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래 한일 양국의 ‘만남’을 다룬 책들은 무수히 많다. 대개 이러한 책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수탈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불편한 만남을 계기로 일본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진 양 민족의 지배와 피지배, 수탈과 저항, 타협과 갈등으로 얼룩진 관계가 해방 국면에서 어떻게 마무리되었고, 그 후 어떤 식으로 새롭게 재편되어갔는지를 다룬 책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1945년 조선의 해방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떠나며 이 땅에 끼친 해악과 민폐는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식민 지배가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일본인의 이동을 금지함으로써 1945~1946년 겨울에 적잖은 일본인들이 굶거나 얼어 죽는 한편, 1946년 봄부터 엑소더스를 방불케 하는 대규모 집단 탈출이 이루어진 사실 역시 음지에 가려져 있었다. 이 책은 해방 후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 한일 양 민족의 ‘헤어짐’의 방식과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한국에서는 해방 후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들을 흔히 ‘식민자’ 또는 ‘지배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식민지에서 강제로 추방된 ‘패전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자국 동포로부터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하여 호사를 누린 대륙 침략의 첨병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잇따른 공습과 패전으로 거의 만신창이가 된 일본 사회는 이들을 본토인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식량이나 축내는 마뜩잖은 민폐 집단으로 무시했다. 그런 점에서 이 귀환자들은 자신이 떠나온 조선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모국에서조차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할 수 없는 일본제국의 ‘사생아’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패전과 귀환이라는 생경하기만 했던 개인의 역사적 체험을 주로 ‘피해·피해자’라는 맥락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들은 전후戰後 일본의 ‘해외 귀환자’이기 이전에 식민지에서 일본제국의 탄생과 성장을 뒷받침하던 ‘식민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 책을 통해 1945년 일본의 패전과 본토 귀환 국면에서 조선의 식민자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두 얼굴의 실체를 해부하고자 했다.
특히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조선에서 패전을 맞이한 일본인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폭넓게 담아내고자 했다. 이 에피소드 속에는 고급 정보를 독점하며 권력을 이용해 제일 먼저 도망간 식민기구의 상층 관료, 조선의 문화재와 귀금속은 물론 살림살이까지 고스란히 일본으로 밀반출한 일본인 갑부, 일본인들이 두고 간 집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각종 로비 행각을 일삼고 암투를 벌인 조선인 브로커들, 자신이 왜 ‘고향’을 떠나 낯선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조선 태생의 일본인, 먹을거리가 없어 급기야 자신이 가르치던 조선인 학생 집에 가정부로 들어간 여교사, 엄동설한에 러시아 병사의 살해 위협을 무릅쓰고 맨발로 38선을 넘어 탈출한 부녀자,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죄로 인민재판에 회부된 일본인 경찰 등의 다양한 서사가 담겨 있다. 모쪼록 이를 통해 한일 양 민족이 헤어지는 과정에서 창출된 복잡다단한 사회상을 독자들이 더욱 생생하게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했다.
1장에서는 1945년 8월 15일 조선에서 패전을 맞이한 일본인 사회 내부에서 불거진 다양한 갈등 양상을 다루었다. 패전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이해 돈 많고 힘 있는 지도층 인사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앞다퉈 도망했다. 이에 남겨진 일본인들은 국가가 자신을 버린 이상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고, 구성원 사이의 불신도 더욱더 깊어갔다. 일본인 공동체의 붕괴는 한동안 존재조차 잊고 살았던 조선인에 대한 공포감을 가중시켰고, 집단 공황 상태에 빠진 일본인들은 저마다 제 살 길을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통장과 도장을 들고 예금 인출을 위해 은행으로 줄달음질하던 일본인들, 귀환 직전 여비를 마련하려고 일본인들이 가재를 처분하는 바람에 온갖 물자가 넘쳐나던 암시장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2장에서는 위기에 처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모습을 다루었다. 당시 일본 중앙정부는 해외 식민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시에 본토로 몰려들어 사회 혼란이 가중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조선의 일본인들이 현지에 머물도록 유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총독부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부담스런 요구였다. 식민기구의 치안 유지 능력은 패전과 더불어 한계를 드러낸 반면,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의 추방 압력은 날로 거세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면초가에 처한 조선총독부 최고위 관료들은 일본인들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미군을 상대로 각종 로비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통화 위기로 인한 모라토리움을 방지하고자 일본 본토에서 조선은행권을 공수해왔으며, 조선인을 상대로 협박과 타협이라는 양면책을 구사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점령군에 의해 해체될 것에 대비하여 ‘일본인세화회’라는 외곽 단체를 만들어 남한 내 일본인의 귀환을 원호하고 북한 내 일본인의 탈출 공작을 막후에서 지도했다.
