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헌정보학의 씨앗을 뿌린 시인
김세익
金世翊
김세익金世翊, 호 현촌, 1924~1995의 삶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문인의 인생과 도서관학자의 인생이다. 김세익의 세계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접근방법이 있겠는데, 우선 그가 거쳐 간 곳 중에서 문인이자 도서관인의 삶이 중첩되어 있었던 경남 마산을 탐방하여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하였다. 필자는 2008년 9월 22일 마산문학관을 방문하여 현촌의 시집 『석류』를 비롯한 문학 활동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수소문을 하여 현촌의 유고집(일기) 『낙우송』과 정년 기념 논문집 『도서관의 창』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 두 자료는 시인이자 도서관학자인 김세익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세익은 1924년 12월 28일 함경남도 흥원군에서 부친 송포 김계룡과 모친 박경엽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995년 1월 26일 72세를 일기로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서 숙환으로 타계하여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에 화장 후 안장되었다.
현촌은 오랜 공직생활에서 은퇴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함경남도 시골에서 살았다. 집 뒤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높은 산이 있고 멀리 동해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 마을은 초가집 80여 호에 10여 개의 기와집이 있는 북국의 농촌이었다.
현촌은 유소년 시절을 이런 목가적이면서도 그러나 답답하기 그지없는 산촌에서 보낸다. 그는 자신의 연약하고 과거회상적인 성격은 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회고한다. 이러한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현촌의 마음에는 시심詩心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세익은 1932년에 전진소학교에 입학한다. 소학교 2학년 때 숙제로 제출한 동시를 보고 담임교사는 “이것 네가 지은 거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때 어린 세익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담임교사는 그가 쓴 동시를 학생들에게 몇 번이고 읽어주었다. 이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흘러 지나가는 에피소드이었겠지만, 교사의 낭독은 그를 문학 소년으로 만들었고 한평생 시를 생각하게 하는 ‘중병’에 걸리게 하였다.
문학소년 김세익은 1938년에 함남공립중학교(당시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글쓰기 실력은 점차 상승하여, 중학교 4학년 때에는 전국글짓기 현상모집에서 장원으로 뽑힌 일도 있었다. 이때 운동장에 도열한 전교생 앞에서 교장이 상장과 상품을 전해주고 치하를 하였고, 또한 그의 글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때가 아마 현촌의 평생에서 가장 ‘쨍’한 때였을 것이라고 그는 회상한다.
이처럼 문학 소년의 꿈이 커나갈 때였지만, 당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로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가 소학교에 다닐 무렵 벌써 중일전쟁이 터져 전쟁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전쟁이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운이 더욱 확대되어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한창 공부할 시기에 근로동원이라 하여 비행장 만드는 일, 일본 신사나 신관 짓는 일 등을 하고, 또한 일주일에 3시간 이상이나 군사교련을 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뿐 아니라 전쟁이 심해지자 일본인 교사들이 속속 전선으로 나가게 되어 유능한 교사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세월이 흘러 1943년에 중학 5학년을 졸업했는데, 전쟁의 양상이 심각해지자 일본은 문과계통의 전문학교를 폐쇄해버리고 몇 개 안 되는 이공계 학교만 명목상 남겨두었다.
이러한 시대상황과 교육환경에서 이공계 전문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러나 청년 김세익은 30대 1이란 경쟁을 뚫고 1944년 3월에 서울대 치대의 전신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합격하였다.
이처럼 김세익은 대학 입학의 관문을 어렵게 통과하였으나, 그의 운명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일본이 한국 청년에게도 병역의무를 가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는 지원병제도는 있었지만 한국 청년들에 대한 징병제도는 없었는데 병력이 달리다 보니 내선일체內鮮一體란 미명하에 한국 청년들도 일본 군인이 되어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당시 김세익은 징병 2기생이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이 1년만, 아니 6개월만 더 지속되었어도 중국의 어느 시골에서 백골이 되었거나 태평양의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 무렵 그 나이 또래의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헛되이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그는 회상한다.
