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거부해라, 스스로의 욕망을 굴복시켜라
- 『파우스트』 제1부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B가 세묜 니콜라예비치 V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1850년 6월 6일 M 마을에서
사랑하는 친구. 여기에 온 지도 벌써 나흘째로군. 약속대로 자네에게 편지를 쓰네. 밖에는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려 나갈 수도 없고 마침 나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 드디어 난 보금자리로 다시 돌아왔네. 말하기도 무섭지만 거의 구 년만이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실제로 사람이 달라졌어. 자네 기억하나? 우리 거실에 걸려 있는 어두운색 작은 거울말이야. 우리 증조할머니 것으로 네 귀퉁이에 특이한 장식이 있는. 자넨 이 거울을 볼 때마다, 백 년 전 이 거울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궁금해 하곤 했지. 이곳에 도착한 뒤 이 거울을 보고 나는 적이 당황했네. 최근 들어 많이 늙고 변한 내 모습을 갑자기 보게 되었거든. 물론 나만 늙은 게 아니더군.
이미 오래전에 낡아버린 우리 집은 약간 기울어진데다 땅속으로 움푹 주저앉아 지금은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지탱하고 있는 형편이야. 우리 착한 바실리예브나, 가정부 말이야(기억할 거야, 자네에게 맛있는 잼을 만들어주곤 했으니까). 완전히 쪼그라들었지 뭔가. 허리까지 굽었어. 나를 보고도 탄성을 지르거나 기뻐 울지도 못하더군. 그저 어머나, 어머나, 소리만 연발하더니 기침을 심하게 해대는 거야. 결국 완전히 지쳐서 의자에 앉아 양손을 흔들기만 하더군. 체렌치 노인은 아직도 건강해서 늘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걸어 다녀. 걸을 때마다 발을 비틀면서 말이야. 여전히 노란색 남경南京 무명 바지에 요란한 소리를 내는 리본이 달린 양가죽 단화를 신고 다니지. 한데 다리가 말이야, 자네가 매번 신기하게 생각했던 그 다리. 맙소사! 지금은 너무 말라서 바지가 펄럭거릴 정도야! 또 머리카락은 하얀 은발이 되어버렸지! 얼굴도 완전히 쪼그라들어서 내 주먹만 하더군. 또 나와 대화를 나눌 때나 옆방에서 뭔가를 지시할 때 노인은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네. 치아가 몽땅 빠져버려 입을 우물거릴 때마다 쐑쐑하며 갈린 소리가 나지 뭔가.
대신 정원은 놀랄 만큼 훌륭해졌어. 라일락과 아카시아, 인동나무의 볼품없는 관목들이(자네와 내가 함께 심었는데 기억하나?) 울창하고 멋진 숲으로 변했다네. 자작나무와 단풍나무도 모두 쑥쑥 자랐지. 특히 보리수의 가로수길은 훌륭해졌어. 난 이 가로수길이 좋아. 연녹색과 회색이 섞인 부드러운 색감의 아치 아래 그윽한 내음도 좋고, 흑토 위 화려한 원 모양 무늬 역시 너무 좋아. 자네도 알다시피 내 정원에는 모래가 없어. 내가 좋아하는 어린 참나무 역시 어느새 의젓한 나무로 성장했더군.