3장에서는 조선 잔류와 본토 귀환이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한반도의 일본인 가운데 상당수는 패전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조선에서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특히 3~4대에 걸쳐 조선에서 생활 기반을 일군 일본인들은 외국인 신분으로 살아도 좋으니 조선에 뼈를 묻겠다고까지 공언했다. 이들은 이미 오랜 조선 생활로 인해 일본에는 의지할 연고도 친척도 없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그동안 조선에서 일궈온 재산과 인적 네트워크를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3장에서 다루는 주요 내용은 조선인의 일본인에 대한 점증하는 추방 압력과 더불어 미군의 송환정책이 가시화되자 잔류와 귀환의 갈림길에 서서 끊임없이 동요하며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좌고우면하던 일본인들의 다양한 모습이다.
4장과 5장에서는 남한과 달리 집단 억류 상태에 놓였던 북한 내 일본인들을 다루었다. 미군은 대부분의 일본인을 1946년 2월까지 집단 송환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자마자 일본인의 이동을 전면 통제한 가운데 남성들을 만주와 소련으로 데려가 강제 노역에 종사시켰다. 부녀자와 노약자만 남은 북한 내 일본인들은 미국과 일본 중앙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미국은 소련과 교섭을 추진하고자 했지만 소련군은 일체의 외교적 교섭을 거부했다. 결국 38선 이북에 갇혀 있던 일본인들은 소련군의 만주 철수가 시작된 1946년 봄부터 1947년 초까지 자발적으로 피난단을 꾸려 집단 탈출을 감행했다. 요컨대 4장과 5장의 내용은 장기간 집단 억류 상태에 놓여 있던 북한 내 일본인들의 생활상과 탈출 과정이다.
6장에서는 조선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이 본토의 동포들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살펴보았다. 특히 해외에서 돌아온 자들을 본토인들이 왜 무시하고 경계했는지, 그에 따라 조선에서 돌아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었으며 본토인들의 처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폈다. 이에 관한 에피소드로는 그 당시 연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던 귀환자들의 자살 소식,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했던 조선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식민지에 두고 온 재산을 되찾기 위한 보상요구운동 등을 다루었다. 독자들은 6장을 통해 식민지의 가해자가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쟁 피해자로 둔갑하게 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생하게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는 일본인들의 본토 귀환이 해방 조선에 미친 영향을 다루었다. 관계를 이야기할 때 만남의 기억만큼이나 강렬한 것이 헤어짐이다. 여기서는 귀환 과정에서 보인 일본인들의 구체적인 행동 양태와 그것이 미친 영향, 그리고 그 결과 형성된 떠나가는 일본인에 대한 조선 사회 일반의 이미지를 살폈다. 특히 신문에 매일같이 등장하는 귀환을 앞둔 일본인들의 범죄 사건, 일본인의 재산 밀반출 행태, 남겨진 일본인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조선인 사이의 아귀다툼, 해방 후에도 이어진 귀환 일본인과 친일 조선인 사이의 밀수 네트워크 등을 다루었다. (하략)
되돌아온 조선총독 부인의 배
1945년 8월 15일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田辺多聞은 상부로부터 정오 무렵에 중대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교통국 간부들과 한데 모여 방송을 들어보니, 그것은 예상대로 항복에 관한 내용이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다나베 국장은 전 직원을 소집한 뒤, 곧 상부의 지시가 있을 터이니 모두들 동요하지 말고 맡은 바 직분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이튿날 드디어 경성교통본국에서 연락이 왔다. 비상시국인만큼 그는 내심 당연히 교통기관 운영과 관련하여 어떤 중대한 지침을 내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않게 그에게 하달된 첫 번째 비상 업무는 당장 일본 본토로 출항 가능한 기범선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총독 부인 일행이 승선할 배가 시급히 필요했던 것이다.
