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것들
- 4월 27일 저녁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훈련받으러 미국에 갔을 때 사 오셨던
금테두리 장식이 있는 유리잔 열 개.
유치원 때부터 반에서 1등을 해 온
꾸앙 오빠
성적표.
우리 집
색깔처럼
붉은 포도주색과 흰색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부겐빌레아* 넝쿨.
창문마다 기웃거리며
엄마에게 북쪽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재스민 넝쿨.
부 오빠가
엄마 재봉틀로 박다가
바늘을 부러뜨렸던
카우보이 가죽 벨트.
그건 오빠가
브루스 리보다
조니 캐쉬**를
더 숭배했을 때 냈던 사고다.
코이 오빠가
버들붕어를 기를 때 사용했던
유리 어항들.
내가
낮잠을 자곤 했던
해먹과 갈고리들.
그리고 많은 사진들.
매해 뗏마다 동물원에서 찍은
젊었을 적 아버지와
젊었을 적 엄마,
세상 사람 다 보게 엉덩이 다 내놓은 녀석이 누구인지
이제는 알아보기조차 힘든
우리 어릴 적 사진들.
엄마는 그 중에서 열 장만 고르시고
나머지는 불태웠다.
아버지에게 고통을 줄지도 모르는
증거는
남겨 둘 수 없기에.
* 부겐빌레아 : 분꽃과에 속하는 열대 덩굴 식물로, 꽃받침을 만져 보면 종이 같은 촉감이라 종이꽃이라고도 불린다.
** 조니 캐쉬(Johnny Cash, 1932-2003) : 미국 컨트리 가수이자 기타 연주가
마지막 인사
- 5월 14일
바다에서 두 주를 보낸 어느 날,
부함장이 우리 모두를
갑판 위로 불러 올려
국기 강하식을 거행했다.
노란 바탕에
빨간색 가로 줄이 셋 있는
남베트남 국기*다.
이제 남베트남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 여자가
나라를 잃은 마당에 살아서 뭐하겠냐고
비명을 지르며 배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사람들이 겨우 그 여인을 끌어내렸을 때
한 남자가 칫솔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나는 둘 다 모르는 사람들이라
그 슬픔과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코이 오빠 눈에는
마치 짓눌려 죽은 병아리 눈처럼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다.
나는 코이 오빠 손을 잡아끌었다.
“나 따라 와.”
오빠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뱃고물에서
나는 엄마의 흰 손수건으로 싼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오빠의 뭉개진 병아리 시체를 팔에 감싸 안은
쥐가 갉아먹은 내 인형.
나는 그것들을 손수건으로 꽁꽁 묶었다.
코이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 인형이 던져지자마자,
흰 꾸러미가 바닷물 속에 잠기자마자
후회가 몰려왔다.
* 남베트남 국기 :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라고도 하며, 응우옌 왕조 때인 1890년부터 1920년까지 사용되었다가, 다시 1955년에서 1975년까지 베트남공화국 국기로 사용되었다.
검정, 하양, 노랑, 그리고 빨강
- 9월 2일 오전 11시 30분
종이 울린다.
아이들이 다 일어선다.
나도 일어선다.
아이들이 줄을 선다.
나도 줄을 선다.
복도를 걸어가서
왼쪽으로 꺾어진다.
쟁반을 하나 들고
음식을 받아서
자리에 앉는다.
밝고 떠들썩한
식당 한쪽에는
하얀 얼굴들.
그 반대쪽에는
검은 얼굴들.
양쪽 다 하하 웃고, 쩝쩝 씹는다.
희지도 검지도 않은
누르스름한 얼굴의 아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이.
어디에 앉아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대체
빵에 폭 싸이고
노란색과 빨간색 소스가
덕지덕지 발린
옥수수 모양의
분홍색 소시지는
어떻게 먹어야 한단 말인가!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우리 베트남 국기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가, 했다.
그러다가
이 나라에는
베트남 국기가 무슨 색인지
알만 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쟁반을 내려놓고
밖에 나가 복도에서 기다렸다.
모르는 게 약
- 9월 19일
이제는 알아.
애들이 나한테 개고기를 먹느냐고 물어볼 때,
왕왕 짖고, 쩝쩝거리고, 배를 잡고 웃는다는걸.
내가 정글에서 호랑이들과 살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으르렁거리며 네 발로 기어간다는걸.
나는 다 알아.
코이 오빠한테
오빠네 학교 애들도
똑같이 그러는지 물으니까
오빠가
내 머리에 대고
고개를 끄덕끄덕했거든.
다 알게 되니까
못 알아듣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 10월 13일
오늘 배운 말은
‘맛있는’이라는 뜻의
딜-리-셔-스.
워씨-잉턴 아주머니가 묻는다.
“워즈 유어 런치 딜리셔스(Was your lunch delicious)?”
- 점심 맛있었니?
나는 말하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우리말을 영어로 바꾸어야 한다.
아주머니는 기다려 준다.
“아이 잇 캔디 인 토일리트(I eat candy in toilet).”
- 화장실에서 사탕을 먹었어요.
워씨-잉턴 아주머니가
당황한 표정으로 묻는다.
“왓(What)?”
- 뭐라고?
나는 ‘the’를 빼먹었다는 걸 알아채고 말한다.
“오, 더 토일리트(Oh, the toilet).”
-아, 그 화장실.
그래도 아주머니
표정은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덧붙였다.
“낫 캔디 올 타임(Not candy all time).”
- 늘 캔디를 먹지는 않아요.
“하지만 늘 화장실에서 먹니?”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
“왜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쩝쩝 짭짭 씹으며
낄낄 깔깔 웃어대는
수많은 입들이 가득한
시끄러운 식당을 생각하면
내 배 속에서
잠자리들이 공중제비를 돈다는 것을.
내 머릿속에서 그 말을 영어로 바꾸는 동안
내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었다.
“이제 내가 네 점심을 싸 줄 테니까,
네 책상에서 먹도록 하렴.”
“교실에서는 안 먹어요.”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 주마.
조금 참고 기다리면
지내기가 더 좋아질 거다.”
아주머니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기분이 좋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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