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기호학
학문은 실용적이다
기호학이란 뭘까요?
심리학이 인간 심리를 다루는 학문이고 역사학이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듯, 기호학은 기호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간단히 정의하기는 쉽지만, 정작 기호학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만큼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비단 기호학의 문제만은 아니겠지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어떤 분야든 가장 먼저 문제시되는 것은 역시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용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기호記號’란 무엇인지, ‘학學’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합해진 ‘기호학’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은 분명히 쉽지 않을 겁니다. 혹 기호학에 입문하려는 사람이 기호학 전문서적에 나오는 수많은 전문용어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처음 만난 상대를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너무 쉽게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에서도 개념을 너무 쉽게 정의하고 그 정의를 의심 없이 진실처럼 받아들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호’나 ‘기호학’이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데 그저 백과사전을 찾아보거나 ‘하루 만에 끝내는~’이라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을 읽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개념들은 쉽게 정의할 수 없기에 스스로 탐구하여 자신이 알게 된 만큼 이해하고 활용하면 됩니다. 이 책은 그렇게 기호학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기호를 설명하는 일은 기호학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강의에서는 먼저 기호학을 둘러싼 현재 상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왜 기호에 관심을 보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은 어떤 학문이든 그것의 쓰임새가 사람들의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서점가에서 소위 ‘실용서’라는 책들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한때 ‘순수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단순히 ‘순수’라는 것에 대한 낭만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학문이 오로지 ‘순수한’ 영역에만 국한된다면 그 학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점차 도태되어갈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언어학에서 음운론은 각각의 음소를 구분하는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우리가 자음 ㅂ과 ㅍ을 구분하는 원칙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면 ‘ㅂ’과 ‘ㅍ’이라는 음소가 이보다 더 큰 단위인 음절 안에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음을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ㅂ’이든, ‘ㅍ’이든, 독불장군으로 존재한다고 할 때 그 하나의 음소만으로는 그 가치와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것만으로 언어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ㅂ이나 ㅍ 하나밖에 없는 언어가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 음소들이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낱말의 단위를 살펴야 하고 또 낱말만으로는 의사를 소통할 수 없는 만큼, 구문이나 문장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리 사이의 구분은 결국 문장의 구분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비록 소리 자체만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음소도 실용적인 문장 사용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음운론이 ‘실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호학도 실용적이다
이런 원리를 확대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념들을 다루는 학문이 그 개념의 쓰임새와 무관하게 성립할 수 없음은 당연할 것입니다. ‘기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호란 ‘무엇을 통해 무엇을 나타낸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나타내는 일은 인간이 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모든 지식과 문화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무엇을 나타내는 일을 ‘표상’ 혹은 ‘재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타나는 것’과 ‘나타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일치할 수 없습니다. 내가 글을 통해 나의 마음을 나타냈을 때, 그 글이 곧 내 마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의 글과 내 마음은 결코 같아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영원히 일치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기호의 양면은 어쩌면 인간의 삶과 문화 전반이 가진 보편적인 역설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와 역설 때문에 인간은 또한 ‘무엇’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두 개의 ‘무엇’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2강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가 나면 화난 표정을 짓습니다. 즉, 화난 표정을 통해 화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시인은 압축된 언어를 통해 자신의 정서를 나타내고, 화가는 조형적인 매개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냅니다. 학자가 이런저런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는’ 기호작용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이처럼 기호는 언어일 수도 있고 조형일 수도 있고 표정이나 동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호가 나타내는 것은 감정일 수도 있고, 생각일 수도 있고, 견해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의 분명한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받았다면 그 영수증도 내가 물건을 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기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호라면 기호의 범위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재현적이고 표현적 행위에 개입하는 모든 매개물로 확대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현상을 연구하는 기호학은 얼마나 방대하고 무궁무진한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거기에서 포착되는 기호작용은 삶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런 점에서 기호학에는 분명히 실용적인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호학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말한다면 기호학만의 독자적인 성격을 놓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림도 기호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그림을 다루는 예술학이나 회화사와 같은 영역을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표현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심리학도 기호학이라고 우길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의 영역은 묘하게도 그것이 다루는 대상에 따라 분류되어 있습니다. 