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서론 : 그들의 방식으로 바라보기
사실에 관한 물음
‘삶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사실facts뿐’ 이라고 『어려운 시절』Hard Times 서두에서 그래드그라인드씨Mr. Gradgrind는 힘주어 말한다. 역사가들은 다수가 그래드그라인드씨와 의견을 공유하는 듯 보이지만 최근의 철학에서 가장 강력한 일부 목소리는 과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얻어질 수 있는지 여부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와 같은 회의적 문제제기가 갖는 세 가지 주요 양상을 다룰 것이다. 주로 현역 역사가로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식의 글쓰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사례에서 회의주의 진영에 들어갈 이유가 충분하다는 점을 제시할 만큼의 저돌성은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의 세계에 가해지는 공격은 꽤 오래전에 지식에 관한 이론이라는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이 반대운동은 세계가 직접적으로 인식되고 논쟁의 여지없이 묘사될 수 있는 감각적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경험주의적 믿음을 뒤흔들려는 사람들에 의해 주로 수행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이와 같은 특정한 경험주의적 교리는 대체로 평판을 잃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은 우리의 판단과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토대 위에 사실적 지식의 구조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2장과 3장은 이런 탈경험주의적 비판이 지닌 몇몇 함의, 현역 역사가들에게 특히 관련이 깊어 보이는 함의들을 살펴본다. 2장의 목표는 역사가로서의 우리의 목표가 주어진 문제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모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상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익숙한 견해를재검토하는 일이다. 이런 접근법은 유지되기 힘들다는 점을 보여주고 역사가와 그들이 수집한 증거들의 관계에 대한 대안적이고 더 현실적인 관점을 그려볼 것이다.
3장은 사실의 세계에 관한 더 특정한 문제를 검토한다. 여기서의 쟁점은 이질적 문화집단이나 이전 시기의 사회가 신봉했던 믿음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와 같은 믿음을 살펴볼 때 그것이 단순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많은 경우 명백히 틀린 것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럴 때 진실과 허위를 판단하는 우리의 감각은 그 믿음을 설명하는 데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한 가지 영향력 있는 답변은, 잘못된 믿음이란 논리적 추론의 실패를 가리키므로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연구 대상인 그 믿음의 진실성을 필수불가결한 지침으로 삼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권장되는 이런 접근법이 바람직한 역사 연구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진리 개념은 믿음을 설명하는 작업과는 무관하다는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 3장의 목표이다.
사실의 세계는 인식론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최근 의미에 관한 이론에서 새로이 전개된 경향에 의해서도 손상되고 있다. 실증주의적 언어철학의 주요한 가정은 의미를 지닌 진술은 모두 사실을 지시해야 하며 따라서 문장의 의미는 그 안에 내포된 주장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콰인Quine은 그와 같이 보고되기만 기다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 같은 건 없다는 주장으로 이런 접근법에 의문을 던졌다.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여러 방식을 최초로 강조하고 이어 말의 ‘의미’에 관해 더 이상 묻지 말고 오히려 서로 다른 언어게임들을 수행하는 다양한 기능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논지도 마찬가지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이런 강력한 비판들은 두 가지 서로 관련된 방향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J. L. 오스틴Austin, 존 설John Searle 같은 사람들은 의미와 대비되는 말의 용법을 검토함으로써 어떤 의미가 생길 수 있는지 상세히 살펴보는 쪽으로 나갔다. 그들은 화행speech act이라는 개념을 따로 떼어내어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사용할 때는 항상 무언가를 말할 뿐 아니라 무언가를 행하게 된다는 사실이 지닌 함의를 추적했다. 다른 한편 H. P. 그라이스Grice나 다수의 다른 이론언어학자들은 무언가를 말하거나 함으로써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물을 때 문제가 되는 의미라는 개념을 재고찰했다. 이 방향의 기여도 마찬가지로 ‘의미’에서 행위자, 용법, 특히 의도성에 관한 물음으로 관심을 옮겨놓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텍스트를 읽는 방식
4, 5장과 6장에서는 좀 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새로운 양상들이 철학사가들과 지성사가들에게 어떤 중요성을 띠는지 살펴본다. 이 책 4장으로 재출판된 논문은 애초에는 서구 사상사에서 ‘영속적 쟁점들’의 중요성을 가정하는 관습에 저항하면서 작업한 것이다. 소위 고전적 텍스트들이 계속해서 연구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이 텍스트들이 그런 영속적 쟁점들을 ‘타당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합의가 있었다. 나는 이와 같은 접근은 과거의 사상가들이 우리와는 매우 다른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을 가능성을 무시한다고 보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과거를 전유한다면 예전의 철학자들이 글을 통해 실제로 행한 것이 무엇인지 고려할 여지가 없어진다고 반박했다. 다시 말해 화행이론에서 끌어낸 몇 가지 통찰을 통해 기존의 지배적 관행을 비판하고 관념의 역사에 대한 한층 역사적인 접근을 옹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주로 논쟁적인 글이 되었지만 재출판하면서 논쟁적인 대목들을 완화했고 몇몇 투박한 공식이나 반복적인 논의도 잘라냈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이 글은 체계화된 주장보다는 비판에 가깝지만 5, 6장에서 전개하는 텍스트 해석의 관점을 예시하는 면도 있다. 5장은 의도성과 텍스트 해석에 관련된 뒤엉킨 논의들을 뚫고 나갈 길을 모색하며 바닥을 정리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6장에서는 해석에 대한 나 자신의 접근법을 풀어놓으면서 동시에 이를 수많은 오해로부터 방어하고 이후 여기에 가해진 숱한 반대 의견에 대응하고자 했다. 앞서 이미 내비친 대로 내 주장의 핵심은 철학사가 진정으로 역사적인 정신에서 쓰여지길 원할 때 주된 임무의 하나로 삼아야 하는 것은 연구 대상인 텍스트를 저자가 그것을 씀으로써 어떤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게 해주는 지적 맥락 속에 놓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물론 오래전에 세상을 뜬 사상가들의 사유과정 안으로 들어가길 열망하는 게 아니다. 그저 역사 연구의 통상적인 기법들을 사용하여 그들이 쓴 개념을 이해하고 그들이 행한 구별을 따라가며 그들의 믿음을 가늠하고 가능한 한 그들의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다.
