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閱讀
나는 책이 없는 시대에 성장했다. 때문에 내 독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내 기억을 정리하다보면 뜻밖에도 서로 다른 이야기 네 개가 내 최초의 독서에 관해 말해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번째 이야기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여름방학의 일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1973년이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7년째로 접어들고 있었고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일상적인 일이 되어 있던 무투武鬪,문화대혁명 당시 서로 다른 조반파 사이에 벌어졌던 무장충돌와 야만적인 가택수색이 지나간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 잔혹한 행위들도 이제 지친 모양이었다. 내가 살던 시골의 작은 마을은 질식할 것처럼 억눌린 안정과 정돈의 상태에 진입해 있었고 사람들은 더욱더 조심스럽게 근신하고 있었다. 광고와 신문에서는 여전히 매일 대대적인 계급투쟁을 떠들어댔지만 나는 이미 아주 오랫동안 계급의 적을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무렵 우리 마을 도서관이 다시 문을 열었고 우리 아버지는 나와 우리 형을 위해 도서대출증을 만들어주셨다. 이리하여 나는 무료하기만 한 여름방학에 할 일이 생겼고, 이때부터 소설을 즐겨 읽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문학작품이 독초毒草였다.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 발자크 같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독초였고, 바진巴金이나 라오서老舍, 선충원沈從文 같은 중국 작가들의 작품도 독초였다. 마오쩌둥과 흐루쇼프가 서로 적이 되어 대치하는 바람에 소비에트연방 시기의 혁명문학도 독초가 되었다. 대량의 장서들이 독초로 간주되어 사라지고 난 뒤에 다시 문을 연 도서관에는 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소설이라고는 20여 종 남짓이었고, 하나같이 국내의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문학이었다. 나는 이런 작품들을 전부 한 번씩 통독했다. 『화창한 날陽天』을 비롯하여 『금광대도金光大道』 『우전양牛田洋』 『홍남작전사虹南作戰史』 『새 다리新橋』 『광산풍운鑛山風雲』 『흩날리는 눈 속의 봄맞이飛雪迎春』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별閃閃的紅星』 같은 작품이 전부 이런 혁명문학에 속했다. 당시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책은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별』과 『광산풍운』 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두 소설의 주인공이 어린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독서는 그 이후의 내 생활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나는 감정을 읽지도 못했고 인물을 읽어내지도 못했다. 이야기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읽어낸 것이라고는 무미건조한 방식으로 서술되는 계급투쟁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나는 이 모든 소설을 아주 진지하게 독파했다. 이는 당시의 내 삶이 소설보다 더 무미건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속담에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당시의 내 독서가 바로 이런 식이었다. 소설책을 구할 수 있고 그 안에 글이 담겨 있기만 하면 나는 무조건 읽어나갈 수 있었다.
2002년 가을, 독일 베를린에 있을 때 은퇴한 한학漢學 교수 두 분을 만났다. 두 분은 내게 1960년대 초기 중국의 대기근에 관해 얘기해주었다. 이 교수 부부는 자신들이 직접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베이징 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고 두 달 뒤에 아내의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아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정말 대단해요. 중국 학생들이 베이징 대학 교정에 있는 나뭇잎을 전부 먹어버렸어요.”
베이징 대학 학생들이 교정에 있는 나뭇잎을 전부 먹어치웠던 것처럼 나의 독서는 우리 마을 도서관에 있는 나뭇잎보다 더 먹기 거북한 소설들을 전부 먹어치웠다.
