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의 이력
1
서쪽 지역의 공장지대까지 지하철로는 한시간 반이나 가야 했다. 지하철 노선도에는 동과 서를 잇는 사십여개의 역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김은 시간을 확인한 뒤 남은 역을 세어보았다. 시간은 넉넉했지만 서쪽 지역이 처음이라 길을 잘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지하철은 처음 듣는 이름의 역에서 문을 여닫은 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해 달려갔다. 김은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동쪽 지역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서쪽 지역의 지명들은 낯설었다. 긴장감 때문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동쪽 지역에서 김은 ‘도시개발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도시’와 ‘개발’ 모두 각광받는 분야였지만 김의 업무는 책상에 앉아 문서작성을 하는 것뿐이었으므로 ‘미래도시의 건설’ 같은 슬로건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김은 똑같은 길로 출퇴근하고 지정된 메뉴의 점심을 먹고 똑같은 업무를 반복해서 처리했다. 똑같은 배경, 똑같은 얼굴, 똑같은 인사, 똑같은 농담과 불평까지, 동쪽 지역의 모든 것은 지루함 그 자체였다. 긴장감이라는 건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이름 같았다.
오후 세시쯤 되면 김은 자신이 구식 프린터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너무 많이 출력해서 늘 열 받아 있는 상태고 어딘가에 용지가 걸려 있으며 잉크가 다 소모된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었다. 걸린 용지를 빼내보면 구겨지거나 찢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는 종이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고장을 감지한 프린터는 빨간불을 밝히지만 김은 그런 것조차 할 줄 몰랐으므로 성능 면에서는 프린터만도 못했다. 네시쯤 되면 김은 스스로 전원 버튼을 꺼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래서 파견업무 제안을 받았을 때 별다른 고민 없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몸으로 뛰는 업무가 많을 거라는 상사의 말도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김에겐 변화가 필요했다.
몇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도시의 하늘은 탁했다. 명도가 조금씩 다른 회색이 창밖을 꼼꼼하게 메우고 있었다. 동쪽의 하늘이 지하철을 쫓아 서쪽 지역까지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옆에 앉은 사람의 이어폰에서는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외치는 노래가 새어나왔다. 그건 노래라기보다 구호처럼 들렸다. 긴장한 탓인지 귀에 몹시 거슬렸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노래를 간접 청취하며 김은 엠피쓰리를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하철역 밖으로 나온 김은 역 근처의 풍경이 동쪽 지역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상가와 가로수와 보도블록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제까지 그가 출근하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약간 실망했지만 긴장감을 누그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지하철역이라는 건 원래 비슷비슷하니까 역 주변을 벗어나면 서쪽 지역만의 특색이 나타날 거라고 기대하며 걸었다. 하지만 공장지대로 들어갈수록 동쪽의 어느 구역을 걷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심지어 공장 건물은 김이 일하던 동쪽 지역의 건물과 흡사했다. 이 도시는 동쪽과 서쪽 지역이 데깔꼬마니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담당자 박은 사원 카드와 약도가 그려진 종이, 열쇠를 건넸다. 한달에 한번 동쪽 지역의 사무실에 와서 프린터와 복사기를 점검하고 가던 AS기사와 인상이 매우 비슷했다.
“출근이나 퇴근 카드는 이쪽에서 찍고 일은 그쪽에서 하게 될 겁니다.”
담당자 박은 약도와 주소가 적힌 종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말하자면 현장근무죠.”
“그렇군요.”
김과 박은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자판기 커피의 맛은 법으로 정해놓은 듯 동이나 서나 동일했다. 기기점검을 끝낸 AS기사와 동쪽 지역의 사무실에서 뽑은 자판기 커피를 한잔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담당자 박이 더 과묵하다는 것 정도였다.
“서쪽 지역은 처음인데, 여긴 지내기가 좀 어떻습니까?”
김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마쳤다. 지내기가 어떠냐는 건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나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모를 때 하기 적당한 질문 같았다. 이 질문을 계기로 박이 이래저래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을까 기대하며 꺼낸 것이기도 했다.
“뭐, 어디나 다 비슷하죠.”
자세한 얘기 대신 박은 적당히 식은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아…… 그렇군요.”
예상보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비슷하다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처럼 들려서 안심이 됐다. 김도 묵묵히 커피를 마셨다. 자판기 커피의 양은 초면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면서 마시기에 적당했다.