어제 낮에 나는 한 시간도 넘게 그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어. 기분이 무척 좋더군. 주변에는 풀이 무성하고 그 위로는 강한 황금빛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졌지. 햇빛은 나무 그림자까지 비껴들었어……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자네, 내가 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잊지 않았겠지. 비둘기가 쉴 새 없이 구구, 하고 울면 때때로 꾀꼬리가 휘파람 소리를 내고, 티티새가 화가 난 듯 울어 제치면 저 멀리 뻐꾸기가 응답하는 거야. 그러면 별안간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미친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지. 나는 이 모두가 어우러진 부드러운 소리에 귀 기울이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어. 마음속은 권태랄까, 가벼운 흥분이랄까, 알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
성장한 것은 정원만이 아니었어. 거리에서 씩씩하고 건장한 체격의 젊은이들과 쉴 새 없이 마주쳤지만, 예전에 내가 알던 그 꼬마들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어. 자네가 예뻐하던 꼬마 치모샤 * 역시 이제는 어엿한 청년 치모페이로 성장했더군.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자네는 당시 그 애가 폐병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지. 하지만 지금 무명 프록코트의 좁은 소매 밖으로 보이는 그 애의 굵은 팔뚝과 몸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탄탄한 근육들……자네가 보면 깜짝 놀랄 거야! 목덜미는 황소 같고 머리카락은 온통 금발의 고수머리야. 한마디로 파르네즈의 헤라클레스 동상 그대로라니까! 반면 얼굴은 많이 변하지 않았어. 크기도 그다지 커진 것 같지 않고. 그리고 자네가 말하곤 했던 이른바 ‘하품하는 듯한’ 미소 역시 여전하더군. 난 그 애를 하인으로 삼았어. 페테르부르크에서 데리고 있던 하인은 모스크바에 버리고 왔지. 지나치게 도시적인 것을 좋아하고 잘난 척하며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서 말이야.
예전에 내가 기르던 개는 한 마리도 없더군. 모두 죽어버렸어. 네프카가 그나마 가장 오래 살았는데 그놈마저도 아르고스가 윌리스를 끝까지 기다린 것처럼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지는 않았어. 흐릿한 눈으로 자기 옛 주인이자 사냥 친구였던 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거지. 샤프카는 아직 살아있다네. 여전히 쉰 목소리로 짖어대. 한쪽 귀도 예전 그대로 찢어진 모습이었고. 꼬리에 가시 달린 우엉을 붙인 채로 다니는 버릇도 여전해.
옛날 자네가 쓰던 방을 내가 사용하기로 했네. 사실 이 방은 햇볕이 너무 들고 파리 떼가 들끓지만 다른 방에 비해 낡은 집 특유의 냄새가 적게 나는 편이거든.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야! 퀴퀴하고 약간은 시큼한, 어딘지 맥이 풀린 듯한 내음이 불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라네.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하거든. 마음속 깊은 곳에 슬픔을 불러일으키다가 결국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지게 하지.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구리 장식의 투박한 옷장과 타원형 등받이가 있는 안락의자, 가운데 자줏빛 금속 장식이 달린 커다란 달걀 모양 장식이 있는 파리똥 투성이의 유리 샹들리에(조상 대대로 내려온 이 가구들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 종일 이것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어. 내 마음은 뭔지 모를 불안한 권태(정말 그랬어!))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어. 내 방에 있는 가구들은 아주 평범한 수제품들이지. 하여튼 나는 좁고 긴 찬장을 한쪽 구석에 남겨두기로 했네. 찬장 위에는 뿌연 먼지 사이로 구식의 녹청색 유리 쟁반이 보이더군. 벽에는 검은 테두리의 액자 하나를 걸게 했어. 기억하나? 자네가 늘 마농 레스코의 초상이라고 한 여자 그림말일세. 지난 구 년 동안 색깔이 약간 퇴색했어. 하지만 눈은 여전히 상념에 잠긴 채 교태스러우면서도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고 입가에는 가볍고 슬픈 미소가 어려 있다네. 그리고 반쯤 뜯어진 장미 한 송이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소리 없이 떨어질 듯하고.
내 방의 커튼은 아주 재미있다네. 원래는 초록색이었는데 지금은 색깔이 바래서 누르스름해졌지. 커튼에는 다르란쿠르의 『은자隱者』에서 인용한 몇몇 장면이 먹으로 그려져 있어. 커튼 한편에는 엄청나게 긴 수염을 기르고 샌들을 신은 은자 한 사람이 눈을 부릅뜬 채, 머리채를 풀어헤친 어떤 처녀를 산속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다른 편에는 머리에 베레모를 쓰고, 어깨에 불룩한 주름이 잡힌 옷을 입은 무사 네 명이 목숨을 걸고 격투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누워 있어. 엉 라쿠흐시(en raccourci) *,죽은 채로 말이야. 한마디로 처참한 광경들이 그려져 있지만, 사방은 고요한 정적뿐. 커튼은 부드러운 반영을 천정에 드리우고 있다네…….
* 프랑스어로 '요컨대'.
