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미학, 그것은 18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성립한 학문으로, 본질적으로 근대의 각인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미학적 사고 또한 이 근대 미학의 영향 아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시점에서 미학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러한 영향력 그 자체를 역사적으로 주제화하여, 이 영향력 아래 쓰여온 다양한 미학사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학사 비판이야말로 이 책의 목적이다.
‘소유’, ‘선입견’, ‘국가’, ‘방위’, ‘역사’라는 다섯 개의 장, 이것이 이 책을 구성한다. 이 다섯 개의 기둥은 근대 미학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창조’, ‘독창성’과 같은 근대 미학의 기초 개념과—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동등하게 근대 미학을 그 근저에서 지탱하고 있다.
사후적으로 돌아본다면, 근대 미학은 확실히 바움가르텐에서 헤겔에 이르는 시대에 하나의 자율적 학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간의 미학사 기술은 종종 바움가르텐에서 헤겔에 이르는 미학의 전개를 단선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목적론적 내지 목적합리적으로 미학사를 재구성해왔다. 이와는 달리 이전에 나는 『상징의 미학』(1995, 도쿄대학출판회)에서, 1735년부터 1835년까지(즉 바움가르텐이 ‘미학’이라는 언어를 만든 해부터 헤겔의 사후 『미학강의』가 출판된 해까지)의 100년간의 미학을, 두 번의 단절을 수반하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과정으로서 기술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른바 근대 미학의 내부에 (예를 들면 ‘칸트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하는, 혹은 ‘헤겔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하는) ‘근대 미학’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했다. 이 책 또한 동일한 관심에 이끌리고 있으나, 그러나 그 관점은 달리한다. 『상징의 미학』이 어디까지나 미학 이론을 내재적으로 취급했다면, 이 책 『예술의 조건—근대 미학의 경계』는 미학 이론의 경계 그 자체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미학’이라는 근대적 학문의 성립은 ‘예술’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탄생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 까닭에 근대 미학의 확립은, ‘예술’을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즉, 앞에서 서술한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창조’, ‘독창성’과 같은 개념)의 확립을 수반하며, 이 개념들이 미학을 내부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 점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 졸저 『예술의 역설—근대 미학의 성립』(2001, 도쿄대학출판회)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미학으로 몰리게 한 동인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제도로서 확립된 ‘미학’의 내부에서는 그 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미학’의 외부에 있는 것이 ‘배경’(地)이 되어, ‘미학’이 ‘형상’(圖)으로서 성립하는 것을 지탱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이 표제에 ‘조건’ 내지 ‘경계’라는 말을 사용한 데는 그 내부와 외부, 혹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를 주제로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 『예술의 조건—근대 미학의 경계』와 이전의 저서 『예술의 역설—근대 미학의 성립』은 정확히 말해 자매편이다.
제도로서 확립된 ‘미학’에 내재하는 역사 기술記述은 개개의 논자가 왜 미학 이론을 주제로 했던가, 혹은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미학으로 몰리게 했던가라는 학문적 관심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학문적 관심은 쓰여진 이론에서는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선적이며 목적론적(내지는 목적합리적)인 미학사적 기술은 마치 미학을 구축하려고 하는 학문적 의지가 수미일관되게 전개되었던 것 같은 환상을 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미학이라는 형태를 취한 것이며, 이러한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자신을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미학을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미학’이라는 동일한 명칭 아래, 실제로는 지극히 다른 학문적 관심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학’이라는 ‘형상’을 부각하는 ‘배경’의 다양성이 문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배경’ 내지 ‘외부’란, 생활세계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도, 또한 미적인 것의 배경에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지적함으로써 미적인 것을 단죄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배경’이 미학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부각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면서 배경과 형상의 교차에 근거하여 미학의 역사를 묘사하는 것, 혹은 다양한 문맥에 속하는 논의 가운데서 ‘하나의’ 미학사를 읽어내려 하는 학문적 관심 그 자체를 반성하고, 제도로서의 ‘미학’을 내부로부터 외부로 개시하는 것, 이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미학’ 내지 ‘미학사’에 대한 연구서인 동시에, 제도로서의 ‘미학’을 내부에서 외부로 꿰뚫어 그것을 통해 ‘미학’ 그 자체를 변모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다섯 개의 장 외에도 프롤로그, 인테르메초, 에필로그를 포함한다. 각각은 (실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나) 상대적으로 독립해 있어서 부분적으로 읽어도 관계없다. 다만, 이 책은 많은 점에서 이전의 저서 『예술의 역설—근대 미학의 성립』과 상호 연관성이 있으므로 함께 읽는다면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어판 서문
『예술의 조건—근대 미학의 경계』가 자매편인 『예술의 역설—근대 미학의 성립』에 이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되다니 저자로서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 책의 의도에 관해서는, 특히 이 책에 왜 『예술의 조건』이라는 제목을 붙였는지에 관해서는 ‘서문’에 기술했으므로, 여기서는 제도로서의 미학을 내부에서 외부로 개시開示한다는, 이 책의 기본적인 입장의 배경에 관해 필자의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미학이 하나의 독립적인 학과인 것을 당연한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대학의 연구・교육 제도가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명한 것은 아니다. 미학이 18세기 중반에 독일에서 성립한 학문이라서 우리는 종종 독일이야말로 미학의 본고장이라고 간주하고 있지만, 실은 독일의 대학에는 미학과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미학의 모국 독일에서 미학은 철학의 한 부분이지 결코 독립적인 하나의 학과가 아니다.