근무지는 공장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두어 블록 지나서 코너로 접어들자 주차장을 연상시키는 널찍한 공터와 허름한 창고가 나타났다. 입구를 제외한 삼면이 시멘트 벽으로 막혀 있어서 주변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벽과 오랫동안 가문 하늘과 땅의 빛깔이 거의 흡사했다. 김이 공터를 둘러보는 동안 바람이 회색빛의 흙바닥을 훑고 지나갔고 김의 구두는 금세 부옇게 변했다. 황량한 근무지 앞에서 김은 기침을 두어번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가 바로 동료도 없고, 책상과 컴퓨터, 프린터도 없는 김의 새로운 근무지였다. 창고 문에는 김의 이름이 붙어 있고 안에는 망치와 해머, 곡괭이, 삽 등의 장비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김에게 주어진 새 업무는 구덩이를 파는 것이었다. 도시개발의 기초작업에 해당한다는 게 담당자 박의 설명이었다. 동쪽 지역에서 김이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했다면 서쪽 지역에서는 좀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기초작업을 담당하게 되는 셈이었다.
김은 창고 안을 둘러본 뒤 삽을 한 자루 골라 들었다. 새로 구비한 것인 듯 삽자루는 거칠었고 초록색 삽날은 번뜩거렸다. 자신이 판 구덩이를 시작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첫 출근이었으므로 머뭇거릴 여유도 없었다. 삽을 들고 공터로 나오자 의욕과 긴장감, 책임감이 뒤섞인 나지막한 기합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김은 오랫동안 가물어서 바싹 마른 흙에 삽을 꽂았다. 푸석한 흙의 질감이 삽자루에 그대로 전해졌다. 발로 삽을 누르고 흙을 퍼내자 흙먼지가 부옇게 피어올랐다. 김은 업무수첩을 꺼내서 편한 복장, 마스크와 안경, 면장갑과 모자를 준비할 것,이라고 메모했다.
삽질 몇번만으로도 한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김은 이 색다른 업무에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미래도시의 건설’이라는 슬로건은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다. 땀을 닦은 뒤에는 어느 정도의 크기와 깊이로 구덩이를 파야 할지 몰라서 담당자 박에게 전화를 걸었다.
“능력껏 파시면 됩니다. 가능한 한 넓고 깊게요.”
“아…… 그렇군요.”
김은 담당자 박이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게 자신을 믿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결론 내렸다. 첫날 맡은 업무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재킷을 벗고 팔을 걷어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덩이는 원뿔 모양으로 변해갔다. ‘깊게’보다 ‘넓게’ 파는 게 더 어려웠다. 김은 삽을 세워서 구덩이의 옆면을 깎았다. 삽이나 일 모두 몸에 익지 않아서 오른쪽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다. 셔츠는 땀에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했다.
점심은 공장 건물에서 해결했다. 식당 표시가 된 곳으로 들어가자 사원 카드를 목에 건 사람들이 식판을 든 채 줄을 서 있었다. 김도 식판을 들고 줄의 끄트머리에 섰다. 식당 안에 있는 오십여명의 사람들이 똑같은 국과 반찬을 떠먹은 뒤 천천히 흩어졌다. 뻐근한 어깨와 팔 때문에 김의 식사 속도는 느렸다.
동쪽 지역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김은 내내 졸았다. 첫 출근과 낯선 지역에 대한 긴장감, 예상치 못한 노동의 피로가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2
동쪽 지역의 취업 시장은 사정이 좋지 않았다. 몇개의 큰 기업이 계열사를 정리하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갈 거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떠돌았다. 그런 뉴스가 인터넷에 뜨면 수백건의 댓글이 따라붙었다.
대졸 취업률은 낮고 실업률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 탓에 부모들은 이십대 중후반이 된 자식들을 몇년 더 책임져야 했다. 퇴직연령은 자꾸 낮아지는데 평균수명이 점점 늘어난다는 게 그들에겐 큰 걱정거리였다. 자식들 뒷바라지와 노후대책 중에 어느 쪽에 더 힘을 실어야 할지도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부모들에겐 살아온 세월과 사연, 자식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한 걱정거리가 존재했다. 그건 주름과 흰머리, 고혈압과 관절염, 혹은 다른 형태의 질병으로 나타났다.
윤도 이년째 미취업 상태였다. 부모와 함께 살았고 그래서 주기적으로 한숨과 야단, 신세 한탄과 걱정, 위로와 격려가 뒤범벅된 한시간 반짜리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가끔은 그 댓가로 용돈을 받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가끔이었다. 미취업자의 일상은 끔찍하게 지루했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면 구직 싸이트에 들어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그런 다음에는 자극을 받아서 영어 공부를 좀 했고 오래지 않아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저녁때는 누가 부르면 나가고 아니면 또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죽였다. 남아도는 건 시간뿐이었으므로 윤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시간을 죽였다. 이년쯤 그렇게 지내자 자신이 시간을 죽인 게 아니라 시간이 자신을 귀퉁이에서부터 조금씩 먹어치운 것처럼 심신이 너덜너덜해졌다.
