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세계화 논의, 어디까지 왔는가?
세계화, 세계화, 세계화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에 대해 다뤘다. 어쩌면 지나치게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개념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워낙 단단히 박혀서 어린 학생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팝 스타들은 세계화라는 단어를 넣어 가사를 쓰기도 한다. 또한 정치인부터 시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화’를 세상의 온갖 변화를 일으킨 원인으로 꼽으며 환호하거나 비난한다. 이제 세계화는 너무 광범위하게 ‘알려져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이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왜 중요한지조차 묻는 사람도 거의 없다. 게다가 세계화에 관한 학술 연구 면에서도 문헌들이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정기적으로) 쏟아지고 있어서 이 주제에 관한 모든 이론서를 읽으려면 도서관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세계화에 관한 내 수업을 들은 몇몇 학생들이 이 주제를 다룬 또 다른 책을 읽어야 하는 게 ‘조금 질린다’고 말하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과용, 과대 포장됐던 다른 모든 개념이 그렇듯, 세계화는 개념의 ‘수명’ 면에서 ‘낡은 이론’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러니 세계화에 대한 사회과학서적이 수로 보나 다양성으로 보나 많은 상황에서 이렇게 책을 출간하는 것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다. 세계화에 대해 나올 만한 이야기는 이미 다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세계화에 관한 논의가 아직도 필요하며, 더 나아가 논의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어떤 이론’이 더 가치 있는지 일련의 평가를 내리는 넓은 의미의 ‘점검적’ 개입을 통해 (점차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세계화 이론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또한 이 책은 지금까지 세계화를 다뤘던 많은 선행 연구들에 분석적, 이론적, 실증적으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빠져있으며, 이른바 세계화 ‘논의’가 몇 갈래의 혼란스럽고 모순되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책의 목적은 내가 2006년에 《세계화 사전Dictionary of Globalization》을 쓰면서 시작한 프로젝트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세계화 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요약하고 참고문헌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세계화 연구를 아우르는 여러 개념, 이론적 견해 및 명제들에 관한 나의 시각도 더욱 발전했다. 《세계화 사전》은 세계화 관련문헌에 대한 중립적인 안내서를 표방하지는 않았다. 대신 비판적인 시각에서 각 개념과 이론가들의 잠재적 강점과 약점을 (많은 경우 매우 피상적으로) 분류했다. 사전으로서는 적합한 방식이었지만, 그 책에서 하나의 중요한 입장을 취하거나 이렇다 할 논의를 발전시키지는 못했었다.
이 책에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시도하려고 한다. 세계화의 ‘주요 이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 안내서를 쓰면서 나는 따로 또 같이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한다. 첫째, 독자들이 세계화에 가장 영향력 있고 의미 있는 기여를 한 많은 이론들을 접할 수 있도록 《세계화 사전》보다 더욱 자세하고 비판적으로 안내하는 것이다(하지만 그 이론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화 논의에서 진행된 다양한 주제들에 맞춰 분류한 이론가들의 주요 논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열한 가지 주제로 정리했다. 책을 이런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 있다. 우선, 각 이론가 혹은 이론가 집단이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이론가들 혹은 더 넓은 차원의 논의와 다르게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 또한 이 방식을 통해 인위적으로 모아놓은 이론가들의 핵심 사상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서 벗어나 세계화에 대한 사상의 최근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형화를 진전시킬 수 있다.