과거의 저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포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분리할 수 있다고 보이는 언어의 두 가지 차원을 뚜렷이 구분하자는 것이 내 입장이다. 하나는 관습적으로 의미의 차원, 즉 단어와 문장에 붙어 있다고 여겨지는 의미와 지시내용에 관한 연구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마 오스틴의 용어로 언어적 행동의 차원이라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할 텐데, 화자가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면서 (혹은 사용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련의 것들에 관한 연구이다. 전통적인 해석학은 일반적으로 이런 차원들의 첫 번째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두 번째도 최소한 같은 정도로 강조할 것이며 이 책의 2권과 3권을 읽어보면 이 점이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의 접근법을 요약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표현하듯이‘말은 또한 행위’라는 주장의 함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시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언술이 행동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숙고하면서, 나는 화행이론이 행동에 대한 철학 일반에 관해 그리고 특정하게는 행위에 관한 설명에서 인과율의 역할에 대해 일러주는 바가 있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원래는 여기 4장으로 재출판된 논문의 말미에서 이 점을 검토했지만 곧 나의 논점이 심각한 혼란을 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다시 한번 시도하자고 결정했고 그 산물이 여기 (상당히 수정되고 다듬어진 형태로) 7장으로 실린 논문이다. 내가 옹호하는 논제는 설사 동기가 원인으로 기능하다는 데 합의하더라도 행동에 대한 비인과율적인 설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여전히 내게 설득력 있어 보이며 분명 애초의 내 논지를 크게 개선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애초에 이런 주장을 제시한 부분을 4장에서 뺐다.
이렇듯 어쩌다 보니 행동의 철학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역사가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서 매우 중요해 보이는 또 다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행위를 설명하는 데서 믿음이 하는 역할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가 합리적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믿음과 행위를 설명하는 데서 합리성 평가는 어떤 역할을 부여받아야 하는가? 나는 먼저 7장으로 재출판된 논문 말미에서 이런 문제들을 처음 제기했고 결국 여기 2장과 3장에서 이 쟁점들을 더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이와 같은 논의들이 원래의 설명을 대체하게 되었고 그래서 애초에 이런 주제를 다룬 7장의 마지막 부분을 잘라내고 다시 썼다.
여기서 내가 따르는 접근법은 콰인, 데이비드슨Davidson, 특히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만난 것과 같은 종류의 전체론을 수용했음을 반영한다. 나의 주된 포부 중의 하나는 텍스트 해석과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에서 후기 분석철학의 이런 움직임이 갖는 관련성과 중요성을 지적하는 일이다.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 로 여겨지는 것들에 초점을 두는 대신, 개념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고 그것들이 서로서로 그리고 더 광범위한 믿음의 네트워크와 맺는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 나는 또한 무엇을 믿는 게 합리적이냐는 문제는 우리 자신이 가진 믿음의 성격에 크게 의존한다고 가정한다. 특정한 믿음을 다른 믿음들의 맥락에 놓아 해석하고 믿음의 체계를 더 넓은 지적인 틀에 두어 해석하고자 하며, 이 더 넓은 틀은 장기지속longue duree의 견지에서 바라봄으로써 이해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의미와 지식에 관한 탈경험주의적 이론들과 그것들이 어떻게 사실들의 실증적 세계를 뒤흔들었는가에 관해 얘기했다. 다음으로는 언어가 본질적으로 생각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매개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근래 들어 확장하고 한층 복잡하게 만든 제3의 길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던 문화비평의 가장 유익한 성과 중 하나는 쓰기와 말하기의 순전히 수사적인 양상들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고 그럼으로써 언어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민감도를 높인 점이다. 점점 더 분명해지는 사실은 우리가 단순히 정보를 소통하기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발언에 권위를 주장하고 상대방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며 포함과 배제의 경계를 만들어내거나 그 밖의 많은 사회적 통제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도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어 8, 9, 10장에서는 이런 텍스트 전략들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다룬다. 여기에 관해 얘기할 거리나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이 감당한 부분은 수사기법의 특정 범위, 곧 사회 세계의 건설에 근거를 제공하거나 무너뜨리기 위해 말의 힘을 활용하는 것과 관련된 기법들에 한정된다. 8장은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를 참조함으로써 사회적 행위가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규범적 서술에 의존하고 있음을 예증하려는 시도이다. 일찍이 1974년에 출판한 논문에서 단초가 제시되기는 했어도 이 장은 대체로 새로 작업한 것이다. 9장은 사회 세계를 재평가하는 방식으로 재서술할 수 있는 전략들에 대한 유형분류를 제시한다. 10장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임무들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는 구체적인 수사기법들을 더 상세하게 고찰한다.