한편 역사를 되돌아보면, 독립된 강좌로서 ‘미학과’가 설립된 것은 도쿄대학이 세계 최초이며(1893), 그것은 파리대학교의 1919년보다 앞서는 것이다. 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에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내지 서구화가 지니는 특질의 한 단면이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된다. 즉 미학이 독립된 학과로 수용된 까닭은 동아시아의 연구자들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가 추진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서양의 철학을 도입할 때, 최첨단으로 간주되던 당시의 철학(구체적으로는 철학을 이론철학, 실천철학, 미학으로 삼분하는 신칸트학파의 체계)의 성과에 주목하고, 이 성과를 그것이 만들어진 경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법 없이 그대로 이입移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때문에 동아시아 학문의 근대화가 본래의 모습, 즉 서양에서 근대화가 지녔던 바람직한 모습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경솔한 생각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미학의 연구성과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으며 그 수준도 매우 높은데, 이것을 가능했던 이유는 미학을 전문화했기 때문이다.
한편, 만약 근대화가 개별 기능 내지 영역의 자립화를 의미한다면, 근대 동아시아 미학의 자립화 내지 전문화는 근대화의 필연적 귀결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학의 자립화 내지 전문화는 서양 근대 학문의 이입에 노력했던 후진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까지도 휩쓸려가는 과정이 된다. 독일미학회가 뒤늦게나마 1993년에 간신히 설립된 것도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미학이 하나의 전문적인 학문이 될 때 사람들은 그 성과에만 주의를 돌리고, 미학이 만들어진 경위, 즉 사람들을 미학으로 몰리게 했던 직접적인 원인을 망각한다. 이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독일, 혹은 유럽에서도 발견되는 상황이다.
『예술의 역설—근대 미학의 성립』과 『예술의 조건—근대 미학의 경계』라는 자매편에서 필자가 시도한 것은 이처럼 잊혀진 요인을 다시 밝혀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예술의 조건—근대 미학의 경계』의 특색은 미학이 자립화하는 과정에서 그 외의 다른 학문 분야들과 공유하고 있던 다양한 관심을 주제화한 데 있다.
이 책이 본래 과제의 지극히 일부밖에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은 필자도 자각하는 바이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어떠한 미학사 연구도 동시에 미학사 비판일 수 있다”라는 명제를 제기했는데, 이 책에서는 이 명제를 충분히 실천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나중에 출판한 『서양미학사』(2009)가 이 과제에 부분적으로 응답한 것이다. 과연 이 시도가 성공했는지 한국 독자분들의 비판을 얻을 기회가 있다면 매우 행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어로 번역해주신 신나경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 신나경 씨는 이전에 도쿄대학 대학원 미학예술학과에 유학하여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에 관한 탁월한 박사논문을 써서(이 논문은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박사논문 라이브러리’의 한 권으로 발행되고 있다), 필자도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신나경 씨가 이 책을 한국의 독자 제현에게 전달하는 수고를 맡아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미학 연구가 매우 활발한 한국에서 이 책이 『예술의 역설—근대 미학의 성립』과 함께 진지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저자로서 더 이상의 기쁨은 없을 것이다.
2011년 9월
오타베 다네히사
프롤로그
중심의 상실
—‘새로운 신화’ 혹은 ‘고딕 환상’
‘낭만주의’란 단지 예술상의, 또는 예술 이론상의 운동일 뿐만 아니라, 탄생 중이던 ‘근대’ 세계에 대한 비판적 대응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관심에 의해 지지되었던 사상적 운동이다. 이것을 특히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친 이른바 ‘독일 낭만주의’ 이론의 검토를 통해 밝히고 본론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프롤로그의 목적이다.
‘중심의 상실’
20세기 중엽에 활약했던 미술사가 한스 제들마이어Hans Sedlmayr(1896~1894)가 쓴 『중심의 상실—시대의 징후 및 상징으로서 19, 20세기 조형예술』Verlust der Mitte: die bildende Kunst des 19. und 20. Jahrhunderts als Symptom und Symbol der Zeit(1948, 이후 『중심의 상실』로 줄인다)이라는 저서가 있다. 18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는 (넓은 의미에서 근대의) ‘예술’ 현상을 단서로 삼아, 거기서부터 ‘시대의 심층을 해석’하려 한 이 책은, 프랑스혁명 이후의 근대 세계를 그 근본부터 비판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명비판적인 특질이 있다.