이는 세계화 이론의 본질에 대한 주요 주장들과 다양한 시각의 상대적 강점 및 약점, 그리고 그것이 세계화 이론의 향후 방향에 주는 함의들을 정리하려는 두 번째 목표와도 연결된다. 이를 위해 이 책에서는 여러 주장을 점진적으로 쌓아나간다. 각 장에서는 이론가별로 주요 사상을 평가하면서, 해당 이론가(집단)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과 비판의 여지가 있는 지점에 대해서 함께 살펴본다. <나가는 글>에서는 이러한 비판적 평가를 바탕으로 각 이론들을 하나로 모아 발전시킨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참고서라고만 볼 수는 없다. 각각의 이론가들에 대한 개별적인 비평서로 볼 수도 있지만, 각 장의 내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오늘날 세계화를 바라보는 방식에 관해 이 책에서 펼치려는 보다 큰 주장과의 연결선상에서 뒤로 갈수록 논의가 진전되도록 정교하게 배열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누가’ ‘주요 이론가’인지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이 결정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 세계화를 가르치거나 연구하거나 혹은 세계화에 관한 평론을 하는 사람들, 아니면 정말 스스로를 최전선의 활동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면 분명히 매우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에 따라 누구를 세계화의 ‘주요 이론가’라고 생각하는지가 매우 다르다. 다른 분석에서도 그렇겠지만, ‘세계화’라는 주제에서는 의견이 유독 더 다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책에 나오는 이론가들이 결코 절대적으로 세계화 논의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한 이론가에게 초점을 맞추고 선택한 주제에 대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각 장의 주제들도 그 자체가 세계화 논의를 개념화하는 포괄적인 이론 틀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다루지 않은 주제들도 관심을 받아야 마땅하며, 앞으로 분명히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를 것이다. 만약 이 책의 범위를 좀 더 크게 잡을 수 있었다면, 예를 들어 특히 환경이나 규제 같은 주제와 관련된 이론가들도 포함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주제는 어느 정도에서 정리를 해야 했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이론가들은 세계화 논의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에 해당하는 사례로 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 발전시키고 있는 주요 주장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의 여정은 각 주제를 꼼꼼하게 이해함으로써 세계화 논의 전반을 아우르는 더 큰 개념적, 이론적 문제들의 맥락에서 세계화를 바라보도록 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주제와 이론가들을 소개하기 전에, 우선 세계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는 정의, 이론, 개념부터 훑을 필요가 있겠다.
세계화는 어떻게 정의됐는가?
세계화 논의에서 세계화를 정의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많다.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세계화에 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세계화는 ‘사회 모든 부문에서 상호연결성과 관련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매우 포괄적이고 이후 15년간 논의되고 있지만, 세계화 연구에는 이에 맞서는 정의들도 많이 존재한다. 닉 비슬리Nick Bisley, 1973~가 최근의 세계화 논의를 평가하며 한탄한 것처럼, 이는 이론화가 엉성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양한 이론가들의 학문적 지위와 맥락을 뒷받침하는 각각의 철학적 시각에 중요한 차이가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화를 알려면 맥락이 핵심’이라는 비슬리의 지적은 꽤 옳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세계화를 둘러싼 정의에 대해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첫째, 학술적 사고 전반에서 각 이론가들이 세계화를 정의하는 방식마다 인식론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인식론은 개념과 지식을 구성하는 가정들의 체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적 인식 틀은 사회과학 인식론의 한 종류이다. 세계화 논의에서 가장 큰 인식론적 차이는, 사회과학의 고전 사회 이론 및 경제 이론에서 나온 ‘근대적modern’이고 ‘구조주의적’인 접근과 이후의 ‘탈근대적postmodern’이고 ‘탈구조주의적’인 접근 사이에서 나타난다. 전자는 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단위로 일관적 체계, 과정과 구조를 활용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구조를 독립체로 보는 데 의구심을 품고 흐름, 네트워크, 관계 및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이 광범위한 구분은 세세한 부분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와 관련한 둘째는 학문 분야별 맥락의 문제다. 사회과학 내에서는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국제관계학 등과 같은 학문마다, 혹은 각 학문 내부의 분과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식론적 특성이 있다. 게다가 각 학문의 관심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고, 사용하는 실증적 접근방식도 다르다. 이로 인해 일부 세계화 연구에서는 특정 학문에서 주목하는 보다 좁은 의미의 세계화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셋째는, 세계화 논의 내부에 지속적인 긴장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화’ 개념이 세계화와 연관된 다중적인 변화에 타당하게 적용할 수 있는, 단일하게 규정되는 현상을 포착하느냐를 둘러싼 긴장이다. 이것은 크게 봤을 때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문제의 결과로 나타난다. 안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와 같은 학자들은 세계화를 근대성과 연결된 보편적인 과정으로 보며, 현대 생활의 거의 모든 차원에 녹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시각에서는 세계화를 인류 역사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신기한 발전이 아닌, 20세기 중반부터 상대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현상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 1953~, 마틴 울프Martin Wolf, 1946~ 및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 1970~ 등 이 책에서 다룰 ‘대중적’ 성향의 세계화 찬성론자 및 반대론자 중 많은 사람들은 세계화를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정치경제학적 현상으로 좁게 본다.
