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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
빚의 노예가 되었나
돈, 돈을 계속 벌어라.
그러고 나서 혹시 미덕이 스스로 따라오겠다고 하면, 그리하라.
- 조너선 스위프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안타깝게 여겨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돕는 일을 우리는 ‘자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갚을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분명히 알면서 굳이 돈을 빌려 준 뒤 그로부터 이익을 얻으려 하는 행위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바로 ‘약탈적 대출’이라고 한다.
이것은 채무자의 형편이 어떻게 되든 이자 수익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산술이 깔려 있는 금융 영업 방식이다. 한때 미국에서 유행한 닌자(NINJA, No incom No Job No Asset) 대출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수입도 자산도 직업도 없는 사람에게 대출을 해 준 것은 자선이 아니라 명백히 ‘약탈’이다.
약탈적 금융 행위는 대출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금융 약자인 서민이나 중소기업인, 자영업자들에게 관행으로 이른바 ‘꺾기 판매’를 하거나, 국내 중소기업에 3조 1000억 원의 피해를 입힌 키코(KIKO) 사태처럼, 금융 상품을 판매하면서 그 위험성이나 계약 조건을 소비자에게 제대로 이해시키지 않는 ‘불완전 판매’ 등도 크게 보면 약탈적 금융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다. 칼 든 강도에게나 쓸 법한 ‘약탈’이란 말이 금융에 적용된다는 것은. 그런데 사실 약탈적 금융 행위는 칼 든 강도보다 훨씬 더 무서운 존재이다. 채무자의 상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대출은 가계 파산은 물론 국가 경제 전체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점은 약탈 행위가 전혀 약탈인 줄 눈치채지 못하게 교묘한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먼저 우리가 왜 이 위협적인 약탈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거리낌 없이 독배를 받아 마시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 치밀한 시스템을 이끌어 온 사회 각계의 공조자가 누구인지는 이어지는 4장에서 다룬다.
채무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유혹의 시작
빚까지 내 가며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중산층이 ‘하우스 푸어’로 내몰리고 있다. 집값 상승세가 멈추면서 매매도 끊겼고 급매물이 아니면 팔리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커 가며 생활비는 느는데 원금과 이자 상환 압박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중산층을 감당 못할 빚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일까? 재테크 광풍이 한창이던 2006년쯤 2억 원을 빌려 집을 산 한 중산층 부부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2008년 금융 위기가 한창이던 때에 한 부부가 지친 표정으로 상담을 받으러 왔다. 검소한 옷차림과 얼굴에 새겨진 작은 주름이 지금껏 큰 욕심 없이 살아 왔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지금은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표정이었다. 부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장 소득이 늘어날 일이 없는데 도저히 저축할 여력이 안 되니 이걸 어떡하죠.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사람들도 많을 텐데, 낭비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도 도저히 답이 없어요.”
소득이 월 400여 만 원이었다. 풍요롭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없다고 할 정도도 분명 아니었다. 더 적은 소득으로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이들이 부인 말대로 낭비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었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아이들 사교육에 돈을 쏟아붓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여유 있을 법한 소득에 만족하지 못하고 급기야 돈에 쫓기는 심정으로 재무 상담까지 결심하게 됐을까?
“2년 전 제가 잠시 뭐에 씌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때는 화가 너무 났죠. 집값이 오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전세로 살고 있었거든요. 이러다 말겠지, 계속 오르면 이건 분명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세에 안주했어요.”
상식이 통하길 기대했지만 세상은 부부를 배신했다. 집값은 멈추지 않았고 순식간에 미친 듯이 올라 버렸다. 당시 이 부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분노는 다시 공포심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분노는 강력한 전염성까지 갖고 있어서 마치 재난 영화 속 쓰나미처럼 밀어닥쳐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인간이 대자연 앞에 나약한 존재이듯, 주택 시장의 비이성적인 과열 앞에서 사람들은 극도의 상실감에 빠지거나 주택 사재기 대열에 내몰렸다. 일부는 더 오르기 전에 매수 대열에 동참해야 한다며 은행 대출 창구로 향했고, 그런 여력조차 되지 않는 다수는 극도의 열패감에 휩싸였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다면 저축을 통해 무언가 이루겠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상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삶이란 제자리를 맴도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탈출구는 비범한 정보 수집 능력 혹은 치열한 자기 계발로 드물게 만들어지는 횡재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집단적인 절망감은 빚에 대한 전통적인 경계심까지 지워 버렸다.
