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이야기
이야기에 깃든 복
이야기를 한다는 것
옛날 얘길 그걸 듣구서는 누귀한테 가 얘길 안 하면 얘기가 굶어 죽어. 그러면 얘기가 굶어 죽는다구. 그러, 괜히 살煞이 되면 안 돼. 그러니까 얘길 해요. 오늘 저녁에 들은 거 아무 데라도 댕기면서 얘기를 해야 얘기가 자꾸 빠져나가면서 얻어먹구 살잖아.
어느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꺼낸 말이다. 강원도 횡성군 학담리의 목수희 할머니. 할머니가 펼쳐 낸 이야기는 바로 ‘이야기 주머니’다.《한국구비문학대계》 2-6,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설화, ‘이야기 주머니’
옛날에 어떤 도령이 이야기 세 마디를 듣고 와서는 그 이야기들을 주머니 속에 꼭꼭 가둬 놓고서 아무한테도 내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 배가 고파 굶어 죽게 된 이야기들은 참다못해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도령이 장가드는 날, 이야기들은 각기 독이 깃든 꽃과 딸기, 날카로운 화살로 변해서 도령을 해치려 했다. 때마침 이야기들의 모의를 살짝 엿들은 이가 있었다. 도령이 부리는 종이었다. 종은 자청해서 도령의 신행길에 따라나선 뒤 이야기들의 연이은 공격을 차례로 물리쳐 도령을 구했다. 죽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도령은 이후 종을 은인으로 떠받들었다고 한다.
꽤나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이야기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잘 말해 준다. 이야기는 해야 맛이다. 이야기를 듣고서 전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사邪가 되고 살煞이 되어 해를 끼친다. 꺼낸 이야기가 해가 되는 건 몰라도 안 꺼낸 이야기가 어찌 해가 될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만 따져 보면 이치가 꼭 그러하다.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는 건 세상과 소통하기를 그친다는 뜻이다. 스스로 고립되어 외롭고 우울하고 답답해지게 될 터이니 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은 ‘이야기를 가둔다’고 했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나를 가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생명이며, 친구이다. 목수희 할머니의 구연에서 내 마음을 쿡 찌른 대목이 무엇인가 하면 옛날 얘기를 전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굶어서 죽는다’는 말이었다. 이야기가 굶어 죽다니! 그건 곧 이야기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살아 있으니 먹을 양식이 필요하다. 그 양식이 무언가 하면 바로 ‘들려주고 듣는 일’이다. 물건은 쓰면 닳는데, 이야기는 쓰면 살아난다. 내가 다른 이한테 들려주고 그가 또 다른 이한테 들려주어 입에서 입으로 옮겨 가다 보면 이야기는 어느새 뽀얗게 생명력이 피어오른다.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우리들의 마음에도 생명력이 피어오른다.
위 이야기에서 도령을 구한 사람은 종이었다. 그가 그렇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의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관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으니 이야기의 말을 듣게 되었고 그 감춰진 내막을 알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 덕에 도령의 목숨을 구한 저 사람은 나서서 그 이야기들을 구원했을 것이다. 가두어졌던 이야기들을 꺼내어 이리 전하고 저리 전해서 그들의 허기를 달래고 즐겁게 세상을 나돌게 했을 것이다. 어떻든 저 사람은 이렇게 한 편의 그럴싸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사람들 마음속에 깃들어 기나긴 생명을 얻은 터다. 명색은 미천한 종이지만 실상은 당당한 ‘주인’으로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그 무엇, 이야기.
이야기를 좋아하면 어떻게 되나
옛말에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두 말을 연결시키면? “이야기를 하면 복이 온다!”
어찌 보면 말장난 같지만, 나는 그 이치를 그대로 믿는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실제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삶에는 천복이 깃든다.