윤의 표면적인 상태는 ‘빈둥빈둥’이었지만 그 단순하고 둥근 표현의 밑바닥에는 자잘한 실패와 좌절, 끔찍한 지루함, 체념이 씹다 버린 껌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해마다 졸업생들이 쏟아져나온다는 것도 무서웠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간 식사 도중에 포크로 자신의 목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는 거였다.
윤은 근무 중에 피우는 담배의 개운함, 매달 입금되는 월급, 사내연애의 짜릿함을 진심으로 갈망했다. 그런 걸 얻으려면 뭔가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무직만 고집했지만 점차 영업직 쪽으로 눈을 돌렸고, 그쪽도 여의치 않게 되자 근무조건만 괜찮다면 생산직도 나쁘지 않다고 마음을 바꿨다. 이제는 월급만 제때 준다면 벽돌이라도 나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무 지역도 동서남북으로 확장했다.
하지만 근무 지역이 서쪽이라고 전화기 너머에서 담당자 강이 말했을 때 윤은 휴대폰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한숨부터 내뱉었다. 대충 계산해봐도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출퇴근으로 버리는 시간만 세시간이 넘었다. 물론 집에서 놀면 스무시간쯤은 버리는 셈이지만, 내키는 조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어디라도 들어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윤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윤의 취업 소식을 들은 부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쪽 지역에서 일한다는 말에는 종류가 다른 한숨이 등장했지만, 저녁 밥상에는 소불고기가 올라왔고 모처럼 다들 편안한 마음으로 뉴스를 시청했다. 회사에 입고 갈 만한 옷이나 사 입으라는 말과 함께 약간의 용돈이 주어졌고 그 댓가로 사회생활과 관련된 한시간짜리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윤은 돈을 받자마자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취직 턱이라고 하자 회사생활을 가장 오래 한 친구가 축하의 의미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윤은 얼굴과 몸매 중에서 몸매를 선택했다. 친구 녀석이 그럴 줄 알았다며 음흉하게 웃었다. 소속과 월급, 여자친구까지 구색을 갖춰가는 기분이 괜찮았다.
친구들과 자리를 옮겨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소개받기로 한 여자가 나타났다. 미니스커트 차림이었는데 쭉 뻗은 다리가 늘씬했다.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친구가 ‘훌륭하지?’라는 의미의 눈짓을 보냈다. 다른 친구들도 재빠르게 여자의 다리를 훑었다. 다들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여자는 몇번 크게 웃더니 말을 놓았고 남자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여자의 옷차림과 말투, 행동, 모든 것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한 사람의 냄새가 풍겼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때마다 여자는 가늘고 긴 다리를 꼬았다. 만남을 지속하고 특별한 사이가 되려면 공을 많이 들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윤의 피는 더 빠르게 돌았다.
3
출근하자마자 김이 목격한 것은 평평해진 공터였다. 전날 파놓은 구덩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공터는 김이 처음 도착해서 본 것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구덩이 주변의 흙만 색이 다른 것으로 봐서 누군가 꼼꼼하게 메워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은 구덩이가 있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지면은 다른 곳보다 살짝 낮았지만 엄연한 평지였다.
담당자 박은 통화 중이었다. 김은 마음이 급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끊기를 반복했다. 단순한 실수이거나 업무상의 착오일 수도 있지만 미래도시의 건설을 방해하는 음모일지도 몰랐다. 바람이 불자 흙먼지가 공터 안을 오랫동안 맴돌았다. 김은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다가 쥐어뜯었다. 통화를 몇번 더 시도했지만 박과는 결국 연결되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김은 다시 삽자루를 쥐었다. 막상 땅을 파기 시작하자 걱정했던 만큼 심각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쟁회사의 방해일 수도 있지만 우연히 일어난 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김이 과도한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건 회사 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김은 새로운 구덩이를 좀더 넓고 깊게 파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삽질을 했다.
흙 속에는 의외로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잡초의 뿌리와 비닐의 잔해, 깊이 박힌 돌멩이, 깨진 구슬과 돌돌 말린 스타킹 한 짝, 그것들은 땅 밑에 숨어 있다가 김의 삽 끝에 걸려 모습을 드러냈다. 삽으로 깊이 떠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손으로 슬슬 파내야 작업이 수월해질 때도 있었다. 삽으로 흙을 파는 것도 문서를 출력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삽질은 느려지고 몸이 뻐근해졌다. 김은 자신이 느리고 성능이 떨어지는 굴삭기가 된 것 같았다.
