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의 기업화, 학문의 시장화
- 박영일
(중략)
한국 대학의 기업화 실태
한국의 대학은 미국 학제를 모델로 삼아 사립대학으로 출범했고 사립대학 의존도는 미국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학풍도 유럽의 철학중심의 비판적이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내면적 성찰 대신에 미국의 통계학적 접근방법과 실용주의 학풍의 영향을 받아 교양지식마저 탈가치적이고 가치중립적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미국과 같이 대학의 기업화와 학문의 시장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거기에 재벌지배구조와 정경유착이라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경제지상주의, 경쟁 중심의 교육정책을 감안할 때 한국 대학은 미국을 뺨칠 정도로 기업화·상업화될 소지가 농후하다. 최근 재벌의 대학 ‘인수’ 사례와 인수 후 이른바 ‘구조개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미국이 학문의 시장화라면, 한국은 대학의 기업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할 것이다.
우선 몇 가지 통계를 살펴보자. 사립대학 의존도는 미국보다 훨씬 높고, 최근에 더욱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1960년대 이후 대학생 수 증가의 80%를 주립대학이 담당하여 사립대 비중이 감소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은 80% 이상을 사립대학이 담당했다. 한국의 사립대 비중은 학생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75.2%에 이른다. 미국은 32%에 불과하다. 더구나 최근에 국공립 대학의 통·폐합과 정원 감축으로 사립대의 비중은 더욱 커지고 있다. 같은 사립대라고 해도 한미 간에는 총장 선출을 포함한 대학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 구성방식이나 운영방식에서 천양지차가 난다. 한국의 경우 재단이사장(설립자 또는 그 가족)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대학의 자치와 자율은 철저히 무시된다. 총장은 대학구성원인 교수, 학생, 교직원이 아니라 임명권자인 이사장에게만 책임을 지면 그만이다.
한편 대학재정은 대부분 학생등록금에 의존한다. 정부의 대학교육비 부담비율은 OECD 제국에서 가장 낮다. 정부가 거의 전액을 부담하는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는 물론, 독일(85%)과 프랑스(82%)에서도 정부의 부담비율이 높다. 유럽 제국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미국의 경우도 37%, 일본도 33%에 달한다. 반면 한국은 정부의 부담비율은 겨우 22.3%이고 77.7%가 민간부담이다. 재단전입이나 기부행위가 미미하기 때문에 민간부담의 거의 전부를 등록금에 의존한다고 하겠다. 학생이 부담하는 등록금은 사실상 그들이 받는 교육 서비스에 대한 대가(가격)이기 때문에 한국의 대학은 철저하게 수익자 부담원칙이라는 시장원리에 입각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의 내실은 뒷전이다.
한국 대학의 기업화는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재단의 기업식 대학운영이다. 사립대학의 경우 교육의 공공성, 대학의 자주성, 자율성은 커녕 대학 운영과 재정의 투명성조차 확보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는 최소한 앞에서 살펴본 미국식 영리대학은 없다.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학교법인은 영리사업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법조문상 규정에 불과하고 재정의 투명성도 보장돼 있지 않다. 실제로는 모든 사립대학이 미국의 영리대학과 비슷하다. 중앙대 재단의 이사장 박용성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인수 이전인 2004년 서울대 초청강연회에서 “대학이 전인교육의 장, 학문의 전당이란 헛소리는 이미 옛이야기다. 이제는 ‘직업교육소’ 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에서 인용한 미국의 영리대학 피닉스 대학의 설립자의 말이나 다름없다. 국공립 대학의 경우에도 ‘재단’이 없다는 것 외에는 학생 등록금 의존도가 높다. 국립대의 법인화 문제도 기본적으로 시장원리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사학재단은 미국의 사립대처럼 경영건전화를 위해 시장원리를 도입한 것이 아니다. 법이 정하는 전입금을 내놓는 재단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하면서 각종 편법, 불법을 동원하여 학교재산을 유용하거나 횡령한다. 원래 그들은 학교재단이 공적 교육목표를 위한 공공재산이 아니라 ‘재단이사장’의 사유재산으로 여긴다. 재벌이나 기업관계자가 학교재단을 지배하는 경우에는 대학을 모 기업의 자회사 정도로 인식하고 효율화와 생산성이라는 기업논리로 운영하고 있다.