이후에도 김세익에게 고난의 세월은 계속되었다. 그는 월남한 누나와 함께 서울에서 살았는데, 누나는 잡지사 기자였고 그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31세의 노처녀였던 누나는 어느 남자를 만나더니 1년도 못 되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실의와 좌절과 빈곤이 20세를 갓 넘은 그에게 한꺼번에 닥쳐왔다. 해방 이후 시대가 한국인에게 식민지를 벗어난 광명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혼란스럽고 곤궁했던 당시는 서민들에게 고통의 세월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특히 의지하는 혈육이었던 누나와 사별하게 된 그에게는 이 시기가 일생에서 가장 참담했던 세월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경과 궁핍의 시기를 지나 현촌은 지방으로 가서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948년에 진주농림고등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고, 이듬해인 1949년 3월에는 마산여자고등학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교사로 지내는 이 무렵 하숙집 앞마당에 큰 석류나무가 있었는데 여름이 되니 빨간 꽃이 만발하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더니 터졌다. 「누나야 석류꽃이 피었습니다」는 그 무렵에 지은 시이고 첫 시집 『석류』도 이런 사연에서 꾸며진 것이다.
한편, 이 무렵 부산·경남지역에서는 학교도서관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학교도서관이라고 하면, 1952년 3월에 개관한 진주여고 도서관을 들 수 있다. 1954년에는 마산여고가 문교부의 학교도서관 연구학교로 지정되어 도서관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1956년에는 부산의 경남고등학교에서 학교도서관을 시작하여 1년 뒤에는 최초의 개가제 학교도서관으로 운영하였다.
김세익이 마산여고에 재직하던 시절, 진주여고 도서관을 만들었던 선각자 박경원 교장이 1954년 봄에 마산여고로 전근해온다. 그해 마산여고가 문교부 학교도서관 연구학교로 지정되자 박경원 교장은 김세익 교사에게 학교도서관을 3년 계획으로 연구하도록 지원하고 1956년에는 전국적 규모의 학교도서관 연구발표회를 개최하게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도서관학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박경원 교장은 그에게 도서관에서 인생의 어떤 사명을 느끼도록 한 최초의 멘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으로 김세익은 도서관학에 본격적으로 입문할 필요를 느껴 1959년 여름과 1960년 겨울 연세대학교에서 시행한 사서교사 강습을 김경일(경기고), 김두홍(경남고), 조재후(경남여고) 등과 함께 받았다. 이들 또한 한국 학교도서관 운동사에 기록되는 인물들로서 학교도서관 운동의 동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서관이라는 세상에 눈을 뜬 김세익은 1960년 12월에 드디어 교사직을 사임하고 도서관계에 뛰어든다. 1961년 1월 한국도서관협회에서 간사, 사무국장 서리 등의 일을 하고, 그해 9월에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학과에 강의를 나갔다. 1962년 3월에는 이화여대 전임강사로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교수까지 되었지만 그는 선진국에서 견문을 넓히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져, 1964년부터 이듬해까지 유네스코 장학생으로 미국, 영국, 독일, 일본의 각 대학 도서관학과 사서Librarianship,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 과정에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1965년 5월에는 런던대학 도서관학과에서 사서교사Teaching Librarianship 과정을 수료하였다.
그가 1965년 미국의 도서관들을 둘러보는 여행 중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더글러스M. P. Douglas 여사였다고 한다. 사실 이전에 만난 일은 없지만 현촌이 생각하는 그녀와의 인연은 10년도 더 되었다. 1965년에 더글러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주도 랄리 교육청의 도서관 담당 장학사였다. 그녀와의 인연,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가 쓴 책과의 인연은 그가 1954년 마산여고 재직 중 맡은 연구 주제 ‘학교도서관의 조직과 운영’ 때문이었다. 요즈음은 상식적인 것이지만 그 당시는 ‘도서관학’이란 미지의 학문이었다. 또한 도서관이 개척되지 않은 불모시대에 문교부 연구지정학교에서 학교도서관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은 황무지에서 금을 캐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지방의 이름 없는 영어교사였던 현촌은 그 연구의 담당자로 임명되어 1954년부터 1956년 연구발표회 때까지 학교도서관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학교도서관을 가꾸고 연구에 임하였다. 국내에 그 방면의 참고 서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김세익은 더글러스의 『The Teacher-librarian's Handbook』, 파고L. F. Fargo의『The Library in the School』을 구해서 탐독하고 나름대로 연구해서 도서관학의 존재와 학교도서관에 대한 개념을 얻게 되었다.
