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터
- 낭혜화상을 그리워하며 눈보라 속을 거닐다
뜨겁게 다가온 사람, 낭혜화상
25여 년 전의 어느 봄날 새벽, 지리산 자락 실상사 마당에 있는 보물 제34호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를 더듬은 적이 있다. 뜬금없이 탑비를 더듬은 까닭은 지난밤 산에서 내려온 찬기를 머금은 탑비를 손가락 끝으로 한자 한자 읽어보려 한 것이다. 아니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읽는다고 하기보다는 흉내를 냈다는 것이 옳다. 겨우 한자를 깨치기 시작한 때였으니 읽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행한 이들 중 한 명은 화가였으며, 다른 한 명은 나말여초의 선종사상에 대한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논문을 준비하던 이는 나의 한문 선생이기도 했으니 그이의 행동을 흉내 내어 덩달아 탑비를 더듬었을 뿐 스스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누가 봤으면 우스꽝스럽기도 했겠지만 그것은 엉겁결에 상상조차도 하지 않았던 일을 겪는 것처럼 독특한 경험이었다. 마모가 심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글자들을 그렇게라도 하면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부의 행동은 나름 신선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시에 느꼈던 전율은 마치 동결되어 버린 양 뇌리에 선연하게 걸려 있다. 그즈음 한문과 함께 구산선문九山禪門에 눈뜨며 불교사상에 대해 맛을 들이고 있던 터여서 선사들의 탑비는 좋은 교재이기도 했다. 그런 참이었으니 사부에게 빌붙다시피 짬을 내서 전국을 떠돌았던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 알고 보니 그렇게 엄벙덤벙 맞닥뜨렸던 선사들의 탑비들 중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담아둘 글귀 한 줄 머금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수철화상탑비가 기억에 남았던 것은 중간쯤에 있던 “…참선에서 꽃술을 드날리고 화엄에서 향기를 모으셨다○○○禪苑揚○集以雜花騰馥○”라는 글 한 줄 때문이었다. ‘잡화雜花’란 본디 《잡화엄경雜華嚴經》을 일컫는 말로 요즈음 말하는 《화엄경》이다. 비록 그날 더듬었던 탑비가 본디 세워졌던 탑비를 탁본해둔 것을 보고 조선 숙종 10년인 1714년에 다시 세운 것일지언정, 그 아름다운 글귀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후대에 다시 세운 것이지만 이미 탁본 당시부터 탑비 전체에 걸쳐 결실된 부분이 많아 그 내용을 고스란히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컨대 수철화상秀澈和尙, 815~893은 교敎와 선禪을 서로 따로 두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다른 한쪽을 배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828년에 실상산문을 개창한 실상화상實相和尙 홍척에 이어 산문의 맑은 선풍을 이끈 2조祖였으며, 신라 제48대 왕인 경문왕에게 교종과 선종의 서로 다른 점과 같은 점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탑비에는 그 강의의 내용이 결실되어 안타깝기만 하다. 앞서 내가 반한 글귀 또한 앞의 세 자와 뒤의 한 자가 결실되어 막연하긴 했지만 공부방으로 돌아와 금석문을 뒤져 읽으며 비로소 깨달았으니, 나는 그 대목에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간 내가 알고 있었던 그 어떤 아름다운 문장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을 만치 빼어났기 때문이다. 글이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은 비단 유려한 문체나 어휘력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세련된 미문이 아니고 투박하더라도 그가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 분명한 아취를 풍기는 것 아니겠는가.