또한 사학재단은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정부의 규제 감독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족벌경영·인사비리·교권탄압 등 각종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들 불법·비리행위는 주로 대학 내부의 교직원이 신분의 위협을 무릅쓰고 진정하거나 고발하여 드러난다. 미미하지만, 사립대에 대한 국고지원이 증가하기 시작한 최근에는 대정부 로비를 위해 전직 관료를 총·학장으로 임명하는 사립대가 많아지고 있다.
대학의 캠퍼스는 상가로 변하고 있다. 학생편의시설이 휘황찬란한 쇼핑몰로 변모되고 기숙사는 숙박사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기업으로부터 기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대학건물과 강의실은 해당기업을 홍보하는 전시장이 되고 있다. 이른바 명문대학의 캠퍼스를 방문해보라. 기업의 자금으로 지어진 건물, 강의실, 연구소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고급 브랜드가 즐비한 호화판 상가가 조성되고 있다. 대학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사회적 신뢰와 평판이 돈에 팔리고 있다. 대학의 학문적 업적을 출간하는 출판업무도 사업화하고 있다.
학문의 시장화의 두 번째 양상은 연구의 상업화다. 미국에서 대학과 기업의 관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켜 학문의 시장화를 야기한 ‘베이-돌 법을 모방해 한국도 1995년에 ‘산업교육진흥법’을 제정한 후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2003년에 ‘산업교육진흥및산학협력촉진에관한법률’로 변경했다. 동법을 근거로 각 대학은 산학협력단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학교기업을 설립할 수 있게 했다. 교수의 연구실은 사업장, 교수는 기업 임원, 교수가 지도하는 학생은 기업의 직원이 된다. 교수는 이 기업을 위해 연구하며 연구결과는 이 기업의 수익 자산이 된다.
폐단은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미국과 비교하여 상업성을 지닌 연구개발능력이 떨어져 주로 이권추구행태(rent-seeking)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학연구의 공공성과 독립성이 현저하게 훼손되었다. 교수들이 당장에 연구결과를 상품화하여 돈을 벌거나 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연구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산학협력프로젝트를 따오기 위해 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로비활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또한 학문연구와 수익사업 사이에 경계가 없어지게 되어 일반사회나 대중이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학교수들이 기업의 신상품이나 신기술을 소개하는 논평기사나 학술논문에 이름을 올리는 사례도 많아졌다.
문제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대학에는 실용화를 위한 응용연구를 뒷받침할 기초연구분야가 탄탄하지 못하고, 상품화할 수 있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도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대학이 엄청난 시간·노력·자금을 쏟고는 있지만 실망스럽게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대학의 지출규모만 커졌다.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돈을 벌어들인 연구는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정부지원을 얻거나 외부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고 학교자원(등록금)만 낭비하는 상황이다. 대학이 상품화와 시장화를 내세워 산학협력과 기술혁신을 자신의 존립근거로 정당화할수록 대학사회가 이권추구사회로 추락하고 성실한 교수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대신에 ‘정치교수’가 활개를 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대학은 당장의 유용성보다는 특정한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은 ‘가상(blue sky)분야’, 또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실험, 그리고 현재 성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 먼 훗날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될 기초연구를 수행해왔다. 역사적으로도 시장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닌 대학이 가장 중요한,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발견과 발명을 이끌어왔다. 대학은 산업기술진보의 바탕이 되는 기초학문을 연구하는 지식·정보의 풀(knowledge and information commons)이다. 기업가들은 확실한 사업 전망이 없거나 당장에 이익을 낼 수 없는 연구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학술과 상업의 경계를 허물어 교수들에게 기업가처럼 학문적 성취를 배타적으로 소유하여 이익추구를 강요할 때, 대학이 전통적인 역할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대학은 시장원리, 수익성만을 추구하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공적 기관이다. 결국 과학기술발전을 위해서도 대학과 기업을 각각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분명한 경계를 정하고,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분업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대학교육의 사유재화 현상이다. 교수의 연구가 중요시됨으로써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인 학생 교육이나 지도는 부차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요즈음 교수 사회에 “교육은 잊어라. 교육에 시간을 들이지 마라. 시간 낭비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대학에서 인정받는 교수는 연구비를 많이 따오고 연구결과를 상품화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교수다. 대학은 상업적 연구가 가능한 실용학문분야만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면서 그런 분야에 교수진도 늘리고 교수의 강의 부담을 줄여주면서 연구를 독려한다. 연구시설 확충이나 최신 장비 구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 반면 대학교육의 중심이 되는 교양분야에는 교원은 줄이고 비정규직으로 대체하고 있다. 교양과목의 경우 한 번에 수백 명을 모아 대단위강의를 하거나 e-class로 대체하고 있다. 최근에는 각 대학이 성공한 기업인 초청 강의나 현장실습과정을 교과과정으로 인정하고 있다.