도서관 직원은 중년 여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는지 나와 형이 다 읽은 소설을 반납할 때마다 책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자세히 검사하곤 했다. 아무런 흠이 발견되지 않아야 책을 받은 다음, 다른 소설들을 대출해주었다. 한번은 그녀가 우리가 반납한 책 표지에서 작은 먹물 자국을 하나 발견했다. 그녀는 우리가 책을 훼손한 것이라고 단정했고, 우리는 그 먹물 자국이 책을 빌릴 때부터 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먹물 자국이 우리의 소행이라고 우겼다. 반납하는 책을 받을 때마다 철저하게 검사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분명한 먹물 자국을 자기가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말다툼이 문투文鬪에 속했다. 우리 형은 홍위병이었기 때문에 문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무투라야 홍위병의 본색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형은 책을 들어 그녀의 얼굴 쪽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그러고는 곧장 그녀에게 달려들어 손으로 따귀를 한 대 세게 후려갈겼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함께 마을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 온 그녀는 쭈그려 앉아 몹시 상심한 표정으로 한참을 울어댔고 우리 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파출소 안을 왔다 갔다 했다. 파출소장은 좋은 말로 그녀를 위로하는 한편, 산만하고 자유분방하게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우리 형을 나무라면서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말했다. 우리 형은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있었다.
파출소장은 우리 아버지 친구로서 언젠가 내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준 적도 있었다. 당시 그분은 아직 어린 나를 한참 쳐다보시다가 한 가지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상대방이 미처 방비하고 있지 못할 때 재빨리 발로 고환을 걷어차라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상대가 여자일 때는 어떻게 하나요?”
그분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남자라면 절대 여자랑 싸워선 안 되지.”
우리 형의 홍위병 무투 행위로 결국 우리는 도서관 대출증을 잃었지만 나는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이미 도서관에 있는 소설을 다 읽은 뒤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름방학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독서에 대한 나의 흥미와 열정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독서를 갈망했지만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부모님의 전문 직업에 필요한 의학 분야의 책 10여 권을 제외하면 네 권짜리 『마오쩌둥 선집』과 홍보서라 불리는 『마오 주석 어록』 한 권이 전부였다. 홍보서는 『마오쩌둥 선집』에서 발췌한 어록 모음집이었다. 나는 아무런 흥미도 없이 이런 책들을 뒤적거리면서 독서의 화학반응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적거려도 독서에 관한 흥미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집 밖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가 나는 사람이 음식을 찾듯이 사방으로 책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몸에 반바지와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한여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잘 알고 지내던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를 발견한 나는 큰 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야, 너희 집에 책 좀 없니?”
나처럼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있던 그 녀석은 내 물음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이런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에 책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신이 나서 그 아이들 집에 따라가 보니 집집마다 서가에 네 권짜리 『마오쩌둥 선집』이 꽂혀 있었다. 게다가 전부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새 책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확실한 경험을 얻었다. 그 뒤로 내가 집에 책이 있느냐고 물을 때 아이들이 없다고 대답하면 나는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되묻곤 했다.
“네 권은 있겠지?”
친구들이 책이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면 나는 손을 내리면서 한마디 더 물었다. “새 책이야?” 친구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면 나는 실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마오쩌둥 선집』이겠지 뭐.” 나중에 나는 묻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집에 오래된 책이 있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었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전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한 명만이 예외였는데, 그는 나를 향해 눈을 찡그려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집에 오래된 책들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네 권짜리 책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한 권짜리 홍보서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표지가 무슨 색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회색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뜻밖의 희열이 밀려왔다. 그의 ‘……인 것 같다’는 세 번의 대답에 내 감정은 극도로 격앙되었고 나는 땀에 젖은 손을 역시 땀에 젖은 그의 어깨에 얹고는 그의 집을 향해 걸으면서 가는 길 내내 그에게 기분 좋은 말만 했다. 집에 도착하자 친구는 아주 힘들게 의자를 옷장 앞으로 옮겨다놓고 의자 위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잠시 옷장 위를 더듬어 먼지가 가득 앉은 책을 한 권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책을 받아 드는 순간 나는 심장이 마구 뛰면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판형이 보통 책보다 작은 이 책은 홍보서와 무척 흡사했다. 손으로 책 위에 두껍게 앉은 먼지를 걷어낸 나는 몹시 실망한 눈으로 붉은 가죽으로 장정한 표지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홍보서였다.
