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히로시마는 나가사키와 더불어 일본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아픔’의 진원지이다. 바로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투하된 원자폭탄 때문이다. 두 도시에서는 그해 연말까지 각각 14만 명과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원폭은 피폭자 본인은 물론 후대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언제까지고 이어진다. 패전 이후 일본은 재건과 부흥의 길을 걸어갔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고통과 절망이 그리고 죽음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덮쳤다. 그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점차 일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고, 경제대국 일본은 원폭을 투하한 미국과 손을 잡았다 .
일본에서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1960년대 전반에 몇 차례의 히로시마 여행을 통해 피폭에서살아남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관찰하고 그려냈다. 20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현대 일본은 원폭을 어디에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분노하며 고뇌한다. 작가는 비극의 크기만큼 깊이만큼 왜소하고 희미한 희망의 싹을 틔우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그 처절하고 치열한 여정이《히로시마 노트》에 담겨있다.
한편으로 이 책은 문학에서 흔히 관찰되는 휴머니즘의 각성과 강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도 챙겨봐 주시길 바란다. 1963년의 상황설명에서 시작되는 도입부가 일본의 반핵 ·평화운동을 이끌었던 원수협(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1955년결성)의 분열된 모습을 서술한 것이 그러하다.
1961년부터 일본의 정계와 사회단체는 소련의 핵실험 재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소련을 옹호하는 공산당 계열에 대해 사회당·총평계열은 모든 핵을 반대한다고 부르짖었다. 이미 중앙 정계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의 틈새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급기야 반핵과 평화의 기치 아래 열려야 할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는 정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에 겐자부로는 그렇게 분열된 대회의 이면에서 피폭자와 그 조력자의 생생한 절규를 포착함으로써 피폭자가 ‘주변화’ 되고 ‘배제’ 되는 실상을 분노를 담아 찬찬히 그려 내고 있다. 원폭뿐 아니라 원폭 ‘이후’에 빚어지는 내부의 가해, 2차 가해에 시선을 던지는 작가의 발걸음에서 이른바 ‘전후민주주의’의 파열음이 들려오는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1960년대 초반이라는 시간은 그런 작가의 예리함과 통찰력이 발휘될 수 있었던 ‘전환기’이기도 했다. 패전에서 전후로 이행하는 일본의 발걸음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갖는 불편함과 새로움을 함께 톺아볼 수 있다.
식민지의 한반도 민중들도 원폭투하에 휘말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2만 명 넘게 희생되었다고 ‘추정’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고 60년이 넘게 흘렀으니 이제는 사망자 수를 규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 교과서에는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을 앞당겼다고 적혀있다. 사망자 수도 밝혀지지 않은 우리 내부의 둔감함 위에 원폭 투하의 몰역사성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렇게 물어보자. 그러면 2만 명이 넘는 한국인에게 닥친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일본제국의 신민이었던 그들은 전쟁의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한국인의죽음과 일본인의 죽음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그 어느 질문에도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빈약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다. 그런 현실을 비웃기나 하듯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라는 구호가 세차게 울려 퍼진다. 역사를 도외시한 미래는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여기 히로시마 노트》에는 국가와 민족을 상관하지 않는 주민 내지 민중으로서 절망 속의 일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재일코리안(조선적과 한국적의 통칭)의 삶이 소개되어 있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은 방사능의 공포를 일본열도 전국에 흩뿌렸다. 한국도 미량이지만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다는 보도에 소스라치듯 민감하게 반응했다 . 그리고 1년 반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후쿠시마는 머나먼 이국땅의 옛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나마 현재 일본에서는 원전 없는 세상을 향한 모색과 시도가 조금씩 힘을 얻어 가고 있다. 과거와 달리 현 민주당 정권은 원전의 효율성보다는 위험 쪽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기려는 기색도 내비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원자력발전소가 꼭 필요하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듯하다. 원전 수출이 국운 발전의 호기라고 선전하는 정부 관계자의 뇌리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그저 남의 일로 치부되고 만다. 역사의 빈곤은 미래의 상상력을 좀먹으며 연명하는 법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의의는 무엇인가? 쉽지 않은 난문이지만 회피할 수 없는 중차대한 한일, 아니 인류의 미래가 걸린 물음이다. 얇지만 가볍지 않은 《히로시마 노트》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 점을 곱씹으며 힘겨운 번역 작업을 견뎌 낼 수 있었다. 끝으로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인내심으로 기다려 준 삼천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2012년 5월
이애숙
프롤로그
이런 책을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히로시마에 관한 이 책의 모든 에세이는 처음부터끝까지 나와 함께한 편집자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씨와 내 가슴 깊숙이 파묻어둔 아주 개인적인 일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1963년 여름 히로시마를 처음 여행하던 무렵 우리의 개인적인 사정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 경우는 빈사 상태의 첫아들이 유리 상자 안에 누운 채로 전혀 회복될 가능성이 없었고, 야스에 씨는 첫딸을 잃은 직후였다.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이 알고 지내던 이는, 평소 자신의 화두이던 핵무기에 의한 세계 종말 전쟁 이미지에 압도당한 끝에 파리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우린 둘 다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여하튼 한여름의 히로시마로 떠났다. 나는 지금껏 그토록 지치고 우울해져서 말수마저 잃어버린 여행을 경험한 적이 없다 .