제들마이어는 예술에서 ‘순수건축, 순수소묘, 순수회화’의 성립, 인간이 가진 감관들의 자율화 경향(즉, 공감각의 해체와 순수시각, 순수청취의 성립), 나아가 학문에서 ‘전문 분야 주의’의 확립 등을 예로 들어, 근대의 특징을 ‘순수화’ 내지 ‘자율화’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근대화’론과도 연결되는 논점을 읽어내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으나, ‘순수화’ 내지 ‘자율화’를 둘러싼 제들마이어의 논의는 오로지 그 부정적인 측면을 향하고 있다.
그의 이상은 중세 로마네스크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모든 예술적 활동이 ‘대성당’의 건립이라는 ‘하나의 전체적 과제에 봉사’했으며 ‘대성당’은 ‘종합 예술작품’이나 진배없다. 여기서 보이는 ‘위대한 양식의 통일성’은 많건 적건 ‘최후의 종합적 양식인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지만, 18세기에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계몽주의적 관념이 확립되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건축을 예로 들면, 첫째, 순수성 내지 자율성을 목표로 하는 ‘건축을 위한 건축’은 조각적, 회화적 요소를 배제한다(그 결과, 조각・건축의 자율성이 생긴다). 이 자율적 건축은 ‘지반의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구체’의 건축—예를 들면 클로드 니콜라 르두Claude-Nicolas Ledoux(1736~1806)의 건축(안)—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결국은 스스로를 지탱하는 ‘지반’과 ‘대지’에서도 자립하려고 한다. 둘째, 마치 모든 인간이 평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듯이(‘자코뱅주의’), ‘모든 건축의 과제’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질적인 과제들을 어떤 하나의 양식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여기에서 성립한 것이 ‘양식의 다원론’이며, 거기서는 개개의 양식이 ‘서로 간의 다툼’을 반복한다. 이것이야말로 ‘중심의 상실’로 특징지어지는 근대 예술의 ‘병’病이다.
제들마이어는, 단순히 자율적 인간을 초월한 ‘신인’神人(그리스도)이, 이 ‘상실된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식함으로써만 이 근대의 병은 치유된다고 언급하며, 근대의 ‘자코뱅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 결론 자체의 옳고 그름을 파고드는 것은 여기서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중심의 상실’을 둘러싼 그의 논의가 어떤 면에서는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 제들마이어에게 근대 예술에서 ‘중심의 상실’이란 그가 『중심의 상실』(제4판, 1951)에서 스스로 인정했듯이,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예언’의 내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낭만주의’가 탄생했던 17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고전적 작가가 부재하는 근대
‘중심의 상실’을 언급한 논고로, 먼저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Goethe(1749~1832)의 『문학상의 상퀼로트주의』Literarischer Sanculottismus(1795)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상퀼로트란 프랑스혁명 시기에 귀족의 상징인 퀼로트를 입지 않았던 혁명적 대중을 지칭하는데, 1792년에 생겨난 이 신조어를 괴테가 바로 문학에 적용했다. 그가 ‘문학상의 상퀼로트주의’라고 부른 것은 독일에서 ‘고전적 작품’의 부재를 소리 높여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괴테도 당시의 독일에 ‘고전적 작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괴테는 그것을 단순히 비판하는 ‘문학상의 상퀼로트주의’가 현대 문학이 놓여 있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무교양적 뻔뻔함’을 드러냈다고 진술했으며, 그 점에서 그는 반혁명의 입장에 서 있다.
우선 그는 “고전적인 국민 작가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어떤 천재라도 “자신이 태어나서 활동하는 환경을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의존적이며, “자신의 세기에서, 어떤 점에서는 이익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다른 어떤 점에서는 해를 입는다.” 괴테에 의하면, ‘고전적인 국민 작가’가 가능하게 되는 상황이란 ‘자국의 역사에서 위대한 사건과 그 결과’가 ‘훌륭하고 의미 깊은 통일’을 갖춘 경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대의 독일에는 이런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독일에는 작가들이 모여서 하나의 방식으로 한마음을 보전하면서, 개개인이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을 형성할 수 있을 만한 사회적인 생활 형성의 중심점Mittelpunkt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단되어zerstreut 태어나, 극도로 다른 교육을 받고, 대개는 오직 자신만을 의지한다. …… 독일의 훌륭한 작가는 유감스럽게도 보편적인 국민 문화를 눈앞에서 발견할 수가 없으며, 그 때문에 젊을 때 자신이 지닌 독창적 천재성(天分)의 특성이, 이런 보편적인 국민 문화allgemeine Nationalkultur를 따를 기회가 없다는 것에 종종 한숨지어야만 했다.