“결혼할 당시 전세금이 모자라 빚을 진 적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절대 빚지고 살면 안 된다고 강조하셨는데, 줄곧 그런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그때는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아 허리띠 졸라매고 살았죠. 월급 타면 무조건 대출 원금부터 갚았어요. 그래서 2년 만에 빚을 다 털었죠.”
부부의 얼굴에는 성실과 순응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그 부부가 결혼과 동시에 갖게 된 빚에 죄진 사람처럼 큰 부담을 가졌음을 짐작케 했다. 그들은 마치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듯 대출금을 상환했을 때의 후련함을 털어놓았다. 상담 탁자 위에 옛 이야기가 하나둘 펼쳐지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낯설면서도 반가운 자신들의 모습을 다시 발견했다. 문득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깨닫고는 새삼 놀라는 얼굴을 했다. 빚에 대한 예민한 경계심이 사라졌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2억 원의 대출을 받을 만큼 대담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아무리 핑계를 대 보려 해도 어디엔가 홀리지 않고는 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물론 세상이 변하기도 했다. 빚이라고는 하지만 대출이자가 거의 공짜나 다름없을 정도로 쌌다. 이제는 빚지지 않고 사는 사람을 바보 혹은 유난스런 사람으로 취급하는 세상이다. 착한 일을 하고도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핀잔만 들었을 때의 억울함. 미친 듯이 오르는 집값에 절망하고 있을 즈음, 명절날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그 비슷한 심정을 느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의 가장 큰 화젯거리는 단연 집과 돈이었다. 그들 빼고 모두 일찌감치 빚을 안고 주택 사재기 대열에 합류했다. 여전히 전세에 머물러 있는 그 부부는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었고 형제들로부터 빚 안지고 살겠다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고집을 버리라는 충고를 들어야 했다. 물론 형제들도 대출 문서 여러 장에 도장을 찍을 때마다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대출금이 통장에 숫자로 찍히는 동시에 절반가량 날아간다. 나머지 절반은 그 빚으로 드디어 내 집을 가졌을 때 완전히 사라진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집값이 오른다는 뉴스를 접한다. 이제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흥분과 기대심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누구보다 잘 살기를 바라는 다른 형제가 두려움에 망설이고 있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가족들의 진심 어린 충고는 그 부부로 하여금 태어나 처음으로 어제와 전혀 다른 선택에 과감해지도록 용기를 주었다.
“저도 처음에는 집값이 오르니까 가족들 이야기 듣기를 얼마나 잘했나 싶었어요.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만 결국 평생 전세살이에서 못 벗어났을 거라 생각하면 섬뜩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집값이 거의 1억 이상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한편으로는 다들 이렇게 살았었나 보다 싶으니까 일만 하고 저축만 하고 살았던 이전의 제가 한심해 보이더라고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흥분할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그들에게서 흥분을 거둬 간 대신 잠시 잊고 있던 두려움을 되살려 냈다.
집값은 더 오르지 않았고 거래는 거의 끊겼다. 겨우 이루어지는 거래도 시세표와 비교해 형편없는 급매물 가격이었다. 더 오를 것이란 기대와 흥분이 지워지고 나니 냉엄한 현실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월 이자만으로 100만 원이 빠져나가는데 곧 원금 상환까지 닥친다. 20년간 매월 150만 원 이상 꼬박꼬박 은행에 갖다 바쳐야 한다. 남편 나이가 벌써 40대 중반. 60대 중반까지 빚 갚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혁명에 가까운 변신을 시도할 때 계산에 넣지 않았다. 따져 보니 20년간 은행에 내는 이자만 2억 원이 넘는다. 빌린 돈의 두 배를 되돌려 주어야 비로소 내 집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연일 집값은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다 조금씩 스멀스멀 내려갔다.