옛날 옛날에 할멈과 영감이 살고 있었다. 긴 밤에 잠은 안 오니 얼마나 무료할까. 할멈이 영감한테 재촉한다. “영감, 그러지 말고 이야기 하나 해 주!” “에궁, 뭔 이야기를 하나? 내 이야기보따리 벌써 다 떨어진걸!” 아무리 채근해도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영감.
다음 날 할멈은 아침 일찍 일어나 따끈따끈 맛난 떡을 삶아서 한 그릇 가득 챙겨 주면서 영감한테 말한다. “영감, 이 떡 가지고 나가서 이야기 좀 사 오슈!” “어허, 어딜 가서 이야기를 사나?” 하여튼 쭐레쭐레 길을 나선 영감.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야기를 사려고 해도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 없다. 그때 들에서 일하던 농사꾼 하나가 어찌나 배가 고팠는지 일단 떡을 먹고 보는 것이었다. “거, 내가 이야기 팔리다!” 그렇게 떡은 먹었는데 이야기가 없으니 이를 어쩌나. 그때 들을 바라보니 웬 황새 하나가 논에서 먹이를 찾아서 엉금엉금 기어 온다. “자, 이야기 시작이오. 엉금엉금 기어 온다!” “옳거니! 엉금엉금 기어 온다!” 농부가 또 보니 황새가 우렁이를 찾아서 둘레둘레 주변을 살핀다. “둘레둘레 살펴본다!” “둘레둘레 살펴본다!” 이번엔 우렁이를 발견해서 딱지를 똑 뗀다. “딱지를 똑 떼는구나!” “딱지를 똑 떼는구나!” 황새가 씰룩하고 우렁이 속을 삼키니까, “저놈이 씰룩하는구나!” “저놈이 씰룩하는구나!” 황새가 나가는 걸 보고 “저놈이 이제 나가는구나!” “저놈이 이제 나가는구나!” 농부가 시침을 뚝 떼면서, “자, 이야기 다 됐소.”
고생 끝에 이야기를 구한 영감이 집에 들어오자 할멈이 묻는다. “이야기 사 왔소?” “아무렴, 사 왔지!” “그럼 들려주오.” “아, 이야기는 밤중에 해야 맛이라구.” 그렇게 오순도순 저녁을 해 먹고 이부자리 속에 나란히 누운 영감과 할멈. “자, 이야기 시작해 보우.” “자, 그럼 시작이오.” 신이 오른 영감이 호기롭게 목소리 높여 이야기를 꺼내는데, “엉금엉금 기어 온다!” 할멈이 받아서, “엉금엉금 기어 온다!” 마침 그때 그 집에 도둑이 들어서 집으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방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는 그만 깜짝! “어이쿠, 이거 뭐지?” 둘레둘레 주변을 살필 적에 영감이 이어서 하는 얘기 “둘레둘레 살펴본다!” “둘레둘레 살펴본다!” 도둑이 깜짝 놀랐지만 설마 싶어서 솥뚜껑을 여는데, “딱지를 뚝 떼는구나!” “딱지를 뚝 떼는구나!” 도둑이 깜짝 놀라 씰룩하니 “저놈이 씰룩하는구나!” “씰룩하는구나!” 도둑이 도둑질이고 뭐고 깜짝 놀라서 문밖으로 향하니까 “저놈이 이제 나가는구나!” “저놈이 이제 나가는구나!” 도둑이 그만, ‘아이쿠, 이 집에 신인이 사는구나!’ 헐레벌떡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옛날부터 널리 전해져 왔고 근래에 이야기 책으로도 거듭 만들어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훨훨 간다’ 같은 제목으로 유명한데, ‘이야기로 도둑 쫓은 사람’이 일반적인 명칭이다. 이야기로 도둑을 쫓았으니 이야기를 통해 복을 받은 사연을 전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고 나면 좀 싱겁다. 이야기는 해야 맛이라지만, 이야기에 담긴 뜻을 이리저리 헤아려 보는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그래 좀 더 따져 보기로 한다.
