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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사고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나를 둘러싼 이 황야를 살피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 속 황야를 보는 일이로구나.” -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만성적 고향 상실증
여행을 생각하도록 이끈 책이자 여행하듯 읽은 책이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감정과 장소성이 함축적으로 어우러진 제목이다. 위의 인용구도 『슬픈 열대』에서 취했다. 그러나 이 책은 여행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행이란 게 싫고, 탐험가들도 싫다”고 토로한다.
아마도 책의 제목에서 그 사정의 얼마간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는 유럽을 떠나 다다른 열대에서 서구 문명이 저지른 “인류의 단일 재배”를 목도했다. ‘슬픈’이라는 ‘열대’의 형용사에는 그 아픈 정감이 어려 있다. 그는 여행이 싫고, 또 탐험가가 싫었다. 탐험가의 발자국을 따라 이윽고 식민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적 역사, 그에게 여행은 그 슬픈 역사와 맞닥뜨리는 일이었다.
여행으로 도피해보았자 우리 존재의 역사상 가장 불행한 모습과 대면하기 밖에 더하겠는가? 이 거대한 서구 문명은 분명 지금 우리가 누리는 기적을 낳았다. 하지만 부작용을 제어하는 데는 실패했다. (……) 여행이여, 이제 그대가 우리에게 맨 먼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인류의 면전에 내던져진 우리 자신의 오물일지니.
하지만 그가 여행을 꺼린 이유를 단지 문명의 어두운 그림자와 마주하기가 쓰라렸던 데서만 찾는다면 충분치 않으리라. 떠돌아다닐 운명에 처한 인류학자였던 그에게는 여행을 사고의 소재로 삼아 자신의 행보를 되돌아보는 일이 절실했다. 그에게 여행이란 단지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장소를 옮기더라도 자신의 고국으로부터 고스란히 가져가는 것이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점을 주목했다. 그래서 『슬픈 열대』 곳곳에서 그는 여행자의 시선에 배인 고약한 감각을 문제 삼는다.
레비스트로스가 소위 열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의 시선에서는 이미 반세기 앞서 윗세대 인류학자들이 거기서 찍어 유럽으로 들여온 사진이 오버랩되었을지도 모른다.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탐험가도 여행가도 군대의 비호 아래서 소위 현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안에는 인류학자도 끼어 있었다. ‘인류’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 ‘인류’를 어디까지나 ‘비서구인’으로 한정했던 인류학자들 말이다(이 점은 오늘날의 지역학이 주로 ‘비서구 지역’을 다룬다는 맥락과도 역사적으로 닿아 있겠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현지인’을 사진 속에 담아 가져온다.
그렇게 사진을 찍는다. 유럽으로 돌아가 전시하리라는 예감 속에서. 낯설고 기이한 장면일수록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리라. 멋쩍은 표정과 어정쩡한 자세로 포착된 현지인의 사진은 귀엽다거나 가엽다거나, 아무튼 호기심 섞인 반응을 얻어내리라. 그들은 사진첩 속에 갇힌다. 유럽인은 현지를 떠나 귀향할 수 있지만, 그들은 노예로 끌려오지 않는 이상 유럽으로 건너오지 못한다. 그들의 모습만이 생활의 맥락에서 뜯겨져나가고 운반된다. 누군가가 카메라는 영혼을 훔친다고 말했듯이.