세계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주 일반적인 수준 외에 별다른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반면, 세계화 이론의 상황은 조금 낫다. 이제까지 밝힌 인식론적, 학문적 차이는 세계화를 이해하는 매우 다양한 이론 틀을 세우기도 했다. 앞으로 여러 이론 틀을 접하겠지만, 이전에 내가 주장했듯 현대 세계화 이론들은 네 가지 주요 철학적 대구對句에 기반을 둔다. 이론가마다 이 네 가지를 강조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이것들은 세계화 이론을 구성하는 주요 철학 재료다.
가장 중요한 첫째는 시공간時空間과 관련이 있다. 이 책에서 논의하는 많은 이론가들은 우리와 타인의 시공간적 경험의 본질이 변하는 것이 세계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라고 주장한다. 기든스는 이러한 관점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의 경험이 확장되는 것이 현대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시공간의 원격화time-space distanciation’라고 부른다. 정보통신기술과 글로벌 미디어, 교통수단 덕에 사회관계는 모든 형태로 ‘확장된다.’ 기든스의 시각에서 이는 근대성의 특징이며, 사회체제의 본질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세계화는 개인, 집단 및 조직의 관계가 급진적으로 재조직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개인이 세계 곳곳으로 더 많이 이동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 세계화의 시공간적 구성에 관한 기든스의 개념은 데이빗 헬드David Held, 1951~와 안소니 맥그루Anthony McGrew, 1942~의 이론에 큰 영향을 줬다. 전 세계적 정보경제를 다룬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 1942~의 이론 역시 정보통신기술이 시공간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에 많은 부분 기반을 둔다.
둘째, 시공간적 현상에서 세계화를 보는 시각은 세계화 이론의 체계를 세우는 데 활용하는 공간 개념인 ‘영토territory’와 ‘규모scale’로 연결된다. 기든스와 같은 이론가들은 세계화를 경험하는 과정에는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가 특징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회관계가 그들이 원래 있던 장소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재영토화’를 뜻한다.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 1949~나 세계화를 다루는 다른 문화 이론가들도 다방면에서 탈영토화를 사용했다. 또한 영토 문제는 ‘초경계성transborderness’이 세계화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본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 1949~과 같은 이론가들의 더욱 뚜렷한 공간적 사고에서도 나타난다. 사회적 경험과 영토의 관계 변화는 더 나아가 다른 규모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세계화에 대한 추상적 논의들에서는 지역 사회, 국가, 지역, 세계와 같은 다중규모의 이론 틀에서 사회 변화를 이해하려고 했다.
