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파리 |
책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_신용호(교보문고 창립자)
우리는 모두 완성되지 않은 한 권의 책이다. _소피 카사뉴브루케
책에 대한 명상
2002년 초에 시작되어 2011년 말까지 이어진 나의 두번째 파리 체류 시기에 내가 살던 집은, 센 강변에 우뚝 서 파리 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펠탑에서 멀지 않은 파시Passy라는 언덕 동네에 있었다. 센 강을 향해 언덕을 걸어내려오면 비르하켐 다리가 센 강을 건너게 해준다. 다리 1층으로는 보행객들이 다니고 2층에는 지하철 6번선이 지나다닌다.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강철과 유리로 지은 건물이 한 채 서 있는 게 보인다. 파리 일본문화원이다. 나는 오후가 되면 유리건물 3층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올라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책을 읽다가 눈이 피로하면 센 강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개가식 서가에 있는 프랑스 시인 폴 클로델의 전집에 눈이 가서 책을 꺼내 스르륵 책장을 넘겨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의 철학Philosophie du livre’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했다. 프랑스 인문학을 대표하는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 판 전집에 들어 있는 이 글은 원래 192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도서전에서 프랑스 정부를 대표하여 행한 강연 원고였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책에 대한 명상에 잠긴다.
“우리는 세계가 하나의 텍스트임을 알고 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클로델은 피렌체라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그 고유한 ‘푸른색’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세련된 시적 언어로 표현한 다음에야 비로소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풀어놓고 있다. 책은 단어와 문장과 면面 들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한 부분을 이루는 단어는 의미로 가는 길에 떨어져 있는 관념의 한 조각이다. 단어라는 조각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고 그 문장들이 연결되면서 의미세계를 창조한다. 책의 면은 선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 면의 가장자리에도 빈자리가 남아 있다. 종이 면 위에 인쇄된 글자가 목소리라면 행간과 가장자리의 여백은 침묵이다. 그렇다면 책의 본문 편집은 단순히 글자를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고요함, 채움과 비움을 조합하여 책을 읽는 사람의 느낌과 생각이 물결처럼 순조롭게 흐르게 하는 고귀한 예술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이나 불로뉴 숲의 바가텔 정원이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작은 정원들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통일된 공간을 이루듯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의 연속되는 면들은 거대한 관념의 정원을 이루며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 독자의 눈은 그 정원에 뿌리내린 식물들이 바람의 흐름에 맞추어 추는 춤을 감미롭게 음미한다. 책을 읽는 일은 커다란 정원을 이루는 연이어진 작은 정원들을 거니는 유쾌한 산책이다.
책이 신문과 다른 점
책과 신문은 읽을거리라는 점에서 같지만 읽는 사람과 맺는 관계는 크게 다르다. 책은 개인적이고 신문은 집단적이다. 책의 독자는 책과 내밀하고 개별적인 관계를 맺는 반면, 신문을 읽는 사람은 신문과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관계를 맺는다. 책을 읽는 시간이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의 시간이라면, 신문을 읽는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공유의 시간이다. 책과 맺는 관계가 깊이 있는 진정한 관계라면 신문과의 관계는 피상적인 일상의 관계가 되기 쉽다. 응당 책과 대면하기보다는 신문을 대하기가 훨씬 더 편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기보다는 신문을 읽는다.
신문의 지면은 지난 24시간 동안 일어난 일 가운데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채워진다. 신문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 즉 시사時事, current events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므로 신문만 읽다보면 세상이 24시간 단위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되어 장기적인 관점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추이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그 사건의 뿌리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일은 소홀히 하게 된다. 그에 비해 책 읽기는 수십 년, 수백 년, 수 세기를 단위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책도 책 나름이지만 좋은 책에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변동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잡지는 책이 아니다
글씨가 박힌 페이지들이 하나의 단위로 묶여 있다고 다 책은 아니다. 흔히 ‘잡지책’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볼 때 잡지는 잡지일 뿐 책이 아니다. 책이라면 하나의 일관된 내용이 책 전체를 관통해야 하는데, 잡지에는 그야말로 이런저런 내용의 잡다한 기사들이 잡탕으로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잡지에는 독자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광고가 점점 더 현란한 형태로 점점 더 많이 실리고 있다. 책을 정신적 메시지가 담긴 고귀한 매체라고 생각한다면 상품 구매를 권장하는 매혹적인 광고사진들이 몰염치하게 버티고 있는 잡지들은 결코 책이 될 수 없다. 현대인은 일상을 뒤덮는 광고의 바다 속에서 ‘이 물건을 사라! 그러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주술에 노출되어 있다. 광고는 우리를 소비의 노예로 만들며 돈을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게 만든다. 그런 자기 소모적 물결에 저항하고 삶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주는 책을 좋은 책이라고 한다면, 광고가 덕지덕지 들어가 눈과 영혼을 홀리는 잡지는 당연히 ‘책’이 될 수 없다.