출근해서 공터에 도착하면 김은 심각한 표정으로 공터를 서성거렸다. 김이 구덩이를 파고 나면 누군가 그걸 다시 메우는 일이 며칠 동안 반복되었다. 이 모든 상황이 원래 업무에 포함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역량을 이런 식으로 시험해보는 건지, 어떤 방해 세력이 개입된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김의 업무는 삼십분에서 한시간쯤 늦게 시작됐다.
김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예전 같으면 여기저기 전화해서 이런 기막힌 상황, 말도 안되는 업무에 대해 열을 내며 떠들었을 것이다. 좀더 젊었을 때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한다는 걸 주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심정이 있었다. 술에 취하면 이 도시가 건재하고 발전하는 게 자신의 엄청난 희생 덕분인 양 떠벌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업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지내는 게 좀 어떠냐는 질문을 받으면 실상이나 진심 같은 건 꿀꺽 삼켜버리고 괜찮다고 대꾸한다. ‘괜찮다’의 뉘앙스만으로도 괜찮지 않다는 걸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어느새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부끄러운 나이, 고통이나 비천함을 축소해버리고 싶은 나이가 된 것이다. 덕분에 괜찮다는 말의 적절한 사용법을 익히게 되었다.
담당자 박에게 전화를 걸기도 껄끄러웠다. 통화 중이더라는 말은 핑계처럼 들릴 게 분명하고 왜 이제야 보고하느냐는 책망이 쏟아질 것 같았다. 분명히 뭔가 잘못됐는데 원인이 뭔지도 모호했다. 엉뚱하게도 생각은 자꾸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싶은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속이 갑갑해지면서 신트림이 올라왔다. 겨우 끊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져서 김은 주먹을 쥔 채 공터를 서성거렸다.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삽을 드는 것뿐이었다. 삽에는 전날 판 흙이 군데군데 말라붙어 있었다. 김은 대충 발로 털어내고 삽을 꾹 밟았다. 다행히 일을 하는 동안에는 걱정이나 불만이 흙먼지와 함께 흩어졌다. 땅을 다 판 뒤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상대를 기다려봤지만 밤이 될 때까지 공터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상황이 반복되자 김은 결국 이 사실을 담당자 박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서류 형식으로 만들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을까 하다가 박의 책상 양옆에 어지럽게 쌓여 있던 서류 뭉치를 떠올리곤 마음을 바꿨다. 면담을 요청하기까지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담당자 박은 프린터에서 나오는 출력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업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작업복 차림도 아닌데 김은 어깨와 팔의 흙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기초작업은 잘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출력물을 훑어보는 박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건지 김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실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김은 목소리를 낮추고 빠르게 말했다.
“문제라니요?”
박이 비로소 김을 쳐다보았다.
“일이 진전되지 않고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구덩이를……”
“기초작업이라는 게 원래 초반에는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당신이 할 일입니다.”
박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동시에 김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서류 뭉치를 뒤적거렸다.
“그게 아니라…… 누군가 제가 판 구덩이를 계속 메우고 있단 말입니다.”
애써 눌렀는데도 김의 목소리는 튀어올랐다. 흠, 하고 박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일이겠죠.”
박이 시계를 보더니 김의 어깨를 툭 쳤다.
“임씨는 그냥 제시간에 출근해서 맡은 일만 하면 됩니다. 그게 우리가 임씨를 고용하고 월급을 주는 이유니까요.”
임이 아니라 김이라고 정정하는 게 먼저일지, 끝을 알 수 없는 방해와 반복에 대해 좀더 설명해야 할지 김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는……”
“업무가 맞지 않으면 말하세요.”
담당자 박은 김의 말을 칼같이 자르고 출력해놓은 이력서 뭉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임씨도 보면 알겠지만 전화만 하면 동서남북에서 달려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습니다.”
박이 자판기 커피를 권했지만 김은 그냥 나왔다. 자신이 임인지 김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편의점 앞을 지날 때 담배를 사서 피울까 잠시 망설였지만 발길을 돌렸다.
4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땅을 파는 것보다는 메우는 쪽이 쉽다. 담당자 강이 업무에 대해 설명했을 때 윤은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공터는 황량했지만 끔찍할 정도는 아니었고 퍼낸 흙은 구덩이 옆에 쌓여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흙을 푸지 않고 밀어넣으면서 윤은 비교적 손쉽게 도시개발의 기초를 닦았다. 흙이 모자라서 바닥이 살짝 꺼진다는 점만 제외하면 수월한 작업이었다. 동료가 없어서 심심하긴 했지만 어떤 일에나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업무를 마치면 윤은 바로 동쪽 지역으로 갔다. 하는 일이라고는 백수였을 때처럼 질릴 때까지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새벽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지만 직장인이 되었으므로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다.