당시 실상사에서 겪었던 그 미세하고도 우렁찬 떨림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몇 달 후 걸음을 옮겼던 곳이 오늘 가는 보령 성주산 기슭의 성주사터聖住寺址다. 그곳에서도 나는 전에 없던 경험을 했다. 미처 글로 다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마음속에 가득 찼으며, 견딜 수 없도록 아름다운 문장에 휩싸여 정신이 아득하기만 했으니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저 사람이 마시는 것이 나의 갈증을 풀 수는 없으며, 저 사람이 먹는 것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는 없으니, 어찌 스스로 노력하여 마시고 먹지 않겠는가. 유교와 불교가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宗旨를 보지 못했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한다.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해 송곳 끝처럼 날카롭기까지 한 이 글은 절터의 왼쪽에 우뚝 서서 천년을 견뎌온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의 뒷부분에 나온다. 그 문장을 처음 대한 나는 마치 평생을 찾아 헤매던 광맥을 발견한 사람과도 같이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까만 빗돌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싱긋이 미소가 번졌지만 몸은 파르르 떨렸다. 마음속으로 “옳다! 옳다!”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아직도 성주사터를 생각할 때마다 당시의 경외와 흥분이 만화경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은 감동이 그만큼 컸던 때문이리라. 그 글 한 줄은 수행자로서의 단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릇 수행자라 함은 금강석과 같은 단단함으로 무장된 단호함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수행자의 으뜸된 자세라고 생각하는 내게 낭혜화상朗慧和尙, 801~888은 뜨겁게 다가온 사람이다.
그대로 믿고 따를 뿐 갈림길 속의 샛길은 보지 마라
그처럼 전율이 일도록 아름다운 말을 서슴지 않았던 낭혜화상은 세상의 그 어떤 티끌에도 물들지 않았다는 무염선사無染禪師다. 그는 신라 제29대 왕인 무열왕재위 654~661의 8대손이며, 13세에 설악산의 오색석사로 출가했다. 불문에 들어서서는 오색석사의 법성선사法性禪師에게 능가선楞伽禪을 배우고, 영주 부석사의 석징대사釋澄大師(혹은 석등대사釋登大師)로부터는 화엄을 공부했다.
당시 부석사는 화엄뿐 아니라 선도 함께 공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구례 화엄사에 필사본으로 남은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785~861의 비문에 그가 대계大戒를 받던 22세에 이미 “율과 선이 스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적인선사는 후에 곡성 태안사에 구산선문 중 동리산문을 열었으며, 15세였던 799년에 부석사로 출가해 공부를 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낭혜화상이 부석사로 가기 전 이미 부석사에서는 화엄과 함께 선에 대한 공부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당나라로의 유학을 권하는 법성선사의 권유를 물리치고 낭혜화상이 부석사로 간 까닭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낭혜화상은 그후 제41대 헌덕왕 때인 822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왕자 흔昕의 도움으로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에 있던 당은포唐恩浦에서 배를 타고 구법求法의 길에 들어섰다. 당나라에 다다른 후 처음에는 화엄을 공부하다가 후에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문하인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서 선을 이어받아 심인心印을 받았으며, 845년 회창법난會昌法難으로 더이상 당나라에 머물지 못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니 낭혜화상은 출가 후 줄곧 화엄과 선을 넘나드는 공부를 했던 셈이다. 그 공부를 바탕으로 그는 구태여 선과 화엄을 구분해 나누지 않고 하나로 묶었을 것이며, 그 하나는 다름 아닌 부처님이었다. 그는 앞에 인용한 문장에 이어서 또 말한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생활하며, 교사巧詐한 마음을 버리는 것, 이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그 말은 분명하니 그대로 따르고, 그 뜻은 오묘하니 그대로 믿으라. 도道를 부지런히 행할 뿐 갈림길 속의 샛길은 보지 마라.
여기에서 말하는 그 말과 뜻은 곧 부처님의 말과 뜻이다. 시비를 할 시간에 차라리 허튼 마음을 가다듬어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재가신도들인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앞다투어 되새겨도 모자람이 없는 따끔한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이 하얀 눈이 되어 절터에 쏟아진 것인가. 채 어둠이 벗겨지지 않은 시간에 다다른 절터는 눈 천지다. 간밤에 퍼부은 눈이 벌써 발목이 잠길 정도로 쌓여 있었지만 묘하게도 눈 내리는 날 특유의 들뜸이 전혀 없다. 오히려 묵직한 정적만이 내려 깔려 있다. 하도 적요해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난분분亂紛紛 내려 쌓이는 눈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눈이 뒷산을 가리고 절터를 뒤덮으며 하염없이 쏟아지는 날, 거센 눈발 뒤로 보이는 탑을 멀리서 바라보기를 얼마나 간구했던가. 그러나 번번이 그 장면과 맞닥뜨리지 못하고 돌아서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되풀이했다. 불현 듯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하던 일 팽개쳐놓고 공부방으로부터 200킬로미터를 멀다 않고 단숨에 달려 다다르곤 했지만 절터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언제나 내가 원하던 장면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내놓고 딴청을 부리기 일쑤였으니까 말이다.
