이렇게 서로 떨어진 채 수업시간에만 학생들과 만나는 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을 모르는 사람,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과 꿈에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다.
때때로 교사의 책상은 돌로 만든 벽과 같은데, 교사는 그 벽 뒤에 숨어서 자신의 적을 공격한다. 바로 아이들 말이다. 하지만 대개 그 책상은 포위당한 성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적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에 갇힌 지휘관은 자신의 두 손이 꽁꽁 묶였다고 느낀다. 자신들의 수업 주제를 잘 알고 있는 교사들에게도 교육은 때때로 힘든 전쟁으로 변하곤 한다. 왜냐하면, 교사와 학생들을 묶어 주는 영혼의 끈이 아예 없고, 아이들의 영혼은 자주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교사와 아이들 사이가 이렇게 나쁘거나 아예 불가능한 까닭은 서로에 대해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교사는 아이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지 않는다. 아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더불어 나누지 않고 아이들 처지가 되어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폴란드의 저명한 교육학자인 야누스 코르차크가 쓴 한 통의 편지가 생각난다. 그가 말하길, 교육자는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의 영혼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매우 민감한 개념이다.
교육자는 아이들의 특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이상화하거나 일반화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몸소 아이들의 순수함, 민감함에 대하여 직관을 하고, 아이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주변의 현실에 대한 감성적인 반응과 도덕적인 반응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이들의 영혼 세계로 우리 자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코르차크의 주문은 아이들 고유의 세상, 즉 아이들의 정신과 마음을 이해하고 느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진정한 교육자가 되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자질들이 있다고 믿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질이 바로 아이들의 영혼 세계로 들어가는 능력이다. 자기 자신도 한때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교사가 될 수 있다.
많은 선생님(특히 10대 아이들이 구닥다리라고 부르는 선생님들)의 불행은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이제 막 지식과 창의성과 인간관계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는다는 점이다. 교육에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행위는 없다. 수업은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는 세상을 알게 되는 과정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아이들의 영적인 삶은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는 방법과 아이들이 만드는 사랑과 믿음의 종류에 달려 있다. 배움의 세계는 똑같이 익히고 따라 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선생님들이 빠지는 재난은 아이들의 정신세계를 오직 등급으로 매기고, 점수로만 평가하면서 모든 아이를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과 그 나머지 학생들로 말이다.
교사가 인간 영혼의 다양한 삶을 오직 한 가지 견해로만 이해하면서 이런 불행한 상황에 빠진다면, 단지 교사들의 직무를 감독하고, 일반적인 지시를 내리고, 허가를 주거나 주지 않는 일만 하는 학교 관리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그 사람의 상황은 더 불행하다. 나는 그런 역할로 갇혀 있다고 느꼈다. 학교 안을 둘러보며 학생들을 살펴보다가 아이들이 선생님과 즐겁게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 평교사 시절이 그리워진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나눌 때에는 아이들이 선생님과 마음을 충만하게 나누고 있기 때문에 누가 다가가도 모른다. 그들에게 그런 학교 관리자들은 필요 없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의 많은 학교에 관행처럼 행해지던 지도자의 형태와 방법은 실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그 무렵의 학교 관리자들은 위에서 교사들을 감독하는 감독관이자, 교사들이 교육 프로그램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설명하는지 따위를 감시하는 교육 행정관에 불과했다. 상부에서 아무런 지시가 없으면 자기들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법도 없었고, 따라서 불필요한 어떤 실수도 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학교 지도자의 본질은 교육의 힘든 과제 속에서 교사들의 눈에 진보적인 교육이념을 구체화한 최상의 경험이 창조되고, 자라고, 강화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창조하고 다른 교육자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 학교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그 자신이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한 그런 관리자가 없는 학교는 상상하기도 싫다.
교육은 무엇보다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친다. 아이들에 대한 지식, 즉 아이들의 정신 발달, 사고, 관심거리, 취미, 능력, 직관, 성향에 관한 이해가 없다면 교육도 없다. 병원 원장이면서 환자들을 진료하지 않는 병원장은 진정한 의사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장도 손수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다른 교사들을 이끌 수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졸업장을 받는 날까지 교장은 아이들의 정신적·도덕적·심미적·감정적·신체적 발달에 관여하면서 아이들이 자라나는 단계를 아이들과 함께 밟아 오른다. 또한, 교장은 아이들과 공통의 흥밋거리를 나누고, 자신의 풍부한 정신적 소양도 아이들과 함께 나눈다.
