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끝없는 분쟁
<본 아이덴티티(Bourne Identity)>, 더그 라이만(Doug Liman), 미국(2002)
기억의 상실
어처구니없게도 현대 분쟁의 상당수는 ‘기억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황당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편리한 일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집권한 직후 이란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란이 이라크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였다. 전쟁은 8년을 끌었는데, 그런 긴 시간 동안 전쟁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이란에서 그쳐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미국의 착실한 친구였던 후세인은 이란과의 전쟁을 끝낸 뒤 돌연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100만 대군을 가진 후세인은 미국의 지원이란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일까? 발등 찍힌 미국은 대단히 아팠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더욱 기가 막힌다. 이제는 망자가 된, 한때 미국의 제1호 공적인 오사마 빈 라덴도 원래는 미국의 친구였다. 때는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던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공산주의 정권의 안정화가 목적이었다. 고지식하고 야성이 강한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들은 즉시 성전(지하드)을 선포했다. 그들은 호락호락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었다. 미국과 파키스탄은 이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계의 해결사 미국CIA는 파키스탄에 캠프를 차리고 이슬람 반군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제공했다. 제국주의 소련의 침략에 맞서 이슬람권은 분연히 일어났다. 19세기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가한 서유럽의 젊은이들처럼, 20세기 스페인 내란에 참가한 세계의 자유주의자들처럼 무슬림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갑부 아들 오사마 빈 라덴은 열혈 청년들의 대장이었다. 오사마가 모집해온 이슬람 지원병들을 CIA가 훈련시켰다.
2001년 이제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을 공격한 테러범을 숨겨주고 있다는 이유였다.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은 또 성전을 선포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은 소련과 함께 싸웠던 형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CIA의 훈련으로 성장한 오사마 빈 라덴의 전사들은 미국과의 성전에 나섰다. 신출귀몰한 빈 라덴 군대의 솜씨는 모두 미국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미국이 가르쳐준 데로 숨고, 위장하고, 저항했다.
미국은 결국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두 전쟁에서 모두 ‘과거의 자신’과 싸웠다. 미국의 전쟁은 오늘의 미국과 어제 미국의 대리인이었던 자의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던 북베트남의 호찌민 역시 한때 미국의 친구였다. 시간이 흐르고 복잡한 국제정치적 상황이 벌어지면서 미국과 호찌민은 절연했을 뿐이다. 이처럼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 이유는 누군가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는 어떤가? 세계의 강대국 미국은 대체로 필요에 따라 쉽게 친구가 되었다가 쉽게 헤어지는 경향이 있다. 상황이 변해도 믿고 신뢰하는 그런 심지 굳은 친구는 아니다. 사랑과 신뢰의 기억을 너무 쉽게 잃어버린다. 때로는 배신의 기억마저 잃어버리곤 한다.
기억의 상실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기억을 잊고 싶은 경우, 하나는 기억을 잃어버린 경우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기억을 잃은 척하든 실제로 잃었든, 외부에 비치는 결과는 같다. 자연인에게 기억의 상실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문제는 집단적으로 기억 상실이 일어날 경우다. 어느 누구도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과거의 경험을 잊고 싶다면? 그럴 경우 과거의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적을수록 결국 묻혀지고 말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가 그렇다. 일본의 주류 언론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자행한 무수한 침략 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난징 대학살이 그렇고 위안부 강제동원도 그렇다. 일본인들은 대신미국의 핵폭탄 투하에 따른 피해에 집중한다. 그래서 평화는 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서 일본인들이 기억하고 싶은 키워드다. 자성自省의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과거를 잊은 자들은 과거의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잊음은 과거를 부인하는 일이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이 현신現身한다면 그는 자신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는 셈이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통점은 침략의 역사를 모두 잊고 싶어 하거나 잊고 있다는것이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는 ‘기억의 상실’을 모티프로 미국 정보기관의 음모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미국의 해외 공작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정부 기관인 중앙정보부CIA가 양성한 특급 살인 병기다. 그는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모든 합법·비합법 작전에 참가해 정보 수집과 요인 납치, 살인과 폭파, 역정보 유포 등을 수행하는 스파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기억을 잃는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게 된 그는 과거의 자신이 낯설기만 한데 오히려 과거의 자신은 현재의 자신을 위협하는 적이 되고 만다.