집 밖에서의 모든 노력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와 잠재력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내수內需 끌어올리기’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우선 집 안에 있는 의학서적을 대충 한 번 훑어보고 도로 서가에 꽂아놓았다. 당시 나는 성격이 그다지 세심하지 못해서 의학서적 안에 놀라운 내용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이런 비밀을 발견했다. 의학서적을 포기하고 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책이라고는 새로 나온 『마오쩌둥 선집』과 아주 오래 뒤적여온 홍보서뿐이었다. 이는 당시 거의 모든 가정의 공통된 상황이었다. 네 권짜리 『마오쩌둥 선집』은 각 가정에 놓인 정치적 진열품일 뿐이었고, 평소에 사상학습을 할 때는 주로 홍보서를 이용했다.
나는 홍보서를 선택하지 않고 『마오쩌둥 선집』 제1권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이 책을 아주 자세하게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나는 독서의 신대륙을 발견했다. 『마오쩌둥 선집』의 주석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마오쩌둥 선집』을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당시에는 여름이면 집 밖에서 저녁을 먹는 것이 풍습이었다. 식사를 하기 전에는 먼저 땅바닥에 차가운 물을 좀 뿌리곤 했다. 지면 온도를 낮추는 동시에 흙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탁자와 의자를 들고 나왔다. 식사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밥그릇을 손에 받쳐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눈으로는 다른 집 탁자 위의 반찬을 살피고 입으로는 자기 밥그릇의 밥을 먹었다. 나는 항상 재빨리 저녁을 먹고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은 다음 곧장 『마오쩌둥 선집』을 들고 저녁노을 속에서 목마르고 굶주린 아이처럼 읽어내려갔다.
이웃 사람들은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힘들게 마오쩌둥 사상을 공부한다며 지나친 칭찬을 늘어놓았다. 우리 부모님은 이처럼 과장된 칭찬을 들으시면 말투와 표정에 뿌듯한 기운이 넘쳤다. 두 분은 남몰래 나의 앞길에 관해 얘기하시면서 문화대혁명이 내게서 공부할 기회를 빼앗아가지만 않았다면 당신들의 아들이 장차 대학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나는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읽은 것은 『마오쩌둥 선집』에 있는 주석이었다.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이 주석은 마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던 소설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이 주석에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거기에는 이야기가 있고 인물들이 있었다.
독서에 관한 두번째 이야기는 중학교 시절에 시작된다. 당시 나는 이른바 독초라 불리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불에 타 없어지는 운명을 피한 이 문학의 생존자들이 우리 중학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나는 진정으로 문학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이 이런 책을 조심스럽게 보존하고 있었고, 나중에 사람들이 대규모로 몰래 돌려 읽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책들이 수천 개의 손을 거쳐서인지 내 손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심하게 낡은 상태였다. 앞부분의 10여 쪽 정도가 찢겨 나간 책도 있었다. 당시에 내가 읽었던 이들 독초 소설들 가운데 상태가 온전한 것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나는 책 제목도 몰랐고 작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끝나는지도 몰랐다.
이야기의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모르는 것은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뜨겁게 달궈진 솥 위의 개미떼가 이리저리 구멍을 찾는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이 이야기에 이어지는 결말을 알아내려 애썼다.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읽은 소설들도 똑같이 시작과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나보다 몇 페이지 더 읽은 사람들이 내게 그 몇 페이지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긴 했지만 여전히 이야기의 결말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의 책 읽기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처럼 끊임없는 책의 파손 속에서 독서를 해나가야 했다. 책 한 권이 몇 명 또는 몇십 명의 손을 거치다보면 한두 쪽씩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도 슬펐고 나보다 앞서 그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자신도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곧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책장을 잘 붙여서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지는 않았다.