그럴 때마다 애꿎게 일기예보만을 탓하며 툴툴거리다가 돌아서곤 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을 것만 같다. 어젯밤부터 퍼붓던 눈은 심상치 않았다. 사실 바다가 내다보이던 숙소의 창가에서 밤이 늦도록 서성거렸던 까닭은 눈이 내린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람이 하도 거세어 눈은 수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날고 있었다. 바닷가여서 그렇겠거니 하면서도 흔치 않은 풍경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은 절터가 바다로부터 사뭇 떨어진 산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고개 하나만 넘어도 세찬 바람이 잦아들고 내리던 눈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는 경험이 숱했으니, 막상 절터에는 눈이 내리고나 있을지 걱정이 앞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밤새 모진 눈보라에 시달린 흔적이 난무한 절터는 엉망이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우려했던 대로 눈은 세차게 내리지 않았다. 내겐 거칠고 모질게 몰아치는 눈보라가 필요했으니 그저 난분분 흩어지는 눈송이와 수북하게 쌓인 눈이 내놓는 정취 속으로는 걷고 싶은 생각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간혹 하늘을 쳐다보고 또 절터를 바라보며 무작정 기다렸다. 눈이 제법 내려도 자동차 밖으로 나가지 않고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발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보라가 빚어낸 아름다운 변상도變相圖
그렇게 다섯 시간, 정오가 가까워올 무렵 이윽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곤 눈이 쏟아졌다. 눈보라였다. 그토록 간구하던,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눈보라 말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눈보라는 모질었다. 그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건 말건, 사진기 렌즈에 눈이 쌓이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장갑조차 끼지 않은 손은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렸지만 쏜살같이 주춧돌로부터 석등에게로, 석등에게서 탑에게로 그렇게 절터를 쏘다녔다. 바람도 미쳤고 나도 미친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버린 듯 눈보라가 점점 거세질수록 더욱 신이 났다. 몸은 잔뜩 웅크렸을지언정 마음만은 환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얼굴로 들이닥치는 눈에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절터에 우뚝한 탑들이 재빠르게 스쳐가는 눈발에 에워싸인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꼭 봐야 했을 아무런 까닭은 없다. 그저 앞뒤 분간하지 못할 만큼 쏟아지는 눈 속에 내가 존재하고 싶었을 뿐이다. 탑은 단지 그 존재에 대한 이유였다. 탑은 부처와 동격의 성물聖物이지 않던가. 폐허로 변해 부처님 계시지 않는 절터에 우뚝한 탑은 곧 부처님인 것이다. 그가 있으니 그 앞에 머물고 싶었던 것뿐, 그것도 이렇듯 모진 날씨에 만나고 싶었던 것뿐이다. 살면서 어느 순간, 누군가가 내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수차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서로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를 만나고 나면 그의 존재보다 나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제 버릇이 되어버렸다.
