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운동
사서 총회의 시작
도서관 운동
미국의 공공 도서관은 19세기 전반기에 계속 발전했다. 여기에는 유료 회원제 도서관도 있었고 기증자가 설립한 일반 도서관도 있었다. 뉴잉글랜드 주에는 이 시기에 그런 종류의 도서관이 1천 개 이상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공공 기관의 형태 또는 서점, 소방서, 공공 독서실 등의 형태로 수천 개의 도서관이 있었다. 매사추세츠 출신의 시인이자 수필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3은 도서관을 칭송하는 글을 통해 미국 지성인들의 감정을 표현했다. “작디작은 도서관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 전국에서 가장 똑똑하고 재치 있는 사람들이 1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풀어놓은 학식과 지혜의 결과물이 최선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기증자의 열정 또는 갖고 있는 재력에 따라 수많은 지방 도서관들이 불길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런 기증자 중 하나가 뉴욕 주 뉴레바논 출신의 제시 토레이 주니어Jesse Torrey Jr., 1787이다. 그는 1804년에 뉴레바논에 소년 소녀들을 위한 ‘무료 청소년 도서관’을 설립했다. 교육과 인권의 옹호자이며 완강한 노예 폐지론자였던 토레이는 ‘수입 와인과 증류주’에 대해 매기는 세금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무료 도서관을 건립할 것을 정부에 제안했다. 그런 세금을 제정하면 ‘폭음을 줄이는’ 데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토레이의 청소년 도서관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도서관의 필요성에 대해 비범한 글을 남겼다. 1817년에 발간된 그의 중요한 저서 제목은 《지성의 횃불The Intellectual Torch》이며, 부제는 “무료 공공 도서관을 통해 지식과 미덕을 확산시키기 위한 근원적이고 경제적이며 신속한 계획 세우기”였다. 몇십 년 동안 토레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굳이 애서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도서관에 대해 극히 열성적인이 기울인 노력은 미국을 넘어 유럽 일부 국가에까지 ‘도서관 운동’으로 번졌다. 모든 사회 계층에서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도서관의 필요성은 해가 갈수록 점점 커졌다. 주일학교에서도 어린이를 위한 서고를 마련했으며, 그런 도서관에서는 소설이 더 인기가 많았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젊은 사람들의 독서를 부추길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장려되기도 했다.
부유한 계층 사이에서는 미국인들을 교육시켜 보다 나은 시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열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밀려드는 이주자들에게 미국에서 출판된 책들을 접하게 함으로써 미국 사회에 보다 빨리 동화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할 필요도 있었다. 소설, 과학책, 그리고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 기계류 작동법을 익힐 수 있는 설명서와 함께 신문과 잡지도 구비되었다. 아세니움과 도서관조합을 비롯한 기계 관련 도서관‘견습생 도서관’으로도 알려짐도 계속 설립되었다. 직원들이 경제를 공부하는 동안 장편소설과 단편소설까지 즐길 수 있게 한, 교육과 오락을 겸한 상인 도서관들도 생겨났다. 노동자 계층을 위한 도서관과 더불어, 이주자들이 동부에 있는 자신들의 고향과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를 새롭게 형성한 서부 지역에도 새로운 대학 도서관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대부분의 대학 도서관은 성직자 교육을 위한 학교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랐으며, 장서는 적고 제한적이었다. 책들은 대개 교실에 보관되었고 학교 직원이 관리했기 때문에 별도의 도서관 시설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는 1841년에 선구적으로 별도의 도서관 건물을 지었다. 의사를 위한 전문 도서관은 1830년에 생겨났는데, 군의관 사무실에서 수집한 의료 서적들이 토대가 되어 국립 의료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남북전쟁1861~1865 전까지는 자발적인 조합과 협회 대부분이 순회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하는 부담을 짊어졌다. 가장 운영이 활발했던 도서관 중 하나는 1838년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설립된 하트퍼드 청년협회Hartford Young Men’s Institute였다. 이 협회는 책을 빌려주고 강의를 하면서 장서를 늘리다가 하트퍼드 도서관조합과 합친 후 1774년에 미국 최초의 사립 회원제 도서관 중 하나로 운영되었다. 1844년에 이 협회는 새로 건축된 워즈워스 아세니움Wadsworth Atheneum으로 옮겨갔다. 워즈워스 아세니움은 반세기 넘게 이 도서관의 본거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선구적인 예술 박물관이었다. 1846~1868년까지 근무했던 헨리 M. 베일리는 저명한 사서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년협회 도서관의 분위기를 묘사한 책을 1850년에 수필로 출간했다. 베일리의 《도서관 사색Thoughts in a Library》은 사서, 후원자 그리고 도서관의 독서실에 띄우는 감상적인 송시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다. 지붕 위로 비가 후두두 떨어지고 창문에도 빗방울이 부딪친다. 밖은 춥고 음산하지만 안은 유쾌하고 명랑하다. 가스등은 밝게 타오르고, 아늑한 공기가 모든 사물 위에 드리워 바깥의 음산함을 잊게 해 준다.