8월 17일 비밀리에 부인 일행이 부산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도청 측에서 마련한 배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배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목도牧島 앞바다에서 그만 멈춰버렸다. 운행 도중에 배가 한쪽으로 점점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배가 워낙 낡기도 했거니와 갑작스런 악천후와 거센 파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과적 때문이었다. 부인 일행이 조선에서 수집한 귀중품들을 어떻게든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무리하게 실은 나머지 배가 미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애써 실은 짐을 절반 이상이나 바다에 버리고 나서야 겨우 다시 부산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진 부인 일행은 부산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경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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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슬픔에 잠긴 일본인들 |
조선에 살던 일본인에게 항복 방송은 곧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들은 패전과 동시에 지배자로서 누리던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고, 이들 앞에는 본토 귀환과 정착이라는 길고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일본이 4년 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고부터 시작된 부산 지역의 등화관제가 해제된 날이었다. 그래서 조선인들에게는 야경을 만끽하며 비로소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뜻깊은 날이었으나, 조선총독 부인 일행으로서는 시가지의 환한 불빛이 경성으로 되돌아가야 했던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을 비출 수도 있기에 결코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부와 권력, 그리고 최고급 정보를 독점한 계층은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앞다투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살림살이까지 몰래 일본으로 반출해 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 주변에는 그저 마음만 있을 뿐 그렇게 할 수 없는 대다수의 일본인이 있었다. 이들은 지도층 인사의 행태를 지켜보며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1944년 경상도 하동소학교로 발령을 받은 새내기 교사 후지와라 지즈코藤原千鶴子(1924년 생)는 “돈 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래 밀선密船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 부모처럼 돈 없는 교사들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부산까지 가서 공식 송환선에 몸을 실어야 했다.”라고 푸념했다. 그녀는 부부 교사였고, 더욱이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소학교의 교장도 친정 아버지였다. 조선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린 지즈코조차 이렇듯 소외감을 피력한 것을 보면, 귀환의 시기와 방식을 둘러싸고 일본인 사회 내부의 계층 간 갈등이 얼마나 심화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갈등은 심지어 함께 밀항하던 동일 집단 안에서도 자주 벌어졌다. 한 예로, 전라북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군산항을 통해 본토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들은 재빨리 배 2척을 마련하고 선적할 짐을 모두 군산으로 부쳤다. 얼마 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태우고 막 출항하려 할 즈음 갑자기 밀항을 단속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배 안으로 들이닥쳤다. 단속반원들은 배에 빼곡히 쌓인 짐들을 하나씩 풀어 내용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적된 값비싼 물건 가운데 상당수가 구 도청 간부들의 것으로 드러나자, 함께 밀항하려던 일본인들의 분노를 샀다.
패전 직후 귀환을 둘러싸고 남한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 사회 내부에서 불거진 잡음과 갈등은 북한 지역에서도 고스란히 재연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더욱더 긴박하고 극단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북한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종전 후부터 줄곧 소련군에 의해 사실상 집단 억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자신이 당장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북한 지역의 일본인 입장에서 본다면, 남한 지역에 살던 지즈코의 넋두리는 그저 복에 겨운 소리요, 호사스런 감정일 따름이었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자마자 38선을 봉쇄했기 때문에 그곳에 살던 대부분의 일본인은 최소 반년에서 1년여 동안 본토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혼란과 억류 상황의 와중에도 극소수나마 군경을 비롯한 지방의 고위 관료군과 대기업 간부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점령체제가 정비되기 전에 재빨리 38선을 넘어 본토로 돌아갔다.