세계화 이론의 셋째 대구는 ‘체제system’와 ‘구조structure’ 개념이다. 세계화 이론을 통합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이론가들은 세계화가 세계 전반적인 현상이며 현대 세계화가 구조적인 수준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상호연결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세계화 사회의 특징이다. 개인이나 소집단의 규모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중간규모의 상호작용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중간규모의 상호작용이란 국제체제 속 국민국가 혹은 전 세계적 유통 체계에서 개별 시장 세력을 의미한다. 앞으로 다룰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1930~의 연구는 이러한 흐름의 중요한 사례로 여겨진다. 비록 개인이 모여 이러한 체계를 만들지만, 오늘날 세계화를 설명하는 데는 조직화와 더 넓은 집합적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과정process’과 ‘행위자agency’ 개념이 있다. 세계화는 본질적으로 과정이라는 주장은 널리 있었지만, 기든스와 카스텔은 이 과정이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라고 봤다. 헬드와 맥그루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은 더 나아가 세계화를 사회관계의 확장, 교환의 강도 증가, 전 세계적 흐름의 가속화, 전 세계적 상호연결성의 영향이라는 네 가지 시공간적 과정에 대응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그들은 이것을 각각 확장extensification, 강화intensification, 속도velocity, 영향impact으로 개념화했다). 헬드와 맥그루 및 동료들은 이러한 핵심 과정들이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와 이전 시기에 모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본다. 그러나 모든 이론가들이 세계화가 하나 혹은 많은 과정이라는 데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의견 차이는 권력과 행위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급진적 이론가인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1960~나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와 같이 후기 구조주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계화를 과정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현대의 행위자에게 일관성과 경직성을 상정한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의 행위자들에게는 그러한 속성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 볼 때는 전 세계적 상호연결성을 이끌어내는 권력관계와 행위자가 일관되지 않고 모순적이며 때에 따라서는 단절을 보인다고 말한다.
여전히 발전 중인 세계화 논의
세계화 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뤄져 왔다. 세계화 논의가 ‘1990년대 초반에 갑자기 꽃을 피운 것처럼 보여도’, 1960년대 혹은 심지어 더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화 개념이 언제 만들어졌느냐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언급되기 시작했다. 《세계화 사전》에서도 요약했듯이 현재 사용하는 세계화 개념의 학문적 기원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1960년대 초반의 경영 이론이다. 당시 경영 전문가들과 미국 경영대학의 여러 학자들은 미국의 대형 다국적기업을 운영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초기 사업 지침서라고 할 만한 책들을 출간했다. 이는 미국 기업들이 세계의 더 많은 나라에 기업을 확장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당시 경영과학의 새로운 ‘최첨단’ 영역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이론가들은 기업이 운영 규모 면에서 국가 단위의 조직들을 자기복제하기보다는 전 세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주요 경영 이론가들이 이 과정을 ‘세계화’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이 용어가 경영 관련 학술서 및 대중서의 핵심 유행어가 됐다.
둘째, 역시 1960년대부터 나타난 사회 이론과 문화 이론의 학문적 기여를 꼽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근대성이 새로운 의사소통 형식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더욱 통합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포착하려고 했던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의 ‘지구촌global village’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급증한 환경 운동에서 등장한 개념들 역시 중요하다. 당시 환경 운동가들은 지구와 천연자원을 유한한 개체로 보는 시각을 전하려고 했다. 최초로 우주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과 달의 궤도에서 찍은 멀리 떨어진 작은 지구 사진들은 모든 인간 사회가 공존하며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생각을 자극했다. 마찬가지로, 생태학에 기반을 둔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1919~의 ‘가이아Gaia’ 이론은 세계 환경의 본질에 대해 주장하는 동시에 인류 사회와 환경 개발이 잠재적으로 전 세계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구호Spaceship Earth’ 개념은 오늘날 세계의 환경을 둘러싼 논의에서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셋째,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경제발전 및 정치를 다룬 정치경제학 및 사회과학 분야의 학술 연구들 역시 중요하다. 1960년대 학술 이론의 다양한 흐름은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신 브레턴우즈New Bretton Woods체제 접근방식의 특징인 ‘근대화로서의 발전’이라는 패러다임과 연결된다. 많은 학자들이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 에밀 뒤르켐david Emile Durkeim, 1858~1917의 이론을 비롯한 고전 사회, 정치 및 철학 이론에 기댔다. 세계화 이론에서 주목할 만한 선행 연구로 앙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 1929~2005 등의 ‘종속발전dependent development’ 이론이 있다. 종속발전 이론에서는 제3세계가 자본주의 제1세계로 인해 저발전 상태에 머물렀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다룰 주요 이론가인 월러스틴이 이러한 시각에서 등장했다. 그는 중심-주변부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세계체제론World Systems Theory’을 제안하면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20세기에 ‘전 세계적 규모’가 됐다고 단정했다.