열람실에는 책 읽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정적이 감돌고 있다. 너무나 고요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확인해 주듯 도서관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린다. 나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한다.
이 책들, 얼마나 큰 행복인가! 책은 우리를 절대 고갈시키지 않는 친구이다. 세상이 냉담하다고? 이곳은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피난처이다. 이곳에서라면 근심을 잊을 수 있고 영혼도 쉼을 얻을 수 있다.
베일리는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와 《해적의 삶Lives of the Pirates》을 포기하고 《총 사냥Hawker on Shooting》을 선택했다가 때로는 부드러운 시가와 화장수 향을 풍기며 돌아오는” 청년들을 본다. 그러나 1852년의 도서관에는 책과 독서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이 청년들 중 한 사람에 대해 베일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한 남자가 열람실에 앉아 있다. 그는 《상인 잡지Merchants’ Magazine》를 펼치고 있지만, 그의 눈은 표지를 지나 사서 책상 앞에서 책을 기다리는 아가씨에게로 계속 향한다. 기다리던 책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아가씨가 무심코 그 청년을 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다. 당황한 아가씨는 급히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러자 청년은 사서에게 와서 머뭇거리며 말한다. ‘캐물으려는 건 아니지만, 방금 계단으로 내려간 아주 예쁜 아가씨의 이름을 알고 싶군요’라고. 오, 아름다운 인생의 봄날이여. 이렇게 청춘남녀의 사랑이 시작되는구나!”
베일리는 자신의 글에서 “수많은 도서관 후원자들이 서부 또는 대도시로 갔지만, 도서관은 어디나 같다”고 적었다. 뉴욕에 남은 사람들과 함께 베일리는 1853년 뉴욕에서 개최된 국내 최초의 사서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참가자 82명 모두는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호명’되었다. “책에 대한 지식 그리고 대중을 위한 장서 구축 및 관리가 사서를 비롯하여 서지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간의 논의와 협조를 통해 더욱 원활해질 수 있다고 믿는 본 서명자들은, 공공 도서관의 발달과 유용성을 더욱 확산시킬 방법에 대해 협의하고 도서 수집가와 독자에게 중요한 사안들을 제안 및 논의하기 위해, 9월 15일 목요일 뉴욕에서 열리는 총회에 그러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존경하는 마음으로 초청하는 바이다.”
워싱턴 광장에 있는 뉴욕 대학교 예배당에서 열린 이 총회에서는 당시 막 설립된 스미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의 사서였던 찰스 코핀 주잇Charles Coffin Jewett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열린 최초의 사서 총회였을 뿐 아니라 이런 성격의 회의로도 세계 최초였다. 미국도서관협회가 1952년에 발표한 기사에 따르면, 대표단은 3일 동안 놀라울 정도로 많은 도서관 및 서지학 사업을 고안해 냈다. 그들은 공통된 관심사에 대해 여러 측면으로 준비한 연설을 했으며, 목록화·분류·색인 정리·도서관들 간의 교류·적절한 도서 선택·정부 문서의 배포 방법 개선 등에 관한 책자를 읽었고, 결의안을 채택했다.
