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누구인가?
엄마는 절대적인 세계이다
태아는 엄마의 배 속에서 아무 걱정 하지 않고 탯줄을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10개월을 보낸다. 마침내 낯선 세상에 태어나고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성장을 한다. 유아는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울고 있는 아이도 엄마 품에 안기면 금새 진정된다. 이는 이 세상의 엄마라면 누구나 경험해본 아이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엄마의 품은 영원한 안식처이고 아이의 모든 세상이다. 아이가 스스로 걷고 뛰어다니기 이전까지는 엄마는 아이들 삶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절대적인 세계이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를 찾는다. 엄마가 잠시라도 안 보이면 아이들은 두리번거리면서 엄마를 찾는다. 엄마는 유아의 절대적인 세상이다.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서도 엄마의 절대적 역할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도 학교에서 돌아와 제일 먼저 외치는 소리는 “엄마!”이다. 엄마가 무엇이기에 아이들은 그렇게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것일까? 아이들은 물건을 찾지 못하면 엄마를 부른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엄마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난감 미니카를 만들다가도 무엇인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것 어떻게 하면 되지?”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는 병원에 가기 전에 자리에 눕혀서 아이의 배를 쓰다듬어준다. 아프다고 하던 아이는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곤히 잠이 든다. 약보다 더 좋은 엄마의 손이다. 엄마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존재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상대가 쫓아오면 엄마 뒤로 숨는다. 그리고 무서운 동물을 보았을 때도 엄마 품으로 가거나 엄마의 치마폭으로 숨는다. 엄마는 자기가 두려워하거나 자기를 해칠 만한 존재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다. 엄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믿음이 가는 존재이다.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엄마는 아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이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여자는 약하다고 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아빠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는 아빠가 아니라 엄마에게 달려간다.
성인이 되어도 엄마는 늘 엄마이다. 세가 넘어서 군에 간 아이들도 엄마를 찾는다. 훈련소에 입소한 군인들은 첫 번째 편지를 엄마에게 쓴다. 그들은 대부분 군에 가기 전에 한 번도 엄마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없었던 아들들이다. 왜 그들은 군인이 되어서야 엄마에게 편지를 쓸까? 군대에서 하는 훈련이 고되고 힘들어도 엄마에게 사실대로 쓰지 않는다. 그들은 군대 생활 잘하고 있고, 밥도 잘 먹고 있고, 춥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쓴다. 한국의 남성에게 군 복무는 태어나서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시기이다. 그리고 가장 불안할 때다. 그때 엄마를 찾는다. 어릴 적에 젖을 물고 편안하게 잠들었던 엄마의 품이 그립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하고, 힘들고,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을 때 엄마를 찾는다. 그때 엄마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병사들은 힘겨운 유격 훈련을 받고 노래 <어머니 마음>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다. 특별히 엄마가 병원에 있거나 힘들게 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왠지 모르게 엄마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성인이 되어서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찡한 존재가 엄마다.
시집을 간 딸도 김치를 담그지 못할 때 엄마를 찾는다. 집들이를 하기 위해 음식을 만들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연락을 한다. 아이가 몸이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가기 전에 먼저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자기도 어엿한 성인이지만 엄마를 찾는다. 딸은 친정 엄마에게 자녀의 양육을 부탁하기도 한다. 여성들은 대가 넘어서도 예측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하면 “엄마!” 하고 외친다. 이 넘은 할머니도 다르지 않다. 산에서 뱀을 보거나, 징그러운 곤충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여성들은 “엄마야!”라고 외마디 소리를 낸다. 엄마가 옆에 있어서가 아니다. 엄마가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리 엄마를 외쳐도 엄마는 달려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엄마를 찾는다. 엄마는 곁에 없어도 늘 존재하는 신비로운 사람이다.
아이의 감시자가 된 엄마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에서 엄마가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의 온 세상이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다. 이 시대에 진짜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아이들의 공부를 감시하고, 성적을 보고 아이들을 평가하는 가짜 엄마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아이의 성공에 필요한 세 가지의 조건이 있다고 한다. 바로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다. 세간에 떠도는 우스갯소리지만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대화를 하거나 직접 방문을 해서 학원의 유명 강사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이를 그 학원에 보낸다. 아버지는 아이 교육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참으로 참담한 우리 교육의 자화상이다.
요즘에는 이르면 유치원 시절, 늦어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이들은 엄마가 추천하는 학원에 다녀야 한다. 엄마는 학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이가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하면 곧바로 휴대전화로 학원에서 보낸 알림 메시지가 온다.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면서 공부하는, 말 그대로 “공부의 노예” 생활이 시작된다.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CCTV가 설치되어 있는 학원도 있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은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는 지옥과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고 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학원으로 끌려간다. 아이가 딴짓을 하거나 한눈을 팔면 학원에서 곧바로 부모에게 동영상을 보내준다. 그 동영상을 받아보는 사람은 아이의 엄마이다. 더 이상 치마 뒤로 숨으면 자기를 보호해주던 엄마가 아니다. 엄마는 자기 생활을 감시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요즘 아이들의 거짓말은 학원과 관련되어 시작된다.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도 학원을 소재로 한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했던 거짓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어느 날 학원에 가지 않고 공원에서 친구들과 놀았어요.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학원에 가기가 싫어서 아픈 척하고 심하게 기침을 했어요.”