세계화라는 용어를 다양한 문헌과 논의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이때부터 학제 간 교류가 나타났고, 기자들도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 냉전의 종식과 ‘시장 자본주의free-market capitalism의 승리’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학술 논문에서만 눈에 띄던 세계화라는 개념이 곧 책 제목과 신문에 등장하면서 1990년대에는 이 용어의 사용이 더욱 가속화됐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는 더 이상 생소한 전문용어가 아니라, 웹이나 대중매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말이 됐다. ‘세계화’가 모든 주요 세계 공용어와 일상생활 용어에 편입된 것은 아마도 1990년대 후반 ‘반세계화’ 운동의 영향으로 G8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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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1930~ 뉴욕 출생으로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학 전반을 두루 연구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 <세계체제분석>은 그의 중요한 저작 중 한권으로 세계화 연구 전반에 큰 영향을 줬다. |
세계는 하나의 체제인가?
세계화 이론의 선구자, 월러스틴
미국의 사회사학자 월러스틴은 아마도 이 책을 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세계화 이론가일 것이다. 그의 연구는 전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를 통합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검토하려고 했던 세계화 이론의 초기 시도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월러스틴은 이러한 면에서 전 세계적 상호연결성에 관해 연구한 초기 주요 이론가 중 한 명이며 그의 연구는 이후 세계화 연구 전반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 그의 연구는 또한 단일한 전 세계적 자본주의체제의 출현을 이해시키겠다는 야심이 있다. 그렇기에 월러스틴은 연대기적 지위 면에서나 이론적 범위의 폭과 다양성 면에서도 처음으로 다뤄야 할 ‘주요 이론가’이다. 물론 그의 연구는 197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을 받았다. 그중 많은 부분은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것들이다. 주로 비판을 받았던 부분은 세계사를 특정 목적에 따른 방식으로 구성하는 경향, 자본주의의 위기와 혁명이 필연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정을 확대하는 방식의 문제, 세계 영토를 세 개의 기능적 지리 영역으로 지나치게 단순하게 나눴다는 것 등이 있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서 월러스틴의 연구를 평가하면서 독자들에게 세계화를 체계로 바라본 이 초기 선구자가 이후 논의들을 어떻게 채웠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또한 기든스, 카스텔, 헬드와 동료들의 연구와 같은 더 광범위한 세계화 이론들도 월러스틴의 초기 이론에 제기된 문제나 비판들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입증할 것이다.
월러스틴은 1930년 뉴욕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랐다. 그는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사회학을 배워 1951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195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콜롬비아대학교에 있을 당시 그의 관심은 주로 아프리카의 정책과 전후 독립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에 맞춰져 있었다. 1971년에 그는 맥길대학교의 사회학 교수로 임명되어 5년간 재직했고, 이후 좀 더 높은 자리인 빙햄턴대학교의 사회학 특별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근대 세계체제를 다룬 3부작 중 뒤의 두 권을 썼다. 그의 저작들에 담긴 주장이 사회과학 전반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그는 경제학, 역사 체계 및 문명 연구센터Centre for the Study of Economies, Historical Systems and를 설립했다. 그리고 2005년에 은퇴할 때까지 이 센터의 소장을 지냈다. 월러스틴은 세계 각국의 대학교에 방문교수로 초빙됐다. 