비록 이 결의안 중 실행된 것은 거의 없고 이 총회의 기억도 시간이 가면서 흐려졌지만, 회의에서 이루어낸 성과는 “오랫동안 도서관과 사서들에게 간접적이나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같은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이 첫 번째 총회는 미국의 사서 세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그 후 거의 4세기 반이 지난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사서들이 모였을 때도 그 영향력과 추진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미국도서관협회American Library Association라는 영구적인 조직이 결성되었다.
1853년에는 헨리 베일리의 《도서관 사색》이 동료 사서들에게도 잘 알려져서, 이 열람실 수필의 마무리 글에 대부분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밤은 지나고, 사람들은 돌아가고, 도서관의 묵직한 종이 열 번 울리면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다.”
주립 도서관의 등장
주립 도서관은 180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주로 입법 기관을 위한 참고 서적 위주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도서관들의 발전은 느리게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816년에 설립된 펜실베이니아 도서관은 최초의 진정한 주립 도서관이었으며, 오하이오·뉴햄프셔·일리노이·뉴욕 주모두 1818년에 설립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미 교육국은 1876년에 전국적으로 도서관 보유 실태를 조사한 결과, 모든 주와 지역이 공공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비록 도서관 대부분은 법률 관련 장서들로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주립 기관의 서비스와 활동을 확장하는 데 앞장섰던 것은 뉴욕 주 주립 도서관이었다. 1888년부터 1905년까지 사서로 일한 멜빌 듀이Melvil Dewey, 1851~1931는 참고 사서reference librarian라는 직함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도서관 내에 어린이 부서도 만들었다. 듀이는 주립 도서관이 공공 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의 발전을 지원하는 데 최적의 기관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1백 권 정도의 책을 공공 도서관이 없는 지역으로 보내는 이동도서관 프로그램도 창안했다.
듀이의 이동도서관은 인간의 운명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열렬한 사명감과 결합되어, 수많은 미국인들이 도서관을 건립하도록 자극했다. 그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이동도서관은 때로는 정부의 후원 아래, 때로는 사적으로 지역마다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주로 뉴욕 주의 방식이 모델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열정은 소규모 지역사회의 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주립 도서관위원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도서관에 대한 열망은 목사인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1813~1887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이제는 책값이 저렴해져서,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도 담뱃값이나 맥주값 정도로 해마다 자신의 서고에 책을 1백 권 정도씩은 채울 수 있으니 축하할 일이 아닌가. 가게 점원, 노동자, 여행자 그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자 분투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불타오르는 첫 번째 야망은 바로 좋은 책을 소유하는 것과 그런 책을 계속 늘려 가는 것이다. 해가 가면서 점점 불어나는 서고는 청년의 인생을 명예롭게 할 것이다. 책을 갖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서고는 사치가 아니라 삶의 필수조건이다.”
영토가 서부로 확장되면서 철도와 전화선이 놓이고 1860년대에 벌어진 남북전쟁의 고통에서 회복됨에 따라 미국인들은 교육을 통한 자기 개선의 힘을 믿게 되었다. 배움에 대한 대중의 욕구는 책으로만 만족될 수 있었다. 어디에서나 공민 의식을 가진 시민들은 기증자가 내놓는 책과 자금으로 공공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자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돈이 부족했으며, 도서관 건립을 위해 공공 기금을 지출하려 하는 지방 정부는 거의 없었다. 반면 대도시 도서관들은 후원 규모가 점점 늘어났으며, 1870년대에는 사실상 모든 대도시에 공공 도서관이 있었다. 이는 대개 작은 규모의 장서들을 결합하고 분산되어 있던 도서관들을 통합하여 설립된 것이었으며 늘 부유한 개인의 후원이 있었다.