교육의 내용도 취업을 위한 테크놀로지 교육으로 변질되고 있다. 극단적인 상업화는 2010년 3월 학생이 대학거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고 지적하고는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하고 대학을 거부했다. 교수도 학생도 대학인 스스로가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학원으로 전락했다고 한탄한다. 더구나 대학은 자격증을 따는 데 드는 기간은 가장 길고, 비용은 가장 비싼 취업학원이라고 빈정거린다. 전공을 가리지 않고 모든 학생이 외국어, 학점관리, 공모전 입상과 봉사활동, 자격증 등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여 스펙 쌓는데 정신이 없다.
더구나 급격하게 증가한 재정부담은 등록금 인상으로 학생들의 부담이 되었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비용도 거의 모두 학생들이 부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부모와 학생들이 현실적으로 이해타산을 하고 취업 경쟁에 몰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학생들의 영감과 꿈을 빼앗고 출세지상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만을 낳고 있다.
그렇다고 편협한 직업교육이 학생들의 취업을 돕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사회의 인력수요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생활 패턴, 산업 사이클과 특정 기술의 유용성이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 학생들을 위한 진정한 직업교육은 단순한 직능교육만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사회현상과 자연현상 전반의 기본원리를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성과 지성을 연마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제공하는 일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사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치는 일에 당황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역시 철학적이고 반성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교양지식이 요구된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만이 아닌, 언제 어디서 소용될지 모르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당장 취업만을 중시하는 현재의 대학교육은 문제가 많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학이 돈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내외적 요인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대학사회에 신자유주의 경쟁논리를 주입하여 대학 문화를 옥죄고 있는 평가제도(이명박 정부가 시행하는 대학정보공시제도 포함)에 있다. 대학평가제도는 건전한 동기와 목표, 기준에 의해 공정하게 운영된다면 대학의 사회적 소임을 다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문제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기준에 의해 평가하는가에 있다.
한국의 경우, 대학평가의 주체가 확고한 자기 논리와 막강한 대중동원력을 지닌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라는 언론기관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조중동’이란 상징어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양 신문은 한국사회에 건전한 여론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대표적인 족벌언론과 재벌언론으로서 신자유주의 담론을 유포시키고 기득권세력에 봉사하는 주식회사 기업이다. 그들은 무한경쟁을 강조하면서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사회분열을 조장하면서 평가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대학체제와 획일적인 서열화를 고착시키고 있다. 또한 학부모와 학생의 학벌 추구행위를 ‘합리적 선택’으로 포장하여 학벌주의의 폐해를 호도하고 학벌주의 타파 노력에 찬물을 끼얹어왔다.
그들의 평가기준은 오로지 무한경쟁을 통한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한 기업용 잣대다. 그것도 1년 단위의 정량적 평가에 의한 서열 매김이다. 평가기준에서 대학의 자율과 학문의 공공성 확보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학문 발전을 뒷받침할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면 평가기준에 학문이 지향해야 할 인간성 도야, 사회정의의 기여, 창의성 신장 등 대학이 구현해야 할 중요한 가치와 이념, 대학의 공공성과 자율성, 재정의 투명성 등을 확보하기 위한 대학의 민주적 운영과 책임에 대한 평가항목은 없다. 대학정상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대학의 비리와 부정을 예방할 재정·행정 운영의 책임성, 대학의 의사결정과 운영에 관한 교직원, 학생 등 구성원의 참여 확대와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 확립 등을 외면하고 있다.