친구들은 퇴근 후 새로 생긴 술집에서 모이는 걸 좋아했다. 거기 어때?라고 묻지 않고 거기 어떻더라,라고 말하려면 미리 분위기나 술맛, 가격 같은 걸 파악해두어야 했다. 취직한 지 일년쯤 된 친구, 수습 딱지를 막 뗀 친구, 취업한 지 얼마 안된 친구와 윤, 아직 미취업자인 친구가 자주 모이는 멤버였다. 술을 몇잔 마시고 나면 네 사람은 회사생활의 고달픔과 더러움에 대해 과장과 허풍을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그 순간에는 사회의 핵심 멤버가 된 듯한 기분에 빠졌다. 상사에 대해 욕하면서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한다든가 단추를 풀고 소매를 살짝 접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그런 분위기를 북돋아줬다. 아직 구직 중인 친구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채워주는 건 대부분 직장생활을 가장 오래 한 친구였다. 그놈은 술을 따라주면서 부하직원에게 하듯 영어 공부 많이 해두라는 식의 조언을 덧붙였다. 백수 친구는 공짜 술에 취해서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취하려는 찰나에 그 말을 듣고 확 취해버렸다. 그리고 어른스럽지 못한 술주정을 했다. 윤을 비롯한 친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이 자식은 이래서 안된다니까,라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친구가 소개해준 여자와는 매일 통화했다. 윤보다 한살 어린 여자는 알고 보니 직급이 대리였다. 유쾌하고 잘 웃었지만 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물을 때는 면접관보다 날카롭고 집요했다.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동쪽 지역의 어디쯤에 살며 집이 평당 얼마인지를 묻기도 했다. 연예인 얘기에 열을 올리고 남자친구와 연락이 안된다며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던 대학 후배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회사 비전 있어? 언제까지 다닐 생각이야? 나중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어? 여자는 애교 섞인 콧소리로 그런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의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윤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남에게 드러낼 만한 업무도 아닌데다 성취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삽자루를 쥐고 구덩이를 메울 때면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이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던 비전마저 지워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분간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것과 제날짜에 들어오는 월급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멀고 낙후된 서쪽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경력을 좀 쌓아두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여자에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어서 윤은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서쪽 지역까지 진출한 건 폭넓은 경험을 쌓으려는 것이고 벌써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이라고. 의심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요즘처럼 쌜러리맨이 별 볼 일 없는 때가 또 있을까, 하며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윤에겐 아직 그렇게 멀리 내다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공터에 도착하면 윤은 구덩이부터 찾았다. 구덩이를 보면 안도했고 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윤은 자신이 메운 구덩이가 새롭게 파헤쳐져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일은 메우는 거니까. 오히려 출근할 때마다 공터에 아무 변화가 없을까봐 걱정했다. 그건 더이상 할 일이 없다는 걸 의미하니까. 그런 식의 해고나 계약파기가 공공연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끔, 언제 누가 왜 구덩이를 파는지 궁금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월급이 언제 얼마나 오를지가 더 궁금했다.
구덩이를 찾고 나면 윤은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언제 또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지, 날씨와 안부 같은 걸 물으면서 슬쩍 떠보았다. 여자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윤의 애를 태웠다. 물론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레스또랑 예약은 필수고 근처의 좋은 모텔을 섭외해둬야 하며 여자가 마음을 움직이고 몸을 열 만한 허풍과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윤은 그 모든 걸 지불하고서라도 여자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여자가 돈만 밝히는 건 아니었다. 작업할 때 목장갑을 끼지 않아서 지저분해진 윤의 손톱을 정성스럽게 깎아주기도 했다. 손톱깎이를 들고 미간을 찌푸려가며 집중하는 여자의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때마다 윤은 여자를 품에 꼭 안았다. 절대로 떠나지 말라고, 영원히 내 옆에 있어달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자의 몸에서 내려와 다리가 풀릴 때나 지갑에 쑤셔넣었던 카드 영수증을 발견할 때면 이 관계에 대해 회의가 들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윤은 다시 그녀를 원했고 기꺼이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했다. 어떤 사랑도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할부로 결제한 사랑의 댓가를 갚으려면 윤은 오래 일해야 했다.