“학원에 가기 싫어서 일부러 학교에서 늦게 집에 왔어요.”
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거짓말은 그렇게 일찍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생의 엄마는 아이들의 성적표에서 100점을 맞은 과목이 아니라 100점을 받지 못한 과목에 먼저 눈길이 간다. 그러고는 묻는다. “이 과목에서는 무엇을 틀렸니? 이 과목은 왜 100점을 받지 못했니?” 아이들은 100점을 받은 과목에 대한 칭찬을 기대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에서 성적표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엄마는 100점을 받지 못한 과목에 대한 질책만 할 뿐이다. 이제 모든 과목을 100점을 받지 못하면 성적표를 내밀기가 겁이 난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적표를 위조하기 시작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의 성적표 위조 기술은 발전하게 된다.
엄마는 아이들의 공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아이들의 성적을 기록한다. 아이들의 학원 가는 시간을 체크한다. 아이들은 종일 공부를 하고 지쳐서 집에 돌아온다. 그 아이에게 엄마는 끝내지 못한 공부를 시킨다. 오늘 배운 것을 복습하라고 한다. 내일 배울 내용을 예습도 하라고 한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더 이상 힘들고 지칠 때 찾아가는 안식처가 아니다. 잠시 친구들과 놀러 나갈 때도 엄마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아도 엄마의 질책이 무서워서 공부방에 들어간다. 공부방에서 책을 펴놓고 있으면 아무 말이 없다. 그래서 공부방에서 친구들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발자국 소리가 나면 책을 보는 척한다. 그렇게 아이는 엄마와 속고 속이는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엄마 잃은 아이들
엄마를 잃은 아이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심각하고 다양한 청소년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잘 자라던 청소년들이 갑자기 가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집에서 엄마를 잃었기 때문이다. 가출하면 잃어버린 엄마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곳에는 자기를 받아주는 친구들이 있다. 자기 말을 들어주고, 좀 빗나간 행동을 해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점 받은 윤리 성적을 보고 규율 반장이라고 불러준다. 영어 시험에서 점을 받았는데 영어 선생님이라고 받들어준다. 집에서는 엄마에게 보여주지도 못한 성적표이다.
아이는 친구들에게서 엄마의 품을 기대하고 가출한다. 그러나 엄마가 아님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곳에 엄마가 있을 리 없다. 우리가 키우는 아이도 유일한 존재이지만, 그 아이의 엄마도 한 사람밖에 없다. 밖으로 나가서 아무리 엄마를 찾아도 엄마는 집에 있는 한 사람뿐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도 없다. 다시 돌아가도 내가 찾는 엄마가 있는 곳이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그만 어정쩡하게 친구들과 머물다가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웠던 엄마의 품을 찾아서 나간 곳에는 엄마가 없다.
최근에 우리는 아이들에 대한 충격적인 뉴스를 자주 접한다. 중학생 때부터 모의고사 전국 석차가 4000등 안에 들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던 고등학생이 자기 엄마를 살해했다. 가출했던 아버지가 개월간 집 안에 방치되었던 시신을 발견했다. 이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동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전국 1등을 해서 법대에 들어가라는 엄마의 강제적 요구에 버틸 수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엄마는 전국 상위권을 원했지만 아이의 성적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아이는 성적을 전국 62등으로 고쳐서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는 어느 날 엄마가 학교를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거짓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엄마를 살해했다. 좋은 성적을 바라는 엄마의 폭력과 폭언이 원인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감시자가 된 엄마에 대한 불만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출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잊혀지기도 전에 중학교 2학년 학생이 “곰인형과 아이팟을 함께 묻어주세요”라고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전체 유서를 읽어보면 매우 정상적인 사고와 꿈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원에 보냈다. 이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1학년 성적이 상위 30% 수준으로 처지기 시작했다. 2학년이 되면서 성적은 중위권으로 하락했다. 그 아이는 선행교육을 통해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영어 원서를 읽어냈다. 그 아이의 책꽂이에는 독일어 책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마음먹은 대로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는 중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밤 12시까지 공부도 했다. 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래서 아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자살을 해야 했을까?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자살을 한다면 한국의 중학교에는 몇 명의 학생이 남아 있을까? 공부는 노력한 만큼 늘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더구나 중학생은 학교 시험의 방향을 모를 수도 있다. 시험 공부의 요령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성적이 오를 수도 있다. 물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적이 제자리에 머물 수도 있다. 아직 학교 공부와 맞지 않는 아이들이다. 성적 때문에 아이들이 자살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중학교에서 아이의 성적이 나쁠 수도 있다. 그때 부모는 좋은 성적을 원해도 고등학교에 가면 성적이 오를 것이라고 격려를 해주어야 한다. 아이가 공부와 맞지 않으면 아이와 함께 다른 방향을 찾아볼 수도 있다. 아이가 가진 재능을 찾아보고 남보다 뛰어난 분야로 아이를 이끌어주면 된다.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당장 받아오는 성적표로 아이들을 평가할 이유가 없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화가 날 수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엄마가 나서서 아이를 질책하면 아이는 누구에게 갈까? 엄마는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다. 그런데 그 엄마가 나서서 자기를 옥죄고 들면 아이는 얼마나 참담할까?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다가가서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준다면 아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우리의 엄마들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얘야! 공부가 밥 먹여주는 것 아니란다”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만 해주고 다독여준다면 아이들이 과연 자살을 할까?