본 아이덴티티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표류 중인 한 청년이 이탈리아 어선원들에게 발견된다. 그는 총을 맞고 바다에 빠졌지만 다행히 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특이하게도 엉덩이 피부에서 작은 칩이 발견되는데 거기에는 스위스은행 계좌번호가 적혀 있었다. 기적적으로 회생한 그는 2주 동안 선원들과 함께 지내지만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선장은 얼마간의 노잣돈을 쥐어주며 그를 항구에 내려준다. 청년은 스위스은행을 찾아 떠난다.
취리히에 도착한 그는 추운 겨울 공원 벤치에서 노숙하다가 경찰의 검문을 받아 쫓기는 신세가 된다. 다음 날 아침 찾아간 스위스은행에서 그는 자신이 제이슨 본(맷 데이먼 분)이란 미국인이며 현재 파리에 살고 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은행 사서함에 보관돼 있던 권총과 거액의 현금, 다수의 여권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본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미국 대사관 진입에 성공하지만 곧 대사관 안전요원의 제지를 받는다. 하지만 본은 전광석화 같은 무술 솜씨로 상대를 제압하고, 경비 병력을 피해 대사관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 본은 대사관에서 보았던 마리(프랑카 포텐테 분)라는 여성에게 접근해 거액을 주기로 하고 파리로 가는 차편을 제공받는다.
한편 미 중앙정보부는 수주 동안 수배해온 실종 요원이 갑자기 스위스은행에 나타나자 경계를 감추지 못한다. 본의 상급자인 콘클린(크리스 쿠퍼 분)은 본의 변절을 의심한다. 작전 중 실종된 뒤 갑자기 나타난 데다 본부에 연락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그는 유럽 전역에 있는 요원들에게 비상령을 내려 본을 찾아내 제거할 것을 지시한다. 한편 파리의 거점 요원은 두 사람의 사진이 들어 있는 수배 전단을 만들어 경찰에 제공한다.
본은 그런 사정도 모른 채 파리를 향해 열심히 달린다. 마리는 달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과묵한 남자에게 질린다. 본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마리는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파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본의 집으로 간다. 둘이 잠시 집을 둘러보는 순간, 요원이 본을 기습 공격한다. 처음에는 기관총 공격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단도와 육박전으로 이어진다. 본은 어렵게 요원을 쓰러뜨리는데 요원은 본이 한눈파는 순간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마리는 투신한 요원의 소지품 속에서 자신의 사진이 실린 수배 전단을 보고 크게 놀란다. 본은 현장을 빠져 나온 뒤 마리에게 안전을 책임질 수 없으니 자신을 떠날 것을 요청한다. 그런 뒤 기차역으로 가 소지품을 감추고 돌아온다. 마리는 갈등하지만 떠나지 않는다. 본과 마리가 역에서 머무는 사이 경찰이 덮친다. 본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경찰 차량과 모터사이클 10여 대가 추격하고 본은 마리의 소형 차량을 운전해 필사적으로 추격을 피한다. 겨우 경찰을 따돌린 본과 마리는 허름한 여관을 찾아가 은신한다. 본은 마리의 긴 머리를 자르고 검은 색으로 염색한다. 힘든 긴 하루를 보낸 둘은 비로소 안도한다.
