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는 말
좋은 교사가 되기를 욕망합니다
제가 바라는 교사는 ‘삶과 사유, 독서와 노동이 양립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사람입니다. 사유 안에 삶이 포섭되는 허영도, 노동 안에 독서가 파묻히는 치기도 희망의 교사를 만들 수 없습니다. 교사는 읽으면서 쓰고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당당한 주체이자 주인이지요.
기실 교사는 가르고 치는 사람입니다. 분명한 이성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고, 따뜻한 감성으로 아이들을 돌봐야(치기) 합니다. 이성과 감성의 강력한 균형이 가르치는 자들의 존재론이지요. 참 어렵습니다. 까다롭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요. 이론과 실천을 고르게 버무려야 하기에 대단한 인내도 필요합니다. 보상도 별로 없습니다. 보람 또한 대단하지 않지요.
그렇지만 교사는, 희미한 희망의 느낌을 향해 돌진하는 무모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초인)야말로 교사의 롤모델이겠지요. 초인이란 스스로 대견해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요. 소문에 이끌리고 세속에 찌든 범인들은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없습니다. 참다운 교사는 참다운 인간입니다. 배우고 익히는 기쁨은 그 어떤 보람보다 좋습니다.
해서 이 책은 좋은 교사가 되기를 욕망하는 젊은 교사의 욕망 분출기입니다. 제대로 된 교사가 되기 위해 썼습니다. 쓰는 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글쓰기처럼 훌륭한 배움도 없지요. 기쁜 나날들이었습니다. 다시 만들고 싶을 짜릿한 경험이었지요. 행운입니다. 배움의 씨앗들이 이렇듯 완성의 열매가 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희망
희망을 실천하라 !
“단순해요. 선생님들은 말만 잘하시잖아요. 세상은 참 어려운데 희망을 가지라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유토피아 교과서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건강, 행복, 사랑, 교감, 나눔, 배려, 평화 등의 따뜻함을 배울 수 있는 교과서. 물론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편한 상상이기도 하지요. 기실 삶이란 이상이 아닌 현실들의 무대니까요. 삶 속에서 유토피아는 한낮 공허한 꿈입니다. 때문에 삶을 중심으로 기획되는 학교에서 유토피아 교과서는 없습니다. 실현 불가능하니까요. 교육은 종교가 아닙니다. 공상도 아니지요. 교육이란 삶의 무대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뼈들이고 살들입니다. 따라서 삶과 유리된 유토피아 교과서는 현실적으로 상상 이상의 가치는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상상 그 자체는 자유입니다. 예술가나 종교의 신도들만의 혜택이 아니지요. 무한한 상상은 상상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성인도 선구자도 아닌 일개 교사라도 유토피아를 바라고, 기획하고, 쪼개고, 다듬는 상상을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교사가 교육의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은 희망의 꽃을 상상하는 믿음입니다. 달콤하고 짜릿하지요. 비록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을 견뎌내는 힘을 줍니다. 꿈이란 이런 의미이지요.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지만 현실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아픔을 버티게 하고 내일을 희망하게 합니다.
오늘은 유토피아를 통해 교육과 교사에 대한 희망의 대화를 조금 해볼까 합니다. 분명 교사는 꿈과 현실, 절망과 희망의 사이에 존재합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탐구하는 존재’라고 하면 조금 편하게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유토피아라는 희망과 디스토피아라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아픈 현실을 고쳐보려는 시도는 우선 이런 꿈들의 선언입니다. 희망의 대화이기도 하지요. 꿈과 희망이란 오늘을 변화시켜주는 달콤함이기도 합니다.