살아 있는 자식이 낫다
학교에는 자살 충동을 느끼는 중학생이 부지기수 존재하고 있다. 지금도 자살을 생각하면서 자살 사이트를 검색하는 아이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이들은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공부에 지쳐 있다. 1년에 네 번 치는 중간・기말 고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에서는 시험 성적이 표기된다. 아이들은 그 성적표를 보고 있을 엄마의 얼굴을 떠올린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엄마가 미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자신을 키워준 엄마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있는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도 가지고 있다. 아이들도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엄마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가장 기뻐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험이 다가오면 온 힘을 다해서 공부를 한다. 중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자기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약속도 취소하고 평소에 보던 드라마도 보지 않고 거실에서 숨죽이고 있는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을 때에도 유서에는 항상 엄마에게 고맙다고 쓴다. 그들은 정말로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왜 인생의 출발선에 선 아이들에게 그렇게 큰 부담을 주는 것일까? 그들은 이제 겨우 초등학생, 중학생이다.
모든 엄마가 아이에게 학습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니다. 많은 아이들은 진정한 엄마의 손길을 느끼면서 자라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진정한 엄마의 길을 끊임없이 막아서고 있다. 세상이 엄마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절대적인 세계로서의 엄마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엄마들은 ‘21세기는 글로벌 경쟁 시대’, ‘이 시대 엄마의 역할’과 같은 자극적인 말을 듣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초등학교의 성적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이의 일생이 결정된다고도 쓰여 있다. 그래서 엄마들은 이성에 반해서 아이 교육을 시작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엄마는 아이 교육에서 뒤처지려 하지 않는다. 아이 교육의 경쟁에 뛰어든 이상 옆집 엄마에게 뒤떨어질 수 없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들이 보내는 한두 개의 학원에 보내지만, 다른 엄마들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점점 불이 붙기 시작한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못할 것이 없다. 내 아이도 피아노, 태권도, 미술학원에만 보낼 일이 아니다. 남들이 보내는 영어, 수학 학원에도 보내야 하고, 과학 영재 수업도 듣게 해야 한다. 다른 부모들이 아이를 특목고에 보낸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국제중학교, 외국인학교라고 포기할 일도 아니다. 이렇게 엄마들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 헌신적인 아이 교육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엄마들은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기꺼이 이 길을 선택한다. 유치원 시절부터 사교육을 시키는 길은 엄마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아이 교육을 위해서 엄마의 생활을 헌납해야 한다. 경제적인 출혈도 감수해야 한다. 엄마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이 길을 선택한다. 그런데 이 순수하고 숭고한 선택이 아이들에게서 진정한 엄마를 빼앗아가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아이들은 소위 ‘엄친아’들과의 비교에 시달린다. 학교 성적에 목매는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된다.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았을 때 엄마를 찾을 수가 없다. 엄마가 아버지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신 맞서주던 엄마가 아니다. 지금은 아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엄마가 되었다. 이렇게 아이들은 엄마를 잃었다.
공부도 못하고 속도 썩이지만 부모 앞에서 살아서 얼쩡거리는 자식이 더 낫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이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이다. 우리는 자식을 잃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부모들이 먼저 깨달아야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집에서 잠만 자고, 공부할 시간에 만 보고 있어도 가출해서 소식도 모르는 자식보다 낫다. 게임만 하고 있어도 집에 있는 자식이 낫다. 아침이 되면 학교에 가고 돌아오면 인사를 하는 자식의 소중함을 잃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조기
영어 교육이
독약이다
영어가 독약이다
언젠가 영어교사를 대상으로 한 특강 자리에서 한 영어교사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교사의 6살 된 아이는 목동에서 영어 전문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푸념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이가 다니는 학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는 단어 시험 때문에 정말 짜증이 난다. 매번 단어 5개씩 시험을 보는데 영어교사인 자기가 집에서 정말로 시달린다. 시험 전에 단어를 가르쳐야 하는 것은 물론, 시험에서 1개라도 틀리면 같은 반의 엄마들에게 소문이 금방 돌기 때문에 만점을 받지 못하면 아이 엄마가 난리가 난다. 그것 때문에 집에서 아내와 갈등을 겪고 있으며,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도대체 왜 시험을 보는지 알 수가 없다.’