사람들을 사회적ㆍ문화적으로 하나가 되게 결합하는 ‘보편적인 국민 문화’라는 ‘중심점’의 결여야말로, 현대에 이르러 고전성이 결여된 원인이다.
‘중심점’이 부재하는 궁극적 이유는, 아마도 당시 신성로마제국 말기의 영방국가 체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괴테는 ‘독일 국가’가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세분’된 것에 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우리는 독일에 고전적 작품을 초래할 소지를 만들 정도의 혁명을 추구할 의도가 없다.” 오히려 반反상퀼로티즘을 표방한 그는, 자신의 논의가 지닌 비정치성(이라는 정치성)을 관철하여, 18세기 후반의 독일 작가들이 만들어온 ‘보이지 않는 학교’에서 ‘보편적인 국민 문화’가 성립되었다고 말한다. 즉, ‘고전적 작가’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점’은 독일 작가들이 ‘노력’한 결과로 이제야 다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오로지 ‘부정을 업으로 하는’ 문학의 상퀼로트는, 괴테(의 비정치적 정치성)에 따르면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존재가 된다.
이러한 괴테의 논의는, 단지 그 미학 이론상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그 반혁명적인 비정치적 정치성에서도 확실히 ‘고전주의’적이라고 부르기 적합한 것이다. 그럼에도 괴테의 바로 이런 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낭만주의’ 운동의 한 출발점이 된다.
‘새로운 신화’
이 역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인물이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이다. 그는 『문학에 관한 대화』Gespräh über die Poesie(1800)에서 등장인물인 루도비코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그대들은 시를 지을 적에 자기 작업에서 버팀목, 즉 어머니와 같은 대지, 하늘, 생동적 대기가 결여되어 있는 것을 종종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 고대인의 문학에서는 신화가 중심점Mittelpunkt이었지만, 그러한 중심점이 우리 [근대의] 문학에는 결여되어 있다. …… 우리는 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개개의 외양, 상像 내지 상징’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근저에 존재하는 생동적 자연관’ 내지 ‘상징적 자연관’과 다를 바 없다. 슐레겔에게 ‘중심의 상실’이란 ‘상상력의 원천’인 ‘상징적 자연관’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다.
슐레겔은 이미 『그리스 문학 연구론』Über das Studium der Griechischen Poesie(1795/97)에서 근대의 시인은 고대의 시인과 같은 범례성이 없기 때문에, 시종일관 ‘개인적인 것’, ‘작위적인 것’, ‘관심을 끄는 것’, ‘독창적인 것’을 추구했음을 역사철학적 전망을 통해 지적했다. “어떤 예술가라도 단지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여, 그 시대, 그 민족 가운데 있으면서 고립된 에고이스트이다.” 제들마이어가 『중심의 상실』에서 주목했던 것은 슐레겔의 이 이론이다. 제들마이어에게는 ‘중심’을 ‘상실’했던 19~20세기의 예술이란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말한 ‘예언의 적중’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슐레겔도 이러한 근대의 병리를 그저 방관만 했었던 것은 아니다. 제들마이어가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이념을 부정하고 ‘신인’神人(그리스도) 가운데서 진정한 ‘중심’을 구함으로써 ‘중심의 상실’이라는 근대의 병을 극복하려 했다면, 슐레겔은 과연 어떤 처방전을 준비했던 것일까?
『문학에 관한 대화』에서 슐레겔은 다시 루도비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가 신화를 획득하거나, 혹은 차라리 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진지하게 협력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이전에 존재했던 신화의 부활 내지 복고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새로운 신화’를 의미한다. ‘오래된 신화’와 ‘새로운 신화’는 대조적인 방식으로 성립한다. ‘오래된 신화’는 “감성적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것, 생동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형성”된 자연적 신화이다. 그에 반해 ‘새로운 신화’에는 “정신의 가장 심원한 깊이에서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출처가 있다. 도대체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자기 자신의 외부로 나감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부로 회귀하는 교체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에 있다. 이 정신의 힘에 의해서만, ‘인류’는 “자신의 잃어버렸던 중심점을 다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슐레겔은, 제들마이어와 비교하면, 제들마이어처럼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관념론적)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원리를 매개로 하여 ‘중심의 상실’이라는 근대의 병을 극복하려고 한다.