여러 차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Ètudes en Sciences Sociales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에서 1998년까지는 세계사회학회International Sociological Association의 학회장을 지냈고, 《사회진화와 역사Journal of Social Evolution and History》라는 학술지의 편집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을 보면 월러스틴이 근본적으로 사회학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는 사회학 안에서 훈련 받고 학술적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들에 성공적으로 걸쳐 있으며, 후에 어느 저작의 서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경제사학자 혹은 사회사학자로 본다고 쓰기도 했다. 실제로 월러스틴의 접근방식은 분명 여러 학문 분야에 단단히 걸쳐 있으며, 많은 사회과학 분야를 넘나든다. 이러한 학제성interdisciplinarity은 월러스틴이 따랐던 사회과학 분석의 ‘총체적’ 전통과 함께, 그가 세계화 이론의 선구자로서 핵심 역할을 하도록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월러스틴의 사고를 여러 단계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세계화 논의에서 단연 월러스틴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체제분석World systems analysis》의 주요 주장을 검토해보자. 그는 ‘세계체제분석’을 통해 현 시대를 개념화했다. 내가 주장하려는 핵심은, 세계체제분석에 대해 여러 비판이 있더라도 이 이론이 아마 현대 세계화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세계화 연구 내부에서 하부 논의의 중심이 된 월러스틴의 이론이 어떻게 수많은 이론가들을 끌어들였는지 보여주겠다. 여기서는 월러스틴의 주요 논의인 세계체제분석을 검토하는 데서 시작해 그의 주요 주장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다음으로는 세계체제분석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비판들은 그의 이론에서부터 세계화 이론이 등장하는 과정, 그리고 이후 월러스틴이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는 데서도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세계체제분석이 어느 정도로 ‘세계화 이론의 원형proto-globalization theory’이라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이론이 다른 주요 세계화 이론가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어떤 면에서 부족한지 밝힐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세계화 이론에 나타나는 월러스틴 이론의 전통을 검토하고, 이후 지속되는 세계화 논의에서 그의 주장이 일으키는 반향을 살펴보겠다.
세계는 자본주의로 통합된 하나의 체제다
세계체제분석은 20세기 초반 역사이론에서 두드러진 두 학파의 뒤를 이었다. 첫째, 월러스틴은 아날 학파the Annales School로 알려진 프랑스 역사학파의 주장에 기대고 있다. 이 학파는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와 뤼시엥 페브르Lucien Febvre, 1878~1956가 1929년에 창간한 《경제사회사 연보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라는 학술지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학문 분야별로 연구가 분화되는 것에 맞서 통합적 학문으로서의 ‘전체사total history’를 주장했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사건을 강조했던 ‘20세기 초 역사학의 지나친 세밀함’에 대한 대응이었다. 월러스틴 역시 정치인들과 같은 중요 인물의 행위가 보통 사람들의 역사에서는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총체적’ 접근으로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학의 경제 및 사회적 뿌리를 강조하는 아날 학파의 접근방식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이 제창한 ‘장기지속longue durée’ 개념에도 담겨 있다.
월러스틴의 사상에서 중요한 둘째 선구자는 전후 발전 이론을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화 이론에서는 상대적 후진국이 선진국의 앞선 산업 경제 노선을 따라야 하며, 신 탈식민국가new post-colonial states들이 부유한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하향식top-down 정책을 시행하면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월러스틴의 연구는 특히 칠레 학자 프랑크의 초기 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크는 전 세계 경제체제의 경제적 절차가 의존적 저개발 상태인 후진국이 더 앞선 산업경제를 ‘따라잡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했다. 월러스틴은 저발전된 세계가 어떤 식으로든 ‘발전’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대신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된 구조적 관계를 통해 저발전 국가들이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세계체제의 본질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프랑크의 시각에 동의했다.