본이 소속된 CIA 팀은 트레드스톤Treadstone이라는 특수 팀이었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암살과 침투 등 불법 활동이 용인되었으며 국장과 의회 정보위원회 이외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동원돼 최고의 요원을 선발·훈련해 실전 배치했다. 본은 그렇게 탄생한 최고의 요원 중 하나였다. 본은 아프리카의 망명 지도자 움보시를 암살하려는 작전 도중 실종되었다. 움보시는 정권 회복을 미국에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CIA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움보시는 한때 미국의 우방이었지만 이제는 적이 되었다. 본이 움보시를 제대로 암살하지 못함에 따라 그는 더욱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 콘클린은 움보시와 함께 본도 제거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암살자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린 본은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기억상실이라고 변명한들 의심이 없어질 리 없었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제거될 것은 분명했다. 조직은 이 일이 더 이상 확산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움보시와 함께 신원이 불명확해진 본을 제거하기로 한다. 본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자신이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은 불가피했다. 물론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 모를 일이지만….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
이 작품은 1980년대 스릴러 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러들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은 1980년대 발표된 관계로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2000년대 발표되면서 냉전 해소 이후로 상황을 변경했다. 하지만 극중 상황은 크게 다르지않다. 첩보원이라고 하면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가 대표적인데 러들럼을 통해 그에 필적할 만한 새로운 캐릭터가 탄생했다.
제임스 본드James Bond: 007와 제이슨 본은 이름부터 비슷하지만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둘은 첩보요원으로 신분은 같지만 본드가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첩보원이라면 본은 탈냉전시대를 대표하는 스파이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 장교 출신으로 해외 담당 정보부인 MI6에 소속된 첩보원이고, 본은 역시 미국 장교 출신으로 해외 담당 부서에 소속돼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물론 두 사람은 모두 가공의 인물이지만 실제 요원들의 캐릭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본드는 주로 영국과 미국 편에 서서 소련과의 대결에 동원되었다. 냉전 해소 이후에는 미치광이에 가까운 호전주의자들을 상대로 지구를 구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본드에 비하면 본은 사실 애송이에 가깝다. 나이도 그렇고 작전 회수도 빈약하다. 신무기를 사용하거나 화려한 카리스마를 선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아이덴티티>를 선두로 본이 나온 세 편의 영화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대중적인 인기 이상으로 첩보물 애호가들에게 본 시리즈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본 시리즈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드가 귀족풍인데 비해 본은 서민적이다. 본드는 이미 최고봉에 오른 대표주자이지만 본은 그저 유망한 살인 병기다. 본드는 바람둥이지만 본은 지조 있는 킬러다. 본은 그처럼 제임스 본드와 같은 귀족 스타일의 킬러나 단순무식한 킬러와는 다른 내면이 강력한 독특한 캐릭터를 구현했다. 본은 주로 총기로 승부하는 본드와 달리 격투기로 단련되어 있다. 특히 본은 절권도를 기초로 다른 격투기를 혼합한 독특하고 매우 효과적인 무술 솜씨를 지녔다. 좁은 공간 내에서 발휘하기 가장 적합한 무술이다. 그런 화려한 액션과 빠른 전개, 현실감 높은 설정, 미국과 유럽, 지중해를 넘나드는 폭넓은 장소 선정은 관객들에게 박진감과 함께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넘치지 않고 잔잔한 본의 남성적 매력도 호감 가는 부분이다.
본은 사실 긍정과 부정 두 면을 모두 가진 남자다. 본은 기본적으로 킬러이며 미제국주의의 첨병이다. 그 자체가 살인 기계이며 실제 여러 차례 사용된 전력도 있다. 그러나 기억을 잃어버리고 난 지금 그는 약자를 보호하고 자신과 자신의 여자를 지킬 줄 아는 헌신적이며 인간적인 남자다. 그는 스스로 인간 성격 개조를 통해 인간 병기로 육성된 자신의 이전 모습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재의 그와 과거의 그 사이에서 혼란스럽고 괴로워한다.