제들마이어가 주목한 것은 당시 (피히테로 대표되는) ‘관념론’의 내부에서 (셸링학파로 대표되는) ‘자연철학’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관념론’이 자기의 내부에서 그것과는 대척적인 ‘실재론’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 ‘자연철학’은 여전히 ‘생동적 자연관’ 내지 ‘새로운 신화’의 단서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탄생해야 할 ‘새로운 신화’란 “관념론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관념론적 토양과 지반 위에 떠도는” 바의 ‘실재론’이며 “문학으로서 현상現象할 것이다.” 그것이 ‘문학’으로서 ‘현상’하는 까닭은, ‘문학’이란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조화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기投企=계획에 대한 감각’
문학이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조화에 기초한다”라고 하는 사태를 결코 정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아테네움』Athenäum-Fragment(1798) 제116단장斷章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해보자. “낭만적 문학die romantische Poesie은 어떤 실재적 관심에서도 관념적 관심에서도 자유로이, 시적 반성의 날개에 올라타고 양자의 중간에 떠다니며, 늘 이 반성을 거듭하여 무한한 계열의 거울과 같이 이 반성을 다수화한다.” 이 반성의 과정 속에서만 ‘낭만적 문학’은 성립한다. 그러므로 “낭만적 종류의 문학은 여전히 생성 중에 있다. 아니, 영원히 생성할 수 있을 뿐이므로 결코 완성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 고유의 본질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 문학’은 ‘발전적=전진적progressiv’으로 특징지어진다. 한편, 이 발전성 내지 전진성은 단순히 한 장르로서 ‘낭만적’ 문학의 특징은 아니다. ‘낭만적 문학’이란 ‘장르’ 이상의 것,—그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발전적=전진적’일 뿐만 아니라, ‘발전적=전진적 종합문학progressive Universalpoesie’으로 규정된다—나아가, 오히려 ‘문학’ 일반의 본질을 구성한다. “모든 문학은 낭만적이며 혹은 낭만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발전성 내지 전진성을 지탱하는 것은 『아테네움』 제22단장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Sinn für Projekte’이다. “투기=계획이란 생성하는 객체의 주체적 맹아이다.” 바꾸어 말하면, ‘투기=계획’이란 계속 생성하고 있는 실재적인 것의 관념적 싹에 다름 아니며, 이 싹은 ‘장래로부터의 단편’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은 ‘발전적=전진적’인 ‘방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상에서 보이듯이, 슐레겔에서 ‘중심점’의 결여는 근대적 정신의 (편파적인) 관념성에서 유래한다. 이 관념적 원리의 편파성을 ‘정신의 본질’에 근거하여 전진적 내지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주의에 주어진 과제이다.
‘전통’의 버팀목
이 낭만주의의 과제는 개개의 예술가가 ‘가장 개성적인 방식으로서’,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함으로써만 완수된다고 『문학에 관한 대화』에서 슐레겔은 루도비코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새로운 신화’의 이념이, 그것과는 양립하지 않는(듯이 생각되는) ‘전통’의 복권과도 결부되는 것이다. 슐레겔이 자신이 간행한 잡지 『오이로파』Europa에 1803년부터 1805년까지 5회에 걸쳐 연재했던 회화론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 논고를 마무리하면서 슐레겔은, ‘자연모방벽(癖)’이라는 하나의 ‘극단’이 “절대적인 독창성을 향한 욕망”이라는 ‘반대의 극단’을 초래했다고 회화사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화가가 만약 “절대적 독창성에 대한 욕망”으로 내몰리게 되면 설령 “예술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기묘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과연 그 작품은 “상형문자hieroglyph, 진전한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옛 시대의 방식으로 결부되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자연감정, 자연관 내지 예감에서 자의적으로 결부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앞에 두고 슐레겔은 “화가는 자신의 알레고리를 자기 스스로 창조해야 할까? 아니면 전통에 의해 주어져 성역화된 오랜 상징에 의존해야 할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첫 번째 방법’은 ‘보다 위험한 방법’이며, ‘성공’이 ‘우연히’ 위임되는 것임에 비해 두 번째 방법은 ‘보다 확실’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방법’으로, 슐레겔이 구체적으로 어떤 회화를 염두에 두었던가는 그가 이 논고를 1823년에 『저작집』Sämmtliche Werke에 수록할 적에 첨부했던 다음과 같은 주석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작고한 룽게의 알레고리적 소묘’는 단순한 자연의 상형문자를 묘사하려고 함으로써, 성역화되었던 모든 역사적 전통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완전히 ‘사도’邪道에 빠졌지만, “이 역사적 전통은 본래 예술가에게 확고한 어머니와 같은 대지를 이루었으며, 예술가가 이 대지에서 멀어진다면, 반드시 위험과 돌이킬 수 없는 손해가 발생한다.”