하지만 윤의 업무환경은 점점 열악해졌다. 얼마 전부터 구덩이가 이상해졌다. 그동안의 구덩이는 얕거나 깊거나의 차이가 있을 뿐 동그랗거나 네모난 형태에 가까웠는데 며칠 전에는 세모 모양의 구덩이가 등장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것은 자로 잰 듯 완벽한 이등변삼각형이었다. 윤은 한참 동안 구덩이를 들여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삼각형의 의미, 변화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몇번을 다시 풀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수학 문제처럼 삼각형은 거기 딱 버티고 있었다. 혹시 근무태만에 대한 경고인가? 근처에 감시 카메라가 있나 싶어 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단순히 매뉴얼이 바뀐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애써도 삼각형의 구덩이는 지루한 일상에 던져진 신선한 변화나 고정관념을 깨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업무상의 스트레스일 뿐이었다. 윤은 이런 식의 일방적인 하달은 딱 질색이었다.
다음 날 윤이 목격한 건 사다리꼴 형태의 구덩이였다. 윤은 그 옆에 앉아 여러대의 담배를 피웠고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담당자 강은 계속 통화 중이었다. 윤은 통화 버튼과 종료 버튼을 번갈아가며 눌렀다. 몇번 더 시도했지만 강과는 결국 연결되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윤은 삽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고의로 엿 먹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윤은 삽을 팽개치고 공터 안을 빠르게 맴돌았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 따위 그만둬버리고 싶지만 다음 달에는 여자의 생일이 있었다. 그날 스타킹과 속옷을 찢게 해줄게. 귀금속 진열대를 바라보던 여자가 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자가 두번이나 착용해본 목걸이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선물해본 적이 없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뜨겁게 불타오를 그 밤을 기대하며 윤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사다리꼴이나 동그라미나 구덩이라는 건 메우고 나면 다 평평해지는 것이다.
동쪽 지역에 돌아가면 윤은 폭음했다. 친구들이 윤의 술잔을 채워줬다. 사회생활이 쉬운 게 아니다, 남의 돈 버는 게 원래 더럽고 치사한 거잖아. 친구들은 어른스럽게 조언하고 윤은 개처럼 취해갔다. 그깟 사회생활 때려치우고 싶지만 백수가 되면 여자를 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별 모양의 구덩이를 발견한 날 윤은 삽을 바닥에 팽개쳤다. 화풀이할 곳이 없어서 삽을 밟고 발로 걷어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공터 안을 돌아다니며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욕을 했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5
동쪽 지역까지 한시간 반이나 걸리기 때문에 김은 퇴근하면 곧장 지하철을 탔다. 저녁이나 술 모두 동쪽 지역의 단골집에서 오래된 친구들과 해결했다. 독신으로 굳어진 김과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현, 이혼 후 연애 중인 장, 또다른 독신인 정이 주 멤버였다. 마흔살이 넘으면서 다들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짧게 이야기하고 희미하게나마 연결된 주변부의 소식에 대해서는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했다. 술에 취했을 때 옛날 이야기를 하는 건 여전했지만 과거에 할애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경우 김은 혼자서 술을 마셨다. 가끔 혼자 가기 좋은 단골 술집이 있었고 대개는 원룸의 식탁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취할 때까지 마셨다.
공장 사무실에서 퇴근 카드를 찍은 뒤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김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흙먼지 때문에 목 안에서 가래가 끓었고 머릿속은 필요 이상으로 가열되어 있었다. 시원한 맥주 한잔 생각이 간절했다. 현, 장, 정에게 차례로 연락하는 것도 귀찮고 동쪽에 도착할 때까지 참기가 싫어서 김은 웨스턴 바 간판이 걸린 술집에 들어갔다. 바에 앉아서 맥주 두 병을 마신 뒤 위스키를 시켰다.
술을 마시면서 김은 치매기를 보이기 시작하는 노모에 대해 생각했다. 노모는 근처 원룸으로 독립한 김의 끼니와 빨래, 재정 상태, 쓸쓸한 인생 같은 것을 끊임없이 걱정했다. 그걸 해결하려고 일주일에 한번씩 반찬거리를 싸들고 김의 원룸 문을 두드렸다. 통에 담고 다시 보자기로 꽁꽁 싼 걸 풀어놓으며 노모는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김치통은 맨 아래쪽에 넣어뒀으니 조금씩 꺼내 먹어라, 고기볶음은 냉동실에 둘 테니 먹기 전에 꺼내놨다가 한번 볶아서 먹어라, 빨래는 바로바로 내놔라, 술 좀 줄여라, 괜찮은 여자가 있는데 한번 만나볼 테냐…… 김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인상을 썼고,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하며 결국 성질을 냈다.