파고의 『The Library in the School』에서는 학교도서관의 개념과 철학을, 그리고 더글러스의 『The Teacher-librarian's Handbook』에서는 학교도서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기술을 배웠다. 이 두 권의 책을 근거로 하여 학교도서관을 조직하여 운영했고 마침내 1956년 11월 17일 마산여고 도서관에서 역사적인 연구발표회를 가지게 된다. 당시 연구발표회의 주제는 ‘학교도서관을 어떻게 조직하고, 또 어떻게 학습에 활용할 것인가?’였으며 박경원 교장과 김세익 교사가 발표를 하였다. 김효정은 학교도서관이란 말이 아직 생소하던 우리 사회에 일대 파문을 던진 이 발표회는 학교도서관의 필요성을 과시하였고 전국에서 모인 인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한국 최초의 학교도서관 관계 연구발표회로서 한국 학교도서관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하였다.
학교도서관을 연구하여 전국적으로 발표회를 가진 일은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최초의 일이었고, 이 발표회는 이 분야에서 뜻있는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1956년에는 피바디 교육사절단이 도서관 발전을 권고하였고, 1957년에는 연세대학교에 피바디 사범대학의 협조로 한국 최초의 도서관학과(학부/대학원 과정)가 생기게 되었으며 1958년에는 연세대에 사서교사과정이 개설되었다.
김세익은 3년 동안 신부가 성서를 몸에 지니듯 『The Teacher-librarian's Handbook』을 늘 들고 다녔다. 그는 영어 교사였기에 그 책을 어느 정도 원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즉, 더글러스는 현촌의 연구발표회를 자신도 모르게 도와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언제나 더글러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은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현촌의 방문을 알고 있었던 더글러스는 정거장에 마중을 나왔는데, 당시 그녀는 70세가 넘은 할머니였다. 그러나 얼굴에서 나오는 기품으로 그녀가 평범한 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고 김세익은 말한다. 그녀는 오랜 세월 학구생활과 정신생활을 해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자, 옷, 구두, 핸드백이 모두 같은 진분홍색이어서 아직도 인생에 많은 희망과 의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고 현촌은 기억한다.
현촌의 도서관 인생에서 또 다른 멘토라고 할 수 있는 더글러스와 그는 초면에도 금방 친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2주간 랄리에 체류하면서 그는 더글러스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녀의 권유에 따라 그 도시의 브루튼고등학교 도서관에서 2주일 동안 실무를 보게 되었다. 브루튼고등학교는 랄리의 일류 고등학교로, 사서교사가 세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일이고 미국에서도 모든 고등학교 도서관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는 사서교사가 없는 경우도 많아 한 사서교사가 여러 개의 학교도서관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장학사인 더글러스는 그 사서교사들의 근무일정표를 짜는 일도 맡고 있었다. 사서교사가 세 명이나 있는 브루튼고등학교 도서관도 미국의 모든 학교도서관이 그렇듯이 독립 건물이 아니라 2층 교실을 세 개 개조해서 도서관으로 썼다.
김세익은 시인으로서 1960년 6월 4일 마산일보에 3·15의거 관련 작품으로 「진혼가」를 발표한다. 당시 마산여고에 재직하면서 마산문인협회 창립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그는, ‘학생위령제에 부치는 시’라는 부제의 이 시를 통하여 독재정권과 사회적 부조리에 항거하다가 쓰러져간 학생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뜨거운 가슴을 가진 시인 김세익의 시를 아래에 소개한다. 현재 이 시는 마산 구암동 국립 3·15민주묘지 기념시비에 새겨져 있다.