『문학에 관한 대화』(1800)의 신화론과 공통되는 것은 예술가가 그 창작을 지탱하는 버팀목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대지’를 필요로 한다는 논점이다. 그러나 1800년의 슐레겔이 ‘어머니와 같은 대지’로 서 ‘신화’ 내지 ‘중심점’의 결여를 앞에 두고 ‘새로운 신화’의 창조를 추구한 데 반해, 1805년의 슐레겔은 ‘성역화’된 모든 역사적 ‘전통’이야말로 ‘예술가’에게 있어서 ‘확고한 어머니인 대지’라고 단언한다.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에 뒷받침된 이전의 ‘새로운 신화’ 이념이 ‘전통’ 속에 구체화한다고 할 수 있다.
‘옛 이탈리아 내지 옛 독일의 회화’ 혹은 ‘옛 독일의 문학’
여기서 일종의 반동을 보는 것은 쉽다(일반적으로 슐레겔의 전기와 후기의 차이로 간주되는 것도, 이 점과 관계된다). 슐레겔이 『오이로파』에 게재한 회화론에서 ‘전통’을 강조했던 시기, 즉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 한스 홀바인(아들)Hans Holbein(1497~1543) 등의 ‘옛 독일’의 회화에 눈을 뜬 시기(1803~1805)는, 쾰른 대성당으로 대표되는 ‘고딕적 내지 옛 독일적’ 건축, 즉 ‘중세의 낭만[주의]적 건축양식’에 눈을 떠 『고딕 건축의 근본 특징』(*원서명)이라고 후에 제목을 바꾼 건축론을 집필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슐레겔에게 ‘새로운 신화’가 ‘획득’되어야 할 것이었다고 한다면, ‘전통’ 또한 새롭게 발견 내지 획득되어야 할 것이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전통’이란 단순히 부여된 사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이로파』에 회화론을 시작하면서 슐레겔은 “내게는 단지 옛 회화에 대한 감각이 있을 뿐이어서, 옛 회화만 이해하고 파악한다”라고 단언한다. 그가 ‘옛 회화’라고 부르는 것은 ‘옛 이탈리아 내지 옛 독일의 회화’—구체적으로는 라파엘 이전의 이탈리아 회화 및 얀 반 에이크에서 한스 멤링Hans Memling(1435?~1494), 뒤러를 거쳐 홀바인(아들)에 이르기까지의 회화—이며, 거기서는 ‘프랑스 화파’, ‘후기 이탈리아인’, ‘플랑드르 및 완전히 현대의 작품’은 배제된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전통’이란 어떤 종류의 역사적 단절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옛 양식’의 회화가 지닌 특징을,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의 술어를 사용하여 “날카로운 윤곽의 엄격한, 아니 오히려 야윈 형태”, “간소하며 소박한 의복”, “인간의 근원적 성격으로 간주하고 싶어지는, 선의에 충만한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과 편협함” 속에 인지한다. 빙켈만은 『고대 미술사』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ums(1764)에서 ‘고대 미술’의 역사를 네 단계로 나누어, 제2의 고전적인 숭고양식에 앞선 제1의 ‘옛(古) 양식’의 특징을, ‘라파엘 이전’의 회화와 비교하여, ‘야윈’ 선묘 혹은 ‘딱딱함’, ‘엄격함’에서 찾았으나, 이것은 슐레겔이 (제2의 양식을 이상으로 하는 빙켈만의 고전주의에 반해) 고전적 단계에 앞선 ‘옛 양식’에서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여, 일종의 프리미티비즘적인 입장을 표방한다는 의미이다. 슐레겔에게는 고전기의 예술이 아니라, 그것에 앞선 예술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적 성격’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대의 화가들에게 “옛 화가, 특히 가장 오래전 화가의 뒤를 따라 오로지 정당하게 소박한 것을 충실히 지속적으로 모방함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이 눈과 정신에 제2의 자연 본성이 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옛 양식’을 중시하는 슐레겔의 미술사 구상이 그의 문학사 구상과 정확히 대응한다는 점이다. 『문학에 관한 대화』에서, 슐레겔은 안드레아(및 마르크스)의 입을 빌려 문학사를 전개하는데,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즉 슐레겔은 첫째로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시에 관한 잘못된 이론에 기초한 잘못된 문학 체계”라고 비판하고, 고전주의 문학보다 앞선 문학을 중시함과 동시에, 둘째로 현대의 독일인은 “자신의 언어와 문학의 원천으로 되돌아감”—구체적으로는 ‘옛 독일’의 전승 속에 포함된 “옛 힘과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해방할” 것—으로써 ‘발전적=전진적’ 특질을 가진 문학을 획득해간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문학에 관한 대화』(1800)와 『오이로파』에 수록된 회화론(1803~1805) 사이에 단절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슐레겔이 ‘새로운 신화’의 이념으로 추구한 것은 ‘전반적인 회춘의 과정’ 내지 ‘영원한 재생’이었으나, 이러한 ‘회춘’의 요청과 ‘전통’의 발견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대 ‘낭만주의’