히로시마에 도착하고 나서 제9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열리는 며칠 동안 우리는 더욱 지치고 우울해졌다. 다음 1장에서 서술하겠지만 너무나 씁쓸하고 곤혹스런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대회였다. 사실 처음에는 대회가 개최될지조차 의심스러웠고, 막상 개최는 되었지만 이미 분열된 대회일 뿐이었다. 우리는 대회에 동원된 그야말로 진지한 수많은 사람들의 주위를 그저 암담하고 삭막한 기분으로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채 한탄하고 침묵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 뒤 히로시마를 떠날 때 우리는 각자가 허우적대던 우울의 늪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손에 쥐었다고 느꼈다. 그것은 오로지 진정한 ‘히로시마 사람’의 특징을 지닌 이들과의 만남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히로시마의, 그야말로 히로시마 사람다운 삶과 사상으로부터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그들한테서 직접 용기를 얻었으며, 유리상자 속에 누워 있는 아들 때문에 우울하던 일종의 노이로제와 퇴폐의 근원을 싹둑 도려내는 고통을 맛보았다. 나는 히로시마와 진정한 히로시마 사람들을 ‘줄’로 삼아서 내 내면의 딱딱함을 점검하고 싶어졌다. 그 무렵 나는, 전후민주주의 시대에 중등교육을 받고, 대학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중심으로 어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일본과 미국 전후문학의 영향 속에서 이제 막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짧은 내면의 역사를 지닌 인간이었다. 그런 내가 가지고 있던 감각과 모럴과 사상 모두를 히로시마라는 하나의 ‘줄’로 문지르고 히로시마라는 렌즈를 통해서 재검토하고자 하였다.
그 뒤로 나는 히로시마를 계속 여행했으며 마침 야스에 씨가 일하는 《세카이》(世界) 편집부가 내가 쓴 에세이를 싣게 되었다. 여기 수록된 모든 글이 바로 그것이다. 히로시마 여행을 거듭하면서 나는 그때마다 새로이 진정한 히로시마 사람들과 만났다. 그 만남은 나에게 가장 신선한 감명을 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따금 그런 히로시마 사람들의 부고를 전해 들어야 했다. 내 에세이가 잡지에 실리자 특히 히로시마에서 절절한 편지를 많이 보내왔다. 그 편지들 가운데서 전형적인 글 한 편을 여기 싣는다. 편지를 쓴 마쓰자카 요시타카(松坂義孝) 씨는 이 책의 5장 불굴의 히로시마 의사들에관한 기록에 나오는데, 의대생 아들에게 업혀서 부상의 몸으로 구호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임무를 다한 마쓰자카 요시마사(松坂義正) 씨의 아들이다. 요시타카 씨는 부상당한 아버지를 업고서 피폭 직후 구호소를 찾아 히로시마 시가를 돌아다닌 바로 그 의대생이다. 지금은 히로시마에서 피부과 병원을 개업하여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 죽음에 직면할 때까지 히로시마 사람은 침묵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어합니다. 원수폭반대 또는 그러한 정치투쟁을 위한 참고 자료로 자신의 비참함이 내세워지는 걸 원치 않으며, 피폭자라고 해서 으레 적선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물론 원수폭반대를 호소하는 것 이상으로 구호금 마련을 위해 피폭자의 비참함을 호소하는 일은 절실하며 계속 이어 가야 합니다. 하지만 건강을 회복하고 평범한 일상생활을 꾸려 나가는 피폭자들이 그런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건강한 피폭자의 세금이나 연하장 이익금으로 마련되는 지원금을 바라고, 그런 식의 연대를 당연시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한 구걸이나 모금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 거의 모든 사상가와 문학가들은 침묵해서는 안 된다며 피폭자에게 입을 열도록 권유합니다. 침묵하는 우리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증오합니다. 우리는 8월 6일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죽은 이와 함께 8월 6일을 보낼 뿐입니다. 야단스럽게 8월 6일을 기리며, 다가올 그날을 맞을 준비로 분주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8월 6일 단 하루만 히로시마를 생각하는 사상가들로서는, 묵묵히 자료로만 남기는 그런 피폭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로시마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 관한 내 에세이에 공감하는 이런 편지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동시에 히로시마 외부인에 지나지 않는 내 글에 예리한 비판의 채찍을 내리치고 있다는 사실에도 어떤 무게를 느꼈다.