여기 정착하면서부터 어떤 정신적 고요함이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어.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무언가를 소망하지도 않고, 공상하는 것도 귀찮아졌지. 하지만 생각하는 건 귀찮지 않아. 자네도 알다시피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지. 먼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나를 엄습했네……어디를 가나, 무엇을 보나, 도처에서 선명한 추억들이 떠오르는 거야. 아주 사소한 일까지 떠올라서 마치 그 선명한 윤곽대로 굳어버린 느낌이었어……이윽고 이것이 다른 추억으로 바뀌면, 거기에서……거기에서 나는 살며시 과거로부터 등을 돌려버려.
그러면 내 마음에는 육중한 나른함만이 남게 된다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버드나무가 늘어진 둑 위에 앉아 있으려니 별안간 눈물이 흐르지 뭔가. 이때 옆을 지나가던 농부 아낙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울었을 거야. 농부 아낙은 흥미롭다는 듯이 흘끗 쳐다보더군. 하지만 금방 얼굴을 돌리며 공손히 인사하고는 지나가버렸어. 나는 이곳을 떠날 때까지, 즉 구월까지 이런 기분으로 지내고 싶네(물론 두 번 다시 눈물을 흘리진 않을 걸세). 그래서 만약 이웃 중 누군가가 나를 방문한다면 난 무척이나 실망할 거야. 하지만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없거든. 자넨 내 기분을 이해하리라 믿네. 고독이란 것이 인간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자네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을 테니까……온갖 풍랑을 겪은 나에게 이 고독은 정말 필요하다네.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아. 책을 몇 권 가지고 온 데다가 여기에도 제법 괜찮은 서재가 있거든. 나는 어제 책장을 모조리 열어 젖힌 다음, 곰팡이 냄새나는 책들을 뒤져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재미있는 책을 많이 찾아냈다네. 1770년대에 필사본으로 출판한 『캉디드』 번역본, 『개선한 카멜레온』(그러니까 미라보 말일세), 『르 뻬이정 뻬베르(Le Paysan pervert)』 * 등 그 무렵에 나온 보고서와 잡지들이 있더군. 어린이 책들도 있었어. 내 것도 있고, 아버지 것도 있고, 할머니 것도 있었어. 글쎄 증조할머니 책도 있지 뭔가. 화려하게 장정된 어떤 프랑스어 문법책에는 커다란 글자로,‘스 리브르 아빠르띠앙 아 마드모아젤 외독시 드 라브린(Ce livre appartient a m-lle Eudoxie de Lavrine)’ ** 라고 쓰여 있더군. 연도를 보니까 1741년이었어.
* 프랑스어로 '방탕한 농부'.
** 프랑스어로 '이 책은 예브도키야 라브리앙 양의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외국에서 가져온 책들도 발견했어. 괴테의 『파우스트』도 있더군. 자네가 기억할지 모르지만, 한때 난 『파우스트』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암기한 적도 있었어(물론 제1부뿐이긴 했지만). 아무리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어.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꿈도 바뀌기 마련. 최근 구 년 동안 난 괴테가 쓴 책을 거의 읽지 못했네. 나에게 그토록 낯익은 이 작은 책(1828년 출판본)을 발견했을 때 그 느낌이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 나는 책을 손에 들고 침대에 누워 읽기 시작했지. 제1막의 장엄함은 벅찬 감동 그 자체였어! 정령의 등장과 그의 대사, 자네도 기억할 테지, ‘인생의 파도 위에, 창조의 폭풍 속에.’ 이 대사는 내 마음속에 한동안 맛보지 못했던 아찔한 전율과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어. 모든 게 되살아났어. 베를린, 유학 시절, 프로일라인 클라라 슈치흐,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한 자이데르만, 라지빌의 음악 등 그 모든 게 말이야……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내 청춘이 눈앞에 되살아나 환영처럼 어른거리더니 온몸의 혈관을 따라 불길처럼, 독약처럼 뛰어다니는 거야. 심장은 확장된 채 수축되지 않았고 심장의 혈관이 온통 약동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욕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지…….