헨리 베일리의 하트퍼드 도서관조합은 19세기 후반의 도시에서 공공 도서관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1878년에 하트퍼드 청년협회는 남녀 통틀어 640여 명의 회원을 보유한 하트퍼드 도서관조합이 되었다. 1893년에는 코네티컷 주 의회 특별법에 따라 그 이름을 하트퍼드 공공 도서관으로 변경했다. 보스턴 아세니움의 사서 출신으로 1875년에 하트퍼드에 처음 고용되었던 캐롤라인 M. 헤윈스Caroline M. Hewins, 1846~1926가 1대 사서가 되었다. 헤윈스는 새로 설립된 미국도서관협회에서 일하며 1891년에 코네티컷 주립 도서관협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1904년에 그녀는 미국 최초의 어린이 도서관 설립을 주도했다.그녀는 어린이 책을 쓰기도 했다. 51년에 걸친 사서 경력으로, 그녀는 여성 최초로 1911년에 하트퍼드의 트리니티 칼리지로부터 명예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과 20세기 초반은, 사서 그리고 여성사서의 수가 증가한 시기였다. 이때는 미국 도서관의 최대 성장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실업가이자 자선가인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였다.
카네기의 공공 도서관
1875년에는 도서관 운동 덕분에 미국에 188개의 공공 도서관이 설립되었다. 카네기는 6백 개 이상의 도서관이 운영되던 1886년부터 미국에 무료 공공 도서관을 건립하기 위해 개인 재산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카네기는 성장 과정에서 책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공공 도서관의 발전에 어느 누구도 그보다 더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없었다.
1850년에 펜실베이니아 주 앨러게니 산업단지에 살았던 14세의 스코틀랜드 이민자 카네기는 제임스 앤더슨James Anderson 대령의 개인 도서관에서 할 수 있는 한 긴 시간을 보냈다. 제임스 앤더슨 대령은 이 도시의 청소년 노동자들에게 4백 권에 달하는 자신의 장서를 개방했다. 카네기의 아버지도 모국에 있을 때 방직업에 종사하는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 도서관을 만든 적이 있었다. 어린 앤드루는 토요일 오후만 되면 도서관이 열리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서 책을 읽었다. 카네기는 앤더슨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며, “어른이 되어 돈을 벌게 되면 우리가 이 훌륭한 분에게 얻은 것과 똑같은 기회를 가난한 집 소년들이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 36년 후,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카네기는 앨러게니의 도서관과 시민센터 건립을 위해 33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이것은 카네기가 기부했던 미국의 무료 공공 도서관 1천 6백여 개 중 첫 번째였다.
카네기는 앨러게니-피츠버그 지역에서 주로 철강업과 건설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1870년, 33세가 된 그는 자신의 수입에서 해마다 5만 달러를 떼기로 하고 “재산을 늘리려고 애쓰기보다는 매년 흑자를 자선 목적에 사용하고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사업은 영원히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것은 카네기의 부에 대한 신조였으며, 그는 평생 재산의 90퍼센트에 달하는 3억 3천 3백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그는 부자는 사치하지 않고 살아야 하며, 자신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을 위해 적절히 베풀고, ‘흑자’로 얻은 수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특히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도서관 건립은 ‘인류의 진보’에 대한 그의 비전 중 일부였다. 카네기는 도서관과 같은 문화 기관이 노동자 계층을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믿었다. 그는 부자가 ‘잉여’ 자금을 기부해야 할 일곱 군데를 들었는데, 중요도 순으로 열거하면 대학교, 도서관, 의료기관, 공원, 회의장과 음악회장, 대중목욕탕 그리고 교회였다. 1881년에 카네기는 고향인 스코틀랜드 던펌린에 공공 도서관 건립을 위한 자금을 기부하는 것으로 도서관 자선활동을 시작했다. 지역사회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료 공공 도서관이었지만, 그는 “지역사회가 그것을 공립학교와 그 부속 기관처럼, 시 자산의 일부로 공공 기관을 받아들이고 유지 및 관리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제공했다.