진혼가
―학생위령제에 부치는 시
그날 밤
황혼이 밀려가고
어두움이 항구를 무겁게 덮고 있던
3월 15일
그날 밤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나온
젊은 사자(獅子)들의
성난 얼굴에
눈물어린 눈동자 더욱 커지며
두 손에 불끈 쥔 커다란 돌멩이에
있는 힘을 다하여
원수의 가슴팍을 향하여
독재자의 대가리를 향하여
던지던 그 용맹이
청춘보다 소중하다던
조국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부르던 애국가도 끝나기 전에
원수의 총탄에 쓰러진 젊음이여
차마 감을 수 없었던 눈을 감고 간
젊음이여!
아침 햇빛이 찬란히 빛나는
푸르고 푸른 하늘가 높은 곳에
한 송이의 목련 봉오리 되어 피었으니
민주혁명(民主革命)의 꽃이 되어
그대들 곱게 피었으니
‘기다리지 않으려마’ 하던 어머니도 여기 왔노라
전우였던 학우였던 복식(福植)이도 순이(順伊)도 여기 왔노라
그대들의 젊은 넋이 누워있는 이 제단 앞에 모두들 이렇게 모여 있노라
그대들의 흘린 짙은 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 모두 여기 줄을 지어 섰노라
아! 생명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없고 조국보다 귀한 사랑이 없을진대
값있게 죽어간 청춘들이여
이 진혼가의 가락에 고이 잠드소서.
김세익이 어떠한 도서관운동을 했는가와 관련하여, 관점에 따라 달리 말할 수 있을 테지만 김종성은 “그가 마산여고에서 학교도서관을 시작하고 연구발표회를 통하여 전국에 학교도서관운동에 불을 지폈지만 1962년에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교수가 되어 학교도서관 운동의 중심에서 떠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도서관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가 되어, 평생 우리나라 도서관을 위하여 일을 하고 글을 썼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1965년 3월부터 1967년 2월까지 이화여대도서관의 사서장을 지냈고, 1969년 2월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구성위원, 동년 3월에는 한국서지사업회 기술위원장, 한국도서관협회 전문위원회 교육조사분과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71년에는 이화여대 교수로 승진하였다. 지방자치단체별로 학교의 교장, 교감을 위한 학교도서관 세미나에 강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970년 6월에는 경기도내 증등학교장 1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학교도서관 세미나에서 ‘도서관 이용지도와 독서지도’라는 내용으로 강의하였고, 1971년 12월에는 충남지역 중고등학교 교감을 위한 학교도서관 세미나에서 ‘학교도서관의 자료와 운영’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학교도서관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의사결정권자들에게 학교도서관에 대한 눈을 뜨게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그는 1972년 유네스코 ‘세계 도서의 해’ 특별위원, 1973년 한국도서관협회 이사, 1980년 국회도서관 운영위원, 1982년 국회도서관 자료선정위원, 1982~1983년 한국 필름아카이브Film Archives 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국내외 도서관계에 헌신적으로 이바지하였다.
한편, 그가 1975년 2월에 마을문고 공적 감사패를 받은 것을 보면, 그는 우리나라 마을문고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 그가 쓴 글들 중에서 그의 도서관철학을 보여주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우리가 아직도 책을 덜 읽는 국민이라면, 그것은 읽을 만한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독서습관이 없고 우리가 책 읽는 즐거움을 모르고 지내기 때문이다. 또, 독서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도서관은 그래도 우리나라의 다른 유형의 도서관에 견주면 그 시설이나 예산이 월등히 앞섰지만, 학생들에게 만족스러운 독서 시설이 되기에는 아직도 숱한 문제가 남아 있다. 덴마크나 영국의 농촌에 가 보면 장보러 가는 주부들이 그 마을에 있는, 작지만 충실한 도서관에 들러서 책을 빌려가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도서관 시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도서관이 그 지역사회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시설임을 굳게 믿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도서관이 지역 사회 주민들과 아무 관계도 없이 학생들의 ‘공부방’으로 전락한 사실은 아주 심각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지금 지향하는 평생교육의 추진도 도서관의 확충 없이는 어림도 없는 일임을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들의 공부방이 아니라, 어린아이나 주부나 노인들이 즐겨 찾는 그런 도서관이 지역사회마다 들어서야 한다. 이제는 그런 데에 투자를 할 단계에 왔다고 본다.