기호학이 다루는 대상이 기호라고 했을 때, 그 기호는 너무 방대해서 이런 학문적 분류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특화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기호학’이라는 학문은 학문세계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사실, 학문이 순수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학문도 제도나 권력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기호학을 연구하는 독립된 학과가 따로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기호학이 아직 학문적인 제도 안에서 그 권력을 행사할 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음을 방증합니다. 한국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조직된 기호학회에 참여하는 수많은 학자의 전공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기호학이 현재 뚜렷한 독자적인 학문 영역을 확보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다양한 학문과 연계되어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통섭’이 화두가 되어 학문 간의 융합을 추구하는 시점에서 기호학의 이런 특성은 역설적으로 이 학문의 엄청난 실용성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철학을 기호학으로 한다, 문학연구를 기호학으로 한다, 심리학을 기호학으로 한다는 말이 성립한다는 것은 ‘기호학이 기호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대상’에 초점을 맞춘 정의가 아니라 ‘기호로 하는 학문’이라는 ‘도구’ 즉 방법론에 초점을 맞춘 정의가 성립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정한 방법론이 여러 학문에 동일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서로 분리된 기존의 여러 학문을 연결하는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호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개념과 ‘기호를 통해서 하는 학문’이라는 개념은 전혀 다른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학문에서 대상이 방법을 결정한다거나, 방법이 대상을 결정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런 말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한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그것은 아는 대상과 보는 방법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생각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학문의 세계에서 이 명제가 잘 실현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근대 이후 학문의 분류는 주로 대상을 기준으로 이루어졌고, 그러다 보니 대상이 다르면 학문 자체를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간주해왔습니다. 이것은 사실 자체를 존중하는 실증주의의 전통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사실을 어떤 형태로든 체계화해야 한다는 형이상학적 강박 때문이기도 한데, 바로 이 점이 근대 학문의 ‘지나친 세분화’라는 폐해를 가져온 것입니다. 만일 좀 더 유연한 관점에서 대상을 통해 방법을 찾고, 그 방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통해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간다면, 학문은 단지 대상 자체의 성질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탐구하는 성질을 갖추게 되겠지요. 그리고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을 통해 그 다양한 국면을 풀어가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거기에 맞는 수많은 방법을 찾아내겠지요. 어쩌면 이런 학문의 모습이야말로 현실과 가장 부합하는 것일 테고, 그것은 인문학이건 사회과학이건 자연과학이건 상관없이 통용될 수 있는 진리가 될 것입니다.
제가 앞서 기호학이 실용적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학문의 이런 특성을 잘 실현한다는 점에서 비롯합니다. 기호라는 사물이 이 세상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호로 본다면 그것은 기호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기호학을 하나의 관점으로 정립하는 중요한 발상이라 하겠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무엇일까요?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알아보겠습니다.
표현으로 문화를 창조하다
첫째, 이 세상을 기호로 본다는 것은 이 세상을 표현된 것과 표현한 것의 관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곧 인간의 문화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자연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 거기에 문화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수만 년 동안 갈고 닦인 바위 하나가 숲 속 어디엔가 있다고 합시다.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연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문화의 일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기호로 볼 수 있을까요? 언젠가 기호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 기호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지요. 적어도 우리가 어떤 것을 기호라고 부를 때에는 대상 자체에 표현하는 성질이 있거나,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는 성질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관점과 대상의 문제를 말하면서 밝혔듯이 표현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과 표현하는 성질로 인식된다는 것은 결코 분리된 관념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일까요? 굳이 어원을 따질 것도 없이 문화는 무엇인가를 생산하는cultivate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인간의 의도와 목적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대상으로 나타났을 때 자연히 그것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한 바위의 예를 들어봅시다. 아무도 모르게 숲 속에 존재했던 바위가 사람의 눈에 띄어 의자 대용으로 쉼터의 역할을 했다면, 바위는 이제 자연물 바위가 아니라 의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위가 의자가 될 수 있다는 이 마법과도 같은 사실은 그러나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바위는 변함없이 그대로 있고, 사람의 생각이 바위를 의자로 만든 것뿐이지만, 그런 과정에서 바위는 하나의 기호로서 ‘여기에 앉으세요’라는 메시지를 표현한 셈이 됩니다.
바위는 좀 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띨 수도 있습니다. 일본 교토에 있는 ‘료안지龍安寺’라는 절에는 이런 바위들을 모래 위에 배치하여 만든 이른바 ‘가레이 산수枯山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정원을 보면서 선禪적인 명상에 잠기기도 하는데, 이때 바위 하나하나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분명히 무엇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bricolage’라는 말로 구조의 성질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처럼 바위가 도구적인 의자도 될 수 있고, 정신적인 명상의 매개도 될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를 보여줍니다. 바위의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바위가 놓여 있는 상황의 맥락에서 어떻게 쓰이는가가 중요한데, 바로 거기에서 기호로서의 성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바위가 그러할진대, 인간이 앉으려고 의도적으로 만든 의자나 종교적 숭배를 위해 세운 성상 같은 것이 내포한 기호학적 성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요. 의자든 성상이든 어떤 목적을 위해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을 창조했다면, 이야말로 각각의 독특한 표현을 갖춘 문화적 산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문화라면 이런 문화가 생성되는 과정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논리를 찾아낼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바로 기호학이 하는 일입니다.