카네기의 기부금에 붙은 단서는 지역사회가 부지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지방 정부가 도서관 직원에게 급여를 주고 관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카네기가 기부한 액수에서 매년 최소 10퍼센트를 지출할 것을 보장한다는 조건이었다. 이처럼 지역사회가 도서관 운영을 위해 개인의 기부금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카네기는 이 도서관들이 대중의 삶과 지역사회가 가진 책임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 약속을 지키고 성장시킬 것을 다짐하는 지역사회만이 카네기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카네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도서관을 관리할 의지가 없는 지역사회라면 도서관을 갖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은 빈부의 차이를 떠나 모든 시민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의식을 가져야만 도서관에 영혼을 부여할 수 있다.”
카네기는 1919년에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새 도서관에 계속 자금을 지원했다. 대영제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 대부분에 도서관이 생겨났으며, 전 세계 2,509곳 도서관 건설에 5,620만 달러 가까이 지원되었다. 그중 4천만 달러는 1,412개 미국 지역사회에 1,670곳의 공공 도서관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카네기가 경영하는 회사의 파업에 가담하여 종종 혈투를 벌였던 노동자로부터 벌어들인 수익이 그의 재산을 형성했기 때문에, 부자 기업가라면 무조건 경멸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카네기를 향한 적대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카네기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기념비를 원해서 도서관을 기증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 철도 노동자 조합원은 카네기가 디트로이트에 도서관을 기증하는 데 반대하는 이유로, “카네기는 그 돈을 벌게 해준 피고용자에게 돈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누구도 그 정도의 부를 정당하게 축적할 수는 없다. 법적으로는 정직할지 모르나 도덕적으로는 정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카네기의 기부를 모욕으로 간주했다. 디트로이트의 한 신문 편집자는 “우리는 스스로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가 자선을 받을 만한 대상이라고 누가 카네기 씨에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번창한 도시를 만들어 달라고 애원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과는 반대로,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회장이자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의 대표였던 새뮤얼 곰퍼스Samuel Gompers, 1850~1924는 카네기의 기부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노동자를 조직화하여 더 나은 조건, 특히 노동 시간 감소를 확보한다면 우리 노동자들은 그가 기부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여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방 정부가 나서서 카네기에게 기부를 요청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여전히 그의 기부를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10퍼센트의 유지 및 관리 조건이 결국에는 시민들의 세금을 늘려 부담만 커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부받는 것을 거부했다. 일부 지역 사회에서는 그의 기부를 단호히 거부하기도 했다. 카네기는 이에 대해 매우 실망했는데, 그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공공 도서관을 이용하며 “보라, 이 모두가 내 것이다. 내가 이곳을 지원하며, 지원하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나는 이곳의 공동 소유자다”라고 생각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카네기는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을 기부하여 1백여 곳의 학술 도서관이 건립되는 데에도 기여했다. 카네기가 베푼 더 큰 선행으로는 피츠버그 카네기 연구소Carnegie Institute in Pittsburgh, 워싱턴 카네기 협회Carnegie Institution in Washington, 카네기 교육진흥재단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 카네기 국제평화기금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등의 설립이 포함된다.
앤드루 카네기의 공공 도서관은 1세기 이상 거의 모든 주에 있는 수백만 미국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 공공 도서관 대부분은 21세기 초반까지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많은 카네기 도서관 건물이 박물관, 사무실, 시민센터 등으로 모습을 바꾸었고 일부는 부서졌지만, 미국에 있던 원래의 1,412개 건물 중 1천 3백 곳 이상이 여전히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137곳은 아직도 처음의 외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뉴욕 시에서 카네기 도서관은 아직도 공공 도서관 시스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원래의 39개 중 31개가 아직까지 운용되고 있다. 피츠버그 공공 도서관 시스템을 구성하는 주요 도서관인 ‘피츠버그 카네기 도서관Carnegie Library of Pittsburgh’을 비롯해 지부 7곳이 모두 카네기 도서관에 해당한다.
