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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중략)
앞에서 소설에서 묘사한 세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풍경에 비유했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도, 마치 운전할 때 자신이 하는 동작을 의식하지 못하는 운전자처럼, 우리 가운데 일부는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소박한 소설가와 소박한 독자는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본 것만으로도 그 나라에 대해 알고, 그 나라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힘을 믿기 때문에, 풍경에 대해, 사람에 관해 얘기하고, 성찰적인 소설가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큼 강력한 견해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성찰적인 소설가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정되어 있는 데다가 유리에 진흙까지 묻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베케트 스타일의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아니면 나나 다른 많은 현대 소설가들처럼, 자동차 운전대, 버튼, 진흙 묻은 창, 기어를 장면의 일부로 그리지만, 우리가 본 것들은 소설의 관점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비유에 휩쓸리기 전에, 우리 모두가 소설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작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주의 깊게 열거하고자 합니다. 소설 읽기란 이 작업들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찰적인 소설가들만이 이 작업을 감지하고 세세하게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실제 소설이 무엇인지(우리가 알지만 잊었던 어떤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킬 것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전체 풍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스페인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돈키호테에 대해 썼던 책에서 모험 소설, 기사도 소설, 싸구려 소설 등은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서 읽으며(이 리스트에 탐정 소설, 가벼운 연애 소설, 스파이 소설 등을 덧붙일 수 있을 겁니다.) 현대 소설은(오늘날 우리가 순문학 소설이라고 부르는) 분위기 때문에 읽는다고 말합니다. 가세트에 의하면, 이러한 분위기 소설은 아주 적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풍경화’와 같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많고 박진감이 넘치건, 풍경화처럼 전혀 이야기가 없건,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항상 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고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면서 읽습니다. 마치 어떤 풍경화처럼, 소설이 우리에게 아무 사건도 던져 주지 않고 수없이 많은 잎사귀만 일일이 묘사한다고 하더라도(프랑스 누보로망에서 알랭 로브그리예 또는 미셸 뷔토르의 작품을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서술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이 잎사귀들이 모여 결국에 어떤 이야기를 형성할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머릿속으로는 항상 배후 어딘가에 있을 어떤 모티프, 아이디어, 의도, 숨은 중심부를 찾습니다.
2. 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합니다.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소설이 단지 어떤 이야기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야기는 수많은 사물, 소리, 대화, 상상, 추억, 지식, 생각, 사건, 장면 묘사 들을 통해 서서히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소설을 읽으며 희열을 느낀다는 말은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단어들이 설명하는(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상상 속에서 떠올리면서, 우리 독자들은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책이 말하는 것, 즉 서술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말하려 한 것, 또는 말했다고 우리가 추측하는 것을 추적해 나갑니다. 소설의 중심부를 찾으며 상상력을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3.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작가가 설명한 것 가운데 어디까지가 경험이며,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궁금해합니다. 특히 소설이 우리에게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에서 이런 의문이 들곤 합니다. 소설 읽기란 소설에 가장 깊이 빠졌을 때조차 ‘어디까지가 상상이며, 어디까지가 경험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소박하게 소설이 실재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잊는 것과 어디까지 상상인지 성찰하며 궁금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하지만 소설 예술의 영원한 힘과 생명력은 이러한 모순들로 이루어졌고, 자신만의 특별한 논리에 의거합니다. 소설 읽기는 세상을 데카르트주의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한 가지 이상의 사고를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내부에 서서히 현실성의 삼차원, 소설 속 세계의 복잡한 차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서로 모순되지만, 동시에 받아들여지고 묘사됩니다.
4. 우리는 계속해서 궁금해합니다. 현실이 이러한 것일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 주고, 묘사한 것들이 지금 우리가 삶을 통해 아는 현실과 같은 것일까?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1870년대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야간열차가 소설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고 편안했을까 아니면 톨스토이는 ‘안나는 책을 좋아하는 여자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 예술의 심장부에는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적절한 형태를 부여한다면, 현실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이러한 낙관주의 아래 적절한 단어, 정확한 비유, 상상과 이야기의 힘, 문장의 축적, 산문의 비밀스럽고 솔직한 시와 음악을 가늠하고 음미합니다. 스타일이 주는 희열과 과제는 소설의 심장부에 있지 않고, 심장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이 매력적인 주제에 대해 수천 가지 사례를 들며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6. 우리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들을 통해 작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도덕적 판단은 피할 수 없는 늪입니다. 다만 소설 예술은 인간을 심판할 때가 아니라, 이해할 때 가장 고매하고 탁월한 성과를 낸다는 것을 잊지 말고,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합시다. 소설을 읽을 때 도덕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소설 주인공을 겨냥해서는 안 됩니다.
7. 우리 머릿속에서 이 모든 작업이 동시에 행해지는 사이, 한편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특히 문학성 높은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텍스트와 맺은 밀접한 관계는 우리 독자들에게 마치 사적인 성공처럼 다가옵니다. 소설이 오로지 우리를 위해 쓰인 것 같은 느낌, 이 달콤한 착각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솟아오릅니다. 작가와 우리 사이에 생기는 이런 친근감과 은밀함은 책에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나와도 별로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는 데 일조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작가와 어느 정도 공범 관계가 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 공범 관계를 해치는 속성을 숨기고 묵인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느라 분주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믿기 위해, 작가가 말하는 모든 것을 그가 원하는 만큼 믿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가의 어떤 집요함, 고집, 그리고 강박관념이 옳지 않게 보일지라도, 책에 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계속 읽고 싶기 때문입니다.