때로 사진은 구경거리일 뿐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그들의 낯선 모습은 유럽인들의 과거 어느 시기인가를 연상시킨다.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인지는 따질 것 없다. 그저 ‘과거 어느’ 시기로 충분하다. 그리하여 그들의 낯선 모습은 처음 구경꾼들에게 몇 차례 감탄사를 자아내겠지만, 이윽고 낯설음은 알 만한 무엇이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감상이 지닌 폭력성을 민감하게 감지했다. 그래서 그는 여행에 관해 묻는 것이다. 현지 조사를 떠난 인류학자도 탐험에 나선 여행가도 유럽을 벗어났으나 유럽이라는 맥락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유럽 문명의 시간관 위에 서서 낯선 존재의 공간을 내려다본다. 따라서 떠나도 떠난 게 아니다. 낯선 존재와의 만남은 결코 자신의 시선, 자기 사회의 질서에 대한 의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여행가는 자신의 문명적 시간관 위에서 낯선 공간을 경험한다. 따라서 그는 떠나도 떠난 게 아니다. |
이제 첫 인용구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지 않았을까. 그에게 여행이라면, 진정한 여행이라면 자기 마음속 황야부터 살피는 일이어야 했다. 또한 그에게 인류학이라면, 진정한 ‘인류’학이라면 단선적 시간관에서 벗어나 인류의 일부인 자신과 먼저 대면하는 일이어야 했다. 그는 인류학자를 두고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자기 사회에 대해서는 비판자이자 다른 사회에 대해서는 동조주의자.” 이 어구에서 강조점은 ‘동조주의자’보다는 ‘비판자’에 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회를 내려다보는 태도만큼이나 자칫 신비화하여 결국 알 만한 대상으로 만드는 태도를 경계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민족학자를 이렇게 부른 적이 있다. “만성적 고향 상실자.” 어느 곳에 가든 고향과 같은 안락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심리적으로 불구 상태에 처한 존재. 이는 물론 인류학자가 자신의 모국을 떠나야 한다는 데서 기인하겠지만, 그에게 진정한 인류학자라면 자기 사회로 돌아와서도 “만성적 고향 상실자”가 되어야 했다.
그 ‘만성적 고향 상실증’의 기록인 『슬픈 열대』는 문학책이 아닌데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다. 그의 문체는 행간으로 풍부하지만 또한 직설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미려한 문체가 재능 덕택만은 아니리라. 저렇듯 깊은 고독감과 그 고독감을 개인의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사상으로 승화시키려 한 의지의 산물이겠다. 『슬픈 열대』에 담긴 울림 있는 표현들은 자신의 감수성을 부단히 시험대에 올리는 시련 속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었으리라.
소비되는 여행
『슬픈 열대』에 관한 서평을 쓸 작정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를 우회해서 꺼내고 싶은 물음이 있는 것이다. 이제 말을 돌리지 말고 묻자. 그가 경계하고 아파했던 여행의 감각이 그저 한 세기 전 유럽의 어느 인류학자들만의 것일까. 물론 이 물음을 곧장 지금의 우리 쪽으로 돌려세운다면 시간적 격차와 문화적 조건의 차이를 간과하는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이 곧 관광처럼 불리는 데에는, 그 ‘관광’이라는 말의 울림에서 저 물음을 던져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아주 사소한 사례로부터 시작하자.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고 꺼낸다. “해외여행 어디 다녀왔어요?”, “인도, 멕시코, 미국, 태국……”, “아, 그래요! 저도 작년 여름 인도에 다녀왔는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상한 대화의 양상이다. 사실 인도라고 해도 내가 다녀온 곳은 중부 지역인 고아와 함피였지만, 상대는 북부 지역인 델리와 바라나시를 다녀왔다. 같은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 반가움에서 얼마만큼의 실감이 공유되고 있을까. 그리고 여행지를 도시나 마을명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라 이름으로 밝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이 그다지 큰 나라가 아니어서일 수도, 자기가 다녀온 마을 이름을 대보았자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렇듯 오가는 대화 속에는 어떤 소박한 정복욕도 깔려 있지 않을까. 사실 내가 뉴욕에서 돌아다닌 거리는 면적이 일본 국토의 1퍼센트에 불과한 섬, 오키나와에서 돌아다닌 거리만큼도 안 되지만, “미국에 다녀왔어”라고 말할 때 어느덧 내 머릿속의 세계지도에서 미국은 한 색깔로 채워진다. 그리고 가끔은 나라를 초월하기도 한다. “응, 이번 겨울에는 중남미에 가려고 해. 한국보다 따뜻하잖아.” 그리하여 상상의 세계지도에서 이번에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하나의 색깔이 입혀진다.
두 번째 사례. 여행을 준비하러 서점에 간다. ‘세계 여행’이라는 제목을 단 가이드북이 즐비하다. 대개는 나라별로 분류되어 있다. 이따금 장사가 안 되는 곳은 지역 단위로 묶인다. 그 ‘세계’ 속에서 한 권을 뽑아든다. 그러면 그 세계는 주요 관광지, 이동 수단과 경비, 숙박 시설, 맛집 등의 정보로 정리되어 있다. 파리에 가면 에펠탑 관광은 필수이며, 파파야에 가면 코끼리 트래킹이 추천 코스다. 이런 식으로 짜인 가이드북이 아까 사례에서 오간 대화의 양상과 무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은 생활 실감의 단위인 마을이 아닌 나라를 오가는 것이며,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관광 명소를 들러보는 일이다. 그런데 관광할 만한 곳이라면, 다닐 곳도 사진 찍을 곳도 먹을 것도 쇼핑할 것도 많은 법이다. 가이드북은 정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가이드북을 쫓아다니는 여행은 바빠지게 마련이다.