저 노부부, 어떻게든 이야기를 구해 보려고 부러 떡을 한 그릇 준비한다. 그 떡을 주고서 구한 이야기란 게 참으로 허망한 것이었다. “엉금엉금 기어 온다”라니! 그 허망한 이야기 하나를 위해 나름 큰 투자를 한 터, 이런 식으로 살기로 하면 아닌 게 아니라 가난해지기 십상이다. 따져 보자면 꼭 떡을 갖다 바치거나 돈을 줘야만 손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얻어 듣겠다고 오가면서 들인 시간과 노력까지 계산하면 적자도 상당한 적자가 될 것이다. 그 시간에 땅이라도 한 번 더 파면 돈이 한 푼이라도 나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적자가 아니었다. 허망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 이야기로 인해 집에 든 도둑을 쫓았으니 결과적으로 더 큰 손실을 막아 흑자가 된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재미있는 함정이 있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도둑이 놀라서 도망갔다는 것을 알지만 정작 영감과 할멈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 그러니까 결국 그들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던 셈이고 따로 얻은 것이 없는 셈이다, 하고 말한다면 그건 이 이야기의 묘리를 놓치는 일이 된다. 이 이야기의 묘미가 무엇인가 하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을 얻는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도둑이 들었다가 제 풀에 도망가 사라졌으니 저 부부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미 복을 받은 상황이다. 어찌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만 복이겠는가.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스며드는 복이 진짜 복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본다. 어찌 복면을 쓰고서 기어 들어오는 도둑이라야만 도둑일까. 여기서 도둑은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상징인가 하면, 나의 소중한 것을 앗아 가는 나쁜 기운들의 상징. 다시 말하면 갖가지 형태의 불안이나 걱정, 우울, 상실감, 짜증 따위가 그것이다. 그들이 스며 들어오면 삶의 평화와 행복이 어느새 솔솔 사라져 없어지는 터이니 그야말로 인생의 큰 도둑이라 할 수 있다. 그 도둑을 잡는 것이, 아니 스스로 제발 저려서 도망가게 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마음을 열고서 주고받는 즐거운 이야기의 힘이다.
위 이야기에는 재미있는 후일담이 덧붙곤 한다.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날 밤, 영감과 할미는 오랜만에 이부자리 속에서 회포를 풀었다. 그다음 날 도둑이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해서 과일 장수로 가장한 채 그 집에 찾아들었다. 그런데 가지고 간 물건이 좀 시원치 않았던지 자그마한 배 두 개가 서로 붙은 게 있었다. 그 배를 보고서 할멈이 영감한테 소리쳤다. “영감, 저놈이 꼭 어제 그놈 같소!” 그 말에 도둑이 깜짝 놀라서 ‘아이쿠야, 이거 알아도 정말 무섭게 아는구나. 여기 있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 가지고 온 과일 다 내버리고서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영감과 할멈. 할멈이 한 말은 그 배의 생김새가 지난밤 영감의 불알 모양과 꼭 같다는 것이었는데 도둑이 제 발이 저려 도망한 것이었다.
그냥 재미로 갖다 붙인 후일담이라 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은즉 무엇이 통하는가 하면 정情이 통한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은근히 서로를 끌어당겨 한 몸이 되도록 하니 이거야말로 진짜 큰 복이라 할 수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도둑을 쫓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 해당하는 복이다. 영감과 할미가 덤으로 과일까지 공짜로 얻게 되었다는 것은 이야기의 애교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 아니 그럴까. 나쁜 기운 훌쩍 사라지고 정이 솔솔 통하면 생겨나는 것이 어디 과일뿐이겠는가 말이다. 상큼하고 달콤한 일 가지가지!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결론. 이야기는 좋은 양식이다.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말, 곧이곧대로 들을 일이 아니다. 그걸 진짜로 ‘가난해진다’고 이해하는 이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건 그만큼 이야기가 좋다는 말이다. 다른 게 필요 없을 정도로 마음이 충만해진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부자가 된다. 금전 따위로 헤아릴 수 없는 진짜 부자가.