월러스틴은 이 두 가지 사상에서부터 출발해, 1970년대 초반부터 세계체제론적 접근방식을 발전시키는 주장과 근대 사회 및 경제의 본질에 대한 주장의 윤곽을 드러내는 주요 저작들을 썼다. 특히 그의 3부작 《근대 세계체제 I, II, III The Modern World Systems, Volumes I, II and III》에서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단일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발전한 과정을 이론화하려고 시도한다. 세 책에서 그가 발전시킨 중심 가설은 이 시기에 자본주의와 통합된 사회를 기초로 하여 단일한 세계 경제가 발전했으며, 그 규모가 점차 전 세계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인간 사회를 조직하는 다른 경제, 사회 및 정치 체계를 능가하는 전 세계적 규모의 세계체제가 출현한 것이다. 학문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분석대상이 자본주의 세계 경제라는 점에서 볼 때, 이 가설의 범위는 분명 ‘총체적’이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왜 총체적인지 알기 위해서는 세계체제론의 다양한 특징을 보다 깊이 있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체제분석은 시간과 공간의 일반 원리를 개발하기 위한 시도가 누적된 것이 사회과학이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한다. 월러스틴은 일반화를 할 때도 어떠한 맥락에서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는 등 정확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역사 체계historical system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정확한 일반화를 실현했다. 그는 이렇게 일반화된 역사 체계를 ‘사회societies’라고 보았다. 사회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서로 맞물린 부분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체계적이다. 그렇지만 사회는 일정 시간 동안 창조되고 발전해 종말에 이른다는 점에서 역사적이기도 하다. 세계체제론의 기저에는, 과거에는 많은 체제들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근대 세계체제라는 한 가지 체제만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월러스틴은 모든 사회체제가 독특하다고 봤으며, 사회체제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소체제mini-system’는 그 안에 하나의 완전한 노동분업과 단일한 문화 틀이 정립된 독립체이다. 그는 이러한 체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주 단순한 농업사회 혹은 수렵채집사회만의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보다 최근에는 ‘세계체제world systems’만이 존재한다. 세계체제는 간단히 말해 단일한 노동분업과 여러 문화 체계를 갖는 단위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세계체제는 단일한 정치체제가 있느냐와 없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세계제국world empire’으로 불리는 전자는 재분배적이고 종속적인 생산수단에 기반을 둔다. 세계제국의 정치체제는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세계제국의 생산수단은 정치체제가 어떠하든 공통적으로 당장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대규모 농업 생산자의 삶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주장이다. 이러한 사례로는 전근대 로마, 중국, 이집트 문명을 꼽을 수 있다. 월러스틴은 이들 문명과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등의 19세기 제국들을 다르다고 본다. 당시의 영국이나 프랑스는 세계 제국이 아니라 식민지를 가진 국민국가였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 경제world economy’는 자본주의 생산수단에 바탕을 둔다. 생산은 이익이 발생하는 경우에 일어나며, 자본의 축적이 이 체제의 근본 동력이다. 세계 경제에는 뚜렷한 정치구조가 없다. 이 체제는 시장이 경제관계를 지배하고, 생산단위들 사이에 경쟁이 붙는 것이 특징이다. 월러스틴의 핵심 주장은, 역사적으로 세계 경제는 분열되거나 한 집단이 정복해 세계 제국으로 전환되는 매우 약하고 불안정한 구조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체제는 자본확장체제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체제만은 예외였다. 그것은 약 1,450년경부터 계속된 유럽 세계 경제로, ‘전 세계적 규모’로 커지고 더욱 안정화된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토대로 전 세계를 삼킬 만큼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론의 맥락에서, 이 같은 체제 내부 혹은 체제 사이에서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세계체제론에서는 역사적으로 사회체제에 일어났던 변화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처음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생산수단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재적 과정으로도, 외재적 과정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변화의 첫 번째 사례로, 소체제는 어느 역사적 시점에 세계 제국을 형성한다. 이와 비슷하게, 봉건 유럽이라는 하나의 세계 제국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형성했다. 외재적 과정인 두 번째 변화의 사례에서는 ‘합병incorporation’이 나타난다. 세계 제국이 팽창하면서, 이들은 이전의 소체제들을 정복하고 합병한다. 15세기부터 확장한 자본주의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소체제들과 세계 제국들을 합병하면서 그 구성원들을 새로운 체제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셋째 변화는, ‘단절discontinuity’이다. 이것은 거의 같은 지역에서 같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체제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 결과 기존 체제는 무너지고 새로운 체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1,000년에 가까운 중국 제국사에서 여러 나라들이 나타났다 사라진 것이 그 예다. 월러스틴은 이렇게 세계 제국이 나뉘는 시기는 무법 상태, 소체제로 전환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적인 사례로는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봉건 유럽이 등장하기 전 유럽의 ‘암흑기Dark Ages’를 들 수 있다.