신문이 세상을 24시간 단위로 보게 한다면, 주간지는 세상을 일주일 단위로 보게 하고, 월간지는 한 달 단위로 생각하게 하며, 계간지는 3개월 단위로 사고하는 습관을 갖게 한다. 인터넷 같은 속도지상주의 미디어는 신문이나 잡지보다 더 짧은 단위로 파편화된 정보와 단편적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책은 그런 급박한 시간단위를 넘어서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긴 사고의 발걸음을 천천히 내딛게 한다.
종이책의 네 가지 장점
인터넷에 수많은 정보와 지식이 떠다니고 전자책이 등장했어도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종이책만이 지닌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 장점으로 책의 신뢰성을 들 수 있다. 종이 위에 인쇄된 책의 내용은 확정적이다. 출판사의 편집을 거쳐 서점에 나온 책이나 도서관에 비치된 책의 내용은 고칠 수가 없다. 100년이 지나도 인쇄된 상태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렇기에 책을 쓰는 저자는 자기가 쓰는 글에 최선을 다한다. 그건 책을 쓰는 사람의 기본자세다. 좋은 책을 쓰려는 사람들은 매일 마음속으로 독자를 향해 ‘나는 이 책에서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들리지 않는 선서를 거듭한다. 그러기에 책은 인간 내면의 가장 양심적인 목소리를 담는 매체다. 그래서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책을 찾아 읽었다. 많은 사람이 책 속에서 길을 물었고 책 속에서 길을 잃었고 책 속에서 길을 찾았다. 책의 신뢰성은 오늘날에도 책이 다른 매체와 경쟁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신뢰성과 더불어 책이 가지고 있는 또하나의 장점은 간편성이다. 책은 그 크기와 두께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직사각형의 사면체로 되어 있어서 일단 손에 쥐기 쉽다. 사각형의 책은 책꽂이에 세워놓으면 아주 작은 자리만 차지한다. 책상 위 한편에 여러 권의 책을 쌓아놓을 수 있고 여행가방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책은 휴대하기에 편리하다. 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고 두 손으로 펼 수 있고 무릎 위에 얹어놓을 수 있고 겨드랑이에 끼고 다닐 수 있으며, 문고판 소형 책자는 상의의 안주머니에도 들어가고 핸드백에 넣고 다닐 수도 있다. 수백 수천 권의 책은 이사할 때 가장 무거운 짐이 되지만 한 권씩 가지고 다닐 때는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책에 들어 있는 엄청난 이야기와 내용을 생각하면 책의 무게는 거의 나가지 않는 셈이다(반질거리고 반짝이는 두꺼운 흰색 종이에 회화, 조각, 건축 등 예술작품 사진이나 역사적 사진이 많이 인쇄된 화집―프랑스어로는 ‘아름다운 책beaux livres’이라고 한다―의 경우는 예외다).
책은 열어보기에 편리하다. 창문을 열듯이 마음 편하게 책의 겉장을 열면 이내 책 속에 가지런히 배열된 글자와 문장 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독자를 환영한다. 부팅을 하고 기다릴 필요가 없다. 마우스를 아래위로 움직일 필요 없이 손가락만 사용하면 책의 처음이나 끝으로 1초 만에 이동할 수 있다. 책을 읽다가 이야기의 전개가 궁금해지면 원하는 페이지로 즉각 이동할 수 있다. 책의 페이지를 끝에서 처음으로, 아니면 처음에서 끝으로 스르르 사랑스럽게 부채를 펴듯 훑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책의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이렇게 썼다.