결말이 없는 이야기들은 나를 훈련시켰다.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못했다. 마침내 나는 스스로 이야기의 결말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인터내셔널가>에는 “애당초 구세주는 없고 신선이나 황제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인류의 행복을 창조하는 것은 완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랫말처럼 매일 밤 전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나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부지런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이야기의 결말을 지어내고 이렇게 내가 지어낸 이야기에 감동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처음부터 나의 상상력이 훈련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소설에 감사해야 했다. 바로 이 소설들이 처음으로 나의 창작 열정에 불을 붙여주었고, 내가 여러 해가 지나 작가가 될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외국 소설도 역시 시작과 끝이 없었다. 나는 그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저자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야기의 시작도 몰랐고 결말도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성애를 묘사한 대목을 읽었을 때는 마음이 몹시 불안했고, 동시에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성애 묘사 부분을 읽을 때면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본 다음 주위에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계속 읽어내려갔다.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문학이 돌아왔다. 서점에는 참신한 문학작품들이 가득했다. 그 시기에 나는 아주 많은 외국 소설을 사서 읽었다. 그 가운데는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도 있었다.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의 작품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침대에 엎드려 『여자의 일생』을 읽기 시작했다. 3분의 1쯤 읽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알고 보니 바로 이 책이었다!
내가 여러 해 전에 가슴을 졸이며 읽었던 시작도 끝도 없었던 첫번째 외국 소설이 바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읽었던 독초 소설 가운데 유일하게 뜯겨 나가지 않았던 책은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춘희』였다. 당시는 문화대혁명이 거의 끝나가던 때로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춘희』는 필사본의 형태로 내 손에 들어왔다. 나중에 정식으로 출판된 『춘희』를 보고 나서야 내가 읽은 것이 축약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는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이 막 세상을 떠난 뒤였다. 우리는 그가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華國鋒을 영명하신 영수라고 불렀다. 당시 화궈펑은 잠시 전성기를 맞았으나 나중에 덩샤오핑이 복권하면서 중국의 정치 무대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 무렵 친구 하나가 나를 한쪽으로 불러내서는 온 세상이 읽고 있는 좋은 책을 한 권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에 관한 책이야.”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곧장 피가 끓기 시작했다. 우리는 내내 뛰다시피 하여 『춘희』 필사본을 갖고 있다는 친구의 집으로 갔다. 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 친구는 책가방에서 아트지로 싼 필사본을 한 권 꺼냈다. 아트지를 벗겨 앞면을 본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뜻밖에도 그는 영명하신 영수 화궈펑의 표준 초상화로 『춘희』를 쌌던 것이다.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반혁명분자 같으니라고!”
놀라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춘희』를 싼 종이가 화궈펑의 사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책을 화궈펑의 초상화로 싼 것은 또 다른 반혁명분자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춘희』를 빌려준 친구가 바로 그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우리는 이미 다 구겨진 이 화궈펑 사진을 처리하는 방법을 놓고 오래도록 상의했다. 마침내 그가 집 밖 강물에 던져버리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러지 말고 차라리 태워버리자고 했다.
우리는 화궈펑의 사진을 흔적도 없이 처리한 다음 필사본 『춘희』를 조심스럽게 손에 받쳐 들었다. 아주 깔끔한 필체로 누런 포장지 위에 쓴 필사본이었다. 이 친구는 하루밖에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내일이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읽기 시작했다. 정말로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독서였다. 3분의 1쯤 읽었을 때 우리 두 사람은 이미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소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잃는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영원히 점유하고 싶었다. 보아하니 필사본 『춘희』는 분량이 엄청난 거작은 아니었다. 우리는 일단 읽기를 중지하고 책을 베끼기 시작했다. 다음 날 책을 돌려주기 전에 어떻게든 필사 작업을 다 끝낼 작정이었다.
이 친구는 오래 사용하지 않은 아버지의 공책을 한 권 찾아왔다. 역시 표지가 누런 포장지로 된 것이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책을 베끼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베끼다가 지치면 친구가 재빨리 이어서 베끼고 친구가 한참을 베끼다 지치면 내가 다시 이어받는 식이었다. 친구의 부모님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실 시간이 되자 우리는 그곳을 떠나 좀더 안전한 장소를 찾기로 했다. 잠시 상의한 끝에 우리는 학교 교실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고등학생들이 건물 2층을 사용하고 중학생들이 1층을 사용했다. 모든 교실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긴 했지만 항상 철제 잠금장치가 채워져 있지 않은 창문이 몇 개쯤 있었다. 우리는 1층에 있는 중학교 교실의 창문을 일일이 검사하면서 지나가다가 잠금장치가 없는 창문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통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우리는 남의 교실에서 있는 힘을 다해 책을 베끼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전등의 전선을 끌어다가 교실의 백열등을 켜놓고 베끼는 작업을 계속했다.