이제 너무 깊숙이 발을 담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갇혔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남은 돈으로 어떻게든 저축해 보려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빚이 자신들을 단단히 묶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레버리지 투자의 함정에 빠지다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제임스 스튜어트는 『도둑의 소굴(Den of Thieves)』이라는 책에서 자산 가격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시기에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친구가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사람들의 안락과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파트 가격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던 시절에 직장인들의 최대 화두는 ‘돈’이었다. 명절날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도 얼굴을 맞대면 재테크 성공담이 주요 화제가 되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흥분을 동반한 자신감에 취했고, 구경꾼이 되었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들이 쉽게 돈 벌 동안 뭐했느냐?”는 핀잔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은 오히려 무언가 부족한 사람으로 치부되고 자산 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세상을 뒤흔들면서 돈이 공짜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공짜 돈을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경쟁 사회에서 뒤처지는 낙오자가 될 것이란 공포심에 휩싸인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투기적 모험에 끼어들면서 자산 시장은 더 크게 요동친다.
케인스는 경제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합리적으로 돌아간다고 보는 전통적인 시각에 반기를 들었다. 사람들의 ‘야성적 충동’이 경제 작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 것이다. ‘공돈’을 차지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과 혼자 뒤처지고 있다는 박탈감이 바로 그 같은 야성적 충동이다. 부동산 투자로 횡재한 이야기를 연일 언론이 쏟아 낸 것도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기에 충분했다. 어느 주부는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 자녀에게 “너는 집 한 칸이라도 있는 사람과 결혼해라.”라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고 상담 도중 털어놓았다.
한때는 빚을 내서 집에 투자하는 것이 투자의 정석이자 내 집 마련이라는 재무적 의무를 이행하는 당연한 절차로 통했다. 그 빚으로 인해 집은 갖게 됐으나 현금 흐름이 깨져서 가계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은 투자를 모르는 무지한 이야기, 잔칫상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로 비난받기 일쑤였다. 그러던 시장이 급작스럽게 변덕을 부렸다. 빚을 지렛대 삼아 큰 수익을 안겨 주며 성공의 정석으로 꼽혔던 레버리지 투자는 중산층을 사회적 조롱을 받는 하우스 푸어의 신세로 전락시켰다.
하우스 푸어 양산한 ‘부자 만들기’ 열풍
“좋아하지도 않고 나쁘다는 것도 알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 때 그 사람을 찍을 거야. 왜냐하면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만 집값을 유지해 줄 것 같고 솔직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성장은 이룰 것 같거든. 도덕성이나 윤리는 정치인들 모두 좋은 점수 주기 어려우니 차라리 성장률이라도 확실하게 챙길 사람 뽑는 게 낫지.”
2007년 대선 당시 지인에게 들은 말이다. 기업 금융 관련 일을 하고 가끔 대학에서 강의도 하는 나름 경제 전문가였다. 그도 당시 다른 중산층과 마찬가지로 무리하게 빚을 내서 뒤늦게 집을 샀다. 집값이 더 오를 것이란 사실에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 집 한 채 못 갖겠구나’라는 절망 혹은 공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평균 이상 소득자였다. 그의 말 속에는 집에 대한 환상, 부동산 재테크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신앙이 들어 있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상황에서는 이성적인 설득이란 불가능하다. 어떤 논리적 반박, 통계적 근거를 제시해도 소용없다. 부동산 가격 상승이 하락 반전할 위험이 있다는 객관적인 수치는 그저 수치에 불과할 뿐 집이 돈이 된다는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닥치고 정치』의 저자 김어준이 말한 대로 우리나라 중산층은 욕망을 좇아 대통령 선거까지 치렀다. 그 욕망은 부지런히 정보를 취하고 발품을 팔아 기회를 잡는다면 일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는 판타지에서 나왔다. 초인종만 누르면 돈이 튀어나오는 식의 재테크 판타지는 주로 집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지나치게 달콤한 그 신화는 팬덤 현상처럼 순식간에 열정적으로 전이되고 확장되었다. 부동산 재테크 시장은 그야말로 광기가 지배했다. 물론 김어준의 지적과 다른 부분도 있다. 욕망과 함께 공포 또한 중산층을 광기 대열에 밀어 넣은 요인이었다. ‘나만 가난해질 것’이란 두려움이 집값 폭등이라는 우연처럼 보이는 횡재와 결합해 광기로 나아간 것이다.