“나는 책을 사랑한다. 구식 책을 좋아하고 오래된 것일수록 더 좋아한다. (…) 책은 휙휙 넘겨볼 수 있고, 주석을 달 수 있고, 잠자리에서도 읽을 수 있고, 편리하게 선반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책의 세번째 장점은 역사성이다. 컴퓨터나 전자책의 화면은 언제나 같지만 책의 지면은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다. 우리의 얼굴처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색이 바래고 주변의 냄새를 자기 몸에 담기도 하며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지기도 하고 건조해져서 부스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책은 세월의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컴퓨터처럼 새로운 모델로 몇 년에 한 번씩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다. 젊은 시절 읽었던 책은 50년이 지나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오래전 책 여백에 끼적거린 메모는 내 글씨체 그대로 고스란히 거기에 남아 있다. 책은 세월과 함께, 나의 인생과 함께, 나의 곁에서 나와 함께 늙어간다.
책의 네번째 장점은 자연과의 접촉성이다. 책과의 접촉은 눈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촉각과 후각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책과의 만남은 의미 이전에 “모양과 무게, 색깔과 감촉, 그리고 냄새가 먼저 온다”. 책과의 접촉은 종이와의 접촉이고 나무와의 접촉이고 숲과의 접촉이고 그 숲에 있던 다른 식물들과 동물들과의 접촉이고 그 숲에 비치던 햇빛, 그 숲에 불던 바람, 비, 눈과의 접촉이기도 하다. 나의 몸이 태어나고 나의 몸이 돌아갈 자연과의 만남, 그건 전자책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종이책만이 지닌 특성이다.
책의 메타포
책은 진리나 의미를 담고 있는 매체이기에 앞서 종이와 잉크로 만들어진 하나의 물건이다. 책은 살 때는 비싸지만 다시 팔 때는 거의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이다. 그런데 절판된 희귀본을 사려면 정가보다 훨씬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다. 크기에 비해서는 무게가 많이 나가고 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하며 습기와 불에 약하다. 한번 불어나기 시작하면 계속 늘어나 점차 집 안의 모든 벽을 점령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책은 하나의 물건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이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메타포를 사용해 책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수많은 독자와 저자가 책에 대한 생각을 메타포로 표현한 것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주 등장하는 메타포들이 있다. 그것들을 몇 개의 범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책, 지식과 정보의 원천
많은 사람에게 책은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다. 책은 견고한 지식의 벽돌이며 지식의 보물상자이고 수많은 정보를 저장한 거대한 창고이기도 하다.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상대를 알고 자기를 알면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렇다면 책이야말로 상대방을 알 수 있는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다.
책을 읽다가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했을 때 지리적으로 독일에 가까운 소련군은 독일의 과학자들을 재빠르게 소련의 연구소로 빼돌렸다. 뒤늦게 독일에 도착한 미군은 독일 도서관과 연구실에 쌓여 있던 책을 본국으로 실어날랐다. 독일 과학자를 빼돌린 소련은 과학기술 경쟁에서 50년대까지 미국을 앞섰지만 독일에서 온 과학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점차 과학발전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 반면 책을 실어나른 미국은 그 책을 해독해 수많은 과학자를 교육하여 결국 소련을 앞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의 원천으로서 책은 사람보다 힘이 세고 오래간다.
우리나라로 이야기의 장소를 옮겨보면 구한말 조선에 부임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는 책을 좋아했다. 그는 서울의 고서점을 찾아다니면서 한서를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경』도 있었다. 그는 그 책을 본국으로 보냈고 그 책은 지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파리 13구에 새로 지어진 프랑스 국립도서관 안내실 벽에는 책의 역사가 연표로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직지심경』이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고 정확하게 적혀 있다. 프랑스 해군이 병인양요 때 강화도 외규장각 서고에서 약탈해간 의궤를 비롯한 귀중본들도 모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일부 반환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을 접수한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인사동 고서점의 책들을 트럭으로 실어날랐다고 하는데, 하버드 대학교 부속 동아시아 연구소인 ‘옌칭 연구소’ 도서관에 있는 한국 관련 고문서의 상당 부분은 그렇게 수집되었다고 한다. 미 국무성 관료들은 점령지를 다스리기 위해서 그곳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곳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귀중한 책을 많이 가져갔다. 일제강점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임진왜란 때도 수많은 책을 약탈해갔다. 조선에 대해 문화적 열등감을 느끼던 일본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수집해간 책 가운데는 1512년 경주에서 출간된 일연의 『삼국유사』도 있었다. 이 책은 1904년 도쿄제국대학이 현대식 활자로 출간한 『삼국유사』의 저본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최남선은 일본에서 『삼국유사』가 새로 발간되는 것에 자극을 받고 귀국하여 광문회라는 출판사를 차려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 고전을 재간행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오랜 세월 잊혔던 우리 고전들이 새롭게 빛을 보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필독서적이 되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책을 가져가는 것은 책이 그 나라에 대한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2011년, 파리 |