8. 우리 기억도 한편으로 전혀 쉬지 않고 열심히 작동합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 준 세계에서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그러려면 소설의 모든 세부 사항을, 마치 나무의 모든 잎사귀를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작가가 부주의한 독자를 도와주기 위해 소설을 단순하고 가볍게 만들지 않은 다음에야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어려움은 소설 형식의 경계와도 직결됩니다. 소설은 읽는 사람이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대한 풍경 속으로 걸어갈 때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의 의미는, 이전에 마주쳤던 ‘다른 모든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 짜인 소설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전체 관계망은 책의 분위기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주의를 집중하여 찾고 있고, 찾아야만 하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9.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입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소설을 만드는 모든 것이 그 재료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서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중심부의 징후는 사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든 세부 사항, 즉 거대한 풍경의 표면에서 마주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풍경을 걸어가며 모든 잎사귀를, 모든 부러진 가지를 어떤 신호처럼 여기고 의심하며 주의 깊게 살피는 사냥꾼처럼 행동합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새로운 단어, 사물, 캐릭터, 주인공, 대화, 묘사, 세부 사항, 소설의 언어적ㆍ형식적 특징, 이야기의 예상 밖 진행 등이 표면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한다고 느끼면서 읽어 나갑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은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소설을 서사시, 중세의 메스네비, 장시(長詩), 그리고 전통적인 모험 소설과 구분 짓는 것은 바로 이 중심부입니다. 물론 소설은 등장인물들이 더 복잡하다는 점에서도 다릅니다.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파고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배후 어딘가에 중심부가 있고, 우리가 그것을 찾길 희망하며 소설을 읽기 때문에 힘을 발휘합니다. 소설이 우리에게 삶의 평범한 세부 사항, 환상, 일상의 습관과 사물을 보여 줄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갖고 경탄에 사로잡혀 읽어 나가게 됩니다. 이것들이 배후에 숨어 있는 어떤 의미, 어떤 의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대하고 광활한 풍경 속 모든 세부적인 것들, 모든 잎사귀와 꽃이 관심을 끌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 뒤에 의미가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삼차원적 허구이기에 우리 현대인에게, 다시 말해, 모든 인류에게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은 삶의 가장 표면에 있는 모습, 그러니까 우리 감각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사적인 경험과 지식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때로는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그러니까 중심부에, 삶의 본질에, 톨스토이가 ‘삶의 의미’라고 했던 것에(우리가 뭐라고 명명하든지 간에), 다다르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낙관하는 그곳에 대한 지식, 직관, 실마리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과 관련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귀중한 지식에, 철학의 난해함이나 종교의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도,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입니다.
나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 사이에, 바로 이러한 희망에 사로잡혀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내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모든 소설은 나에게 우주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 우주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못지않게 인생의 모든 면을 세세히 알려 주었고, 나의 삶 못지않게 인간적이었으며, 오로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심오하고 포괄적인 바람, 위로 그리고 약속 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습니다.
이번 강연에서 종종 언급될 E. M. 포스터는 『소설의 이해』라는 책에서 소설의 가치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은 우리가 그것에 느끼는 애착이라고 말합니다. 내게 소설의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소박하게 세계에 투사할 수 있는 중심부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힘에 있습니다. 더 간단하게 말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에게 삶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얼마나 이끌어 내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소설은 삶에 관한 우리의 중심 사상에 호소해야 하고, 그러한 기대 아래 읽혀야 합니다.
소설은 삶의 숨은 의미나 사라진 가치를 추구하고 찾아내는 데 적합한 구조이기 때문에, 소설 예술의 정신과 형태에 가장 적합한 스타일은 독일인들이 ‘교양소설’이라고 부르는, 젊은 주인공이 세계를 알아가면서 성숙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성장소설, 교육 소설입니다. 나는 젊은 시절 교양소설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훈련시켰습니다.(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 토마스만의 『마의 산』을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소설의 중심부가 주는 기본적인 지식, 그러니까 세계가 어떤 곳이고 삶이 어떤 것이라는 지식을, 단지 중심부뿐만 아니라, 소설의 모든 곳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좋은 소설이란 모든 문장이 우리에게 진정 위대한 지식을,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감각의 본질이란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여행이, 그러니까 도시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방에서, 자연에서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불확실한, 감춰진 의미를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소설에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번 강연에서 소설이 어떻게 이 모든 무게를 짊어져 왔는지를 연구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치 소설을 읽을 때 중심부를 찾는 독자들처럼 또는 삶의 의미를 찾는 교양소설의 소박하고 젊은 주인공들처럼, 우리도 호기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솔직하게 소설 예술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가려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광대한 풍경 속을 걸으며 여러 정거장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작가를 둘러본 다음, 소설 캐릭터로, 이야기의 구조로, 허구에 대한 개념으로, 소설 속 시간에 대한 문제로, 사물로, 관점으로, 박물관으로, 그리고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곳으로 떠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진짜 소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지요.
(본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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