앤드루 카네기의 기부가 없었더라면 그토록 많은 공공 도서관이 설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시행되고 있는 그의 철학 중 한 가지는 도서관 장서를 개방해서 독자들이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도서관 대부분은 개가식이 아니어서 손님이 책을 신청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면 직원이 찾아다 주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사서의 역할
카네기의 개가식 대출과 같은 도서관 이용 방향을 추구한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미국의 도서관 및 박물관 책임관리자인 존 코튼 다나John Cotton Dana, 1856~1929이다. 그는 1899년에 “소규모 도서관의 사서들이 광범위한 도서를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도서관 입문A Library Primer》을 집필했는데, 그 책에는 손님이 직접 서고에서 책을 찾는 방식을 강력히 지지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고를 개방하여 손님이 들어갈 수 있게 하고, 개가식 운영을 도서관의 기본 방침으로 삼도록 하자. 전체 도서관에 활기차고 융통성 있는 분위기가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이는 당시 미국 도서관의 방향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었다. 코튼의 도서관 입문서에서는 도서관의 내부우선적와 외부, 서고 배치와 높이너무 높으면 안 됨, 장식간단하게, 조명가능하면 자연 조명으로, 가구안락의자는 무거워 옮기기 불편하고 게으름뱅이들이 좋아할 우려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음 등에 대해서도 설명되어 있었다. 코튼은 이상적인 사서와 도서관 운영 기본 방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서는 교양, 학식 그리고 실무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는 항상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를 선도해야 하며,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아 사람들이 자신을 더 많이 이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는 정직하고 열정적이며 지적인 리더이자 스승이 되어야 한다. 그는 어린이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하며, 쉬운 책부터 최고의 책까지 선택하는 방법을 어린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만큼 지혜로워야 한다. 그는 지역사회의 어떤 교사보다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는 교사들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그는 도서관을 어린이들의 학교, 성인들의 대학 그리고 교육 활동의 영원한 중심지로 만드는 동시에, 건전하면서도 고무적인 주제들을 공동의 사고에 있어 본질로 만들어야 한다. 그는 책에 대한 확고한 취향과 애정을 가진 독서광이 되어야 하는 동시에, 책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을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코튼이 언급했듯이 훈련된 사서라는 직업은 계속해서 발전해, 1884년 뉴욕에는 멜빌 듀이가 설립한 미국 최초의 사서 교육 기관인 컬럼비아 도서관 운영학교Columbia School of Library Economy에서 사서들이 육성되었다. 이 학교는 남자들만 다니던 컬럼비아 대학교와 연계되어 있으나 몇 년 후 듀이의 강좌에 여성들이 너무 많다는 이의가 제기되자, 뉴욕 주 알바니로 이전했다. 이곳이 뉴욕 주립 도서관학교가 되었고, 듀이는 주립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며 강의를 했다. 엄격한 교육 과정과 여러 가지 혁신듀이의 십진 분류법 포함으로 듀이는 도서관학의 선구자로 꼽히게 되었다. 듀이의 도서관학교에는 여성이 점점 많아졌는데, 이런 현상이 20세기까지 계속되면서 사서는 당연히 여성이라는 인식도 커지게 되었다.
금서: 지적 자유의 제한
19세기를 지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늘어나는 책의 양 때문에 미국의 사서들은 끊임없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게다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책을 금하던 풍조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금서의 기준은 광범위하고 주관적이었다. 즉 외설, 음란 또는 공중도덕에 대한 위협이었다.
금서로 지정된 책은 ‘쾌락에 빠진 영국 여인’을 묘사하여 1821년에 금지된 존 클렐런드John Cleland의 1748년작 《패니 힐Fanny Hill》부터 미주리 주의 한 배교자 이야기인 테오도어 드라이저Theodore Dreiser의 1925년작 《아메리카의 비극An American Tragedy》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1884년작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은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공공 도서관에서 “저속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한 비평가의 비평을 이유로 금지되었다. 마크 트웨인의 속어 사용은 “품위 없고 해롭기 때문에, 그의 소설 또한 지적이고 존경할 만한 사람보다는 빈민가에 사는 이들에게 더 어울리는 최대의 졸작”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금서 열풍을 주도한 부류는 종교 기관에 속한 이들이나 영향력 있는 개인들이었으며, 지적 자유물론 일정한 범위 내에서를 옹호하는 미국의 ‘도서관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던 많은 사서들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에 브루클린 공공 도서관은 어린이 부서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과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을 둘 다 금서로 지정했는데, 이는 어린이 부서를 담당한 젊은 여성 사서가 이 소설들의 등장인물이 “상스럽고 거짓말을 하며 해로운 행동을 해서” 반대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헉은 몸이 가렵다고 긁어대며”, “발한”이라는 고상한 표현 대신 “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이유도 포함되었다.