고딕의 부활운동이라면, 흔히 젊은 시절의 괴테(즉 ‘고전주의를 표방하기 이전의 질풍노도’기의 괴테)가 쓴 논고 『독일 건축에 관하여』Von deutscher Baukunst(1772)가 인용된다. 슈트라스부르크 대성당의 동량棟梁 ‘에르빈 폰 슈타인바흐Erwin von Steinbach(1244경~1318)에’ 헌정한 이 논고에서 괴테는 “프랑스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인도 자신들의 건축을 자랑할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그와 대비되는 것으로 ‘고딕’ 건축을 들어 ‘독일의 건축, 우리의 건축’이라며 찬양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선입견과 결부되어 있던 ‘고딕’의 가치 전도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논고를 계기로 고딕의 부활운동이 급속히 고조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사태는 역전되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특히 프랑스혁명의 영향 아래) 교회ㆍ수도원의 해방, 세속화가 진행되어 수많은 중세의 교회 건축이 파괴되었다. 슐레겔이 19세기 초에 목격한 것은 “오래된 교회당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모습이며, 그 때문에 고딕이란 그에게 여전히 발견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괴테의 이 논고가 결코 고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괴테의 『독일 건축에 관하여』는 그의 친구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1744~1803)가 자신의 『오시안론』Auszug aus einem Briefwechsel über Ossian und die Lieder alter Völker, 『셰익스피어론』Shakespeare 등과 함께 편집했던 저서 『독일의 특질과 예술에 관하여』Von deutscher Art und Kunst(1773)에 수록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이러한 사정에서도 명백히 보이듯이 고딕 복권은 남방적=고전적 원리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북방적=근대적 예술의 정당화를 목표로 하는 광범위한 예술운동 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오시안’Ossian, ‘셰익스피어’, ‘고딕 건축’이라는 조합은, 이미 영국의 저작가 윌리엄 더프William Duff(1732~1815)의 『독창적 천재성에 관한 고찰』Essays on Original Genius(1767)에서 발견된다. 괴테의 논고도 당시에 이미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예술운동을 배경으로 생겨난 것이며, 이것이 소위 ‘고전[주의]적’인 것과 ‘낭만[주의]적’인 것이라는 대립 개념의 성립을 촉구했다.
‘고전[주의]적’인 것과 ‘낭만[주의]적’인 것이라는 대립 개념이 명확하게 자리매김한 것은, 프리드리히의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Schlegel(1767~1845)이 1801년부터 다음 해까지 강의했던 『예술론』Kunstlehre에서다. 그리스ㆍ로마의 고전기를 이상으로 하는 ‘고전주의’도, 중세를 이상으로 하는 ‘낭만주의’도, 역사상의 어떤 과거 속에 자신의 기원을 추구하여, 그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거나 그것을 모방하여 현재 상태의 예술을 쇄신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그런 의미에서는 고전주의도 낭만주의도, 반동적인 동시에 또한 혁신적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아우 슐레겔의 건축론(1806년 발행)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이 논고를 파리의 건축에 관한 보고로 시작하여 “고딕 양식에서 오래된 노트르담 교회”를 유일하게 예외로 하고, 이미 ‘파리의 유명한 건물’을 비판했다. 그 이유는 이들 건물이 이미 “고대적인 것을 단지 피상적으로 추구할” 뿐이며, 거기에 보이는 “이탈리아 혹은 그리스 식으로 줄지어 늘어선 기둥”도 “이질적인 국토와 풍토”에서 완전한 ‘불균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고딕 건축의 기원’은 “북방에서 사용되어, 북방의 풍토에 적합한 북방적 건축양식의 자연 본성 속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라고 슐레겔은 주장한다. 슐레겔은 1803~1804년의 문학사 강의에서도 ‘코르네유, 라신’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문학이 “고대의 고전적 문학을 모방하여 만든 문학”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서는 ‘근원적인 소질’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슐레겔에게는 고전주의가 자신과는 이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운동이라면, 낭만주의는 오히려 독일에 고유한 ‘근원적인 것’을 다시 획득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슐레겔은 ‘중세의 낭만[주의]적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진 교회를 ‘고딕적 내지 독일적’이라고 특징짓는다.
다시 만들어진 중심
그러나 ‘고딕적’ 내지 ‘옛 독일적’인 것은 정말로 잃어버린 ‘중심점’을 다시 소환할 힘을 가지고 있을까?