그 교사는 그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나는 강의에서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그러한 갈등을 겪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여섯 살 된 아이가 일주일에 5개의 단어를 배우고 암기해도 1년이면 280개에 불과하다. 그 단어들 중에 분의 를 기억한다고 하면 대략 190개의 단어를 아이가 학습하는 것이다. 물론 시험에 나오는 단어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양보해서 1년에 300개의 단어를 익히고 그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을 배운다고 치자. 이를 위해서 아이는 일주일에 5일씩 아침부터 학원에 간다. 점심도 학원에서 먹는다. 이를 위해 엄마는 아빠가 벌어오는 월급의 1/4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경제적인 부담, 영어 교육으로 인한 부모들의 갈등과 다툼은 엄마가 한 선택이니 논외로 하자.
유치원생을 영어 전문학원에 보내면 집에서는 위와 같은 일이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부모들은 아이의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 그 시험을 보고 있는 아이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상상이라도 해보았는가? 아이는 부모보다 10배, 100배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할 뿐이다. 그 아이는 스트레스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학원에 보내주었다. 엄마에게 잘 보이려면 학원에 열심히 다녀야 한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싸움을 하지 않도록 아이는 100점을 받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아이는 100점을 받으면 쉴 수 있다. 집에서 그 지겨운 영어 공부를 엄마와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아이는 한 문제도 틀리지 않기 위해 영어 단어를 외운다.
아이를 일반 유치원에 보내는 부모들도 아이의 영어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유치원에서 영어는 특별한 아이들이 배우는 과목이 아니다. 일반 유치원에서도 영어는 필수 과목이 되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자녀 교육에 열성적인 부모들은 아이들을 일반 유치원에 보내지 않는다. 두세 배의 비용을 감수하고 영어유치원에 보낸다. 영어유치원에서는 원어민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일반 유치원에서도 원어민 영어 교육이 보편화되는 추세이다. 영어유치원에서 내건 슬로건에는 ‘아이비리그의 시작’이라고 쓰인 것도 있다.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도전할 고등학생이 다니는 학원이 아니다. 아직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유치원생이 대상이다. 아직 영구치로 이갈이도 하지 않은 유아들이다. 유아들은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영어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쓰는 말인지도 모른다. 배운 영어를 사용해본 적도 없다. 그냥 엄마가 학원에 데리고 갔고, 거기에 갔더니 영어라는 말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아이들은 영어로 말을 해야 한다. 언어는 생존에 필요한 의사소통의 한 수단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영어를 배우고 있다. 재미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전문적인 학원에서 매일 원어민에게 배운다. 유치원 아이들이 왜 영어를 배우고 있을까?
21세기 들어서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세계화 시대, 그리고 치열한 글로벌 경쟁 시대에 ‘영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말은 옳다. 아이들이 맞이해야 하는 미래는 지금보다 치열한 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킬 책임도 있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 방법과 시기에 문제가 있다. 5세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이들이 학원에서 배우는 영어 단어는 2,000개 수준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쓰고, 읽는 책들도 이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이것이 5세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13세까지 학습하는 총량이다. 그런데 이것을 유치원 시절부터 배울 이유가 있을까? 영어 단어 ‘apple, banana, ask, take …’를 5세의 아이가 굳이 일찍 배워서 9년간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초등학교 3학년, 아니면 6학년을 졸업하면서 배워도 중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다.
왜 조기 영어 교육이 독약일까?
영어는 모국어와 달리 창의적, 비판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과목이 아니다. 모국어는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 3-4세까지 아이들이 배우는 한국어의 어휘 수는 많지 않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단어를 배우면서 단어의 개념을 함께 습득한다. 이를테면 ‘나무’라는 말을 배울 때는 나무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습득하고 파악한다.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거나, 만질 수 없는 ‘사랑, 생명, 열정’과 같은 어휘를 추상명사라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들은 모두 추상화된 개념이다. 아이들이 배우는 한국어의 ‘나무’라는 어휘도 추상적이다. 아이들은 소나무, 참나무, 전나무, 단풍나무를 수없이 보면서 ‘나무’의 일반적인 특징을 체득한다. 아이는 ‘나무’를 ‘뿌리, 줄기, 잎으로 구성된 식물’로 기억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나무를 ‘나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것이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이다. 영어를 학습할 때는 이러한 추상화의 과정이 필요 없다. 아이는 모국어에서 습득한 ‘나무’의 개념을 영어의 ‘tree’로 대체하면 끝이다.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거친 복잡한 과정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이것이 모국어와 외국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한국어의 ‘경험’이라는 어휘를 모르는 아이에게 영어 단어 ‘experience’를 가르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이는 발음을 할 수는 있지만 학습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마치 앵무새가 단어 몇 개를 발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앵무새는 발음을 할 뿐이다. 앵무새의 머릿속에 ‘사과, 나무, 감자’의 개념은 없다.