이런 일은 과거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평범한 농부가 튤립 한 뿌리를 사려고 살고 있던 집과 땅을 판 것도 모자라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면 이해가 되는가? 당연히 미친 사람쯤으로 생각될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이 같은 광기에 휩싸인 농부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바로 투기의 역사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튤립 파동’ 이야기다. 튤립 한 뿌리에 인생을 걸었던 것은 튤립 가격이 계속 올라 나중에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었다. 이런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투기 대열에 끼어들었고 은행도 튤립 매입 자금을 기꺼이 빌려 주었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광기, 패닉, 붕괴』에서 “은행들은 자금 대여자로서 어떤 때는 무척이나 강한 풍요감에 젖어 제한 없이 자금을 빌려” 준다고 표현했다.
그러다 돌연 시장에 공포가 나돌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대개 사람들이 지나치게 돈을 많이 빌린 탓에 그 이자나 원금을 상환하기 위해 새로운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이다. 이미 튤립을 사려고 갖고 있는 자산을 대부분 탕진하고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은 전부 끌어다 튤립에 투자했다. 결국 튤립 살 돈을 더 이상 마련할 수 없게 되고 매수자를 찾지 못한 튤립 가격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은행은 태도를 바꾸었다. 찰스 킨들버거의 표현을 다시 빌리면 “어떤 때는 신중함이 극에 달해 차입자들이 바람에 휘둘리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여기서 ‘바람’은 튤립 가격의 붕괴를 은유한다. 풍요감에 후한 인심을 쓰던 은행이 태도를 바꾸고 ‘신중함이 극에 달해’ 빚을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너도나도 튤립을 팔기 시작했다. 튤립 가격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아 서서히 공포심이 짓누를 때쯤 큰 빚을 안고 산 구근은 어디 내다 팔 수도 없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찰스 킨들버거는 ‘출입문 폐쇄 공포(Torschlusspanik)’라는 독일인의 표현을 인용해 “육중한 출입문이 철커덕 닫혀 버리기 전에 빠져나가려는 투자자들이 쇄도하면 패닉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흥분으로 광적인 투기 대열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반대로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공포심에 광적으로 내몰리면서 투매 대열에 휩쓸렸다. 그리고 무일푼이 되어서야 튤립이 그저 꽃일 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튤립 한 뿌리와 바꾼 인생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여기서 ‘튤립’이란 말을 ‘아파트’로 바꾸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튤립 대신 집 한 채에 인생을 걸었다. 그리고 튤립 파동의 비극적인 결말처럼 부동산을 둘러싼 광적인 재테크도 중산층을 위협하는 결말로 치닫고 있다.
재테크, 중산층을 무너뜨리다
한국은행이 2012년 2월 발표한 「한국의 경제성장과 사회지표의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에 75.3퍼센트이던 중산층 비율이 2010년에는 67.5퍼센트로 8퍼센트포인트 가까이 줄었다. 20년간 경제가 꾸준히 성장했고 서점가에선 재테크 책이 연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는데도 중산층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건 아이러니다. 경제성장의 몫이 중산층에게 충분히 돌아가지 않았고 재테크 역시 대다수 중산층의 자산이나 소득 증가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인 셈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서 2011년 8월에 낸 「한국 중산층의 구조적 변화」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보고서는 중산층 안에서 적자 가구 비중이 1990년 15.8퍼센트에서 2010년 23.3퍼센트로 높아졌다고 밝혔는데, 이는 중산층의 비중이 줄었음은 물론 살아남은 중산층조차 아슬아슬한 적자 재무 상태로 버티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선거 판세까지 뒤흔들 정도로 재테크 광풍이 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중산층이 신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비정규직으로 밀려날지 모를 위험천만한 세상이다 보니 노동이 아니라 투자에 의한 자산 증식만이 살길처럼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취약한 사회 안전망과 중산층을 보호하고 늘려 줄 사회 시스템의 부재가 중산층으로 하여금 재테크에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게 만든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을 때는 자신의 재테크 성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흥분했을 것이다. 