배가 너무 고파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몸이 극도로 피곤해졌다. 우리는 책상 몇 개를 붙여서 침대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베끼는 동안 한 사람은 책상을 이어 만든 침대 위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이런 식으로 번갈아가며 한 사람이 책을 베낄 때 한 사람은 책상 위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서로 교대하는 횟수가 갈수록 많아졌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반 시간 이상 베끼다가 교대를 했는데 나중에는 5분마다 교대했다. 친구가 엎드려 자면서 코를 골기라도 하면 내가 얼른 다가가 툭툭 치며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야, 일어나. 네 차례야!”
내가 막 잠이 들면 그가 어김없이 다가와 몸을 툭툭 치며 깨웠다. “야, 일어나.”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방을 깨워가면서 마침내 우리 인생의 가장 위대한 과업인 필사 작업을 마쳤다. 우리는 다시 교실 창문을 타고 넘어 이른 새벽에 계속 하품을 해대면서 학교를 빠져나왔다. 헤어질 때 그는 우리 둘이 합작한 새 필사본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쉽지만 내가 먼저 읽을 수 있도록 앙보한 것이었다. 그는 깨끗한 글씨로 쓰인 원래의 필사본을 들고서 동쪽 하늘에 붉은 햇무리가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춘희』 필사본 원본을 돌려줘야겠다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가 잤다.
집으로 돌아가보니 우리 부모님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계셨다. 나는 재빨리 어제 먹다 남긴 식탁 위의 찬밥과 반찬을 먹어치우고 침대로 가서 잤다. 얼마 자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께서 호통을 치시면서 나를 깨우더니 어제 어디를 가서 집에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으셨다. 나는 잠이 덜 깬 척하며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시 엎드려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점심때까지 계속 잤다. 이날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직접 만든 필사본 『춘희』를 읽었다. 우리가 필사를 막 시작했을 때는 글씨가 그런대로 반듯한 편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휘갈겨 쓴 글씨가 많았다. 내가 갈겨 쓴 글씨는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지만 친구가 갈겨 쓴 글씨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읽는 내내 화가 치민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필사본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옆구리에 끼고 문을 나섰다. 그 친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학교 농구장에서 그 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마침 공을 골대 가까이 몰고 가다가 내가 화난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라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 화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이리 와! 이리 와보라고!”
아마도 내가 당장 싸움이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였는지 그 역시 화를 내면서 농구공을 땅바닥에 세게 내던지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머리 가득 땀을 흘리면서 다가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는 슬그머니 옷 속에서 필사본 『춘희』를 꺼내 그에게 살짝 보여주고 나서 얼른 도로 거둬들였다. 그러면서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형님이 네가 쓴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겠단 말이다.”
그제야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리고는 얼굴 가득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히히 웃으면서 학교 안의 작은 숲으로 나를 따라 들어왔다. 숲으로 들어선 다음 나는 우리의 필사본을 꺼내 독서를 계속했다. 친구를 옆에 앉혀놓고 책을 읽어내려가다가 알아보기 어려운 부분이 나올 때마다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대체 무슨 글자야?”
나의 독서는 마치 입으로 음식을 떠먹는 것 같아서, 더듬더듬 간신히 『춘희』를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소설에 담긴 이야기와 인물들은 내 마음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았다.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기분으로 필사본을 친구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그가 읽을 차례였다.
그날 밤 내가 침대에서 자고 있을 때 그 친구가 우리 집 문밖에 와서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댔다. 그 역시 내가 갈겨쓴 글씨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가로등 밑으로 갔다. 그는 깊은 밤 인적이 드문 가운데 감정에 북받쳐 이 소설을 읽었다. 나는 연신 하품을 해대며 전봇대에 몸을 기대고 앉아 충실하게 그의 독서 현장에 함께했다. 이따금 휘갈겨 쓴 글씨를 알아볼 수 있도록 그의 부름에 응하는 서비스도 제공해야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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