삶을 위한 저항
아기장수의 죽음, 그 너머의 의미
‘아기장수’와의 인연
내가 아기장수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을까? 그것은 대학에 들어가고 국문과에 진입한 뒤의 일이었다. 어쩌면 4학년 봄 학기 ‘구비문학론’ 수업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그리 늦었나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 그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구비문학 쪽에 문외한이었다. 현대문학을 전공으로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구비문학이라는 용어부터가 낯선 상황이었다. 어릴 적 듣던 설화나 민요 같은 것이 국문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때 늦은 신기한 발견이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둔 채로 학교를 쉬고서 출판사에서 일하던 중에 나는 구비문학을 공부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구구한 과정은 생략하거니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린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였다. 그 뒤 학교에 돌아와 졸업 논문을 준비할 때 내가 우선적으로 집어 든 이야기가 바로 ‘아기장수 설화’였다. 논문 제목이 아마 ‘아기장수 설화와 꾀쟁이 하인 설화의 비교 고찰’이었을 것이다. 둘 다 ‘저항’을 화두로 한 이야기이면서도 서로 이야기 색깔이 다르다는 데 주목했던 것 같다.
그 뒤 대학원에 들어와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학회에 선보인 첫 연구의 대상으로 다시 아기장수 설화를 선택했다. 박사 과정 재학 중에 한국고전문학연구회(현 한국고전문학회)의 연구 발표를 떠맡고서 ‘아기장수 설화와 진인출현설의 관계’를 주제로 삼았다. 아기장수 설화를 단독으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작업의 핵심은 이 설화의 의미 구조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있었다. 발표 논문은 학회 발표를 거친 뒤 같은 제목으로 《고전문학연구》 5집에 실렸거니와, 내가 전문 학술지에 수록한 최초의 연구 논문이었다.
아기장수 설화에 관한 연구는 나한테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거기에는 설화를 보는 내 나름의 중요한 시각이 반영돼 있다. 문면에 직접 말해진 것 너머에 있는 숨은 의미를 찾는 관점이 그것이다. 나는 그 관점을 이후의 논문들에도 널리 적용해 왔다. 나의 박사 학위 논문은 역사 인물에 관한 설화를 분석한 것이었는데, 텍스트 너머에서 실현되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설화 공부의 이력을 늘어놓은 셈이 됐는데, 요점은 간단하다. 아기장수 설화가 내 인생 여정의 한 축이 되는 이야기라는 것. 어떤가 하면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나의 삶에서 아기장수가 갖는 의미는 학문적인 것 이상이다. 그것은 불의나 폭력 앞에 무기력한 나의 심약과 비겁을 일깨우는 날카로운 침針 또는 창槍과 같은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나는 그로부터 도망갈 수 없음을 안다. 그리하면 나의 삶이 비굴하고 하찮은 것이 될 터이므로.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대학 2학년이나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소설이 아닌 희곡이 사람을 한가득 전율시킬 수 있다는 것을 놀랍게 깨닫도록 한 작품이 있었다.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나는 그 뒤에도 이만큼 강한 인상을 주는 희곡과 만난 기억이 없다.
아하, 이제 생각이 난다. 어느 현대문학 수업인가에서 ‘최인훈론’에 대한 주제 발표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때 최인훈 작가의 작품들을 두루 찾아 읽는 과정에서 이 작품과 만났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기장수 설화와 대면한 것도 바로 이 작품을 통해서인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었을 때의 강렬한 인상이 남아서 뒷날 구비문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다음에 ‘아기장수 설화’를 찾아보게 되었던 게다.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학창 시절의 기억.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나한테 전해 준 것은 놀라움과 공포였다. 이제 작품을 옆에 두지 않은 상태에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형상과 느낌을 서술해 본다.