관객들은 그런 본이 안타깝지만 본의 입장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다. 관객들은 인간미를 갖춘 ‘현재의 본’이 마음에 들지만 ‘과거의 본’이 가진 막강한 파워는 그대로 두었으면 한다. 착한 현재의 본이 막강한 힘을 제대로 써주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극은 그런 관객의 의도대로 흘러간다. 그래서 영화는 성공할 수 있었다. 제임스 본드는 소련이나 전쟁광 같은 악당들을 해치우면서 박수를 받았지만, 제이슨 본은 어느덧 전쟁광이 되어버린 자신의 옛 조직을 향해 하이킥을 날리면서 박수를 받고 있다. 이때 기억상실은 참으로 편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한 장면. 기억을 상실한 인간 병기 ‘본’은 자신의 옛 조직을 향해 하이킥을 날리면서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다. |
첩보전에서 테러전으로
지나온 20세기는 전쟁의 시대였다. 무수히 많은 국지전이 있었지만 뭐니 해도 가장 강력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질서에 익숙한 제국주의 세력들의 결전이었다. 50년 만에 세계 판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제국으로 재편되었다. 전통의 영국과 프랑스는 힘을 잃었고 독일은 두 번이나 패전했다. 이어진 40년간의 냉전시대는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무수한 대리전이 벌어졌다. 미국은 한국과 베트남에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직접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리전이 주를 이루었다.
냉전시대에 가장 치열했던 분야가 첩보 분야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정보의 중요성은 재래식 군사력 이상으로 높아졌다. 정보전에 소요되는 예산의 규모도 커졌다. 각국에서는 각종 정보기관을 만들어 정보전에 동원했다. 정보情報(intelligence)가 일반적인 사안을 말한다면 첩보諜報는 은밀히 엿듣거나 수집한 정보를 말한다. 정보전은 통상적인 활동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첩보전은 비밀작전을 통해 이뤄진다. 핵무기의 개발로 재래식 전쟁이 핵전쟁화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미소의 첩보전은 불을 뿜었다. 스파이는 이중 스파이를 낳았고, 정보는 역정보를 낳았다.
냉전시대 첩보전의 중심은 베를린Berlin이었다. 본 시리즈에서도 중요한 지역으로 등장하는 베를린은 냉전을 상징하는 도시다. 동독 내에 위치해 있지만 서독에 속한 서베를린과 동독에 속한 동베를린으로 나뉘었다. 냉전 초기 베를린 봉쇄와 이에 맞선 서방의 베를린 공수작전, 그리고 베를린 장벽 건설과 탈출 등 40여 년의 분단 기간 동안 베를린은 항상 뉴스의 중심에 있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첩보전은 급속히 힘을 잃었다. 조직과 기구도 축소되고 인력도 감축되었다. 첩보전의 주요 대상도 정치에서 경제로 바뀌었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된 명료한 대결 구도가 사라지면서 전선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국익을 위해서라면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고 모두가 적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었다.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면서 모든 이로부터 견제받기 시작했다. 테러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힘으로는 될 수 없기에 테러를 동원하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테러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인 자살 폭탄 테러의 시작은 1983년 주 레바논 미국 대사관과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 기지에 대한 공격이다. 차량을 이용한 자살 공격이라는 방식으로 이뤄진 두 번의 테러로 400명 이상이 숨졌다. 1990년대 이후 미국 국내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자행된 여러 테러들은 대부분 이 방식을 응용했다. 9.11테러마저도 폭탄의 수송처가 트럭이 아니라 항공기였다는 점이 다를 뿐 자살 테러라는 점은 유사하다. 재래식 전쟁은 전선이 전투원 간에 이뤄지고, 첩보전은 첩보원들 간에 이뤄진 데 비해 테러전은 전선이 민간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투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없어진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민간 전쟁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있다.