마쓰자카 씨는 히로시마의 동인지 《톱니바퀴》(歯車) 최신호에서 후카쿠사 시시로(深草獅子郞)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은 나한테 보낸 그분의 생각과 감상을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새삼 히로시마 외부인에 대한 히로시마 내부의 정당한 비판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젊은 히로시마 지식인이 말하는 정당방위의 목소리를, 내 글과 함께 읽어 주었으면 한다.
오에 씨가 언급한 히로시마의 피폭 의사들은 피폭 후유증에 직면하여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운명을 직시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따라서 때때로 원폭증이 없어졌다는 식의 낙천적인 보고를 한 뒤에도 씁쓸한 심정으로 거듭 정정하곤 했다 . 폭심지 (爆心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나는 미미한 후유증이 있긴 하지만 아직 건강하고, 부모님과 당시 여대 2학년으로 피폭한 아내, 1960년 전후로 태어난 아이들 셋 모두 건강하다 . 후유증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될 수 있으면 낙천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 그래서인지 이전부터 원폭 문학은 왜 회복 불가능한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후유증, 심리 묘사만 다루는 것인지 의아했다 .
예를 들면 피폭의 비참함을 당한 가족이 건강을 회복하여 인간으로서 새 삶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불가능한 것일까? 피폭자는 과연 모두 원폭 후유증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일까? 피폭자는 피폭자라는 심적부담과 열등감을 극복하고서 보통 사람처럼 자연사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죽음은 모두 원폭 후유증에 따른 비참한 죽음이며, 원폭을 저주하는 원폭 반대에 도움이 되는 자료로만 여겨져야 하는 것일까?
원폭이라는 재해를 당하여 우리의 삶이 굴곡지고 고통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원폭만이 아니라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다른사람들도 그런 경험을 한다. 히로시마 피폭자들만의 피폭자 의식 같은 느슨한 감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 스스로를 경계한다. 스스로 치료하고 스스로 인간성을 회복하고 피폭되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은, 원폭과 무관한 죽음을 나 자신의 것으로 맞이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피폭 이후 19 년, 아흔셋의 나이로 사망한 우리 할머니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인생의 굴곡을 거치고서도 어쨌든 원폭 후유증이 아닌 자연사로 건강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원폭의 영향을 벗어난 피폭자의 자연사도 종종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8 월 6 일의 히로시마시에 터무니 없는 정치적 발언이 넘쳐나서 엄숙해야할 그날을 외부인이 지배하게 되거나, 피폭자의 죽음이 외부의 정치적 발언을 위한 자료로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
…… 원폭 반대를 위한 자료로 이용되기보다는 오히려 진정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후유증도 없는 낙천적인 피폭자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얼마 전 나가사키에서 피폭자 시인인 하라구치 기쿠야(原口喜久也 ) 씨가 골수성 백혈병인지 하는 진단을 받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사실을 유고 시집 후기를 통해 우연히 알고서는 망연자실했다. …… 하라구치 씨는 원폭 후유증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방법으로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죽음을 비인간적이고 몰개성적으로 원폭 후유증이라고 여기는 원폭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온 인간이 자기다운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 것이라 생각하고싶다. 피폭자에 대한 정밀한 검진이 없었다면 병의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며, 하라구치 씨도 자신의 건강에 대해 단순히 위화감을 느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폭자에게 그런 낙천적인 위화감은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오랜 시간 견뎌내야 하는 원폭후유증이라는 확실한 죽음이 찾아올 따름이다. 그런 진단은 일반적으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고의 삶을 살고서도 그에 합당한 죽음을 계획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 마지막까지 원폭
후유증을 안고서 할 일을 완수하는 것이 피폭자가 인간임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인지, 아니면 하라구치 씨나 하라 다미키 (原民喜) 씨처럼 결벽하게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인간임을 회복하는 방법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옮긴이의 말, 프롤로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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