오늘 또한 마찬가지다. 탑이 없었다면, 곧 부처님이 없었다면 내가 눈보라 모진 절터를 이렇듯 헤매고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 급한 것은 부처님이 아니었다. 설사 내가 그에게 급하다고 해도 그는 언제나 시간을 요구했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여여如如하게 있지만 그에게로 가는 동안 나는 언제나 뒤뚱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뒤뚱거리다가 세상에 미혹되어 사람에게 흔들리기 일쑤였고, 너덧 차례 그렇게 흔들리고 나면 떨어져나가는 것은 불거진 욕심만이 아니었다. 그것과 함께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것들은 뭐라 형용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나만 아프고 마는 것에서 그치면 천만다행이었다. 문득 나 자신을 바라보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까닭 모를 분을 이기지 못해 나도 모르는 어느새 내가 피폐한 가해자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렇듯 혹독한 날씨 속에서 부처를 만나고 싶었다. 그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앞세워 모진 눈보라 속을 걸으며 참회하고 나를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바람은 목덜미에 바짝 붙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떠밀다시피 몰아세웠고, 나는 휘청거리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더구나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바람에 날린 눈이 얼굴로 달려들어 연비의식燃臂儀式을 치르는 것처럼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바람이 마치 계戒를 주는 전계화상傳戒和尙인 것만 같았다. 그는 내가 지은 업장業障을 소멸시키고 계를 내리는 것마냥 내가 이미 지나온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탑을 에돌아 다시 탑으로 가는 길에 뒤돌아보니 나의 흔적은 가뭇없었다.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길, 겹겹이 껴입어 둔한 탓인지 마음이 급한 것인지 두어 차례 엉덩방아를 찧었다. 또 얕은 둔덕에 올라서려다가 메다꽂히듯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바람은 황급히 나의 흔적들을 지웠다.
그렇게 발자국도 없이 내가 기어코 다다른 곳은 절터 가장 뒤의 으늑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고스란히 눈보라를 맞으며 내가 한 것은 그토록 간구했던 거센 눈발 뒤의 탑을 바라보는 것도, 또 부처님을 떠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얼어붙은 입으로 경전을 소리 높여 염송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망연했을 뿐이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 까닭은 눈앞에 펼쳐진 정경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바람은 잠시도 멈출 여지를 보이지 않았고 그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쏟아지던 눈발도 덩달아 이리저리 몸을 틀었으니 향화 끊어진 도량에 은하수라도 흩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불화佛畵가 또 있을까. 아! 절터는 흑백의 농담이 빚어낸 한 폭의 찬란한 변상도였다. 형체도 형상도 없는 화엄이 펼쳐지는가 하면, 어느새 그 자리에 선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었다가 또 튼튼한 꽃받침이 되어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가 펼쳐지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의 아름다운 문장이 그림으로 나타는 것만 같았다. 낭혜화상의 아름다운 말들이 크나큰 괘불掛佛이 되어 허공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던 그것, 차마 눈을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얼굴은 찢어질 것만 같았고, 손은 떨어져나갈 것처럼 시렸지만 내 한 몸 돌볼 겨를이 없었다. 계를 내리는 전계화상의 자비로우며 근엄하지만 때로는 가슴이 철렁한 할喝과도 같은 목소리처럼, 바람은 변주곡인 양 시시각각 그 높낮이와 굵기 그리고 거친 정도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허공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정경이 펼쳐졌으니 어찌 내 몸 돌본다고 돌아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눈보라 또한 여간 아니었다. 먼 산을 삼킨 눈보라는 절터마저 삼킬 태세인지 점점 거세지고 황량한 절터에서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탑비가 있는 전각 언저리뿐이었다. 어찌나 바람이 제멋대로인지 전각 자리 또한 눈보라에 휩싸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벌판보다는 나았지만 서 있지도 못하고 옹색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야 했다. 눈밭에 빠졌던 정강이 아래가 젖어 한기가 엄습해왔지만 모른 체하고 검은 빗돌을 바라보며 낭혜화상에게 빠져들었다.