식민지 시기 일본광업주식회사는 평안남도 진남포에 사는 일본인 약 15,000명 중 7~8%가량이 재직했던 손꼽히는 대기업이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말 조선인들이 이 회사를 접수하면서 일본인 직원들은 일자리에서 쫓겨나 도로 정비나 항만 하역 등 잡역에 동원되었다. 소련군이 일본인의 이동을 전면 금지한 상황이었으므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밀항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약 1,000명에 이르는 직원들은 저마다 탈출 계획을 세우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9월 말 이 회사의 공장장과 과장급 이상의 간부들만 따로 밀선을 수배해 경성으로 탈출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바람에 남겨진 평직원들은 더욱 강화된 감시체제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개별 직장 안에서도 귀환을 둘러싸고 직위에 따른 계층 간의 갈등이 상존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강원도는 소련군이 먼저 진주했다가 나중에 미군이 다시 관할하게 된 지역이 유독 많았다. 소련군 진주와 동시에 철원·금화·회양·통천·고성·회양·강릉 등지에서는 군수와 경찰서장이 제일 먼저 감금되었다. 그러자 인근 지역의 다급해진 경찰관들은 민간인, 즉 자신이 보살펴야 할 관할 지역의 일본인들을 버려둔 채 자기 가족만 거두어 남쪽으로 도망갔다. 이들은 대개 교통의 요지인 춘천으로 몰려갔다. 치안 담당자들의 이 같은 행태가 뒤이어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면서 춘천에 도착한 이들은 그 지역 일본인들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들을 거둔 것은 춘천의 경찰 관계자뿐이었다.
당시 군 수뇌부가 보인 일련의 태도 역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8월 28일 소련군이 예상치 않게 38선 이남 지역인 춘천 도청에 진주하자 일본인들은 당황했다. 소련군이 과연 어떠한 요구를 해올 것인가가 일본군 수뇌부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도청의 일본인 지도부는 서로 꽁무니를 빼며 소련군과 대면하기를 꺼려 했다. 결국 몇몇 간부가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인 인민위원회 측이 주최한 소련군 환영회에 참석했다. 진주군의 최우선 목표는 일본군의 무장해제였으므로 당연히 일본군 수뇌부가 참석해야 했지만, 정작 군 책임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이는 특히 그 지역 헌병대장이었다. 그는 소련군이 춘천에 진주할 것이라는 정보를 제일 먼저 입수한 당사자였음에도 몸이 아프다며 도청 간부와 군 관계자의 연석회의에 자신의 부하를 대신 보냈을 뿐, 소련군 진주 당일부터 어떠한 연락에도 응하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소련군의 유화적인 태도가 확인되자, 그는 비로소 회의석상에 나타났다.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독일도 연합국이 공습하는 상황이었지만 절대로 투구를 벗지 않았다. 우리 일본 역시 대공습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본토 결전을 통해 적을 무찌르고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다.”라며 뒷북을 쳤다. 그의 말에 회의실에는 일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혼자 도망가려 한 사실이 탄로 나면서 그는 결국 헌병대 안에서도 비웃음을 샀다.
패전에 즈음하여 구 식민지에 있던 일본인 지도부의 리더십과 관련해 전후戰後 일본 사회에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가 소련의 만주 참전 때 관동군 총사령부가 보인 일련의 행태이다. 당시 관동군 수뇌부는 소련의 공격이 시작되자 곧바로 열차를 동원하여 만주국의 고위 관료와 군 관계자 가족을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만주의 여타 개척단원을 포함해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일반 민간인들에게는 대피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구 소련 지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혼란 속에서 희생된 자 또한 적잖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의 피난 과정에서 버려지거나 부모의 사망으로 혼자 남게 된 잔류 고아가 대거 발생했다. 논자에 따라서는 관동군책임론을 반박하면서, 중소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참전해 일본인을 강제로 데려간 소련을 비난하거나 총사령부가 미처 거류민들을 보호할 여유가 없었던 부득이한 정황을 강조하기도 한다.