말로만 하는 희망의 파수꾼
희망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교육자, 문화예술인 등등. 희망이란 말로 세상을 유토피아로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릅니다. 그중 유난히 희망에 대해 말이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희망을 가장 많이 말하는 존재. 그들이 바로 교사입니다. 희망의 교과서적 지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희망이란 말로 먹고 삽니다. 희망이 주는 계몽성과 시장성 덕분입니다. 희망이란 묘약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기도 하지만,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밥줄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희망 전도사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지요. 그만큼 현실이 어렵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교사는 자신을 희망의 파수꾼이라고 믿곤 합니다. 저 또한 교육이 전적으로 희망을 현실화하는 행위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희망이란 말은 참 위험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희망 예찬은 오히려 희망의 구체화를 방해하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 는 『무지한 스승』에서, 희망을 말하는 교사들의 무지를 꼬집습니다. 그에 의하면 ‘교사는 자기 학습의 조건이자 계기로만 존재’합니다. 교사는 희망을 위한 능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리만 지켜주면 되는 피동적 존재지요. 가르치는 행위가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는 매우 회의적인 주장이기도 합니다. 희망을 위해 교사는 자리만 지키면 됩니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학생들은 스스로 배웁니다. 왜일까요? 교사가 말하는 희망은 말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학생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살과 뼈가 없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새내기 교사 시절 제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무지한 스승임을 깨닫게 해준 13세의 소녀가 있었지요. 소녀는 늘 삐딱했습니다. 하루는 소녀의 삐딱함이 참 궁금했습니다. 소녀가 옆 반 교실로 간 틈을 타 일기장을 훔쳐보았지요. 일기장을 꺼내 두 장쯤 읽을 무렵 갑자기 소녀가 들어왔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저는 흥분했고 소녀는 차가웠습니다. 새내기라 풋내기였던 저는 외려 소녀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나는 선생님이야. 네 일기를 볼 권리가 있어.” 소녀의 대답은 심플했습니다. “그랬나요? 계속보세요.” 난감했습니다. 심플한 대답은 대화를 끊었습니다. 핑계조차도 소용없는 칼날 같은 공포였지요. 쑥스러웠습니다.
새내기 교사인 저는 교사의 권리만 알았을 뿐 학생인 소녀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많이 반성했습니다. 창피하기도 했지요. 만회하고 싶어졌습니다. 당당하게 “나는 교사다”라고 외치고 싶었지요. 그날 이후 소녀를 추적하게 된 이유입니다. 부모님과 몰래 만나기도 했지요.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조금씩 소녀를 이해하게 되었지요. 소녀가 엄청난 효녀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추적 결과, 소녀에 대한 주변 분들의 칭찬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빠 없이 자란 소녀는 생활 고투에 시달리는 엄마를 위해 동생들을 키우는 작은 엄마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동생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 어린 아홉 살 때부터 말이지요. 소녀가 차갑고 어른스러웠던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왜 하필 소녀는 다른 어른들에겐 친절하고 교사들에게만 삐딱했을까요? 마을 분들에게는 하염없이 상냥한 소녀가 유독 교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훔쳐본 일기에 의하면, 소녀는 교사가 말뿐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소녀에게 교사란 고달픈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존재였지요. 말로써, 말로만 먹고 사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텁니다. 때문에 소녀에게 교사는 자리만 지켜주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학교라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일종의 문지기였지요. 실천 없는 희망찬가는 이처럼 한 소녀의 생각을 삐딱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었습니다.
희망은 앎이 아니라 실천이다
이처럼 희망이란 말로서만 전이되는 방식이 아닙니다. 말뿐인 상상은 희망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녀가 그랬듯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언어는 죽은 말입니다. 고된 삶을 오히려 더 아프게 누르는 가식이 될 수도 있지요. 희망을 인식론적으로만 파악하는 교사들의 나쁜 습관은 희망에 대한 상상을 가로막습니다. 희망의 존재론적 성찰이 희망을 상상하는 근간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지요. 희망은 많이 아는 것보다 많이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니까요. 랑시에르의 말처럼 교사의 역할은 ‘스스로 지적 능력이 평등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보는 것이지요. 희망이란 실천을 위한 언어니까요.
구체적으로 교사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실천을 위한 희망찬가의 실질적 모습을 다시 상상해봅니다. 교사가 교사의 자리를 스스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교사라는 자리에 대한 반성적 재인식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이지요. 실천 없는 희망을 발설하는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이 말한 희망의 직접적인 자리를 파악하는 행위지요. 그것이 희망에 대한 상상의 윤리입니다.
존재론적 이해는 인식론적 이해보다 빨라야 합니다. 희망은 앎이 아니라 일종의 실천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조건 속에서 희망은 나눔의 행위가 되고, 교사는 희망의 파수꾼이 됩니다. 하지만 인식론에 치우치면 교사와 학생이 평등하다는 가정이 파괴됩니다. 희망을 교사 위주로 설계하게 되지요. 교사의 위치가 희망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비약까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진행된 희망은 교사를 가르치기만 하는 존재로 가둡니다. 때문에 존재에 앞선 인식은 희망을 흐려지게 하고, 교사를 무지하게 만듭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리 지키기’와 ‘말’뿐이지요. 말로만 하는 희망은 나누면 나눌수록 절망의 폭력으로 미끄러집니다. 실천 없는 희망의 역설이지요. 교사가 학생에게 조건이자 계기로만 존재하기 방식입니다. 무지란 말뿐인 앎의 다른 이름입니다.