아주 가난한 시골집이었다. 부부가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말을 더듬는 사람. 순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그 아내 또한 나쁜 일이라곤 생각도 못 할 착하기 그지없는 여인.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기쁨도 잠시, 아이가 날개로 날아다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장수가 났구나!’ 경악하는 부부. 그 순간부터 깊은 고민이 시작된다. 장수가 났다는 걸 알면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죽일 텐데, 온 마을이 난리가 날 텐데 이를 어쩌나.
부부가 마을 사람들과 이 일을 상의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랬던 것도 같다. 어떻든 부부는 깊고 깊은 고민 끝에 아기를 하늘나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다른 이의 손을 거치지 못하게 부모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 아기를 잠들게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아기를 누르면서 그 아버지가 아기보다 더 큰 고통으로 죽도록 괴로워했던 것 같다. 마침내 잠이 든 아기…….
그 뒤에 아주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매우 환상적으로 채색된 아기의 승천 과정이다. 부모에 의해 잠든 아기는 용마인가를 타고서 하늘로 훨훨 날아간다. 부모는 고통 없는 곳으로 어서 가서 편히 쉬라며 손을 흔든다. 마을 사람들 다 함께 모여 아기장수를 떠나보내며 손을 흔든다. ‘어서 가거라. 훠어이 훠이.’
아이가 장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처절한 두려움과 번민에 휩싸이던 부부의 모습. 그 순박한 부부의 더할 나위 없는 공포는 책을 읽는 나한테도 강하게 전달되었다. 세상에! 저들이 저렇게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장수가 태어나는 일이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역적이 될 수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아기장수를 샅샅이 뒤져서 모조리 잡아 죽인다는 권력의 위력. 그 힘이 닥칠 수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극도의 전율에 휩싸이는 한 마을…….
제 아기를 제 손으로 죽이던 저 부모의 미칠 듯한 고통의 형상이 지금도 생생하다. 말을 더듬는 모습 때문에, 부부가 너무나 순박하다는 사실 때문에 몇 배로 더 짙게 다가오던 고통의 느낌. 그 고통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으니, 책을 읽던 그 당시 현실을 이루고 있었던 5공화국의 서슬 퍼런 권력은 전율하도록 난폭했던 터였다.
그나마 이 작품에서 위안이 되는 것은 부모의 바람대로 아기장수가 용마를 타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장면에 이르러 독자들은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는 극단의 선택이 아기를 위하는 최선의 길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에서 아이의 부모와 마을 사람들의 눈가에 두루 이슬이 맺혔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책을 읽던 나의 눈가에도.
슬픔의 격정을 거쳐 마음의 정화catharsis를 가져오는 전형적인 비극. 그 극적 효과와 설득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은 세상에 잘못 태어난 아기장수와 그 아기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부모를 위한 한 판의 씻김굿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는 아기장수 설화를 통해 무자비한 권력 아래 신음하고 있었던 민중의 생활상을 드러내면서 그들의 원한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과거는 물론이고 작품이 쓰이고 읽히는 ‘현재’를 염두에 두면서.
언제 어디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 한구석에 이 작품의 이야기 해석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서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과연 아기장수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부모가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인 것은 과연 어쩔 수 없는 필연적 선택이었을까?
아기장수가 무참하게 죽은 것이 필연이었다고 하는 것은 실패와 좌절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생각되었다. 그것이 저 설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닐 것만 같았다. 이윽고 설화 공부에 나서서 아기장수 전설의 각편(version; 특정 설화의 이본들을 ‘각편’이라 일컫는다)들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러한 의문은 확신으로 변해 갔다. 어느 날, 나는 아기장수 설화에 대한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식 해석과 결별을 고했다. 그러한 해석의 설득력과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이 설화의 본질적인 의미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설화의 더욱 본질적인 의미는 그 너머에 있다!