낭혜, 화엄과 선의 경계에 서다
낭혜화상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보수라 할 수 있는 교종과 진보적 성향의 선종이 서로의 방법을 내세우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충돌만 있지는 않았을 터다. 역사의 흐름 대개가 그렇듯이 충돌이 있으면 화해와 융합을 모색하는 무리들도 생겨나게 마련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낭혜화상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애초부터 하나의 방법에 매료되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그의 공부는 교와 선 양쪽 모두 아우르는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그에게는 두 가지의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 생각이 서로 다른 생각을 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조차 머금은 채 한 곳으로 나아갔으니, 그 모습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분별하고 가려내는 시비의 근원을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비란 서로 다른 생각의 충돌일 테니, 그것이 사라진 곳에는 오로지 수행자의 본분인 정진만이 있을 뿐 아니겠는가. 하물며 그것을 둘로 구분조차 하지 않고 서로 동등하게 두었으니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그는 오색석사에서 법성선사에게 능가선을 배우고 난 뒤, 당나라로 유학을 권하는 선사의 말을 뒤로 하고 부석사로 떠나지 않았던가. 법성선사는 당나라에서 능가선을 배우고 돌아왔으며, 능가선은 《능가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는 북종선北宗禪 계열이었다. 그러므로 낭혜화상 역시 북종선을 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신행선사神行禪師, 704~779에 의해 지리산 아래 산청 단속사에 터를 잡은 북종선은 활발하게 퍼져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그가 선종사찰을 마다하고 화엄도량인 부석사를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본디 부석사는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창건 이래로 화엄의 종주도량으로 그 이름을 떨쳤으며, 자연히 왕실과의 돈독한 관계를 끈끈하게 이어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석사를 택했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의 사상 전반을 통해 흐르는 원융圓融으로 미루어보면 굳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욱이 그가 부석사로 떠나며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음에랴.
밤중의 새끼줄은 뱀으로 속기 쉽고, 허공의 베올은 분간하기 어렵다. 물고기는 나무에 올라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토끼는 나무 그루터기를 지킨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가르친 것과 내가 깨달은 것에는 서로 나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진주를 얻고 불을 피웠으면 조개와 부싯돌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도에 뜻을 둔 사람들에게 어찌 꼭 정해진 스승이 있겠는가.
이미 어릴 때 유가의 경전을 읽었던 낭혜화상은 불문에 들어서서 선을 배웠다고 해서 굳이 그것만을 따라야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진주를 얻고 불을 피웠으면 조개와 부싯돌은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선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또다른 스승을 찾아 화엄도량의 문을 두드린 것은 아니었을까. 물고기를 나무에서 잡을 수 없고 나무 그루터기만을 지킨다고 토끼를 잡을 수 없으니, 스스로 물고기와 토끼를 찾아 움직인 것이지 싶은 것이다. 그것은 지금껏 배운 것과는 다른 법法을 구하려는 행동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석사는 화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선도 함께 배울 수가 있었으니 그 유혹은 큰 것이었으리라.
또한 낭혜화상이 법성선사에게서 배웠을 것으로 짐작되는 북종선은 화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다. 화엄사상이란 곧 북종선의 소의경전인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장如來藏사상이 교학적으로 발달해 다다른 궁극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도의선사道義禪師에 의해 전래되어 지금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남종선南宗禪과는 달리, 법랑法朗에 의해 들어오고 그의 제자인 신행선사에 의해 전파된 북종선은 경전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화엄과 북종선은 서로 회통할 수 있는 여지가 강하게 비친다는 것을 뜻한다. 그에 따라 낭혜화상은 화엄과 함께 선 수행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부석사로 걸음을 옮겼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공부와 수행에 대한 그의 정념은 놀라운 것이었다. 부석사에서 석징대덕(또는 석등대덕) 아래에서 정진했지만 이내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그만 구멍에 담긴 물에서는 잔이 뜰 수 없듯,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는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윽고 817년(?) 도반인 도량道亮과 함께 당나라로 향하는 사신 일행의 배에 올랐다.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한 달 반가량을 표류하다가 지금의 흑산도인 검산도劒山島에 이르러 돌아오고 만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고 822년에 조정의 사신으로 떠나는 왕자 흔의 배를 얻어 타고 다시 당나라로 향했다.
그는 먼저 장안의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다다라 스승을 구했는데 화엄을 논하는 설법이 부석사에서 배운 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상사는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 당시 스승으로 모셨던 지엄화상智儼和尙, 602~668이 주석했던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경전을 버리고 선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느 얼굴 검은 노인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 말은 “멀리 자신 밖의 사물에서 (도道를) 구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遠欲取諸物 孰與認而佛”라는 것이었다. 그 한 마디에 문득 깨달은 그는 지상사를 떠나 마조도일의 제자인 불광佛光 여만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에게서도 답을 구하지 못하고 다시 마조의 제자인 마곡麻谷보철을 찾아간 것이다.