꿈과 현실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꿈에 대한 이해방식도 비슷하게 작동합니다. 18세기 과학이 철학을 잠식할 당시 칸트 (Immanuel Kant) 는 매우 ‘파괴적인 방식’으로 실천적 희망을 구축합니다. 철학의 상상을 위해 과학을 적화하기보다 과학을 융합하여 새로운 철학을 창조하겠다는 의지였지요. 칸트의 놀라움은 적을 벗으로 승화할 수 있는 지점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기반을 스스로 창조하는 능력이었지요. 재창조의 정신은 이처럼 상생의 상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칸트에게 있어 꿈과 현실은 서로 대립된 개념이 아닙니다. 새로운 건설, 새로운 창조를 위해 엉켜 있는 융합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립이, 싸움의 명분이 아닌 건설적 융합으로 작용할 때 상상은 창조가 됩니다. 이것이 꿈과 현실, 희망과 절망을 오묘하게 사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을 불러들여 비판적으로 상상하는 힘은 그 자체로 희망적인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유토피아적 상상으로 섞어야 합니다. 융합이 현실이 될 때 유토피아는 상상이 아닌 희망의 오늘이 됩니다. 전쟁을 막는 것은 전쟁에 대한 개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에서 죽어간 그 절망적 공포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제대로 된 상상은 그 자체로 현실입니다.
서로 다른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희망적 언어가 된다는 칸트의 생각은 상상 그 이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희망과 상상을 통해 건설적 비판서를 출간했으니까요.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 탄생된 배경입니다. 근대 과학으로 무너져가는 철학에 희망을 건설하려는 칸트의 고된 투쟁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때문에 그를 읽는 것은 매우 희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칸트가 바라는 창조적 인간은 종속돼 있지만 자유로운 인간(판단력 비판)입니다. 매우 역설적인 존재지요. 종속과 자유의 대립을 두루 섞어 인간학을 재정립하고, 인간의 희망을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 희망과 상상은 일종의 접착제입니다.
희망을 말하는 최전선인 학교에서도 우리는 칸트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소모적 대립에서, 비판적 상생으로 교사들은 자기 존재를 다시 써야 합니다. 희망은 대립을 창조적 건설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희망의 이름으로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상상해야 합니다. 새로운 건설을 위해 비판의 융합을 결행해야 합니다. 희망이란 일종의 비판적 힘들의 모임이기도 하니까요.
희망을 실천하라!
일기 훔쳐보기 사건 이후 저는 소녀를 꾸준히 따라다녔습니다. 매일 귀찮게 하며 교사에 대한 절망의 시선을 바꾸려고 애썼지요. 제 허기진 노력을 불쌍히 여겼는지 어느 날 소녀는 마음을 열었습니다. 속을 털어놓고 교사를 불신했던 이유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단순해요. 선생님들은 말만 잘하시잖아요. 세상은 참 어려운데 희망을 가지라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또박또박 말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소녀의 절망적인 말 속에 희망의 싹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사는 희망을 말하기보다 희망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교실이 절망적이라고 회의하는 사람은 교사로서 자질이 없습니다. 절망 속에 피는 꽃의 아름다움을 애써 찾으려는 행위가 교육이니까요.
삐딱 소녀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현실이 어려워 대학을 다 마치진 못했답니다. 며칠 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여군이 되었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왠지 고맙고 마음이 짠했지요. 자신이 빠진 절망의 늪에서 스스로 희망을 배우는 한 소녀의 열정을 보고 희망의 진짜 의미를 배웠습니다. 절망의 그늘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현실을 개혁하는 의지의 논리 같은 것이지요. 절망이 행운이 되는 지점입니다. 교사들은 이 지점을 스스로 학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와 안정만이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지요. 희망이 드러나는 조건은 절망입니다. 절망의 늪에서 희망이란 꽃은 더 아름답습니다.
다시 유토피아 교과서를 상상합니다. 만약 교과서가 만들어진다면, 첫 장엔 아름다운 말과 함께 인류가 저지른 잘못들이 화보로 들어 있었으면 합니다. 랑시에르가 지적하고 칸트가 실천했듯, 교사에게 희망은 절망의 현실을 새로 보는 정신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의 교과서를 쓰는 행위이지요. 파괴적이고 위험하지만 실천적으로 희망을 상상하는 자리입니다. 내일의 아이들에겐 꼭 절망에 좌절하지 말라고 타일러주고 싶습니다. 절망의 오늘이 희망의 내일을 위한 위대한 상상이었다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외쳐야 합니다. 그래요! 희망, 바로 그것이지요.
(본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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