관동군 총사령부에 대한 ‘책임론’과 ‘옹호론’이 공존하는 가운데 아직 정확한 사실 관계는 선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소소한 내용상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 관동군 출신자나 해당 지역 귀환자들이 본토로 돌아온 뒤에 다양한 방식으로 관동군 수뇌부의 행태를 거론하며 이들의 책임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왔다는 것이다.
일본군 수뇌부의 문제는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전투를 치르며 진주한 북한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다. 소련군이 함포사격에 이어 시가지 상륙을 개시하자 나남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 제19사단은 제일 먼저 교통의 요지에 헌병대를 배치하고 열차를 수배했다. 그리고 함경북도 곳곳에서 전란을 피해 모여든 일반 피난민들을 북쪽으로 쫓아버리고 나남 군관구의 군인 가족들만 태운 경성행 열차를 남으로 발차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패퇴를 거듭하던 한반도 북단의 군부대는 소집영장을 남발해 일반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당시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 아오지인조석유공장장 시바타 겐조柴田健三는 “영문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이 소집영장을 받아 들고 회령에 있는 병사兵舍로 모여들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기 대신 삽 한 자루씩을 쥐어주고선 소련군의 총알받이로 삼았다.”라고 성토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식민기구인 총독부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군사령부는 패전과 귀환 국면에서 이와 같이 노골적인 기민棄民을 광범위하게 자행하고 있었다.
패전은 반세기 동안 아시아를 호령한 일본제국에 총체적 균열을 가져왔다. 그것은 단순히 제국이 지배하던 영역의 공간적 분리나 지배 네트워크의 붕괴로 끝나지 않았다. 좀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은 그동안 애써 감춰왔거나 제국의 논리로 강제 봉합되었던 일본인 사회 내부의 잠재된 불신과 갈등이 패전을 계기로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특히 비상시국을 맞아 사리사욕과 개인의 보신만을 추구하는 사회 지도층의 낯 뜨거운 행태는 결국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또한 그것은 오랜 기간 해외의 일본인 사회를 하나로 묶어낸 제국의 이념과 가치관을 급속도로 무너뜨렸다. 지도력과 상호 신뢰의 붕괴는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위기감과 피해 의식을 고조시켰고, 급기야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게 만들어 곳곳에서 일본인 공동체의 해체를 촉진했다. 이제 ‘나만 살겠다’는 원초적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정제되고 균질화된 제국의 일본인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본인을 상대로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조선인 사회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식민기구의 고위 관료로 상징되는 국가는 물론이고 오랜 기간 믿고 의지하며 정을 나눈 이웃조차도 나를 버렸다는 배신감과 피해 의식, 그에 따라 오직 스스로 내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위기의식만이 일본인의 뇌리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은 근대 이래의 한일관계와 조선에서 보낸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화할 수 있을 때 획득할 수 있는 관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집단 정서가 지배하는 한 일본인 사회 내에서 자성을 촉구하는 조선인의 요구는 좀처럼 의제화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나와 내 가족이 일본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또 조선에서 일군 재산을 어떤 방법으로 한 푼도 빠짐없이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골몰한 나머지 단 하루도 머릿속이 맑을 날이 없었다.
생경한 공포의 실체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穂積真六郎(1889~1970)8)는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옥으로 다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비상시국을 맞이해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전 직원에게 회사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환기시켰다. 그는 이 엄정한 시국에 한순간의 암흑이 혹여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과 뒤섞인다면 일본인들이 체감하게 될 공포는 극에 달할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패전은 일본인으로 하여금 그들 주변의 조선인 존재를 의식하게 만들었다.