가난한 것은 게으른 개인의 자기 책임으로 보일 수밖에 없고 복지는 세금을 늘리는 부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재테크 가능성이 열린 사회에서 타인과의 연대는 불필요해 보였다. 아파트 가격 담합이라는 왜곡된 연대 정도가 존재했을 뿐이다. 결국 재테크 성공이란 착각에 빠진 중산층은 사회 안전망 후퇴에 적극적인 지지층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그 화살이 중산층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무리한 빚을 감수하고 장만한 집값이 몇억 원씩 올랐지만 자산 가치가 뛰었다고 부자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하우스 푸어라는 서글픈 신조어가 탄생할 만큼 부채 이자 갚느라 허덕이는 가난으로 내몰리고 있다. 사실상 자산 투자 시장은 한쪽이 이득을 보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손해를 보는 ‘제로섬’의 처절한 머니게임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당신이 3억 원짜리 주택을 구입해 이웃에게 5억 원에 팔았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차익 2억 원을 거머쥐었다. 그 2억 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바로 당신의 이웃이 지불한 비용이다. 그 이웃이 돈이 넉넉해서 집을 5억 원에 구입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지난 몇 년간 주택 시장 흐름을 비추어 볼 때 당신의 이웃은 2억 원 이상 모기지 담보 대출을 끼고 20년 혹은 30년 상환 계획으로 집을 샀을 것이다. 앞서 상담했던 부부 역시 20년에 걸쳐 상환하기로 하고 2억 원을 빌렸다고 했다. 결국 당신이 손에 쥔 차익 2억 원은 당신의 이웃이 20년, 30년간 일해서 갚아야 하는 돈이다. 누군가 차지하는 자본소득이란 다른 누군가가 미래에 받을 노동 소득, 즉 대출 원금인 셈이다.
이처럼 너의 손해가 나의 수익이 되는 자산 빼앗기 경쟁 구조를 갖고 있는 재테크 시장에서 중산층은 처절하게 패배했다. 소득 상위 20퍼센트 가구조차 77.4퍼센트가 빚을 갖고 있다는 통계 수치로 미루어 볼 때 중산층이 자산 투자로 돈을 벌기는커녕 다른 누군가의 차익을 챙겨 주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패자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본소득을 차지하게 될 것이란 달콤한 기대를 안고 자산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모두가 빚을 떠안은 채 하우스 푸어로 전락했을 뿐이다. 물론 누군가는 대다수 하우스 푸어가 지불하는 대출 원금과 이자 비용을 차익으로 챙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중산층의 노동 소득은 재테크에 성공한 소수의 자산 소득으로 이전되었다. 노동 소득의 양극화와 더불어 자산의 양극화까지 벌어진 셈이다.
사회 안전망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부자 되기에 매달렸던 중산층은 결국 가난해졌다. 재테크 열풍은, 지친 얼굴로 상담을 하러 왔던 부부처럼 20년간 나눠 갚아야 하는 숨 막히는 빚의 미래만을 만들었을 뿐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채무 인생의 대물림
지금 지고 있는 채무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제는 어린 시절부터 빚으로 돌아가는 일상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다음 기사를 보자.
앞바퀴의 스위블 휠, 부드러운 핸들링, 안정된 승차감, 와이드 타이어에 의한 충격 흡수력, 3단계 등받이 시트.
자동차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아기 엄마들 사이에 인기라는 수입 유모차를 묘사한 것이다. 국산 유모차보다 2배 이상 비싼 수입 유모차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뛰어난 성능 때문만은 아니다. 남성들이 외제차에 열광하듯, 유명 브랜드를 단 수입 유모차는 엄마들의 과시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때로는 남들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경제학 원리대로라면 상품의 가격이 오르면 그에 따라 수요가 감소하고 수요 감소에 따라 가격이 하락하면서 시장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와 반대로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과시적 소비재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소비자의 과시적 욕구를 자극하려고 이처럼 ‘고가 전략’이란 마케팅 수법을 쓴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은 기업의 이러한 고가 전략을 일찍이 간파했다. 그는 1899년 자신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상층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각 없이 행해진다.”며 당시 미국 상류층의 과시적 소비를 비판했다.
기업들은 시장이 균형을 알아서 찾아가니 내버려 두라고 정부를 압박하면서도 균형점에서 이탈하는 이런 현상을 이용해 비합리적인 소비를 부추긴다. 가정경제가 빚의 수렁에서 허덕이는 이때, 수입 유모차 시장은 기업들의 고가 전략에도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수입업체는 해외보다 2배 가까운 가격으로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일부 언론 기사에서도 수입 유모차에 대한 ‘애정 어린’ 설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대개 ‘저출산 시대, 프리미엄 키즈 제품 인기’라든가 ‘럭셔리 키즈 대세’ 등의 제목으로 모성을 자극해 내 아이만 초라해지지 않을까 엄마를 불안하게 만드는 교묘한 광고성 기사들이다.