가이드북을 힐난할 생각은 아니다. 그보다는 가이드북을 활용하는 (때로는 버리는) 여행자의 능력과 감수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행은 시간과 비용의 기회비용을 따지는 일이 된다. 즉 소비 행위가 된다. 아마도 ‘○○투어’, ‘○○패키지’ 등은 가장 합리적인 소비의 매뉴얼을 제공해줄 것이다. 그런데 저렇듯 가이드북이나 관광 상품이 경제적인 여행코스로 안내해준다면, 다시 말해 한 눈 팔지 못하도록 샛길로 새지 않도록 그야말로 ‘가이드’해준다면, 그 경우 선택지는 비슷해지고 말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니 우선순위에 놓이는 것은 교환물, 즉 모국으로 돌아가서 말하면 “아! 거기”라는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리라.
여기서 세 번째 사례. 거칠게 말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나중에 “아! 거기”라는 반응을 얻으리라는 그 예감의 교환 목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거기에는 단연 미디어의 공로가 크다. 갖가지 여행 정보 프로그램은 그 나라에 가면 방문함직한 관광 명소나 관광자원을 소개해 준다.
그런데 여행 정보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마다 어떤 위계가 느껴진다. 단적으로 말해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분류된다. 가령 패션의 ‘첨단’을 달리는 밀라노와 동남아로의 ‘오지’ 여행이라는 식이다. 시카고를 방송으로 내보낼 때면 빌딩숲을 보여주며 시작하지만, 캄보디아 편에서는 물고기를 구워 먹는 아이부터 나온다. 그리고 런던 시계탑의 묵직한 울림에서는 역사성이 느껴지는 듯하지만, 멕시코시티 띠앙기스 재래시장의 북적거림은 마치 삶이 날 것 그대로 튀어나온 듯 묘사된다.
해외여행은 그야말로 국경을 넘어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낯선 풍경을 마주하기 전에 이미 그 낯설음을 너끈히 소화할 수 있는 든든한 해석 틀이 마련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문명관이 아닐까. “역시 잘 사는 나라더라”라거나 “못 살던데”라는 감상 속에서 그 문명관은 가감 없이 드러난다. 낯선 곳에 다다르고도 “잘 산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묻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얼마나 ‘잘/못 사는지’를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 공항의 시설에서 느끼고, 거리에 나가 물가로 확인한다. 예상과 다르더라도 그 충격은 기껏해야 “생각보다 못 살지는 않던데”라는 반응 안으로 흡수된다.
우리는 낯선 곳에 가지만 그곳은 결국 잘 살거나 못 사는 나라다. 특히 동남아시아는 비교적 저렴하게 들러볼 수 있는 동시에 한국인에게 일종의 우월감을 안겨 관광 붐이 조성되고 있다. 1, 2만 원짜리 마사지로 육체적 봉사를 받을 때의 느낌. 그 일순의 감각은 미국에서 구입할 수 없는 것이다. 액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월한 위치에 잠시 서보아도 서구 문명을 향한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가 들췄던 저 고약한 여행의 감각은 1세기 전 유럽 인류학자들의 것이지만, 1세기를 지나 지금 그것이 가장 일반화된 곳은 다름 아닌 소위 ‘중진국’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앞서 상상의 세계지도에서 그 나라가 한 가지 색깔로 칠해졌다면 이번에는 문명의 시계열 속에서 한 가지 색깔로 덧칠된다. 두 차례의 색칠로 그 사회가 지닌 복잡한 지역성과 복잡한 시간성은 가려지고 만다.
여행의 사고
이렇듯 소비가 된 여행에서 소비되는 것은 시간과 돈만이 아니다. 거기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대껴 지내며 일궈놓았을 삶의 논리와 가치들도 가벼운 경험담 속에서 소비되고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여행이 품고 있을지 모를 어떤 가능성 역시 소비되고 있지는 않을까. 그 여행의 가능성을 찾아 다시 레비스트로스로 우회하자.