사람들은 왜 그 비극을 되새기는가
아기장수 설화는 우리나라의 여러 설화 가운데 가장 많은 각편이 채록 보고된 이야기이다. 최근에 김영희가 세세히 정리한 바에 따르면 자료 수가 300편 이상이다.김영희, 《비극적 구전서사의 구연과 여성의 죄》, 연세대 박사논문, 2009 전국 웬만한 고을마다 이 이야기가 있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사람들은 이 비극적인 전설을 도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전승해 온 것일까? 민중이 쓰라리게 패배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되새기기 위해서 그들은 이 이야기를 전하고 또 전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제시하기 전에 기초적인 사실을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보통 ‘아기장수 설화’라고 통칭되지만, 실상 그 안에는 서사 맥락을 달리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날개 달린 아기장수와 용마’로, 또 하나는 ‘어머니의 배반으로 실패한 아기장수’로 명명될 수 있다. 이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날개 달린 아기장수와 용마 : 시골 어떤 집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일을 하고 돌아와 보니 갓난아이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놀란 부모가 몰래 엿보니 아이가 겨드랑이의 날개를 움직여 방 안을 폴폴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집에 장수가 난 것을 깨달은 부모는 자칫 집안에 후환을 미칠까 두려워하여 볏섬(또는 돌, 기타)으로 아이를 눌러서 죽이고 말았다. 아이가 죽고 나자 어디선가 용마가 나타나 구슬피 울다가 사라졌다.
어머니의 배반으로 실패한 아기장수 : 한 시골집에서 여인이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억새로 탯줄을 끊고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아랫몸이 없고 윗몸만 있어 우뚜리라고 불렸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장수의 비범한 능력을 보인 뒤) 어머니에게 청하여 (곡식을 가지고) 바위 밑으로 잠적했다. 장수가 났다는 소문에 나라에서 그를 잡아 죽이려고 나섰다. 탐문 끝에 아기장수의 어머니가 붙잡혔다. 위협에 직면한 어머니는 장수가 말했던 기한을 코앞에 두고서 아들 있는 곳을 실토하고 말았다. 군사가 들이닥쳐서 바위를 깨고 보니 아기장수 우뚜리는 아랫몸이 거의 다 자란 상태에서 (곡식이 변한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짜가 하루 모자랐던 탓에 그는 힘을 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자료에 따른 이야기의 다양한 편차에 대해서는 길게 논하지 않는다. 다만 두 이야기가 신이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가 부모에 의하여(또는 어머니 탓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 함께 다룰 만하다는 점을 확인해 둔다. 곧바로 핵심 문제로 들어가 보자. 과연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아기장수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무엇을 확인하려 했다는 말인가? 민중은 권력의 무서운 힘 앞에 억눌려 쓰러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인식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이에 대해 내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아기장수가 가지고 태어난 신이한 능력이다. 이야기 속 장수의 능력은 비범한 것 이상이다. 겨드랑이의 날개나 용마, 바위 속의 군사 조련 등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 신이한 능력이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니, 아기장수는 곧 신탁神託을 받고 태어난 존재가 된다. 그가 태어났다는 것은 세상이 바뀔 때가 되었다는 하늘의 뜻을 표상한다. 하늘의 뜻을 표상하는 존재이므로 그는 당연히 성공해야 하는 터였다.
그럼에도 아기장수는 쓰러지고 만다. 상대의 힘이, 또는 현실의 벽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차적인 해석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이야기에서 아기장수의 죽음이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아기장수의 죽음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죽음이 아니다. 그리되면 안 되는 죽음이었으며, 얼마든지 그리되지 않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그는 출전과 성공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너무도 안타깝게, 너무도 아깝고 억울하게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날개 달린 아기장수와 용마’를 보자. 그가 날개를 지녔다는 사실이 그리 허망하게 노출되지 않았더라면 장수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용마가 조금만 더 일찍 나타나 장수를 태워 갔더라도 그는 죽거나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용마를 타고 나서기만 했다면 천하무적으로 세상을 훌쩍 뒤집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배반으로 실패한 아기장수’에서는 안타깝고 억울한 지점이 더 많다. 정체가 그렇게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또는 그 어머니가 아들의 종적을 노출하지만 않았더라면, 또는 더도 덜도 말고 단 하루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장수는 좌절하지 않고 세상을 훌쩍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운수가 닿았더라면!