영어는 수학처럼 기초를 공부하고, 상위 단계에서 그것을 응용하는 과목이 아니다. 수학에서는 덧셈, 뺄셈을 배우고 곱셈, 나눗셈을 배워야 한다. 덧셈의 원리를 알아야 곱셈의 원리를 깨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곱셈과 나눗셈을 알고 있어야 중학교에서 배우는 인수분해를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수학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초를 다지지 않으면 상위 학년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영어는 기초를 알아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목이 아니다. 단어를 배울 때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 모국어에서 습득한 개념이 있으면 ‘apple, banana’와 ‘passion, evidence’도 동시에 학습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장과 원서를 읽음에도 기초와 고급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학 서적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고 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알고 있다면 영어로 경제학 책을 읽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기에 영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없다. 13세에 영어 단어를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5세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7세 이전의 지적인 학습이 아이의 지적인 성장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조기에 영어 공부 하느라 배우지 못한 수영, 운동을 성인이 되어서 배우기는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만들어가는 추억,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는 시기를 잃으면 되찾을 수 없다. 부모는 아이들이 성장해서 성인이 되면 퇴장한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독자적으로 세상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성숙을 이끌어줄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초등학교 2학년 이전 시기의 영어 교육은 그래서 아이들에게 독약이 될 수 있다. 부모는 그 시기에는 영어가 아닌 한국어 교육에 치중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육체적 감각을 키울 수 있는 운동과 놀이를 할 수 있도록 부모가 배려해야 한다.
글로벌 경쟁력의 본질은 영어가 아니라 창의적, 비판적 사고이다. 창의적인 사고를 통해 아이들은 미래 사회에 필요한 것을 생각해낸다. 창의적, 비판적 사고의 원천은 모국어이다. 글로벌 경쟁력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유치원 시절부터 영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없다. 유치원에서 영어 조금 배운다고 미래에 인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창의적인 인재라면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그를 도와줄 수 있다. 영어가 먼저가 아니다. 우리 아이는 글로벌 인재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이가 될 수도 있다. 성인이 되어서 영어를 쓰지 않는 직업에 종사할 수도 있다. 조기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아이들이 보낸 시간과 스트레스는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영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부모와 학원이 심어준 논리이지, 아이의 머릿속에서 형성된 논리가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의 의지를 반영해서 주도적으로 영어 학습을 하지 않는다. 엄마들은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이에게 영어 학습이 놀이보다 재미있을까?
한 달 만에 완전히 잊혀진 핀란드어
우리 아이는 4년간 핀란드의 유치원을 다녔다. 핀란드에서 지낸 시간이 4년이 되던 무렵 아이의 핀란드어 실력은 같은 또래의 핀란드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 정도로 핀란드어를 하면 원어민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핀란드어는 여전히 외국어이지, 모국어는 아니었다. 이는 아이가 또래 아이들, 그리고 성인들과 핀란드어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 거리낌이 없을 뿐이었다는 의미이다. 어린 아이들의 외국어 능력은 성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이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핀란드어로 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저녁 종합 뉴스를 듣고 이해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아이의 핀란드어 말하기는 한국에서 년 정도 학원을 다닌 아이들의 영어 구사 능력을 앞지르는 수준이었다고 판단된다.