1945년 8월 16일 사무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남대문로에는 어느새 붉은기를 든 조선인들이 만세를 외치며 경성역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듣자 하니 오후 3시쯤에는 소련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 무렵 총독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사원들의 만류와 걱정을 뒤로 하고 혼자 길을 나선 그는 처음에는 이 소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래 전 만주사변이 발발했을 때도 겁 없이 만주 벌판을 활보하던 그였다. 그러나 천하의 호즈미도 이미 경성부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청 건물을 돌아 광화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갑자기 그 많던 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치안 당국의 시위대 해산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1919년의 ‘만세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보니 그렇게 많은 조선인을 구경한 것도 그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는 조선 통치 36년 가운데 마지막 10년은 잇따른 전쟁으로 삶이 팍팍해진 조선인들이 이러저러한 불평을 품을 수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총독부의 ‘친절한’ 문화통치에 대한 적대적 불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지나치게 안일했다는 점은 천황의 항복 선언 직후 조선인들에게 나타난 집단행동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연락이 두절된 함경도를 제외하고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중앙에 보고된 ‘불상사건不祥事件’은 총 913건이었다. 사건 내역을 살펴보면 조선인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서,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한 개인을 상대로 한 살상과 폭행 사건은 약 267건이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학교 교원, 행정기관의 공무원,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당시 북한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 지역에서도 보고 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오지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은 집계에서 누락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이 보고 수치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사건의 양상에 주목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통치 기간 내내 조선인의 일상을 직접적으로 통제했던 경찰서·주재소·행정관서에 대한 습격이 많았다. 둘째, 각 지역 신사에 대한 공격이 두드러졌다. 이것은 조선인들이 그만큼 신사를 ‘왜족 우상의 복마전伏魔殿’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특이하게도 일본인보다 오히려 조선인 피해자가 훨씬 더 많았다.
과연 이 기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원인은,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치안 및 행정기관에서 고급 정보를 다루면서 명령 계통상 상위직에 있는 일본인들이 조선인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먼저 피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근본적 원인은 행정조직 말단의 조선인을 이용해 대민 지배를 꾀해온 총독부의 통치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집단행동은 때로는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후 약 1주일 사이에 나타난 폭행·습격 등의 사태는 그동안 봉인되었던 조선인의 해묵은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한꺼번에 표출된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벌어진 사건은 갑작스레 맛본 해방감에서 나온 비이성적 행동이기도 하지만 조선인의 가장 솔직한 속내가 드러난, 즉 양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결과 식민 지배 말기 전시체제 속에서 먹을거리와 물자를 공출하고 해외의 군수공장·탄광·전쟁터 등으로 사람들을 징발할 때 앞장서며 악역을 맡았던 조선인들이 지난날의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말하자면 군중의 시선은 그런 일을 지시하고 관리한 일본인이 아니라, 이들 일본인의 수족 노릇을 한 사람들에게 향했던 것이다.
패전 후 벌어진 이 같은 사태에 당황한 총독부는 8월 18일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 사진을 불태울 것을 지시하는 한편, 각 지역 신사에 신속히 연락해 신령이 불경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위패를 불태우는 승신식昇神式을 거행하라고 했다. 일본 식민 지배의 상징인 천황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거류민에게 온갖 재앙을 막아주는 액막이로서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준 일상의 공간이자 일본 문화의 구현체였던 신사가 ‘불경’하기 그지없는 조선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차마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건의 경중과 다과를 떠나 이러한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며 집단적 공포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들이 느낀 생경한 공포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조선·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직업적으로 조선인 사회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첩보·정보계 관료나 한반도에 대자본을 투자한 기업의 간부 등 극소수 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인은 사실상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식민자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본래부터 일본 본토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 정서야말로 조선인의 불만과 저항을 철저히 봉쇄한 ‘친절한’ 문화통치의 산물이었다. 3·1운동 이후로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한곳에 모인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호즈미의 회상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일본인은 패전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한반도 안에서만큼은 집단적 저항을 피부로 감지할 수 없었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상의 평화로 받아들였고, 조선인들을 자신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관심 밖의 존재로 치부했다.