결국은 장수가 죽었으니 마찬가지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죽을 수밖에 없어 죽었다는 것과 죽을 일이 아닌데 죽었다는 것은 크나큰 차이이다. 전자와 달리 후자에는 ‘성공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 내지 의지가 깃들어 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하늘의 뜻을 안고 세상에 장수가 났다. 그런데 미처 나서서 힘을 써 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말이 안 되는 아깝고 억울한 죽음이었다. 그 억울한 죽음이 없었다면, 세상은 바뀌었을 것이다. 어떻든 아기장수는 죽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라는 법은 없다. 그의 출생이 하늘의 뜻이었다면, 장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아니, 이미 태어나서 어딘가에서 나설 날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장수가 또다시 그렇게 속절없이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내 시운이 그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는 세상에 나서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바뀌게 될 것이다.
이 설화에서 과거의 좌절은 ‘가능했던 성공’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논리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야기 텍스트를 넘어서 현실을 향해 열리면서 ‘가능한 성공’으로 이어진다. 요컨대 사람들은 ‘미래의 성공’을 말하기 위해 ‘과거의 실패’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내가 발견한 이 설화의 비밀이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결론 난 것이 아니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안타깝게 죽은 이야기 속의 장수와 달리 시운時運을 얻을 수 있다면 새로운 장수는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기장수의 성공과 좌절이 단지 시운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건 꽤나 허무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결정론에 불과하다. 언젠가 시운을 제대로 얻은 하늘의 장수가 나타나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영웅이 훌쩍 나타나서 단숨에 세상을 뒤집고서 도탄에 빠진 민중을 훌쩍 구원한다? 천만에! 그건 장밋빛 환상일 따름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싸움이다. 어떤가 하면 상대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하며 인정사정이 없다. 장수가 아직 어리니 클 때까지 봐준다는 식의 온정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권력을 위태롭게 할 최소한의 조짐이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싹을 뽑아서 짓밟는 것이 그들의 생리이다. 아무리 그들을 탓하고 원망해 본들, 바뀌는 것은 없다.
그리하여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과거의 실패든 또는 미래의 성공이든,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면, 장수의 부모에게, 마을 사람들에게 있다. 장수를 제 손으로 눌러 죽인, 또는 종적을 노출한 그 사람들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잘못을, 장수의 아버지나 또는 어머니의 잘못을 탓하자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그들을 탓하자는 것이다. 그들의 잘못이었다. 그들이 아기장수를 지켜 주지 못한 탓이었다. 그 못난 보신주의 때문에, 그 나약한 패배주의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되었다. 세상을 바꿀 기회가 날아가고 말았다.
못헌 일이죠 암, 잘못헌 일이죠. 생명 하나 죽이는 것두 잘못헌 일이구, 더구나 큰 재목 될 사람에서루 죽인 것이 잘못헌 일, 한없이 잘못 아니것슈. 통탄헐 일들이지.
- 1989년 5월 21일, 충남 부여군 내산면 묘원리에서 김충현 구연(신동흔 채록)
즈그들이 다 죽어도 자석을 나아(놔) 두었이몬 큰 성공을 하고 말긴데…….
- 《한국구비문학대계》 8-2, 경남 거제군 거제면 설화 ‘아기장수와 용마’(박천수 구연)
자기들이 죽더라도 장수를 살렸어야 한다! 저 한마디 말이 천둥처럼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다. 그렇다. 사람들이 나서서 지켜 주지 못하는데, 부모조차 믿어 주지 못하는데, 어떤 놀라운 힘을 가진 장수인들 성공할 수 있으랴. 스스로가 희망도 의지도 없는데 세상이 어떻게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으랴. 내가 다치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그 희망을 지켜 내야만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스로 저버리고 나서 아무리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를 되뇐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마침내 다다른 지점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해석과 꼭 반대가 된다. 아기장수를 죽인 부모의 행위는 어떻게 해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순간, 싸움은 끝이 난다. 권력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축배를 들 것이다.