도서관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시설과 돈, 그리고 책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시설이라 함은 건물을 말하는데, 건물이 반드시 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는 20평 정도의 소규모 도서관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책은 계속 구입하여 서가가 언제나 생기에 넘쳐 있어야 하므로 돈이 필요하다. 또 도서관을 전문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사서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도서관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어 도서관이 제 구실을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중략) 미국의 카네기도 많은 도서관을 지어서 사회에 기증했지만, 운영은 시나 군에서 맡아 했다. 그래서 아파트단지를 형성할 때 도서관을, 정확히 말해서 공공도서관을 의무적으로 설치케 하고 하나의 공공도서관으로서 시나 구청에서 운영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영국에서는 도서관위원회가 행정적 차원에서 중앙이나 지방 할 것 없이 설치되어 있어서, 교육감이나 교육장이 있는 것처럼 같은 수준의 도서관감이나 도서관장이 있다. 이런 발상은 학교가 학교교육을 담당하고 도서관은 사회교육을 수행한다는 이념이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학교교육에 대한 투자도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도서관 투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이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근대화를 위해서, 또 국민생활의 근대화를 위해서 도서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야 한다. 말로만 성인교육·평생교육 할 것이 아니라 그 기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정보사회에 살고 있다. 도서관은 정보센터다. 그리고 문화센터·독서센터·레크레이션센터이기도 한 도서관문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본격적으로 고려될 때가 왔다.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많은 데가 아파트 단지다. 생존만이 아니라 생활을 위해 아파트단지마다 크지는 않아도 아담하고 본격적인 도서관이 있으면, 문화성이 생기고 진정한 의미의 조국근대화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글들을 읽어보면, 한국 사회에서 도서관을 ‘사회적 기관’으로 정립하고 널리 보급하고자 하는 김세익의 철학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작은도서관’ 운동이 펼쳐지고 있고 정부와 국립중앙도서관도 이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현촌 또한 일찍이 이렇게 도서관이 사람들 가까이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소규모 도서관에도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서가 필수적으로 배치되어야 함을 그는 역설하였다.
김세익은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교수로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동안,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도서관학회장을 역임하는 등 학계에도 선도적 기여를 하였다. 그가 쓴 역작들로는 『도서관과 사회』(1971), 『도서관조직경영론』(1977), 『도서·인쇄·도서관사』(1982), 『한국도서관협회 삼십년사』(1977), 『학교도서관 조직과 운영』(1990) 등이 있다. 그는 도서관을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정립하고자 하였고, 도서관경영·도서관사·학교도서관 분야에서 기본을 세우는 저술을 생산하였다. 그의 저서들을 읽다 보면, 그가 도서관학의 역사적, 사회적 기본을 탐구하면서도 우리나라 도서관 현장에 근거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또한 현장을 개척하는 데 기여하는 저술을 쓰고자 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1989년 12월 4일 김세익은 교수생활의 마지막 저서로 『학교도서관의 조직과 운영』을 탈고하였다. 마산여고 교사 시절 학교도서관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된 그의 도서관인, 도서관학자로서의 삶은 학교도서관에 대한 저술로 마무리되었다.
40년간의 오랜 교단생활을 끝내고 1990년 2월에 김세익은 정년을 맞게 되었다. 그는 정년이 되었다고 섭섭하거나 아쉽다거나 하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안도감 같은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동분서주하면서 적극적으로 현장개척, 학문연마, 후학양성, 저서 생산 등을 하며 정신없이 보냈는데, 나이 50이 넘어가고 무지를 깨닫게 되면서부터 강단에 서서 강의하기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고 회상한다. 정년은 이와 같은 중압감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안도감이 생기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정년 후에도 그는 1991년 3월까지 일본 동경 아세아대학에서 객원교수 생활을 하였다. 이후 독서와 집필, 닭 기르기, 정원 가꾸기, 산책이나 드라이브로 소일하다가 1995년에 별세하였다.
김세익은 한국 도서관계와 문헌정보학계에 기초를 놓고 도서관사랑을 심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도서관 현장과 강단에서 남긴 도서관사상과 발자취는 이 땅에 남아 사랑의 씨앗이 되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되고 사람들이 가꾸는 숲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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