노르웨이 유아용품 전문 업체 스토케가 생산하는 유모차계의 벤츠 ‘익스플로리’는 이미 신세대 엄마들의 필수품. 기존 유모차와 달리 유아 시트를 부모의 눈높이에 맞췄고, 최대 170도까지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 있어 아이가 유모차에서 완전히 누운 자세로 잠들 수 있다. 익스플로리는 백화점에서 170만 원대에 팔리는데 이조차도 수요가 너무 많아 종종 품귀 현상을 빚는다. 익스플로리의 이런 인기에 힘입어 영국 버버리가 개발한 유모차 ‘잉글레시나 클래식’(190만 원), 콩고드가 출시한 ‘네오카본’(520만 원)도 반응이 좋다.’
『주간 동아』 2010년 6월 21일 ‘럭셔리 키즈는 먹는 물도 달라!’ 중
이 기사의 부제목은 더 기가 막히다. ‘한국서도 최고, 최상, 소황제 마케팅 바람… 부모 신분 상승 욕구 아낌없이 투자.’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일으키려는 의도로 해석될 위험이 있다. ‘아낌없이 투자’라는 대목 역시 ‘투자하라’는 선동으로 들린다. 광고와 언론, 대형 마트와 백화점, 인터넷 쇼핑몰과 블로그 마케터,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숨어 있는 설득자’들은 기어코 엄마들의 주머니를 터는 데 성공한다. 그 주머니가 넉넉하다면 엄마들의 과시적 모성을 탓할 필요는 없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공원 한 바퀴 도는 동안만이라도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다면 굳이 개인의 소비 취향까지 나무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엄마들의 주머니는 이미 신용카드 할부 영수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씁쓸한 뿐이다.
기업의 고가 마케팅에 넘어간 엄마는 200여 만 원의 딜럭스형 수입 유모차를 12개월 할부로 구입한다. 성격 급한 엄마는 할부가 채 끝나기도 전에 50여 만 원짜리 접이식 유모차도 12개월 할부로 구입한다.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과시적 모성을 충족시켜 주려고 생애 첫 이동 수단부터 ‘빚’으로 소유한다. 물론 이건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아직 아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 자신이 겨우 2년 남짓 타게 될 이동 수단에 빚이 딸려 있고 그것을 갚으려고 부모가 12개월 이상 카드 대금 결제에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다. 과시적 모성이 할부로 채워졌다는 것을 들킬 일이 없다는 이야기다. 아이가 조금씩 자라면서 소비에 관심을 보일 때쯤에는 이미 어릴 때부터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만 본 탓에 엄마를 이상한 눈길로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린 시절의 소비 형태가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마케팅 전문가 마틴 린드스트롬은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취향이 성인 시절의 소비 패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하기 위해 120개국 이상의 지역에서 수행한 연구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포천』 500대 기업의 70퍼센트 이상, 그리고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다양한 조직들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총 2035명의 어린이 및 성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인의 53퍼센트, 10대 청소년의 56퍼센트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브랜드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단지 브랜드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고 소비 결제 및 금융 이용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가 카드 결제와 빚에 의존하는 모습을 간접 경험했기 때문에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는 신용카드 결제가 고정관념이 되어 버릴 위험이 크다. 실제로 지금의 어린이, 청소년 들은 부모가 돈이 없다고 하면 “카드 있잖아.”라고 말한다. 버는 범위 내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카드만 있으면 소비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자라는 것이다.