애당초 고딕의 ‘기원’ 그 자체가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형 슐레겔의 강의 초고 『예술론』(1801~1802)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고딕 건축. 그 성립에 대한 역사적 물음. 비본래적 명칭. 사라센인. 인도에서.” 초고이기 때문에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형 슐레겔은 고딕 건축의 고트=게르만 기원을 부정하고, 오히려 이슬람 기원설—크리스토퍼 제임스 렌Cristopher James Wren(1632~1723)이 제창했다—을 취하고, 나아가서는 인도 기원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형 슐레겔에게서 이 강의 초고를 빌려서, 스스로 1802년부터 다음 해까지 『예술철학』Philosophie der Kunst을 강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1775~1854)은, 고딕 건축의 인도 기원설을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설인 것처럼) 제창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 슐레겔은 “고딕 건축의 아라비아 기원에 관한 가설은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라고 강조함과 동시에, “독일의 건축가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른바 고딕 건조물을 세웠다”라고 언급하며, 고딕 건축의 독일 기원을 주장한다.
나아가 아우 슐레겔은, 회화의 영역에서 본다면 “[반] 에이크의 인물상에는 후대의 의미에서 네덜란드적인 것[=세속적인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므로, 에이크를 독일 회화 속에 포함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연할 것”이라고 말하여 ‘옛 독일 회화’의 출발점을 에이크에 둔다. 에이크는 “기반이 낮은 독일 회화에 기초를 다진 사람”이며, ‘독일의 네덜란드’ 화가라고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고를 지탱하는 것은, 독일의 근원성에 대한 확신이다. 1803~1804년의 『유럽 문학사 강의』Geschichte der europäischen Literatur( Vorlesungen)에서 ‘옛 독일 문학’을 논할 때도, 슐레겔은 “독일어는 가장 근원적이며 오래된 언어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진술하여 독일어의 근원성을 지적하면서, 나아가 ‘독일적’인 것의 범유럽성을 강조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최고의 문학에는 로마적 성격이 아니라, 독일적 성격이 있다.” 또 그는 바로 이어서 이후에 “유의미하며 생산적인 시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근대의] 문학을 포괄”하는 ‘독일 문학’뿐이라고 하면서, ‘독일적’인 것의 근원성에서 그 장래의 가능성을 도출한다.
슐레겔의 이러한 논의가 지닌 자의성을 지적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독일어’의 범유럽성에 대한 주장이 후일 『인도인의 언어와 지혜에 관하여』Über die Sprache und Weisheit der Indier(1808)에서 전개되는 ‘인도ㆍ유럽어족’의 이론체계를 촉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고딕의 기원이 프랑스의 생 드니 수도원이라는 것이 명백해진 것은 1843년의 일이므로, 슐레겔의 고딕론이 당시 그 외의 고딕론—예를 들면 프랑수아 르네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1768~1848)의 『그리스도교 정수精髓』Genie du Christianisme(1802)의 고딕론—과 비교하여 특별히 자의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고딕적’ 내지 ‘옛 독일적’인 것을 둘러싼 슐레겔의 논의에서 파악해야 할 것은 그것의 자의성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고딕적’ 내지 ‘옛 독일적’인 것을 (있어야 할) ‘중심점’에 상응하는 ‘사실’로 다시 만들려 하는 그의 의지일 것이다. ‘잃어버린 중심점을 다시 발견’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신화’의 이념이야말로, ‘고딕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고딕 환상’은 그 후에도 (형태를 바꾸며) 반복되지만, 여기서는 율리우스 랑벤Julius Langbehn(1851~1907)의 『교육자 렘브란트』Rembrandt als Erzieher(1890), 하인리히 뵐플린 게르슈텐베르크Heinrich Wölfflin Gerstenberg(1864~1945)의 『독일적인 특수고딕』Deutsche Sondergotik(1913),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1882~1965)의 논고 『후기 고딕과 표현주의의 형식체계』(1925)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역설 속의 낭만주의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전통’을 사후적으로 (다시)—구성하는 작업 그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다시 해석되지 않으면 창조적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동시에 ‘전통’이 그 자체로서는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고딕 환상’이 환상인 이유는 ‘전통’을 (다시) 구성하는 행위, 혹은 그 행위를 지탱하는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이 배후로 물러나 (다시) 구성된 ‘전통’이 ‘사실’로 간주된다는 점에 있다. ‘사실’로 간주된 ‘전통’은 사람들의 행동이나 의식을 속박하며, 창조적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필요한 것은 현대에 ‘중심’이 부재함을 인정하고 ‘전통’의 (새로운) 해석=구성이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전통’인가 ‘투기’인가 하는 양자택일 대신에 ‘전통’과 ‘투기’의 역설을 역설로서 긍정하고, ‘전통’과 ‘투기’ 사이에 열려 있는 중심 없는 공간 속에 감히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 낭만주의가 대치했던 문제가 오늘날의 문제로 계속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본론은 이 역설로 헤집고 들어가려는 시도이다. 우선 근대적 예술관의 바탕에 있는 ‘독창성’과 둘러싼 역설을 검토하는 데서 시작하기로 하자.
(서문,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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