넷째 변화는, 단절과는 반대로 역동적 연속성의 결과이다. 월러스틴은 문화를 흔히 ‘영속적’이라고 보지만, 각 개체들은 사실 계속 역동적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선형linear과 순환형cyclical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모든 세계 제국은 인접한 소체제까지 팽창했다가 결국에는 관료 및 군사 확장의 부담으로 위축되는 ‘흥망’의 순환적 패턴을 보인다.
19세기 및 20세기 역사를 파악하는 데 이러한 방식을 활용한 월러스틴의 중심 주장은, 근대 자본주의 경제에 바탕을 둔 세계체제의 한 형태가 전 세계적 규모가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체제가 어디서나 똑같이 전 세계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월러스틴은, ‘전 세계적’ 경험이 지리적으로 어떻게 확장되고 어떤 특징들이 나타나는지를 기록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밝힌다. 그는 근대 세계체제에 ‘단일한 세계 시장’, ‘복수의 국가체제’, 그리고 ‘3단 정치구조’라는 세 가지 기본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중 마지막 요소는 오늘날 세계체제를 정치집단으로 나눈다. 세계 경제에서 작용되는 착취 과정은 항상 3단 형태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주장이다. 이는 세계체제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자신과 체제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간의 대립을 더욱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중간계급’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세계체제분석은 근대 자본주의체제의 공간형태를 논의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발전론을 유의미하게 진전시켰다. ‘근대화로서의 발전’에 대한 프랑크의 비판을 토대로, 월러스틴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세 가지 지역으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나뉜 지역은 자본주의가 침투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이 맡은 역할을 반영한다. 그는 실제로 세계 경제가 어떻게 위기와 혁명을 피했는지에 대해 지리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전 세계의 지리 차원에서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중심부the core’, ‘주변부the periphery’, 그리고 ‘반半주변부semi-periphery’의 세 지역으로 나뉘어 발전했다. 중심부는 원래 북서유럽에서부터 나타났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넓게는 제1세계First World와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심부는 노동에서 나오는 잉여가치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주변부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도 수용한다. 제3지대인 반주변부는 정치적 균형추의 역할을 한다. 이 영역은 어느 쪽의 지배도 받지 않지만 주변부를 착취하는 동시에 그들 스스로도 중심부로부터 착취당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만일 반주변부가 없었다면, 세계 경제는 정치적으로 훨씬 불안정하고 ‘부드럽게 굴러가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의 여러 세계체제 이론가들은 라틴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가 중심부의 상류층이 반대파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막아주는 반주변부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봤다.
월러스틴은 수십 년간 이러한 시각을 발전시키면서 세계체제라는 렌즈를 통해 근대 세계체제의 여러 측면을 검토했다. 그는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 사이에서 권력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반주변부가 어떤 복합적인 역할을 담당하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한 구체적인 이론 틀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체제론의 접근방식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양한 국가와 지역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적용하려고 했던 이후의 사회과학 연구들에 뒷받침이 됐다. 이러한 연구는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세계체제분석이 어느 정도는 세계화를 인식의 중심에 두고 있는 보다 최근 이론들로 대체된 것도 사실이다. 세계체제분석이 세계화 이론으로 전환된 것은, 월러스틴이 처음 세계체제분석을 주장한 이후 관련 연구에서 밝힌 비판점 및 한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이러한 비판이 세계체제분석의 본질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기 위해, 이제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을 향한 다양한 비판을 검토해야 할 차례다.
(들어가는 글,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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