자식을 죽인 저 부모의 모습이, 자식의 종적을 노출한 저 어머니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표상하는 것임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믿는다. 하여 저 설화는 우리한테 묻는다. 만약 네가 아기장수의 부모가 된다면 너는 어찌하겠느냐? 너는 과연 저들처럼 하지 않겠느냐? 너는 목숨을 다해 그를 지켜 주고 키워 줄 것이냐?
사람들은 이야기를 전승하면서 궁극적으로 이 질문에 대면했던 것이라고 믿는다. 그 질문을 거듭하면서 옹골지게 마음을 다지는 것, 그것이 이 설화의 핵심적인 존재 의미였다고 믿는다. 아기장수 설화는 우리 안의 비겁을 꿰뚫는 냉정한 성찰의 서사라는 것이, 그를 통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키워 나가고자 하는 다짐의 서사라고 하는 것이 나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나는 아기장수 설화와 진인출현설의 관계를 논하면서, 죽은 아기장수가 새로운 장수를 낳으며 그 장수가 떨치고 나설 때 세상의 구원자인 ‘진인眞人’이 된다고 했다. 진인이 나섰다는 것은 ‘드디어 때가 됐다’는 뜻이다. 그러한 공감대가 형성될 때 사람들은 한 목숨 초개처럼 내던지며 들불처럼 일어났으니, 홍경래 항쟁 때 그러했고 동학 농민전쟁 때도 그러했다. 19세기를 점철한 그 수많은 민란들! 그때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 과연 그들은 무엇을 믿고서 그렇게 떨쳐 일어났던 것이었을까. 남들은 뭐라 할지 몰라도, 나는 그 밑바탕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이야기’가 있다고 믿고 있다. 저 냉정한 성찰과 결연한 다짐의 서사로서 아기장수 설화 말이다.
내 가슴속의 아기장수
아기장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현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의 그 쓰라린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이 사회의 기득권 지배 권력에 의한 교묘하고도 조직적인 살해였다. 저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가 언젠가 자기네 권력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자 저들은 그 싹을 싹둑 잘라 버렸던 것이다. 합법의 탈을 쓴 무서운 음모!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생존의 기본 법칙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아기장수 설화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나 자신이 답해야 할 질문이 된다. 너는 과연 어찌하겠느냐? 또다시 그렇게 장수를 버리지 않을 수 있느냐? 저 무도한 불의와 드센 폭력에 맞서서 장수를 지켜 낼 준비가 되어 있느냐?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느냐?
고백하자면, 나는 어려서부터 순둥이로 자라난 겁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서슬 퍼렇던 5공 시절, 두려움 때문에 한 번도 ‘데모’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촛불 시위에 몇 번 나가서 소리도 지르고 항변도 해 보았지만, 경찰이 증거 채취용 카메라를 들이대면 슬그머니 숨기 바빴다. 말하자면, 허용된 틀 안에서 진짜 싸움이 아닌 싸우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만약 진짜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리하여 나를 버려야 할 상황이 된다면, 나는 과연 그리할 수 있을까. 나는 정녕 희망을 배반하지 않고서 끝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 장수가 될 자신은 없다. 그것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장수를 지켜 주는 일은, 장수와 함께 싸움터로 나아가는 일은 ‘선택’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정의를 꿈꾸는 한 시민의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의무이다. 그 일을 피한다면, 인간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앞으로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지키는 일에 나서서 그 길을 굳게 이어 갈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알의 밀알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 중요한 바탕은 ‘아기장수’와의 인연일 것이다. 그 가는 길, 아기장수가 지켜봐 주고 힘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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