내가 핀란드에서 귀국했을 때 우리 아이의 나이는 만으로 일곱 살이었다. 나는 학위논문을 준비하느라 집에서 아이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언어를 배운다. 그래서 가능하면 같이 뛰어놀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어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에서 새롭게 적응하는 데 아이는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어의 어휘들을 가끔씩 설명해주는 것은 필요했다. 그렇다고 따로 한국어 공부를 시키지는 않았다. TV 보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는 TV를 보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한국어 어휘를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귀국 이후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같이 밥을 먹다가 우연히 핀란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때까지 한국에 돌아온 후 우리는 집에서 핀란드어를 쓴 적이 없었다. 나는 불쑥 아이에게 핀란드어로 간단한 질문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녀석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을 했고, 다시 한 번 핀란드어로 간단한 인사말을 하면서 대화를 유도해보았다. 그런데 아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에게 핀란드어로 ‘하나, 둘, 셋’을 해보라고 했다. 아이는 핀란드에서 거의 매일 사용했던 ‘yksi, kaksi, kolme’라는 단어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놀랐다. 핀란드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사용하던 아이가 불과 한 달 만에 ‘하나, 둘, 셋’마저 잊었다니! 그 단어들만 잊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핀란드어 단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핀란드어는 까마득하게 ‘잊혀진 언어’였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간단한 인사말, 자주 사용하는 단어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만에 기초 어휘까지 망각했을 것이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에서 지워진 핀란드어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나의 외국어를 잘하던 아이였다. ‘귀국해서 집에서 한 시간씩만 핀란드어를 사용했다면 지금도 핀란드어를 잘할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아직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닐 테니 회복시켜볼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런데 곧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한국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는 핀란드어를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필요하면 나중에 다시 배우면 된다. 아이의 인생에서 핀란드어는 평생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핀란드어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아이에게는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일, 고민해야 할 다른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우리 아이의 핀란드어 능력을 회복시키는 일을 깨끗하게 포기했다. 그 이후로도 집에서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우리 가족의 대화에서 핀란드어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가끔씩 아내와는 핀란드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저 우리가 아직 핀란드어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에 불과하다. 그 대화는 핀란드어를 연습하거나 유창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외국어에 대한 나의 태도를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언어학을 전공한 학자이고, 마음만 먹으면 아이의 귀중한 외국어 실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는데 이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아이의 교육에 관심이 없다고 비난을 할 수도 있다. 혹자는 만약 핀란드어가 아니라 영어였다면 그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자신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만약 내가 영어권에서 유학을 해서 아이가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 있었다면 글자를 가르치고 책을 읽히면서 그 능력을 유지시켰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아이가 했던 외국어가 영어가 아니라 핀란드어라서 무시하고 내버려둔 것이 아니다. 영어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나 핀란드어는 한국에서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가치로 따지자면 영어보다 핀란드어의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소중할 수 있다. 핀란드어를 포기한 이유는 아이에게 핀란드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가 사용할 기회도 없는 언어였다. 그래서 아이가 핀란드어를 잊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나의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또는 유지하기 위해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외국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성인도 참아내기가 쉽지 않다. 당장 외국인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문서를 쓰는 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에 다가올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외국어를 계속해서 배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왜 아이가 그렇게 빨리 모든 것을 잊었을까? 따로 실험을 해볼 수는 없었지만 글자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핀란드에서 글자를 가르치고 책 읽는 훈련을 했다면 그렇게 빨리 핀란드어를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핀란드에서는 유치원에서 글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없다. 외국어 학습에서 글자의 중요성을 한번쯤 생각하게 한 사건이다. 그런데 글자를 배워서 책을 읽었다고 해도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까? 책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의 시간이 조금 연장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언어를 아이가 기억할 것이라는 기대는 부모들의 생각이다. 생존의 문제가 걸리면 아이들은 기억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이들이 외국어를 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아이만 한 달 만에 외국어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외국에서 성장한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영어, 일본어를 했던 아이들도 한 달이면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한국의 제한된 환경에서 배운 영어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이러한 특성을 지닌 외국어 교육, 영어 교육에 그렇게 몰두할 필요가 있을까? 영어가 아니라 좀더 근본적인 것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내가 아이와 핀란드어를 다시 하게 된 것은 대학 강의실에서였다. 아이가 내가 맡은 핀란드어 강의를 신청했던 것이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는 아이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한때 핀란드어를 잘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이는 다른 학생들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처음으로 핀란드어를 접하는 학생들과 비교해서 읽기, 말하기, 쓰기 그 어느 영역에서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어려서 외국어를 하면 성인이 되어서 다시 배울 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는 항간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이론은 전혀 근거가 없다. 어릴 적 원어민 수준! 대학생이 되어서 소용이 없었다.