오로지 제 할 일만 하고 계신 낭혜화상
그러고 보니 불현듯 교敎를 포기한 낭혜화상이 선禪을 익히려고 찾아간 이들은 모두 남종선 계통인 마조도일의 제자였다. 당시 마조도일은 이미 열반에 들었지만 그 제자들은 홍주종洪州宗을 이루고 있었으며, 홍주종은 화엄의 성기性起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지엄화상에 따르면 성기란 깨달음의 본체〔性〕가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것〔起〕을 말한다. 이는 중생이란 본래부터 여래가 될 수 있다는 여래장사상과도 밀접한 것이다. 홍주종은 이러한 여래장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으므로 낭혜화상뿐 아니라 이미 화엄을 익히고 유학을 떠난 대개의 신라 유학승들이 수용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곡보철의 문하에 들어간 낭혜화상은 남들과는 달리 선을 빨리 익혔다고 한다. 그가 익힌 선은 마조선馬祖禪으로 짐작되는데 그것은 보철화상이 마조도일의 법을 이었기 때문이다. 마조선의 특징은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언묵동정言默動靜과 같은 일상의 모든 행동에서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곧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이며, 즉심시도卽心是道인 것이다. 이는 그동안 낭혜화상이 공부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방법이었지만 적응이 빨랐던 것 같다. 선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철화상으로부터 심인을 전해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곧 보철화상이 열반에 들고 말았다. 그때부터 낭혜화상은 대륙을 떠돌기 시작했다. 선지식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대중들에게 보시행을 하여 동방의 보살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그런 보살행은 845년의 회창법난으로 인해 다시 신라로 돌아올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낭혜화상의 구도행은 당시 신라 하대를 관통하고 있던보수와 개혁사상 모두를 두루 섭렵하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화엄과 북종선 그리고 당나라에 가서 남종선의 홍주종을 익혔으며, 어린 시절에는 유가의 경전까지 읽었으니 이야말로 원융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더구나 그는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지금 현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것들을 폄훼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마음에 모두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성주사터는 그런 그가 신라로 돌아와서 중창불사를 일구어 다시 도량을 일으킨 곳이니 그 아니 아름다운 곳이겠는가. 낭혜화상 스스로에게 분별이 없으니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호하면서도 분명하며, 백척간두의 장대 끝이기도 하며,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와 같기도 한 생각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앞에서도 말한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한다. “저 사람이 마시는 것이 나의 갈증을 풀 수는 없으며, 저 사람이 먹는 것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는 없으니, 어찌 스스로 노력하여 마시고 먹지 않겠는가”라고 말이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욱 감동이 큰 것이다. 그 때문인가. 언제나 이곳을 찾아도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비석이 오히려 큰 꾸짖음의 할喝을 토해낼 뿐 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를 나무랄 수도 없다. 비록 냉정할지라도 그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를 찾아가는 길, 그 길은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이 아니던가.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독을 두려워한다면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는 길, 그 길에서 내가 구하려는 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이다. 전체라는 것은 부분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부분의 집합이 곧 전체이며, 전체는 부분을 평등하게 아우르는 것일 뿐 그 어느 것이 다른 것에 대해 우선하며 상하를 나누는 수직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속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분별을 넘어선 전체, 그곳은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인식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禪의 깊숙한 곳일 테니까 말이다.
살면서 분별의 마음이 가득 차올라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진저리 칠 만큼 고독에 시달리고 난 다음이면 절로 발걸음이 옮겨지던 곳.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또는 장대비가 하염없던 날 그리고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소름을 돋게 하는 날까지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은 채 무수히 절터를 거닐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에게서 벗어날 힘이 없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되돌아서면 저만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낭혜화상은 오직 당신 할 일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제 할 일, 그것이면 모든 것이 충분할 것만 같다. 그것만 제대로 하면 세상일 어긋날 것 하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제 자신의 모습조차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 나 아닌가.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비롯되고, 나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면 그 매듭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곳, 성주사터는 내게 그처럼 치열하게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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