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대한 각서
고독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
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
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천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 공, 고독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
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종이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은 팔과 이어져 있기에,
그림은 닫히지 않는다 고독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
이다
움직이는 누드
1
어떤 고요함은 도착 훨씬 뒤지만 또 어떤
고요함은 출발 직전이어서, 이상한 푸른빛
사이로 사뿐히 너는 발꿈치를 들어 올린다
튀어나온 젖가슴은 동요하고 있었을 거다
그러나 아직 네 팔과 다리는 네 생각을 채
짐작하지 못한 듯, 아니면 벌써 잊어버린 듯
2
네가 팔을 뻗어 남자의 씨앗을 던질 때
잠이 덜 깬 허리도, 다리도 따라 나섰다
아직 새벽이었고 빛의 입자들은 쾌락의
재에 묻어 더러워졌다, 흙 묻은 밥알처럼......
공기는 부푼 젖가슴에 눌려 자국이 났고
시든 음부 사이로 벌레들이 기어 나왔다
3
그냥 물이 아니라 한사코 헤엄치는 물
그냥 땅이 아니라 무작정 기어가는 땅
한 세월 너는 그렇게 오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너는 떠나가고 있는 중이다
눈 오는 오리온좌에서 습한 전갈좌까지
어두운 지층 속에 길을 만드는 것이다
來如哀反多羅 6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을 헤아리는지 모르면서
끓는 납물 같은 웃음을
눈 속에 감추고서
한낮 땡볕 아스팔트 위를
뿔 없는 소처럼 걸으며
또 길에서 너를 닮은 구름을 주웠다
네가 잃어버린 게 아닌 줄 알면서
생각해보라,
우리가 어떤 누구인지,
어디서 헤어져서,
어쨌길래 다시 못 만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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