노모가 사흘 만에 원룸 문을 두드렸을 때 김은 이번 주는 정신없이 지나갔군, 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전주에 가져다준 걸 몇개 버린 뒤에야 새로운 반찬거리를 겨우 냉장고에 들여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노모가 다시 원룸 문을 두드렸을 때 김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부분은 아직 괜찮지만 날짜 감각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의사는 요양원을 권하면서도 그건 최후의 수단이 되는 쪽이 좋다고 했다. 요양원에 가면 노인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해하기 때문에 상태가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은 소개받은 간병인을 노모의 집에 보냈다. 그녀는 아침부터 노모가 잠들 때까지 옆에 붙어 있었다. 김 외에 다른 형제가 있었다면 노모나 김에게 힘이 되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역시 간병인 쪽이 마음 편했다. 간병인 비용은 예상보다 비쌌지만 흥정을 하면 홀대할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그걸 감당하기 위해 김은 도시개발의 기초라는 이상한 작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 편이 김치통을 들고 매일 문을 두드리는 노모를 보는 것보다 나았다.
김이 위스키를 한 잔 더 주문했을 때 지친 표정의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술집 분위기는 묘하게 침울했다. 혼자 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행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웃고 떠들지 않았다. 그들은 퇴근 후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낮 동안의 일들을 잊고 곯아떨어지기 위해 마시는 것 같았다. 시계를 자주 힐끗거렸고 술잔을 빠르게 비웠으며 술집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김에게 이 술집은 출퇴근 시간에 보는 지하철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한 줄의 의자에 촘촘하게 앉아 있는 일곱개의 무표정한 얼굴들, 각자의 손잡이에 의지해서 포개져 있는 좌석 대기자들, 다들 입을 다문 채 졸거나 음악을 듣고 있을 뿐인데도 어수선하고 고단한 분위기로 꽉 차 있던 열차 안. 술에 취하거나 술에 취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웨스턴 바의 출입문을 통해 내리고 탔다.
빈속에 급하게 마셔서 김은 좀 취했지만 걸음걸이가 망가지거나 혀가 꼬일 정도는 아니었다. 마신 술에 비해 너무 말짱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 한 손으로 계속 머리칼을 쥐어뜯었기 때문에 그의 몰골은 흉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거울 앞을 여러번 지나쳤는데도 김은 그걸 몰랐다. 그는 노모와 구덩이 생각에 깊이 침잠해 있었다.
김은 얼음만 남은 잔을 쳐다보았다. 구덩이를 파고 그게 메워지고 또 파는 일이 변함없이 반복되었다. 구덩이를 메우는 놈도 같은 삽으로 작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무로 된 손잡이 부분은 손에 익어서 제법 매끄러웠다. 그걸로 한 삽 한 삽 뜰 때마다 김은 천원, 이천원, 하고 셌다. 동쪽 지역의 사무실에서 회의자료와 보고서, 공문이 한장 한장 인쇄되어 나올 때도 그랬다. 그건 김이 작업을 견뎌내는 방식이었다.
월급은 정확히 제 날짜에 입금되었고 점심 메뉴는 이주 간격으로 반복되었다. 김은 건성으로 일했다. 구덩이를 파는 시간은 점차 단축되었다. 어차피 다시 메워질 거라고 생각하면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지 않고 대충 하는 쪽이 그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애초에 설렁설렁 일하도록 설계된 인간이 아니었다. 잘하지는 못해도 열심히 하는 게 그의 유일한 장점이자 무수한 단점 중 하나였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김은 도시개발에 관한 책도 읽고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형태의 변형이었다. 삼각형, 다이아몬드 모양, 별 모양의 구덩이를 떠올린 순간 김은 입술 끝을 움직여 조금 웃었다. 밑그림을 그리고 그대로 밑바닥까지 파는 일은 예상보다 어려웠지만 덕분에 모처럼 작업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메워질 일 같은 건 당분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출근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성과가 컸다.
남쪽 지역으로 파견근무를 간 동료는 동쪽에서 일할 때보다 여러모로 근무환경이 좋아졌다고 했다. 가족들도 좋아하고, 남쪽에 눌러살까 생각 중이야.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김은 잘됐다고 말해주었다. 솔직히 김은 가본 적 없는 남이나 북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다음 달 월급은 사흘치가 삭감되었다. 이유는 ‘근무태도 불량’이었다. 삭감된 월급명세서를 받고 나서 김은 다시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자신이 점차 한 자루의 삽이 돼가는 것 같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공터 전체에 구덩이를 팠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메워졌다.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뻐근한 건 괜찮았다. 다만 무용한 일을 반복해야 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 의미없는 일을 계획한 것은 누구며 지시하는 것은 누구고 내버려두고 감시하는 건 누구인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일이 사라져버릴까봐 두려웠다. 노모가 고요히 눈을 감을 때까지 김에겐 이 일이 필요했다.