영어 교육은 초등학교 3학년이 적기가 아닐까?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배웠다. 나는 아이의 영어 학습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아이가 영어를 배운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 집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영어로 말을 한 적도 없다. 아내가 초등학교에 ‘방과후 수업’ 영어 교사로 강의를 나갈 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도 많은 학부모들이 영어 공부를 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학원에 보냈다. 아마도 아내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남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 정작 내 아이는 영어를 전혀 못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의 학습 관련 교육은 내게 맡긴다는 원칙은 그대로 지켜졌다. 나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우리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형편없이 처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중학교부터는 영어를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정규 수업 시간에도 영어의 비중이 높아진다.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3개월간 영어 공부를 했다. 나는 아이에게 발음기호를 가르쳐주었다. 혼자서 영어 단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를 암기하라고 했다. 그 단어들은 모두 합쳐도 1,500개를 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만 집중력을 가지고 공부하면 한 달이면 충분히 외워낼 수 있는 양이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는 영어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말해보라고 했다. 아이는 짧은 기간 영어를 공부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다른 아이들에게 현저하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특별히 영어에 흥미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영어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엄마들에게 영어 교육을 중학교 입학 전에 시키라고 권고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 교육을 시작한다. 내가 아이에게 초등학교 시절에 영어 학습을 시키지 않은 이유는 부족한 한국어 능력 때문이었다. 영어로 된 책을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다면 영어 교육은 무의미하다. 우리 아이의 한국어 능력은 다른 아이에 비해서 부족했다. 핀란드에서 자란 4년의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도 초등학교 3학년 이전에는 영어 교육을 권장하고 싶지 않다. 초등학교 3학년 이전의 영어 학습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아이들은 그 시기까지는 한국어에 집중할 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영어는 외국어이다. 외국어 학습은 아이들의 창의성과는 무관한 과목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영어를 잘한다고 알려져 있다. 모든 핀란드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핀란드에서 영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를 선택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1-2학년 시기에는 모국어인 핀란드어 학습에 몰두한다. 유치원 시절에 배우지 못한 글자도 그때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그 시기에는 핀란드어 교육이 강도 높게 이루어진다. 전체 수업 시간의 절반이 핀란드어 수업으로 배정되어 있다. 외국어 학습에 왜 모국어가 중요한가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영어 학습의 시기를 3학년으로 권장하는 이유가 반드시 모국어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들의 영어 학습은 조금 늦어도 학습에 대한 흥미만 있다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실제로 초등학교에 수학 과목의 학습 지진아는 있어도 영어 과목에는 없다는 보고가 있다. 영어 조기 학습이 아이들의 두뇌, 창의력, 사고력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찍 영어를 배워서 잘하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어진다. 일찍 배웠다는 이유로 끝까지 영어를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일화가 있다. 영어 교육 관련 TV 프로그램에 섭외되어 녹화를 하러 갔다가 방청을 온 목동의 한 엄마로부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가자 영어가 혐오 과목이 되었답니다. 지금은 영어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해요.”
질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왜 중학생 아이가 영어를 싫어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다시 영어에 흥미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초등학교 다닐 때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영어 학원도 6년이 넘게 다녔다. 그들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영어에서는 뛰어난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영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 할 중학생이 되었는데 왜 영어를 혐오 과목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아이들마다 특성이 다르다. 그래서 조기 영어 교육을 받고 영어를 좋아하게 된 학생들도 있지만 반대로 영어를 싫어하게 된 학생들도 있다. 중학생이 되어서 영어를 싫어하는 학생들은 자유의지로 학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관심을 가진 분야의 책이나 기사를 영어로 읽어보기 위해 학습을 하지 않았다. 그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배웠던 영어를 사용해본 기억도 없다. 오직 학원에서만 사용하는 괴물과 같은 말을 배웠을 뿐이다. 시험을 보는 요령도 배웠다. 그들은 엄마가 권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에도 응시했다. 하지만 그 시험을 왜 보았는지 알 수도 없다. 영어를 배우면서도 늘 자신의 실력을 측정하는 시험에 시달렸다. 학원에서는 단어, 듣기, 독해 시험에 시달리면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서 되돌아보면 남은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영어 공부가 싫어진 것이다.
영어에 싫증을 낸다고 아이들을 다그칠 일이 아니다. 실제로 어른들도 영어 학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가능하면 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성인들도 해외 파견 근무와 같은 명확한 동기가 없으면 영어 공부에 실패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화 영어도 신청해보고 회화학원에 등록도 하지만, 끝까지 마무리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3개월의 코스를 끊고 초기에 1-2주, 길어도 1개월만 다니고 중단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개월 동안 학원을 다녀도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외국인과 매일 만나서 대화를 하지 않는 한 회화 실력은 크게 향상되지 않는다. 학원을 다니면서 영어 실력이 느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소수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만이 성공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에 포기하거나, 끝까지 학원을 다녀도 나아지지 않는다. 성인들은 영어의 중요성을 아이들보다 더 잘 안다. 영어 학습의 목적이 분명하고, 다급한 현실에 직면한 사람들만이 성공한다.
우리 사회에는 아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부모가 있다. 해외에서 근무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경우이다. 외교관, 해외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직장인, 1-2년간 연구 활동을 하는 교수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강요하지 않고도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언뜻 선택받은 부모들이고 축복받은 아이들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들에게 축복만은 아니다. 그 아이들이 영어를 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그 시기에 한국에서의 교육을 받을 수 없다. 얻는 것이 있지만 잃는 것도 있다. 부모들은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조기유학, 어학연수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기유학과 어학연수를 보내서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교육의 차원을 떠나서 아이를 한국의 명문 대학에 보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렇게 무리한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 한국에서 교육을 해도 수능 시험 1등급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수능 시험 1등급을 받기 위해서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칠 필요도 없다. 적절한 시기에 효율적인 영어 공부를 시키면 된다.