상상할 수 있겠나, 벌써 마흔이 다된 내가 쓸쓸한 자기 집에 혼자 앉아 이런 부질없는 공상에 빠져 있는 모습을 말이야! 누가 엿보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상관없어. 난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 하긴 부끄럽다는 감정 역시 젊음의 증거이니까. 그런데 내 자신이 늙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게 되었는지 아나? 바로 이렇다네. 지금 난 즐거운 감정을 과장하고 쓸쓸한 마음은 밀어내려 애쓰고 있거든. 하지만 젊었을 때는 반대였다네. 우수와 권태는 보물처럼 아끼고, 쾌락의 폭발은 애써 잠재우려 했지…….
그런데 나의 친구 호라시오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지금껏 쌓아온 나의 모든 인생 경험에도 이 세상에서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야. 더구나 그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아, 이렇게 부질없는 말까지 쓰고 말았군! 그럼, 잘 있게나! 다음에 또 쓰겠네. 자네는 지금 페테르부르크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참, 우리 집 요리사 사벨리가 자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군. 그도 나이를 먹었지만 많이 변하지는 않았네. 약간 살이 찌고 동작이 둔해진 것만 빼고 말이야. 여전히 삶은 알줄기를 넣은 닭국이며, 가장자리에 무늬를 넣어 만든 빵, 피구스 같은 것을 잘 만든다네. 그 유명한 초원의 요리, 피구스 말이야. 자네 혀를 새하얗게 만들고, 하루 종일 말뚝처럼 서 있게 만들었던 바로 그 요리. 고기를 얼마나 오래 익히는지 접시에 대고 두드리면 소리가 날 정도야, 마치 마분지 같아.
자, 그럼, 오늘은 이만!
자네의 친구 P. B로부터
같은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1850년 6월 12일 M 마을에서
사랑하는 친구, 오늘은 자네에게 제법 중대한 소식을 전하려고 하네. 내 말을 들어보게나! 어제 난 식사를 하기 전에 잠시 산책을 하고 싶어졌어. 그것도 정원을 걷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거리로 통하는 한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지. 곧고 긴 길을 아무 목적 없이 걷는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야. 남이 보기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서두르면서 말이야. 문득 앞을 보니까, 저 멀리 마차 한 대가 오더군. ‘설마 우리 집에 오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두려움마저 느꼈어……하지만 그건 기우였네. 마차 안에는 멋스럽게 콧수염을 기른 신사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거든.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 한데 마차가 내 옆에 왔을 때 신사가 갑자기 마부에게 말을 멈추게 하더니 공손히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는 거야. 혹시 아무개 씨 아니냐며 내 이름을 말하더군. 하는 수 없이 나도 걸음을 멈추고 마치 재판에 나가는 피고처럼 용기를 내어, 네, 그렇습니다만, 하고 대답했지. 한편 나는 양처럼 순한 눈길로 낯선 콧수염 신사를 바라보며, 흐흠, 얼굴이 낯설지 않은데, 하고 생각했어.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그 사이 신사가 마차에서 내리며 묻더군.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전 당신을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이 신사가 프리임코프라는 사실을 알았다네. 자네 생각나나? 우리 대학 동창 말이야. 친애하는 나의 친구여, 자네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하고 이 순간 생각할 테지. 프리임코프? 상당히 싱겁고 평범한 친구였지. 못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멍청하지도 않은 그런 친구 말이야. 물론 맞는 말이지. 하지만 여보게. 그다음에 있었던 우리 대화를 좀 들어보게나.
“저는 당신이 우리 마을로, 게다가 우리 옆집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물론 기뻐한 사람은 저 말고 또 있습니다.”
프리임코프가 이렇게 말했어.
“글쎄요, 대관절 누가 또 기뻐하셨는데요?”
나는 물었지.
“저의 아내입니다.”
“부인이요?”
“네, 제 아내입니다. 당신과는 예전부터 아는 사이니까요.”
“실례지만, 부인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베라 니콜라예브나입니다. 아내의 성은 옐초바라고 합니다.”
“베라 니콜라예브나라고요!”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편지 서두에서 말한 중요한 소식일세.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자네는 뭐가 중대하다는 건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을 테지……그래서 난 나의 과거……아주 먼 옛날 일을 잠깐 이야기하려고 하네.