패전 후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 중 적잖은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났거나 오랜 기간 생활하며 정들었던 조선에 대해 막연한 그리움을 피력하곤 했다. 그런데 이들이 회고록을 통해 쏟아내는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조선인에 대한 기억이나 조선인과 무언가를 함께했던 기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이들의 조선·조선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이들에게 조선인은 과거를 회상할 때 어렴풋이 떠오르는 한반도의 수목산천과 다를 바 없는 그저 풍경의 일부일 뿐 대등한 사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속적인 일상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획득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인은 일본인 귀환자들의 사적인 기억에서 어느 한 자리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남은 조선인은 대개가 양반가, 부유층, 유학파 등 재력 있고 일본화·근대화된 생활 방식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과 ‘근대’라는 잣대로 걸러진, ‘만남의 자격’을 갖춘 조선인이 아니라면 굳이 떠올릴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의 회고록 속에는 자신과 상하 관계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 대한 극히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오모니(어머니)’, ‘기지배’ 등으로 불리던 가정부라든가, 사업장에서 자신이 부리던 조선인이 회고 속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단편적인 에피소드나 부차적인 기억으로 처리된다.
일본인에게 기억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조선인은 대개가 ‘○○짱’ 등 아무렇게나 붙인 일본식 애칭이나 ‘김·이·박’ 등의 이름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바로 이 같은 일그러진 만남의 방식이 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무지로 이어졌으며, 1945년 8월 이후에 조선인과 이별하는 대목에서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즉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유순하기만 했던 조선인들이 하루아침에 왜 이렇게 포악한 행동을 일삼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 모를 당혹감에 휩싸인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패전 직후에 나타난 조선인의 집단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거류 초기 일본인들은 집단의 안전을 위해 한데 모여 살기 시작했다. 조선인을 피해서 만들기 시작한 일본인들만의 공간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변두리로 몰아내면서 형성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인촌은 점차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어갔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 철도역과 정거장,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 편의 시설을 조성했고, 경찰·군대 등 치안기관을 유치해 그 공간을 더욱 안전하고 편리한 곳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그만큼 조선인과 단절의 벽을 높이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일본인의 공간은 조선인의 그것과 분리되어 마치 섬처럼 존재했다. 게다가 사회적 지위와 직업군에 따라 일상의 동선마저 민족별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설령 같은 곳에 살더라도 양 민족은 일상적으로 서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원산중학교에 다니던 가사이 히사요시笠井久義의 회고록에는 대홍교大虹橋를 경계로 남쪽의 ‘원산부’와 북쪽의 ‘원산리’를 묘사한 그림이 들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가사이가 생활하던 원산부에는 공장, 부민관, 은행, 상점, 신문사, 공설 시장 등이 빼곡히 들어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북쪽의 원산리에는 원산역과 철도 관사를 제외하면 산자락을 끼고 들어선 초가지붕들만 성글게 보일 뿐이다.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원산리는 가스등과 전깃불이 들어오는 원산부와 달리 밤만 되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음침한 곳이었다. 또한 그곳은 변변한 상설 시장도 없이 10일에 한 번 꼴로 겨우 장이 서는 곳이고, 목욕탕은 물론 위생 관념도 없는 수백 년 전의 전근대 세계가 마치 멈춰버린 시곗바늘처럼 그대로 존재하는 듯한 별세계였다. 그러나 그는 원산리가 왜 그런 곳이 되었는지, 또 그곳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굳이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자신은 원산부 안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간의 분리는 이렇듯 만남의 단절과 심리적 괴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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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원산부와 조선인의 원산리 |
일본인은 각종 편의 시설이 집중된 도회지인 부
府와 지정면
指定面에서 한데 모여 살았다. 이들이 만든 이른바 일본인촌은 조선인을 외곽으로 몰아내며 차지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근대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반면에 이러한 번화가의 외곽에 자리 잡은 조선인촌은 여전히 봉건시대의 시계가 돌아가는 차별과 소외의 공간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물리적 시공간 안에서도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대를 살았다.