책, 절망의 치료제
책은 절망의 치료제다. 책은 희망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다. 조용히 책을 펼치는 사람에게 책 속의 글자들은 희망의 소리를 전한다.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나 인생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에게 책은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럴 때 독서는 닫힌 마음이나 상처난 가슴을 달래주는 치료제가 된다. 책은 병원의 장기입원 환자나 감옥에 갇힌 사람 들에게 지루함과 답답함을 달래주는 치료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책은 인생을 살다가 환멸을 느껴 삶이 무의미해졌을 때 절망의 웅덩이에서 우리를 끄집어낸다. 배우자나 자식,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떠나 그 상실감을 견딜 수 없을 때 책은 가까이 다가와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다. 치솟아오르는 몸의 욕망에 시달리며 세상과 삶의 존재의미를 찾는 청소년들에게도 책은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치료제이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는 안내자가 된다.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에 사는 지나라는 소녀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의 부모는 1950년대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떠나 남불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아랍 사람으로 프랑스에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 딸은 공부할 필요가 없고 결혼해서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의무교육으로 중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었다. 그때 나이 열여섯이었다. 사무실 하급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을 땄지만 아버지는 그녀에게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하도록 요구했다.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지나는 거의 집 안에 감금된 생활을 했다. 집에는 문화적 취향을 키울 만한 도구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지나는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그러다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는 남동생들의 고등학교 교과서를 읽기도 했고, 시장에서 채소를 살 때 포장지로 쓰였던 구겨진 신문 한 면을 읽기도 했으며, 병원에 갔을 때 누군가가 대기실에서 읽다 놓고 간 주간지를 주워 읽기도 했고, 프랑스어 사전을 아무 데나 펼쳐 읽기도 했다. 글자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악착같이 읽었다.
아버지는 딸의 독서를 금지했다. 가정을 지켜야 할 여자가 책을 읽는 게 재앙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책을 읽었다. 그녀에게 독서는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고 즐거움을 맛보는 시간이었으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맏딸인 그녀는 집 안에서 살림을 도맡아했지만 남동생은 대학에 입학했다. 지나는 동생 덕분에 문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점차 텍스트 뒤에 감추어진 깊은 의미를 알아보게 되었다. 문학은 그녀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녀에게 독서는 정신적 균형과 안정된 심리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매일의 예식이 되었다. 만약 독서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나는 그 답답하고 소외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병원으로 갔을 것이다. 지나에게 독서는 광기로 빠지는 것을 막아준 절망의 치료제요 정신의 방파제였다.
책, 다양한 도구
책은 특별한 기능을 가진 다양한 도구로 생각되기도 한다. 책은 일단 나를 지금 여기의 한정된 일상의 지평을 넘어 아주 먼 곳, 아주 먼 옛날이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날아갈 수 있게 하는 이동의 도구다. 책을 펼치는 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책은 내게 주어진 의무와 책무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게 하는 손쉬운 여행의 도구다. 그래서 발자크는 “나는 책이라는 배에 승선하여 아주 달콤한 여행을 마쳤다”라고 썼고, 쥘리앵 그린은 “책이라는 창문을 통해 우리는 다른 먼 곳으로 날아갈 수 있다”고 적었다. 이렇게 책은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게 하는 마술램프이고, 책을 읽는 행위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마술램프에 접속 플러그를 꽂는 일이다. 책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타임-스페이스 머신이다. 책을 타면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대로 마음껏 날아갈 수 있다.
책은 방향을 제시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모험가에게는 보물섬으로 인도하는 지도가 되기도 하고 길 잃은 사람에게는 나침반이나 내비게이션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책을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책은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등대가 되어주며 부서진 삶의 편린들을 주워모아 새로운 형태로 만들게 하는 접착제가 되기도 한다.