우리가 183*년 대학을 졸업했을 때 나는 스물세 살이었어. 자네는 곧 관청에 들어갔고 나는 알다시피 베를린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지. 하지만 베를린에서는 시월까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여름을 러시아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어. 이왕 떠나는 김에 시골에 묻혀 실컷 놀다가 독일에 가면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었어. 이 계획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 어디서 여름을 보내지?’ 하고 나는 생각했네. 고향에는 가고 싶지 않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까운 친척들도 없었거든. 난 외로움과 지루함이 두려웠어…….
그래서 사촌 아저씨뻘 되는 친척의 권유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의 영지가 있는 T현에서 머무르기로 했네. 그는 부유하고 선량하며 담백한 지주였고 귀족다운 저택에서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었어. 난 그리로 갔네. 아저씨 집은 아들 둘에, 딸이 다섯인 대가족이었어. 게다가 집 안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았어.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네. 소란스러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도저히 조용하게 지낼 수 없었거든. 무슨 일이든지 모두가 힘을 합쳐 처리하고,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보려 애쓰고, 무엇이든 생각해내려 기를 썼기 때문에 하루가 끝날 무렵 우리는 녹초가 되어버렸지. 내게는 이런 생활이 어쩐지 저속하다는 느낌마저 들었어. 그래, 기회를 봐서 떠날 생각을 하고 오로지 아저씨의 명명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런데 바로 이 명명일의 무도회에서 나는 베라 니콜라예브나 옐초바를 만난 거야. 그리고 그냥 눌러앉고 말았지.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당시 열여섯 살이었어. 우리 아저씨 집에서 오 베르스타 정도 떨어진 자그마한 영지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지. 소문에 의하면 베라 니콜라예브나의 아버지는 아주 유능해 단시일에 대령이 되었고 전도가 유망한 사람이었는데, 사냥을 나갔다가 친구가 잘못 쏜 총을 맞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하더군. 그렇게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게 되었지.
베라 어머니 역시 보통 여자와 달리 몇 개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교양 있는 여자였어. 그녀는 남편보다 일곱 살인가 여덟 살 연상이었는데 두 사람은 연애결혼이었다고 하더군. 베라 아버지가 그녀를 집에서 몰래 데리고 나왔다는 거야.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마지막 날까지(프리임코프의 말에 따르면 베라 어머니는 딸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군) 검은색 상복만 입었다는 거야. 나는 지금도 베라 어머니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네. 표정이 풍부한 거무스레한 얼굴에 머리채는 짙은 잿빛이었고, 작고 오뚝한 콧날에, 생기 없고 커다란 눈동자는 엄해 보였어.
베라의 외할아버지는 라다노프라는 사람이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약 십오 년간 살았다고 하더군. 외할머니는 알바노의 평범한 시골 여자였는데, 베라 어머니를 낳은 이튿날 예전 약혼자였던 트란스테베리아 출신 남자에게 살해되었어. 라다노프에게 애인을 뺏긴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지……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스캔들을 일으켰다고 하네. 그 후 러시아로 돌아온 라다노프는 자기 집은 물론이고 서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화학, 해부학, 신비 철학 등을 연구하며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노력했어. 그리고 그는 영혼과 교류하거나 죽은 자를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마법사로 여겼다네. 그는 딸을 무척이나 예뻐해서 자신이 직접 딸의 교육을 맡았어. 하지만 베라 아버지와 도망친 것만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고, 딸도 사위도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한 뒤 두 사람에게 불행한 미래를 예언하고는 쓸쓸히 혼자 눈을 감았다네. 과부가 된 베라 어머니는 모든 시간을 딸의 교육에 바치고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어. 내가 베라 니콜라예브나와 알게 되었을 때, 글쎄, 그때까지 다른 도시에는 가본 적이 없다는 거야. 심지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내 도시조차 말이야.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여느 아가씨와는 달랐어. 그녀에게는 뭔지 모를 특별함이 느껴졌다네. 나는 처음 만났을 때 놀랄 만큼 차분한 몸짓과 말투에 깜짝 놀랐어. 어떤 일에도 신경을 쓰거나 걱정하는 법이 없었고 내 질문에는 솔직하고 현명하게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상대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지. 표정은 아이처럼 순진하고 정직했지만 약간 싸늘하고 단조로운 면도 엿보였어. 그렇다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표정은 아니었지. 그녀가 쾌활해지는 일은 드물었어. 그런 경우에도 다른 여자와는 달랐지. 순수한 영혼의 빛이 그녀의 존재를 밝혀준다고나 할까.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균형 잡힌 몸매에 날씬한 편이었지. 얼굴 윤곽은 뚜렷하면서도 섬세했어. 반듯하고 예쁘장한 이마, 빛나는 금발, 엄마를 닮은 오뚝한 콧날, 제법 도톰한 입술. 그리고 검은빛이 도는 잿빛 눈동자는 풍성한 속눈썹 밑에서 약간은 지나치게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곤 했어. 손은 크지 않았고 그리 예쁜 편도 아니었어. 재능을 가진 사람의 손은 그렇지 않은데……사실 베라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지는 않았어. 목소리는 마치 일곱 살짜리 어린애처럼 날카로운 톤이었고. 나는 아저씨의 무도회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었고 며칠 뒤 처음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어.