브루클린 대학의 도서관장이던 에이서 돈 디킨슨Asa Don Dickinson, 1876~1960 역시 톰과 헉이라는 등장인물을 만든 마크 트웨인에게 그의 책을 브루클린 도서관에 넣지 말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트웨인은 디킨슨에게 이렇게 답장을 썼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매우 걱정스러웠습니다. 나는 어른들을 위해 그 책들을 쓴 것이며, 소년소녀들이 그 책들을 읽게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괴로웠습니다. 청소년기에 더럽혀진 마음은 절대로 다시 정화될 수 없습니다. 바로 내가 그 표본입니다. 나는 15세가 되기도 전에 성경 무삭제판을 끝까지 읽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읽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던 내 어린 시절의 불성실한 후견인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가라앉지 않는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도 그런 아픔을 겪거나, 살아생전 다시는 깨끗하고 달콤한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젊은 여성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녀도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솔직히 귀하가 원하신다면 허클베리 핀의 성격을 변호하는 말을 한두마디쯤 하고 싶지만, 그래 봤자 하느님과 나머지 신성한 형제들(아합과 97명의 다른 사람들)의 성격보다 나을 것도 없겠군요. 만일 어린이 부서에 성경 무삭제판이 있다면, 그 젊은 여성이 그 문제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톰과 헉은 빼도록 도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마크 트웨인의 편지를 읽은 후 그리고 이 때문에 직원들이 그에 대해 더 큰 적의를 갖게 된 후, 도서관은 그의 책들을 성인과 어린이가 모두 접근할 수 있는 서가에 두는 것으로 절충했다. 그러나 논쟁은 밖으로 번져 나갔고, 브루클린의 이 ‘고상한 척하기’는 사설과 뉴스 기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하트퍼드 공공 도서관의 캐롤라인 헤윈스 사서는 새로 문을 연 어린이 도서관에서 그녀 자신에게는 큰 의미가 있던 톰과 헉을 금지하는 데 반대했다. 이는 마크 트웨인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트퍼드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서들은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20세기 미국 지역사회에서 필수적인 인물이자 거의 모든 곳에 있는 붙박이와 같았고, 학교 선생님만큼 중요하며 심지어는 선생님보다 더욱 엄격했다. 1957년에 브로드웨이에서 히트를 기록한 《뮤직 맨The Music Man》의 작곡가 메러디스 윌슨Meredith Willson, 1902~1984은 중서부에서 살던 젊은 여성 사서들, 그중에서도 특히 더욱 서쪽인 유타 주 프로보의 메리언 실리Marian Seeley를 작품을 통해 회고했다. 이 뮤지컬에는 아이오와 주 리버시티의 예쁘고 씩씩한 사서 메리언 파루가 등장한다. 악기 영업사원인 해롤드 힐은 도서관에서는 항상 침묵을 지켜야 하는 관행에 대해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상투적 표현을 이용하여 ‘사서 메리언’에게 아래와 같이 구애한다.
사서 아가씨.
당신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려면 어찌해야겠소?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오, 사서 아가씨…… 메리언
하늘이 도와 도서관에 불이라도 난다면
자원봉사자 호세 브리게이드멘은
그 소식을 메리언에게 귓속말로 전해야 하겠지…….
사서 아가씨!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당신이 필요해요, 사서 아가씨…… 메리언
내가 넘어져서, 그걸 뭐라고 부르실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부순다면 나는 바닥에 누워버릴 수도 있소
내 몸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사서 아가씨……
하지만 여기서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소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오, 사서 아가씨…… 메리언
나는 절대 그걸 못할 거요
교양인이라면 용서할 수 없는 죄니까
어떤 사서와든 큰 소리로 말하는 것 말이오
바로 메리언 당신 같은…… 사서 아가씨와.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