패전 당시 원산부립국민학교 2학년이던 마쓰나가 이쿠오松永育男는 한 번도 조선인 친구와 놀아본 기억이 없다. 그가 기억하는 조선인은 가끔씩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주머니가 전부였다. 원산에도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패전 후였다. 생활비가 바닥나 책과 옷가지를 팔기 위해 원산리의 조선인 재래시장에 갔을 때 그는 북적거리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들을 접하기 전까지 그의 머릿속 원산은 일본인의 공간이었던 원산부가 전부였다. 그가 패전을 실감한 계기는 어른들의 대화 내용과 표정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른들은 조선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 끝에는 이웃 일본인 집에 불이 났다거나, 동네 부잣집과 순사 가족이 차례로 화를 입었다는 심각한 대화가 늘 따라붙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른들이 부쩍 조선인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의 일본인들이 패전 후에야 비로소 조선인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것이 생경한 공포로 다가왔음을 말해준다. 좀처럼 떨칠 수 없었던 두려움은 조선과 조선인을 잘 몰랐기 때문에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카무라 기미中村貴美(패전 당시 23세)는 충남 강경경찰서 병사계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천황의 항복 방송이 있고 나서 그 다음 날 출근해 보니 경찰서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었다. 폭도는 다름 아닌 경제법위반죄로 투옥되었거나 혹은 군대에 끌려간 아들과 남편을 둔 조선인 부녀자들이었다. 서장실로 들어갔더니 조선인 순사가 “이제는 우리가 서장이다”라면서 떡 하니 회전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패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온순했던 마을 사람들이 “(일본인들은)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가라”고 협박하는가 하면, 신성한 신사에 돌과 방망이를 든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곧장 어느 일본인 집으로 몰려가 집기를 부수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보고 동네의 경방단 어른들이 놀라서 이제는 본토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을 꺼냈다. 나카무라가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로 돌아가야만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른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녀도 결국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왜 ‘자신의 고향’인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선동자들의 중상에 부화뇌동하는 조선인의 무지와 무모함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사리사욕에 혈안이 된 조선의 ‘아귀축생’들이 바글거리는 지옥으로 변한 고향을 영문도 모른 채 떠날 뿐이었다. 귀환에 즈음해서는 조선인에 대한 공포가 어느새 증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조선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조선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중견 관료도 마찬가지였다. 강원도 내무부장 오카노부 교스케岡信俠助(1901년 생)는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재학 중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1928년부터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해온 노련한 관료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인근의 조선인들과 평소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었고, 나름대로 조선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자부했다. 패전 이튿날 하루 종일 만세 소리가 그치지 않자, 그는 친하게 지내던 조선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당신들은 왜 그런 바보 같은 ‘만세 소동’을 벌이냐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새내기 직원으로서 장래가 촉망된다며 그가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유군이라는 조선인조차 끝내 답변을 회피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한 그는 “조선인은 결국 우리와 결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20년 가까이 조선을 경험한 그였지만, 일본 통치에 협력했던 조선인들이 패전 후 지니게 된 복잡한 심경까지는 끝내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의 회고 속에서 패전은 곧 불안과 공포로 시작된다. 물론 식민 지배 말기에도 전쟁에 대한 공포는 늘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포의 중심축은 조선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긴 세월 조선에서 풍요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살면서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다. 그래서 패전 직후 조선인들이 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패전 후 자신이 왜 조선을 떠나야 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도 상당히 많았다. 이들이 패전 후 느낀 공포는 그곳이 엄연히 조선인의 땅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증폭된 것이다. 패전 후 맞이한 재앙이 일본의 조선 지배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일본인 귀환자가 패전이라는 직접적인 계기에만 매몰되었던 이유 또한 이것이다.
식민 지배 초기에는 크고 작은 저항을 겪었으나, 3·1운동을 기점으로 강고한 통치가 계속되면서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더 이상 두려운 대상이 되지 못했다. 1세대는 점점 지배 초기의 긴장감을 잊었고, 2세대는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조선에서 태어났다. 패전 후 일본인들이 경험한 이 생경한 불안과 공포는 곧 조선인에 대해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던 특권의 대가였다. 지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가 곧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