학교에서 중요한 인물은 누구일까? 교육을 수행할 때 학교 지도자는 어떤 분야에서 다른 교사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할까? 학교의 주요 인물은 어린 학생들의 학급을 맡는 교사이다. 그 사람은 아이들의 선생님이기도 하고, 동무이기도 하며, 다양한 방면의 정신적 삶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교육에서 학습은 넓은 뜻으로 볼 때, 교육이라는 한 송이 꽃을 이루는 여러 장의 꽃잎들 가운데 한 장의 꽃잎일 뿐이다. 꽃이 아름답기 위해 특별히 한 장의 꽃잎이 더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교육에도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따로 없다. 방과 후 여러 가지 활동에 흥미를 느끼는 것과 학급 안에서 반 동무들과의 관계 등등, 교육에서는 모든 것이 다 중요한 수업이다.
나는 학교 책임자로 6년을 재직한 뒤에 한 학급을 맡아 관리하는 교사가 되었다. 물론 이 방법이 학교장이 학생들과 직접 연결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다. 하지만 내게는 이 방법이 가장 큰 효과를 볼 것 같았다. 아이들 공동체의 직접적인 책임자가 되어 아이들을 맡는 것은 자연스러운 조건을 바탕으로 한 광범위한 실험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내가 한 일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실습의 내용과 목적을 어느 정도 보여 줄 수 있는, 어느 일정 기간의 특징에 대하여 몇 가지 말하겠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기간은 아이들의 성격 형성에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 러시아의 훌륭한 문학가이자 교육자인 레프 톨스토이6)는 한 아이가 태어나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 아이가 얻는 이성, 감성, 의지력 그리고 성격이 아이가 다섯 살 이후로 평생 얻는 것보다 더 많다고 주장했다. 마카렌코도 “사람의 됨됨이는 다섯 살 이전에 결정된다.”고 말하면서 톨스토이 생각과 뜻을 같이했다. 뛰어난 도덕가인 야누스 코르차크는 저서 《내가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칠판을 바라볼 때 더 많이 배우는지, 창밖을 바라볼 때 더 많이 배우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과연 아이들을 위해 도움이 더 되고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칠판 위에 억지로 적어 놓은 논리적인 세상일까, 교실 창문 밖에서 훨훨 떠다니는 또 다른 세상일까? 누구도 한 사람의 영혼을 묶어 둘 수는 없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자연스러운 발달 법칙과 아이들의 특징, 포부 그리고 요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평생토록 누런 표지의 이 낡은 책에 적힌 말들을 기억해 왔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이 책 저자의 영웅적인 행동을 전해 들었을 때, 이분의 가르침은 평생 내가 지켜야 할 계율이 되었다. 야누스 코르차크는 바르샤바의 유대 인 게토7)에 있는 한 보육원의 원장이었다. 히틀러주의자들은 이 불쌍한 아이들을 트레블링카8)의 화덕장에 몰아넣고 죽이려고 했다. 코르차크는 아이들과 함께 죽을지, 혼자 살아남을지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는 제안을 받았다. “우리는 당신이 뛰어난 의사라는 것을 안다. 굳이 당신까지 아이들을 따라 불길 속에서 타 죽을 필요는 없다.” 한 게슈타포가 이렇게 말했을 때 코르차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 “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은 할 수 없소.” 이것이 그가 한 대답이었다. 곧 닥쳐올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달래 주며 그는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코르차크의 삶과 도덕의 힘과 순수함의 위업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아이들에게 진정한 교육을 하려면 먼저 아이들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신스키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 채 지내다가 불행이 닥치면 그제야 자신이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깨닫는다고 했다. 오랫동안 조국을 떠나 있을 때 조국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못 만날 때, 아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지 못할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말을 떠올린다. 해가 갈수록 나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훌륭한 교사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한다. 