비평가들은 계속해서 철학사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이 이 분야의 핵심을 제거한다고 불만을 표시해왔다. 만일 우리가 고전 텍스트에 담긴 영원한 지혜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을 공부하는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런 텍스트를 상황의 변화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더 넓은 담론의 요소로 다룬다면 ‘가장 케케묵은 고리짝 관심사’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고 본다. 나는 이런 식의 우울하리만치 속물적인 반대를 예견했고 원래는 여기 4장으로 실린 논문 말미에서 그에 대해 반박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나의 반응은 비평가들을 만족시키기엔 도무지 불충분했고 따라서 여기 6장으로 재출판된 논문 후반부에 더 상세하게 서술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충분치 못했고 내 작업이 순전히 역사적이며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반박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나의 주장을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다시 진술해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나의 작업이 내 힘이 닿는 한 역사적인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시에 현재의 사회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지면에서 밝힌 바 있듯이 과거의 용도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적 유산의 주문呪文에 홀려 있기 십상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우리가 가진 규범적 개념들을 분석하고 사유할 때 우리의 지적 전통의 주류를 통해 전해 내려온 방식이 틀림없이 유일한 사유방식이라고 믿어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역사가들이 할 수 있는 기여의 하나는 일종의 푸닥거리이다. 들어보려는 의지로, 즉 그들의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으로 과거에 접근한다면 이처럼 너무 쉽게 홀리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이해는 현재적 생활방식에 체현된 가치들과 그 가치들에 대해 사유하는 현재적 방식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가능한 세계들을 놓고 행해진 일련의 선택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아보게 해준다. 이런 인식은 가치들이나 그것들이 어떻게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느 하나의 지배적 설명에서 놓여날 수 있게 해준다. 가능성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를 갖출 때 우리는 계승받은 지적 규약들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새로운 탐구정신으로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게 된다.
도덕적·사회적·정치적 사유의 구조가 과거에 실제로 유통될 당시는 어떠했는지 조사한다면 그로부터 밝혀낸 것을 성찰함으로써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또한 많다. 우리는 평가 조건의 적용에 관한 끝없는 논쟁과 마주치게 되며 인정과 정당성을 얻으려는 끊임없는 싸움을 목격하게 되고, 그리하여 가장 추상적인 사유체계의 기초에까지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적 동기들을 감지할 예민한 감각을 얻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철학적 논의가 종종 사회적 권력에 대한 주장과 깊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10장에서 지적하다시피 이와 같은 광경에서 끌어낼 수 있는 몇 가지 함축적인 의미들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삶을 관장하는 원칙들이 일반적으로 세미나실보다는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방식의 논쟁을 거쳐왔다는 점이다. (혹은 세미나실이라는 게 실상은 전쟁터라는 교훈일 법도 하다.) 그와 관련되어 있는 또 다른 함축은 이런 전쟁 같은 건 초월한 듯 공평무사한 분석자의 태도로 정의와 자유 그리고 여타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포괄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우리 시대의 도덕·정치철학자들을 아이러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온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끌어낼 교훈은 사회적인 설명에서 결국은 구조보다 행위자가 더 특권적인 대우를 받음직하다는 점이다. 사회적 권력의 여타 형태들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물론 하나의 제약이고 그것은 우리 모두를 형성한다. 하지만 8장과 9장에서 보여주고자 한 바와 같이, 언어는 또한 하나의 자원이며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여 우리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탈정치화된 입장을 반영하기는커녕 하나의 정치적 주장을 이룬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펜이 하나의 강력한 칼이라는 점을 인식하자는 주장이다. 물론 우리는 관행에 길들여져 있고 그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관행들이 발휘하는 지배력은 부분적으로 그것들을 유지하는 우리의 규범적 언어가 갖는 힘에 기대고 있으며, 그러므로 언어라는 자원을 활용하여 이런 관행을 떠받치는 대신 무너뜨릴 가능성도 언제나 열려 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