어느 프랑스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는 비교적 순탄한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이혼을 당하고 난 다음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빠졌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허무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막막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읽지 않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지나온 삶을 깊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읽은 책들은 그녀가 허물어진 자신의 정체성의 조각들을 주워모으고 거기에 새로운 요소들을 추가해서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게 모든 책은 도구상자다. 그는 누구나 자기 책에서 필요한 도구를 꺼내어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책은 재미있는 장난감, 베개 대용, 인테리어 도구, 세상을 다르게 보는 안경, 생각을 발효시키는 효소가 되기도 한다. 농부가 삽과 괭이로 밭을 갈듯, 독자는 책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지식의 논을 가꾸고 마음의 밭을 일군다. 책은 정신적 위기에 대처하는 방패가 되어주며 죽어도 삭이지 못할 분노의 불길을 꺼주는 소화전이 되기도 한다.
책, 생각의 집
책은 생각의 집이다. 우리는 집을 짓듯이 ‘책을 짓는다’라고 말한다. 책을 쓴 사람을 지은이라고 말한다. 책은 지은이가 생각으로 지은, 생각이 사는 집이다. 책의 목차는 책이라는 집의 구조를 보여준다. 집이 방과 거실, 침실과 서재, 부엌과 화장실 등으로 구성된다면, 책은 장과 절로 구성되고 학술서적의 경우에는 참고문헌과 색인이라는 공간도 있다. 책의 제목이 있는 앞표지가 책이라는 집의 대문이라면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짤막한 글이 있는 뒤표지는 책의 뒷문이나 옆문이다. 책은 앞뒤가 분명한 구조물이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동서남북을 잘 구별할 수 없는 미로가 되기도 한다. 책이 집과 같은 구조물이라면 정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때로 뒷문이나 옆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담을 넘을 수도 있다.
책이 구성된 방식에 따라 책이라는 공간을 오가는 방식도 달라진다. 잘 짜인 추리소설은 정문에서 후문으로 이르는 길이 분명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어야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책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시집, 수필집, 논문집, 설교집, 잠언록, 화집 등은 마음 가는 대로 아무 데나 펴서 읽을 수 있다. 요즈음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독서의 호흡이 짧아진 독자들을 위하여 50개 또는 100개 정도의 짧은 글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 책들에는 출입구가 따로 없다. 그야말로 아무 데나 원하는 곳으로 들어가 기분 내키는 곳에서 나오면 된다.
독자는 각자 자기 방식대로 책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자기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찾아 책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다. 다만 독자의 성격과 의도에 따라 즐겨 읽는 책이 달라지고 책에서 찾아내는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책, 저자의 자식
책은 저자의 자식이다. 저자는 머릿속에 책의 씨앗을 잉태하고 키워나간다. 저자가 읽는 책, 만나는 사람, 바라보는 풍경이 모두 그 씨앗을 발아시키고 키우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된다. 희미하던 장과 절이 분명한 형태를 띠게 되면서 ‘책’이라는 이름의 아이는 저자의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때로는 머릿속 한구석에서 성장을 멈추고 숨죽이고 있기도 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초고가 완성되고 출판사에 넘겨진다. 그건 임신부가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편집인은 조산사나 산부인과 의사 역할을 한다. 원고 수정과 편집 작업이 끝나고 판형과 지질과 제목과 표지 디자인이 결정되고 나면 완성된 원고는 이내 인쇄소에 넘겨져 얼마 후 드디어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탄생한다. 그리고 그 책의 탄생을 알리는 일이 시작된다. 1924년 1월 8일자 동아일보에는 한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이광수의 『춘원단편소설집』 재판 발행 광고가 실려 있다. 거기에서 이런 문구를 읽을 수 있다.
“저자는 말하되 ‘이 단편들은 나의 생명이다. 잘났든, 못났든 다 나의 정신의 아들들이다’ 하였다.”
책은 저자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어느 날 신문사 문학 담당 기자가 작가 최인호의 부인에게 남편이 쓴 책을 읽느냐고 질문했다. 그랬더니 최인호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저 사람을 다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림자까지 굳이 보아서 뭐한대요?”
그렇다. 책은 그 책을 쓴 사람의 그림자다. 책은 저자가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벗는 허물이다. 본체를 아는 사람이 허물, 즉 껍데기를 만져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책은 작가의 고투의 산물일 수 있고 책 속에는 타인이 모르는 감추어진 정신세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잘 나타나지 않던 무의식적 욕망과 갈증이 작품의 착상과 집필 과정에 작용할 수도 있다. 작가에 대해 아무리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작가의 신비한 정신세계를 통해 나온 작품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진정한 창작이라면 그것은 아직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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