옐초바 부인은 매우 이상한 여자였어. 성격이 뚜렷하고 고집이 세며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성격이었지. 나는 부인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 그녀를 존경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두려워하기도 했네. 부인은 모든 것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처리하는 성격이어서 자기 딸도 법칙에 따라 교육시켰지만 딸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없었어. 딸은 어머니를 사랑했고 맹목적으로 신뢰했어. 예를 들어 어머니가 책을 주며 이 페이지는 읽지 말라고 하면, 그녀는 그 앞의 페이지부터 읽지 않았고, 물론 읽지 말라는 페이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
하지만 옐초바 부인은 자신만의 이데 픽세(idees fixes) * 과 습관을 가지고 있었어. 예를 들어 그녀는 상상력을 자극할 우려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서워했어, 마치 불처럼 말이야. 그래, 딸 역시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소설 한 권, 시 한 편 읽은 적이 없다는 거야. 대신 지리, 역사는 물론이고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은 해박한 나를 당황하게 만들 정도였어. 자네도 기억하겠지만, 내 학부 성적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지.
* 프랑스어로 '고정관념'.
어느 날 나는 옐초바 부인에게 그녀의 습관을 지적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어. 물론 부인이 워낙 과묵해서 대화에 끌어들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 그때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어.
“당신은요.”
옐초바 부인이 드디어 입을 열더군.
“예술 작품을 읽는 것이 유익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고 말씀하시지만요……제 생각에는요, 인생을 살면서 유익한 것이든, 즐거운 것이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그리고 그 선택은 영원한 거지요. 저도 언젠가 양쪽을 결합시키려 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불가능해요. 그저 멸망하거나 저속해질 뿐이지요.”
부인은 정말이지 놀랄만한 존재였어. 광신이나 미신 같은 게 있긴 했지만 정직하고 자긍심 높은 사람이었어.
“나는 사는 게 무서워요.”
어느 날 부인이 나한테 그러더군. 실제로 부인은 인생을 두려워하고 있었어. 삶의 근저를 이루는 신비한 힘, 때때로 뜻하지 않게 표면 위로 드러나는 불가해한 힘을 그녀는 두려워했어. 그 힘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진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겠지! 옐초바 부인에게 이 신비로운 힘은 가공할 정도로 명료하게 나타난 거야. 어머니의 죽음, 남편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이쯤 되면 누군들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걸세.
나는 부인이 미소짓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부인은 마치 마음의 자물쇠를 잠그고 열쇠는 물속에 던져버린 사람 같았어. 일생 동안 수많은 불행을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네. 그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지. 자기감정을 자제하는 습관이 얼마나 몸에 배었는지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했어. 부인은 한 번도 내 앞에서 딸에게 키스한 적도 없고 친근하게 애칭으로 부르는 일도 없었어. 그저 ‘베라’ 라고만 불렀어. 나는 지금도 부인이 한 말을 기억하네. 언젠가 내가 우리 현대인들은 모두가 상처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더군.
“스스로에게 상처 입힌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에요. 자신의 존재 전체를 꺾어버리든가 아니면 아예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아요.”