『슬픈 열대』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루소를 주목했다. 그에게 진정한 인류학은 우선 익숙한 자신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했다. 그런데 루소는 “나는 타자다”라는 표현을 선취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루소는 자신을 삼인칭으로 대상화했다.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등장하는 ‘자연 상태’라는 가정도 그런 자연 상태가 실제로 존재하느냐는 추궁에 시달리고 원시 상태를 찬미한다는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자기 세계를 되돌아보는 ‘방법’으로서 도입된 것이었다. 그 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루소를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민족학자에 가까웠던 사람”이라고 상찬한다.
반면 데카르트에게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코기토에 관한 명제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심리학적이고 개인적인 틀 속에 머문다고 지적한다.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을 때 레비스트로스가 겨냥하는 대상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어보면, 의외로 여행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올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여행의 사고’가 레비스트로스와 닮은 구석이 있다. 나는 철학에 문외한일뿐더러, 더구나 데카르트에 관해서라면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능력이 있을 리 없다. 다만 그의 ‘여행의 사고’는 살펴보고 넘어가고 싶다. 근대적 ‘주관론’ 내지 ‘주체론’의 시조로 간주되는 데카르트이기에 더욱 그렇다.
잠시 레비스트로스로 돌아가자면, 그에게 진정한 여행이란 단순히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맥락의 전환을 의식하는 행위여야 했으며, 그렇지 않고서야 여행지는 자기 세계의 연장이 될 뿐이다. 맥락의 전환을 의식하려면 자기 존재를 되묻고, 자기 사회의 사고 체계를 의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데카르트에게도 그런 성찰이 있었다. 아니, 데카르트야말로 그런 성찰을 했다. 더구나 그 성찰은 장소의 이동 가운데 이루어졌다. 언젠가 그 장소는 더 이상 물리적인 장소를 의미하지 않게 되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년 전에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을 피해 여기에 오기로 결심했다. 오래 지속된 전쟁 덕분에 훌륭한 질서가 세워진 이 나라의 군대는 사람들이 안식하고 평화의 결실을 누릴 수 있도록 봉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나는 남의 일에 호기심을 갖기보다는 자기 일에 열중하는 활동적이며 위대한 국민들과 함께 대도시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가장 먼 황야에 있는 것처럼 유유자적하는 은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이곳”이란 네덜란드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에서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을 피해” 네덜란드로 왔다. 『방법서설』을 집필하기 전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상업이 발달한 도시국가였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 와서도 그곳에 속하지 않았다. “가장 먼 황야”처럼 대했다. 여기서 예의 ‘만성적 고향 상실자’를 들먹인다면 너무 이른 일일까. 자, 이어지는 일구를 보자.
또 그 후에 여행을 하면서 우리와 반대되는 감각을 갖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야만스럽고 미개한 것이 아니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은 우리 못지않게 혹은 우리 이상으로 이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러므로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라는 것, 그리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리에 대해서는 그 발견자가 민족 전체라기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했기에 그 진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그 진리성이 만족스럽게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계속되는 이동은 데카르트에게 간헐적인 섬광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위와 같은 문구에서 데카르트는 철학자보다는 인류학자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적어도 그는 골방에 틀어박혀 책을 내놓지는 않았다. 걸어 다니며 묻고 사유했다. 그것도 9년씩이나. “9년 동안 세상에서 연출되는 연극 속에서 연기자보다는 관객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연극’을 의심했다. 앞서의 인용구에서 밝혔듯이 자명하다고 여겨온 것이 진리가 아닌 관습이나 선례는 아닌지 의심했다. 그리고 진리는 추종하는 자가 많다고 진리로서 판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진리에 다가가는 것은 고독의 여정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그 고독은 이동을 감행할 때 얻을 수 있는 고독이다.