영어는 유치원 시절부터 단어 10개씩 외운다고 잘할 수 있는 과목이 아니다. 차리리 중학생이 되어서 정신적, 육체적인 준비가 되었을 때 3개월 정도의 집중적인 훈련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기간에는 다른 과목의 공부의 비중을 줄이고 영어에 몰두하도록 배려를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시간은 많다. 거의 매 학기 치르는 중간, 기말고사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중학교 시절 한 학기라도 영어 학습에 몰두하면 10년간 학원에 다니면서 배운 것보다 잘할 수 있다. 짧은 기간 동안 학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문장 분석을 할 수 있는 영문법 교육은 필요하다. 아이들 스스로 영어 학습을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1-2학년을 거치면서 한 번 정도의 방학 기간은 영어 학습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외국어는 한 번 학습했다고 마무리가 되는 분야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듣고, 읽고, 말하고 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외국어 학습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조기 영어 교육을 반대하는 이유도 이러한 외국어 학습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영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영어 학습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다면 시작 시점을 가능하면 늦추자. 아이들의 불필요한 노력과 시간 허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모국어는 생명이다 한국어를 지켜라
우리 아이는 30개월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자랐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걷고 뛰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가장 중요했던 한국어 습득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핀란드에서 살아야 한다는 특별한 변수가 생겼다.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했다.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이가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이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모국어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아이는 이제 막 한국어를 습득했다.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한국어를 지켜주는 일은 쉽지 않다. 모국어는 아이에게 생명이다. 모국어를 잃으면 정신적인 생명을 잃는다. 외국어는 필요하면 배우면 된다. 그러나 모국어는 제때에 습득하고 유지하지 못하면 언어의 미아가 된다. 모국어가 없으면 사고를 할 수 없다. 아이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한국어를 잃으면 아이는 정체성이 없어진다. 아이는 한국어를 통해서 자기의 뿌리가 한국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나는 유학 첫날부터 집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집에서 아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핀란드어 사용할 수 없었다. 유학 초기에 유치원 교사가 언어 문제로 아이가 유치원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교사는 본인이 나에게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나는 고민 끝에 그 제안을 거부했다. 대신 내가 직접 유치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핀란드어 문장 여 개를 아이에게 가르쳤다. 그 이후로 아이는 유치원에서 핀란드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어떤 방법으로든 핀란드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부족한 핀란드어 능력이 아이에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아이가 집에서 핀란드어를 배운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이었다.
아내는 아이에게 한국에서 가지고 온 책을 매일 읽어주면서 한글을 교육해보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가 가르쳐준 한글을 익히지 못했다. 아이가 책장을 넘기면서 ‘거북이, 토끼, 사자’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아이는 글자를 보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림을 보고 귀로 들었던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핀란드 유치원에서는 글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나도 초등학교 입학 이전의 글자 교육에 반대한다. 결국 아이는 한글을 깨치지 못했다. 아내와 나는 끊임없이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가 읽어준 책 내용을 아이에게 설명해보라고 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많은 노력을 했지만 아이의 한국어 지키기는 3년이 지나면서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아이는 집에서 핀란드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문장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의 문장 구조에 핀란드어 단어를 채워넣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6세가 되면 친구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이는 유치원이 끝나면 이웃집의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당연히 핀란드어로 이루어졌다. 아이에게 핀란드어가 한국어보다 더 편안한 언어가 되기 시작했다. 금지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아이의 모국어 지키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대사관과 KOTRA에 근무하는 직원 가족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 집에는 우리 아이보다 한두 살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웠다. 우리 아이는 핀란드 유치원을 다녔다. 아이들이 만나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들은 이제 막 핀란드로 이사를 왔다.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면서 또래 아이들의 한국어를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유학 4년째가 되었을 때 아이의 한국어 지키기가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아이는 핀란드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7살 아이들이 구사하는 수준의 핀란드어였다. 7세의 아이는 성인이 사용하는 어휘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기의 생각을 핀란드어로 표현하는 데 불편이 없었다. 핀란드어의 복잡한 문장을 서슴없이 구사했다. 핀란드어의 관계대명사와 분사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아이는 집에서 핀란드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핀란드어 사용 금지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의사 표현을 한국어보다 핀란드어로 더 쉽게 했다. 단순히 집에서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해서 해결될 수 있는 시기를 넘어섰다. 아이는 핀란드어로 하는 질문에 응답을 하지 않는 나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아빠는 내 말을 이해 못 해? 아빠는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 모르니까 말을 안 하는 거지?”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었다. 실제로 아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아이들 세계에서 사용하는 독특한 어휘들이 있었다. 아이들만 사용하는 은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의 말을 한국어로 다시 표현해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반복시켰다. 그렇게 해서라도 모국어를 지켜주어야 했다.
만약 핀란드에서 1년을 더 머물렀다면 아이는 핀란드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핀란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아이의 한국어 지키기는 실패했을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아이가 6세가 되면 에시꼬울루(esikoulu, 취학 전 년 교육 프로그램)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학교 교육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마련된 제도이다. 우리 아이도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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