스타니슬랍스키9)가 한 말 가운데, “감정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불러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교사이면서 교육자, 이것이 바로 학교 책임자가 갖춰야 하는 훌륭한 가르침을 위한 기본이다.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꾸준한 만남이 없다면, 서로의 생각과 느낌이 서로의 경험 속에 스며들지 않는다면, 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감정의 바탕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아이들과의 다양한 감정적인 관계는 교사가 그저 지도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동무이자 동지처럼 친밀한 감정을 드러내 보여 주는 밑바탕이다. 하지만 교사가 수업시간에만 아이들과 함께하고, 그 시간에만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친밀한 감정은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칠판 위에 억지로 적어 놓은 세계와 교실 창문 밖의 떠다니는 세계를 서로 대적하는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필수 과목들이 아이의 영혼을 뒤덮고, 칠판이 아이들을 노예로 삼는 반면에 창문 밖의 세상은 참다운 자유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파블리시에 오기 몇 년 전에 나는 아이들의 삶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거듭 깨달았다. 교사는 아이의 식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어머니 같은 사람 말이다. 어린 학생이 교사에게 갖는 믿음,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호 신뢰, 학생이 교사에게 느끼는 자애로움은 교육의 기본 요소이다.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이처럼 가장 복잡하고 슬기로운 요소들을 교육의 법칙으로 지각한다면 그 교사는 진정한 정신의 교사가 될 수 있다. 교사의 귀중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을 향한 깊은 사랑, 즉 아버지의 지혜로운 엄격함과 철저함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어머니의 애정을 더한 사랑이다.
어린 시절은 사람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절은 참되고, 소중하고, 거짓이 없고,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날들이다. 아이가 어릴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아이가 그 시절을 누구와 함께 보냈고, 아이를 둘러싼 세상에서 아이의 마음과 정신에 무엇이 스며들었는지가 이다음에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큰 영향을 미치고 또 결정짓는다.
아이의 성격과 생각의 과정과 표현 방식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에 형성된다. 교과서와 수업을 통해 아이의 머리와 마음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아이를 감싸고 있는 주변세계가 있기에 가능한데 그 주변 환경은 교과서와 나란히 존재한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책을 펼치고 읽을 수 있는 순간 사이의 그 모든 힘든 과정을 그 주변세계에서 겪는다.
학습이라는 길고 힘든 일이 어린 시절에 시작된다. 나는 33년 동안 모든 나이대의 아이들이 쓰는 낱말들을 살펴보았고, 어른들이 쓰는 낱말 또한 조사했다.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일반 협동농장에 속한 한 가정(아이의 부모는 모두 중등교육을 받았고, 그 집에는 300~400권의 책이 있다)의 일곱 살짜리 아이는 모국어의 3000~3500개 낱말에 대해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풍부하게 느낀다.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이 낱말들 가운데 1500개 정도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쓴다. 중등교육을 받은 45세에서 55세까지의 노동자와 협동농장의 농부들은 모국어의 낱말 가운데 5000~5500개 낱말 뜻의 차이를 이해하고 느낀다. 그리고 일상에서 쓰는 낱말은 2000~2500개로 그 이상을 넘지 않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린 시절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개인의 미래를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해서 아이들이 자라고 난 뒤에 재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안톤 마카렌코는 재교육의 힘을 잘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그도 어린 시절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교육의 올바른 임무는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막는 것이고, 따라서 재교육을 할 필요도 없게 하는 것이다.