대학의 경쟁체제는 대학 간 경쟁, 교수 간 경쟁, 학생 간 경쟁체제로 구조화되어 있다. 최상위에 대학서열화 경쟁이 있다. 서열경쟁에는 모든 대학구성원이 동원되고 있다. 교수 간 경쟁에서는 강의보다는 연구실적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학생 간 경쟁은 성적과 스펙을 바탕으로 한 취업 경쟁이다. 교수와 학생은 대학 간 경쟁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서열이 우위에 있어야 연구 프로젝트를 따오고 연구비를 끌어오기가 쉽고 자금을 모을 수 있으며 학생들의 취업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평가는 크게 연구, 교육, 국제화로 나뉜다.
연구업적 평가는 기본적으로 이공계기준이고 미국 규범(American standard)이며, 논문 편수와 연구비 수주액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질적인 배려는 학문의 특수성이나 사회적 특성을 무시하고 A&HCI, SSCI, SCI 등 국제학술지, 한국연구재단 등재지 등등으로 계층화돼 있다. 국제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 월등하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한국의 문학, 역사, 문화 법제 등 전적으로 한국적인 경우에도 영어 논문을 써야 할 형편이다.
이리하여 대학에서 연구다운 연구는 사라졌고, 논문 편수만 늘어났다는 자조와 탄식을 자아내고 있다. 더구나 대학 당국은 각종 평가에 대비하고 학교 서열을 끌어올리기 위해 더 많은 논문을 쓰라고 강요한다. 논문을 많이 쓰면 승진, 포상이 주어진다. 논문 편수를 늘리려고 누구도 참조하지도, 보지도 않은 논문이 학술지를 도배하고, 석사학위 수준 논문에 3~4명의 교수 이름이 오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교수들은 깊이 사색하고 긴 호흡을 가지고 연구나 저술활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논문을 양산하는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비중이 가장 높은 항목이 취업률이다. 취업률을 대학평가의 핵심지표로 삼는 것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최소 4년이란 시간과 수천 만 원의 돈을 들여 대학을 나왔는데 취업이 안 된다면 본인과 가족에게는 큰 고통이고 사회적으로도 큰 낭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업률을 핵심지표로 삼는 것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대졸자 취업난은 기본적으로 학생 측 요인보다는 사회 전체의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요 측면에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과도하게 자동화하고 해외로 진출하여 고용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그것도 하청과 출장근무로 비정규직을 늘려 일자리의 양극화를 꾀한다. 따라서 취업난 해결은 경제력 집중과 재벌지배체제와 같은 경제구조개혁과 함께 정부의 거시경제정책, 산업정책, 노동시장정책, 교육정책, 사회복지정책, 과학기술정책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개별 대학이나 학생이 해결하기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
더구나 취업률의 대학별 격차는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리고 대학서열화와 학벌사회는 기업(자본)의 필요와 이들을 만족시키는 제도와 정책을 국가경쟁력으로 포장하여 국민 모두에게 이로운 것처럼 선전하는 기득권층과 평가를 하는 바로 그 언론기관이다. 기업은 학벌 인맥을 업무에 활용할 수 있고, 학벌 외엔 적절한 선발기준이 없다는 논리로 대학 서열에 의한 채용관행을 강화하면서 학벌주의를 더욱 견고하게 고착시킨다. 그들은 채용을 심사하기 위해 학교서열 이외의 방법을 개발하는 데에 비용과 시간을 투자할 의사가 없으며, 신규 직원의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훈련에도 전혀 투자하지 않는다. 취업 준비생들에게 실무수행에 필요한 훈련비용을 부담시켜 그 성과를 가로챌 뿐만 아니라, 대학의 정상적인 교육기능마저 왜곡시키고 있다. 한국과 같은 학벌사회에서는 대학과정의 내용이나 교육의 질과는 상관없이 상위서열 대학의 취업률이 높게 마련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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