민간 전쟁
보스니아와 중동에서 지휘관을 역임한 영국군 루퍼트 스미스Sir Lupert Smith 장군은 그의 저서 《전쟁의 패러다임》(2008)에서 ‘민간 전쟁’의 개념을 알기 쉽게 제시했다. 민간 전쟁War Amongst the People은 현대전이 전투원과 전투원 사이에 이뤄진 기존의 전쟁과 달리 민간인 사이에서 이뤄지는 전쟁이다. 민간 전쟁에서는 선전포고와 같은 어떠한 시작을 알리는 형식이 없다.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전투원과 비전투원 간의 구분이 없다. 모두가 적일 수도 있고 모두가 친구일 수도 있다. 민간 전쟁의 시대에 전쟁은 더 이상 압도적 물리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에 따라 그동안 각국이 많은 경험을 통해 쌓아놓은 무수한 전투 교범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전쟁의 양상이 바뀐 만큼 해법도 달라져야 한다. 각국은 무인항공기와 전투 로봇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고 전투 교범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했다. 오래전 군인은 평소에는 농사와 노동에 종사하다가 비상 시 소집되는 의무병이었다. 이는 근대 들어 오스만제국과 독일제국이 상비군을 채택하면서 지원병으로 바뀌었는데 현대에 들어와 다시 민간인 체제로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냉전 질서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않은 한반도처럼 재래식 전쟁이 아직도 힘을 발휘하는 곳도 있지만 비정규적 상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분쟁’은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당한 개념이다. 분쟁conflict은 전쟁warfare과는 또 다르다. 전쟁이 ‘직접적 물리력을 동원해 상대를 살상하는 구체적 행위’라고 한다면, 분쟁은 ‘국가와 국가 또는 국가와 사회 간의 다툼’이다. 분쟁이란 관점을 통해 민간 전쟁 즉 테러와 같은 비정규적 전쟁 상황이 잦은 현대에 있어 나타나는 여러 다툼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현대 분쟁의 이유는 근원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는 발전해왔지만 국제정치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경선이나 세력권이라는 것은 냉전의 해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2차 세계대전 이후 책정된 경계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지역에서 전쟁 이전의 회복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제정치 역시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뒤틀린 상태가 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 강해진다. 크고 작은 다툼이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힘들지만 다툼을 조정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원상태는 그대로 둔 채 새로운 문제만 부가되기 쉽다.
국제정치학자들은 국제관계의 모순矛盾이 심화되면 갈등이 불가피해진다고 예측한다. 지금처럼 자본주의의 갈등이 심화된다면 세계는 또 한 차례 크게 분출할지도 모른다. 2011년 이후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지역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듯이 또 어느 지역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POP-UP
베를린Berlin 통일 독일의 수도. 전통의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시가지를 관통하는 위풍당당한 길이 돋보이는 지역이다.
영화 더보기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 폴 그린그래스, 미국(2004)
본 시리즈 2편. 본은 마리와 함께 인도에서 은신하지만 킬러에게 마리가 희생된다. 본은 과거의 자신이 국제적 음모와 관련돼 있음을 알게 된다. CIA 역시 자신을 노리는데 …
본 얼티메이텀(The Bourne Ultimatum) | 폴 그린그래스, 미국(2007)
본 시리즈 3편. 기억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제이슨 본에게 ‘블랙 브라이어’의 존재가 포착된다. 더욱 막강해진 조직은 자신을 더욱 옥죄어 온다. 본은 진실을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본 레거시(The Bourne Legacy) | 토니 길로이, 미국(2012)
본 시리즈 4편이지만 감독과 주연배우 모두 변경. 내용은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에 기반하고 있다.
더 읽어보기
루퍼트 스미스, 황보영조 옮김, 《전쟁의 패러다임Utility Of Force》, 까치, 2008
토머스 소웰, 채계병 옮김, 《비전의 충돌》, 이카루스미디어, 2006
임희완, 《20세기의 역사철학자들》, 건국대학교출판부, 2003
존 리즈, 김용욱·김용민 옮김, 《새로운 제국주의와 저항》, 책갈피, 2008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