나는 학교 책임자로 있으면서, 교사가 교육을 가능한 한 여러 가지 지식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수단으로만 여길 때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삶이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알았다. 정규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방과 후 수업이나 활동에서도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삶이 상처 입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학교들이 많다. 5, 6교시 수업이 끝나도 아이들은 또 네다섯 시간 동안 학교에 남아 있다. 뛰어놀거나 쉬거나 맑은 공기를 쐬러 밖으로 나가는 대신에 이 아이들은 또 공부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은 끝이 안 보이는 수업의 연속이 되고 만다. 이런 관행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방과 후 수업은 아주 소중한 교육 현장이다. 교사와 아이들이 꾸준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알맞은 조건이 갖추어진 때가 바로 이 시간이다.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없다면, 더 높은 감성 교육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훌륭한 교육이념들이 수없이 거절당했다. 아이들은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과 마치는 종 사이에서 옛날의 낡은 책상에서 똑같은 낡은 수업을 받을 뿐이다. 아이들은 기운을 빼앗기고 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 까닭은 아이들을 잔디밭이나 공원에 데려가거나 숲으로 산책하러 나가는 것보다 교실에서 수업을 계속하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교육학에 상세하게 설명된 최상의 보육 프로그램을 갖춘 학교들이 그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안타깝다. 주요 원인으로 교육의 일반적인 약점을 들 수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과학적인 지식을 완전히 익히지 않고서는 일이나 기본적인 인간관계나 시민으로서 갖는 의무의 실행 등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학습은 기쁨과 즐거움만을 주는 쉽고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차세대 시민인 어린 세대들의 삶은 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 끈기가 있으며 일을 사랑하는 인재들을 길러 내야 한다. 아이들의 부모 세대, 할아버지 세대, 증조할아버지 세대가 겪고 이겨 냈던 역경보다 더 힘든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아이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1970년대와 90년대 사이의 어린 학생들의 지식수준은 지금 세대 아이들의 수준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높을 것이다. 익혀야 하는 교육의 범위가 더 넓어질수록, 빠른 성장과 발달과 성격 형성이 이루어지는 시기, 즉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의 신체의 본질을 더 고려해야 한다. 그 아이는 언제나 자연의 아이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자랄 것이다. 이 유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은 아이를 풍요로운 정신문화에 연결해 주어야 한다. 아이를 둘러싼 환경은 무엇보다 풍부한 현상들과 끝없는 아름다움을 품은 자연의 세계이어야 한다. 이 자연 속에 아이들의 지성을 위한 무궁무진한 재료가 녹아 있다. 하지만 이 자연의 재료와 더불어 사회에 대한 인간관계와 일과 연결된 환경 요소들의 역할 또한 해가 갈수록 중요하다.
하지만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이 생각을 위한 감성의 자극을 대신할 수 없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에게 이 자극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약 아이들이 감성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한 이미지들로부터 영감을 받는다면, 주변세계의 보기들과 현상들이 일반화된 진실은 아이들에게 개인적인 확신이 된다. 아이들은 자신의 주변세계에서 최초의 과학적 진실을 발견하고, 생각의 재료를 자연 현상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에서 찾고, 천천히 사회관계와 일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파블리시 학교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저학년 아이들, 특히 1학년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1학년 아이들은 교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흥분과 기대에 들떠 진지하게 수업 첫날을 맞는다. 그런데 어째서 몇 달이 지나면, 때로는 채 몇 주도 못 가서 아이들의 그 초롱초롱했던 눈빛이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날까? 왜 공부가 어떤 아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되고 말까?
많은 교사가 진심으로 이런 아이다운 자연스러움과 이 기쁨에 찬 인식과 세상의 발견을 지켜 주고 싶어 한다. 교사는 공부가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흥미로운 일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바람과는 반대가 될 때가 많다. 가장 큰 까닭은 교사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정신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학교 담장 안의 세계가 공부에만 한정되어 수업 종소리에 얽매인 채, 마치 한 가지 기준에 맞춘 듯이 아이들을 똑같이 만들어 내고 풍부한 개인의 세상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흥미를 길러주고 아이들의 정신적인 삶을 다양화시키는가에 대해 조언을 했다. 하지만 조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교육사상이다. 그것의 본질은 아이들과 교사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드러나고, 교내에 우뚝 솟은 높은 건물처럼 전체 교사의 눈앞에 드러나 보일 때에 교육의 본질은 분명해진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학급 단위의 교육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은 10년 동안 이어졌다.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학급 단위의 생활은 학교 전체의 생활과 따로 나누어져 있지는 않다. 때에 따라서는, 전체적으로 학교의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교육의 형태와 방법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학급 단위의 운동을 더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만 하겠다. 왜냐하면, 학급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본질이 학교 안의 모든 성공을 결정짓는 주요 조건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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