경계를 넘어서다
둘째, 기호학은 모든 것을 기호로 치환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서로 연관 짓게 하는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문학을 설명하든, 그림을 설명하든, 음악을 설명하든, 아니면 영화를 설명하든, 이들을 기호학적으로 설명하는 언어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면 기호학은 기호로서 이들의 공통된 성질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의 좋은 점은 문학, 그림, 음악, 영화가 같은 원리에 의해 생산되거나 수용된다는 논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열한 이런 것들을 ‘장르’라고 말합니다. 장르라는 분류체계의 기원은 생물학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과 식물을 무슨 종이니, 무슨 속이니, 무슨 과니 하며 상하 관계의 질서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초창기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지구에 생존하는 어떤 대상이든 체계적인 틀에 따라 분류된 분야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문학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분류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더욱 체계화하고 공고히 한 것은 바로 이런 자연과학의 경향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글이든 그것이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를 따지는 장르적 사유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게 된 것입니다. 국문학에서 글을 시, 소설, 수필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이제는 거의 제도화되다시피 했고, 그림을 동양화니 서양화니 나누는 것도 같은 발상입니다. 요즘 전공을 구분할 때에도 이런 장르론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와 소설, 회화와 조각, 음악과 철학 등 서로 다른 영역들 간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의 생산적 가능성이 아예 처음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모두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는 매체인 만큼, 이들 사이의 관계가 개방되고 활성화된다면, 더욱 풍요로운 토양에서 그 표현을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요? 혹자는 장르론적 사유를 농경적 사유에 비유합니다. 쉽게 말해 머무름의 사유라는 것이지요. 무엇엔가 귀속되면 거기에 뿌리박고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집불통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호학에는 바로 이런 사유를 근본부터 해체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본질이 있다고 보지 않고 그 본질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내어지는지에 주로 관심을 두다 보니, 무엇엔가 귀속되는 것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호는 그것이 발생하는 현장에서 의미가 생성될 뿐, 기호 자체에 근본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호학은 이른바 본질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도전적 사유가 바탕을 이룹니다.
미디어를 통한 실용성을 추구하다
셋째, 기호학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입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실용성이란 학문에서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이는 기호학의 도구적인 성질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구적 성질이라 하면 대개 이념적 내포나 목적도 없이 그저 유용하게 쓰이는 가치로 오해하기 쉬운데, 기호학은 도구적 성질 자체에 기호학의 이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기호로 보기 때문에 그 기호의 논리가 만들어지고, 그 논리는 결국 세상은 기호로 이루어졌다는 이념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학문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념을 강조하다 보면, 방법의 정합성이 약해지고, 방법에 치중하다 보면 결국 목적 자체가 불분명해질 때가 흔한데, 기호학은 성격 자체가 이미 이런 오류에서 벗어난 학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만으로도 기호학의 실용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를 좀 더 오늘날의 상황과 관련하여 설명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미디어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캐나다의 영문학자이자 문명비평가였던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오늘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휴대전화 등이 발휘하는 미디어의 힘은 참으로 막강합니다. 그런데 과연 미디어가 오늘날에만 문제 되었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어는 소리로 하는 말이나 문자로 쓰는 글로 구성되는데, 이는 모두 일종의 미디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른바 미디어의 전환기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로만 의사소통하다가 글이 발명되면서 의사소통의 질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이냐 글이냐가 매우 중요한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그리스 시대 플라톤은 글이 주는 폐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우리의 몸과 직결된 것인데, 글은 종이에 쓰임으로써 왜곡될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보다는 글이 거짓을 말하기 훨씬 쉬운 미디어라는 말인데 오늘날에 보아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글은 말과 달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인류 문화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글이 없었다면 과연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 계승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 글이 인쇄 기술의 발명 덕분에 엄청난 기세로 확산합니다. 이른바 ‘구텐베르크 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그토록 세력을 떨쳤던 글이 오히려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새로운 매체의 발명으로 문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미디어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요즘 미디어는 지난 시대 ‘말이냐 글이냐’라는 단순한 양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고, 더욱 주목할 점은 이런 새로운 미디어가 언제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미디어의 변화는 단지 소통 수단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이 구축하는 사유와 글이 구축하는 사유가 다르듯이 새로운 미디어는 새로운 사유를 구축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런 미디어의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사유도 요동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호학은 미디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이런 미디어의 이해에 기호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 것입니다. 오늘날 기호학이 특히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말하는 까닭을 바로 이런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늘날 기호학이 왜 필요한 학문인지를 알아봤습니다. 이제는 기호학이 주위의 다른 학문과 맺고 있는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기호학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학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인문학의 전통에 포함되고 축적된 다양한 분야와 긴밀한 관련을 맺어왔습니다. 예를 들어 시학, 해석학, 의미론, 수사학, 논리학, 인식론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분야들은 모두 언어와 사유를 대상으로 삼으며 그 무한한 광맥을 어떤 방식으로 캐내느냐에 따라 구분됩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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