얼음이 녹아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웨스턴 바를 나온 김은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김을 지나쳐 지하철역 쪽으로 갔다. 얼른 동쪽으로 돌아가서 곯아떨어지고 싶은 마음과 달리 김은 출근할 때처럼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조명과 가로등 불빛이 창고 앞과 공터를 환하게 비췄다. 낮에 김이 파놓은 구덩이가 삼분의 일쯤 메워져 있고 옆에 삽이 놓여 있었다. 김이 쓰던 것이었고 손잡이가 따뜻한 걸로 봐서 근무자는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창고 문 앞에는 김의 이름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반찬통을 들고 원룸 앞에 서 있던 노모를 봤을 때처럼 김은 말없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돌아온 근무자는 구덩이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김보다 젊은 건 확실하지만 왜소하고 패기도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남자는 삽이 없어진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일 끝내고 가서 전화할게. 당연히 보고 싶지.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 긴 통화를 마친 남자는 삽이 보이지 않자 창고에 가서 쓰레받기를 가지고 나왔다. 삽이 없어진 것 때문에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고 찾을 생각도 없는 듯했다.
시간을 확인한 남자는 묵묵히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남자의 몸 위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공터 안에는 흙을 푸는 소리와 남자의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구덩이 안으로 흙이 떨어질 때마다 김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남자가 정신없이 움직일수록 김은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고민, 업무에 대한 회의, 때려치우고 싶은 욕구가 저 남자의 삽질에서 나오고 있었다. 김은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뽑힌 머리카락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바람이 한차례 공터를 휩쓸고 지나가자 남자의 주변에 흙먼지가 일었다. 남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비볐다. 김은 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술기운은 적당했다. 삽날로 남자의 뒷목을 찍자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눈은 깊게 파놓은 구덩이처럼 어둡고 축축했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이 달싹거렸지만 남자는 곧 다 메워지지 않은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거기서 벗어나려는 듯 허우적거렸지만 김은 그 위에 흙을 덮었다.
6
동쪽 지역에는 모처럼 비가 내렸지만 서쪽 지역은 여전히 가물고 하늘이 탁했다. 서쪽 지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김은 굳은살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삽을 쥐기에 좋은 모양새였다.
주말마다 김은 양갱이나 사탕 같은 걸 사가지고 노모에게 들렀다. 노모는 간병인을 엄마라고 불렀고 김을 알아봤다가 못 알아봤다가 했다. 김이라는 걸 알고 나면 옷 꼴이 그게 뭐냐, 당장 빨아줄 테니 벗어라, 성화를 부렸고, 반찬 싸줄 테니 가져가서 챙겨 먹어라, 얼굴이 그게 뭐냐, 하며 빈 반찬통을 꺼냈다. 그러다 다시 김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누구슈? 하고 물었고 우리 아들 못 봤수? 그놈이 배가 고플 텐데, 하며 먼 곳을 바라봤다.
간병인은 월급을 좀더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가 말한 액수는 좀,보다는 꽤,에 가까웠다. 그래도 요양원보다는 나을 것 같아 김은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구덩이는 일주일째 메워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보면 공터는 군데군데 동그랗게 팬 치즈 조각처럼 보일 것 같았다. 구덩이 사이의 경계도 점차 좁아졌다. 김은 구덩이들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남자가 묻힌 곳에는 작은 돌을 세워 표시해두었다. 모든 구덩이를 지름이 같게 팠고 퍼낸 흙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그동안 파고 메우기를 반복한 공터의 흙은 부드러워서 작업하기에 편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의욕적이고 성실했다. 월급에는 특별 보너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이상 팔 곳이 없어지자 김은 구덩이를 하나씩 메워나갔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평평해진 공터의 흙은 전체적으로 황토색에 가까웠다.
김은 편의점에서 산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비닐 포장을 뜯고 나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천천히 피웠다. 사탕과 과자, 쥐포 따위를 대신 물고 다니느라 바지 치수까지 늘려가며 끊은 담배였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공터에는 누군가가 오게 될 것이다. 그게 흡연 욕구를 불러일으킨 건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도 예측 가능했다. 그건 바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김이 두가지 일을 다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김은 자신이 판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그의 키만한 길이에 사면이 반듯한 직사각형이었다. 그동안 파온 구덩이 중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판 것이기도 했다. 김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바라보며 담배를 계속 피웠다. 머릿속에서는 발생 가능한 몇가지 상황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선택해서는 안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흙먼지가 공터 안을 배회했다. 김은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삽을 다시 쥐었다. 삽을 팽개치는 건 좀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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