옐초바 부인의 집에 출입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네. 하지만 나는 자주 그 집을 방문했어. 부인 역시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지. 그리고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네. 우리는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을 하곤 했지……어머니는 별로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지만 베라 스스로가 어머니와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나 역시 베라와 단둘이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지. 베라는 무엇을 곰곰이 생각할 때 소리 내 말하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네. 그녀는 밤에 자면서 그날 받은 강한 인상에 대해 큰 소리로 말하곤 했어. 한 번은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평소 버릇대로 가볍게 턱을 괴더니, “B씨는 좋은 분 같지만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무척 친밀하고 한결같았지. 단지 이따금 그녀의 맑은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뭔가 기묘한 것, 일종의 만족감과 상냥함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어……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꾸물거리고 있었지. 얼마 후에는 이 귀여운 소녀를, 이토록 내 마음을 사로잡은 소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베를린은 예전의 매력을 잃어갔지. 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스스로 인정할 만한 용기가 없었고, 또 무엇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어. 마치 마음속에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는 것 같았지.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모든 것이 명백해졌네. ‘더 이상 무엇을 찾으려는 거냐?’ 난 생각했어. ‘어디로 가려는 거지? 아무리 애써봐야 진리란 손에 잡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오히려 여기 남아 결혼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 결혼이라는 것도 그때 나에겐 전혀 위협이 아니었네. 도리어 나는 아주 기뻤어. 그래서 그날 즉시 내 계획을 말하러 갔어. 자네도 예상했겠지만, 베라가 아니라 옐초바 부인에게 갔지. 노부인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
“아니요. 당신은 베를린으로 가서 좀 더 상처를 입고 돌아오세요. 당신은 선량한 분이지만 베라에게 필요한 사람은 아니에요.”
나는 당황하여 눈을 내리깔았고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졌지. 그리고 자넨 놀라겠지만 나는 이내 옐초바 부인의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네. 일주일 후 난 그곳을 떠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부인도 베라도 더 이상 만나지 못했어.
내 연애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대충 간추려서 말했네. 자네가 워낙 ‘장황하게 늘어놓는’ 걸 싫어하니까. 베를린에 도착한 후 베라는 내 기억 속에서 빠르게 잊혀졌지……하지만 프리임코프가 전한 뜻밖의 소식에 난 묘한 흥분감에 사로잡혔어. 베라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고 있으며 더구나 이제 곧 그녀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어. 마치 깊은 땅속에 있던 과거가 부활해 별안간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히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았지. 프리임코프는 우리의 과거 인연을 다시 재개해볼 요량으로 나를 찾아와 가까운 시일 내에 자기 집을 찾아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말하더군.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기병대에 근무하다가 중위로 퇴역했고 여기에서 팔 베르스타 정도 떨어진 곳에 영지를 구입했는데 앞으로는 농지 경영에 전념할 생각이라더군. 또 아이 셋이 있었지만 그중 둘은 죽고 지금 남아 있는 아이는 다섯 살짜리 딸 하나뿐이고.
“부인도 절 기억할까요?”
내가 물었지.
“그럼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가 대답했어.
“아내는 당시 어린애였지만 장모님은 항상 당신을 칭찬하셨지요. 그리고 당신도 아시다시피 아내는 어머니 말이라면 일언반구도 소홀히 하지 않으니까요.”
순간 내 머릿속에 옐초바 부인이 나에게 한, 내가 베라의 신랑감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어……‘그래, 자넨 신랑감이라는 말이군.’ 나는 프리임코프를 곁눈질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지. 그는 우리 집에서 몇 시간쯤 앉아 있다가 돌아갔어. 프리임코프는 매우 선량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네. 겸손한 말투와 선한 인상은 사람을 끄는 뭔가가 있었어…… 하지만 지적인 부분은 뭐랄까, 대학 시절보다 진전을 보지는 못한 모양이더군. 나는 반드시 그의 집을 찾아갈 생각이네. 어쩌면 내일 당장 갈지도 모르지. 베라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야.
자네는 그 짓궂은 버릇대로 지금쯤 부장 책상에 앉아 나를 비웃고 있을 테지.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가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자네에게 꼭 전할 생각이네. 그럼 잘 있게! 다음에 또 쓰겠네.
자네 친구 P.B로부터
(본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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