이제 그는 땅 위에서만 이동하지 않는다. 『방법서설』이나 『성찰』에서 등장하는 익히 알려진 내용이지만,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환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듯 어제로부터 이어지는 오늘과 방금 전으로부터 넘어오는 지금을 의심하며 연속된 시간에 균열을 내어 복수의 시간들 사이로 이동을 감행했다. 물론 저 꿈은 눈을 뜬 채로 꾸는 꿈이었다. 즉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것은 기존의 선입견과 학설이 내준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의심했다. 옳다고 믿는 것은 방금 전까지 옳다고 믿어왔기 때문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는 그렇게 낯설음의 충격을 익숙함 안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여기서 다시 저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로 돌아가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를 강조하면 ‘주관성’이 추출되고, “나는 존재한다”에 중점을 두면 ‘주체성’이 나온다. 그리고 전자에서 근대 합리주의의 인식론, 후자에서 이후 실존주의가 움텄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데카르트의 코기토라면 “생각한다”는 끝없는 회의여야 하며 “존재한다”는 안주할 수 없는 이동이어야 한다. 끊임없이 사유하고 그 사유를 의심하며 존재는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 운동이 멈춘 자리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철학서 속에서 정리되는 서구 근대철학의 ‘일반 원리’로 응고되고 말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데카르트의 철학이 아니다. 다만 서구 근대철학의 ‘기반’을 닦아놓았다고 하는 데카르트라고 할지언정, 그 사고의 기반에는 어떤 유동성이 감돌고 있으며, 어쩌면 거기에 여행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는 것이다.
공空=간間의 여행
사실 데카르트를 저렇게 읽어본 데에는 일본의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그 내용은 『탐구』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여행을 사고할 때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발상도 제공했다.
그는 공간을 ‘공空=간間’이라고 바꿔 읽었다.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 내용을 풀이하자면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오르는 그의 사상적 행보를 따라가야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의도만을 확인해 두자. 그는 ‘공空=간間’을 통해 지리적 공간이 아닌 인식론적 공간을 탐색하려 했다. 공空은, 즉 ‘비어 있다’ 함은 세계가 이미 어떤 의미로 들어차 있다는 전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표현이며, 간間, 즉 ‘사이’는 경계를 넘어설 때 발생하는 어떤 종류의 전환을 민감하게 의식하기 위한 표현이다.
이제 다시 해외여행으로 돌아오자. 해외여행은 자기 사회가 아닌 곳을 간다는 의미에서 특수한 경험이다. 익숙한 자신을 이끌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이다. 거칠게 말해 그 경험은 두 가지 방향을 품고 있다. 첫째, 자신이 예상하거나 알고 있는 일을 확인하는 여행이다. ‘이국적인’ 체험도 ‘이국적인’ 채로 결코 낯설지 않다. 둘째, 자신의 앎과 감각이 의문으로 다가오는 여행이다. 이 경우에는 익숙하다고 여겨온 것마저 의미와 색깔이 바뀔지 모른다. 그리하여 인류학의 행보에 식민적 인류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처럼 다른 갈래의 길이 있듯이 여행도 두 방향을 간직하고 있다.
낯선 대상을 범박하게 처리하는 개념이 되고 말까봐 아껴두었지만, 여행은 ‘타자’에 대한 시선을 바꿔놓을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추상적이 될까봐 저어되는 말이지만, 세계를 규모가 아니라 무수한 질적 경계와 차이,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내는 사건들로 보도록 이끌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체험을 위해서는 그 낯설음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만남의 맥락을 스스로 구성해야 하는 힘겨움이 따르리라.
승려들, 걷다 |
그리하여 나는 내가 꺼리는 여행을 늘어놓고 싶다. 속되게 표현하자면, 경치나 풍물을 눈에 바르는 여행 (그야말로 관광), 그리하여 관광객의 시선에 머무르는 여행, 그리하여 한 번 찍었으니 두 번 다녀올 필요가 없는 여행, 현지 사회의 역사와 고유한 맥락을 무시하는 여행, 그래서 꼭 이곳이 아니라 저곳을 다녀왔어도 되는 여행 (가령 역사 문화적 조건이 다르지만 따뜻한 남쪽 섬이라는 점에서 “하와이나 오키나와”), 이리저리 난폭하게 문명의 잣대를 들이대는 여행, 자신의 시간 위에서만 배회하는 여행, 그래서 결국 자신이 바뀌지 않는 여행.
그러나 역시 정작 적어보고 싶은 것은 내가 원하는 여행이다. 나라 단위가 아니라 마을 단위에서 생활 감각을 체험하는 여행, 자신의 감각과 자기 사회의 논리를 되묻게 만드는 여행, 현지인의 목소리를 듣지만 그것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여행, 카메라를 사용하되 그 폭력성을 의식하는 여행, 마음의 장소에 다다르는 여행, 물음을 안기는 여행, 길을 잃는 여행, 친구가 생기는 여행, 세계를 평면이 아닌 깊이로 사고하는 여행, 마지막으로 자기로의 여행.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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