맞벌이 부모 가운데는 문구점이나 가까운 유기농 식품 매장에서 자녀가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 있게 해 두는 경우도 있다. 미리 매장에 부탁해 두고 일주일 단위로 아이들이 이용한 외상값을 나중에 결제하는 식이다. 부모가 없을 때 급하게 물건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인 것 같지만 이 또한 아이들이 계획하는 소비 대신 일상적인 외상 구매에 익숙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는 아이들도 카드와 외상을 화폐처럼 인식하고 있을 정도이다. 청소년 경제 교육 시간에 ‘화폐의 종류’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중학생들은 신용카드와 온라인 결제 등 전자 결제를 중요한 화폐 수단이라고 자연스럽게 답했다.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빚을 내서 소비하고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하는 왜곡된 소비와 일 개념을 학습하고 있다. 다만 자신이 직접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갚는 고통까지는 모른다. 조금씩 자아가 자라면서 여기저기 숨어 있는 설득자들의 집요한 감성 조작에 넘어가 별 저항 없이 명품 자동차 장난감이나 레고 시리즈 같은 브랜드를 사도록 길들여진다. 카드만 있으면 비싼 명품 브랜드 제품을 손에 쥘 수 있으니 부모가 느끼는 경제적 부담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행에 민감해지는 나이가 되면서 부모와 경제적 갈등을 자주 빚는다. 부모의 등골을 휘게 만들 정도로 비싸서 이른바 ‘등골 브레이커’라 부르는 고가의 명품 의류 등을 구입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부모의 속을 태운다.
숨은 설득자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소비 습관에 온갖 사교육비 부담까지 겹치면서 부모에게는 아이 키우는 일이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운 과제가 되어 간다.
그러다 아이들이 20대가 되면 대학 등록금이라는 무거운 재정적 ‘형벌’에 직면한다. 대학 등록금은 이미 사회적 이슈이니 그것을 마련하는 게 부모의 능력 밖임을 모르는 자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저소득, 서민 가계는 물론 중상위 계층조차 대학 등록금을 빚 없이 해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 등록금은 이제 신분과 계층을 떠나 소수 부유층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아직까지 시장 논리에 바탕을 둔 정책을 고집한다. 사회적으로 거센 비판이 일고 선거철마다 등록금 정책이 등장했다 사라질 정도로 중요한 이슈가 되었지만 기껏 내놓는 대책이라곤 학자금 대출 제도 개선 정도이다. 소득으로 안 되면 빚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금융 논리가 유일한 해법인 셈이다.
대학생이 되면, 빚에 의한 소비를 별 부담 없이 받아들이던 데서 벗어나 빚 갚기와 밥벌이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된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 발등에 떨어진 미래를 보니 돈을 벌자마자 빚부터 갚아야 하는 처지가 눈에 들어온다. 당장 대학 문을 나서면 청년 실업이라는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데 등에는 빚짐까지 짊어졌다. 상당수 청년층이 그 빚짐을 견디지 못해 찬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신세가 되고 있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2009년 9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30대 직장인 867명 가운데 학자금 대출을 이용한 사람이 53.7퍼센트에 달했다. 그중 84퍼센트는 아직 그 대출금을 갚지 못했거나 갚고 있는 중이라고 응답했다. 그나마 이들은 힘겨워도 등에 짐을 짊어진 채 어쨌거나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미 그 빚짐에 눌려 다리를 후들거리며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 떼고 있거나 아예 주저앉은 청년들도 많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2011년 5월 말 기준 학자금 대출 연체금 총액은 3887억 원으로, 2009년 말 2394억 원에 비해 62퍼센트 늘었다. 대출금 원금이나 이자를 6개월 이상 갚지 못하고 있는 신용 불량자 수는 2011년 5월 말 기준으로 이미 2만 9709명에 달한다. 앞으로도 지옥 같은 빚이 기다리고 있는데 벌써 지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극 앞에서 정부와 사회가 여전히 시장 논리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다수 사람들을 가난에 옷자락 잡히게 만들려고 팔을 걷어붙였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국가란 현대판 노예를 사육하는 간수라고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다.
요람에서 일어나 혼자 앉을 만큼 자라면 수입 유모차를 타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노스페이스 점퍼를 교복처럼 입다가, 이제 교통카드 기능이 포함된 체크카드를 지갑에 넣게 된 20대들은 빚을 내지 않으면 숨만 쉬고 살아야 한다는 개그 소재 같은 현실만 일찌감치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학자금 대출은 서막에 불과하다. 결혼과 동시에 집을 구하고 자녀 출산 및 양육, 교육 비용을 감당하려면 다시 빚의 사이클에 올라타야 한다. 부모가 물려준 빚이 자녀의 빚으로 이어지는 야만적인 빚의 대물림 구조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본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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