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쓰인 모든 사진은 저자의 작은 친구들의 작품입니다.
다만 그들의 이름은 그대로 쓸 수 없어 가명 표기했습니다.
다시 나를 일깨워준 작은 친구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여는 글
부끄러운 나의 고백
지난 몇 년 동안, 치열하게 나 자신과 싸웠지만 그 수고로움도 헛되이 삶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삶은 그냥 살아지는 게 아니라 처절하게 싸워서 살아내야 된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과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던 어느 날입니다. 무심하게 하늘을 본 순간, 그동안 내 인생 길가에 있던 사람들, 나무들, 풀잎들, 돌멩이들, 들꽃들이 나와 무관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끊임없이 관계 맺기 위해 그 자리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철저히 자연으로부터 빚을 내어 살고 있는 나.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생을 살고 있을 이름 없는 들꽃 혹은 하찮아 보이던 돌멩이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깊은 눈길을 주며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타인과 나.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것은 다름 아닌 소년원 아이들이었습니다. ‘기관의 경관’ 후속 작업으로 교도소나 보호시설 등을 찍으려고 여기저기 섭외 요청을 하러 다니던 때였습니다. 그때가 작가로서 현실적인 욕망이 가장 클 시기였습니다.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정말 유명한 작가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작가로서 대접도 받고, 품위 유지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현실적 욕망에 순수하게 시작했던 사진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정과 두근거림을 빼앗겨버렸습니다. 열정이 사라진 가슴에 거친 욕망만 남아있으니 될 일도, 될 수 있는 일도 없었겠지요.
다시 첫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작업을 오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소년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의 첫 마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무조건 프로그램을 만들고 제안서를 써서 안양소년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원장님이 프로그램을 보시더니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이 일은 제 인생계획표에 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과의 만남이 저에게는 구원이자 치유이자 고백인 셈입니다.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중학교 음악선생님을 했던 경험이 있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년원 아이들은 아무래도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대부분 학교에서, 가정에서 상처받은 친구들이라서 그들과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일이 수업보다 우선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여는 작업을 하는 동안 어느새 저도 아이들에게 위안받고 치유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들에게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인간에게 자존감은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최소한의 자신에 대한 예의라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이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자존감과 꿈을 짓밟히고, 칭찬보다 비난을 더 많이 받고, 남은 건 분노밖에 없는 듯 보였습니다. 꿈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시대에 살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친구들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많았습니다. 건방진 생각이지만 사진으로 그들의 꿈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어느새 그들과 작업한 지 4년이 넘어갑니다. 제가 과연 그들에게 꿈을 품게 해주었는지 궁금합니다. 한동안 TV에 ‘우리는 누군가의 영웅입니다’란 광고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광고에서 영웅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걸 짧은 몇 초 안에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광고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한동안 광고의 문장도 외우고 다닐 정도였죠. 친구들을 이해하기까지 꽤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 삶의 역사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니 분노가 보이기 시작했고, 슬픔과 좌절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들을 통하여 저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는지 그러면서도 감사보다는 불만이 더 많았던 내 삶을, 내 안에 있는 나를 똑바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사진을 가르쳐주었지만, 아이들은 저에게 인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차별이 아닌 차이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전 아이들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들이 나의 영웅이듯이…….
이야기 하나
바.라.보.기
내마음이 보이나요?
내마음이 보이나요?
“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나’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를 노트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세요. 3가지 이상, 10가지라도 상관없어요. 오늘은 노트에 적은 단어를 이미지로 만들어보는 작업을 합니다.”
첫 수업시간, 다소 생소하고 어려운 주제임에도 아이들은 금세 진지해지고, 숙연해졌다.
샛별이는 ‘외로움’이라고 적었다.
다른 친구들이 대부분 자연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면, 샛별이는 여백을 활용하여 자신의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을 표현했다. 영특하게도 공간과 사람의 비율을 적절히 활용해서 자신이 의도한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작품이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천샛별 |
사물을 대상으로 셔터를 누르기 전에, 사물과 나의 관계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거친 후 아이들의 사진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눈으로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온몸에 와이파이를 작동시켜 찍기 시작했다. 사물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을 보기도 하면서 아이들은 어느새 사진을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감성에 다가가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사진, 닫혀 있는 그들에게도 가장 좋은 마음의 일기장이 되었다.
사진을 보면 마음이 들리고, 마음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아닌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책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한다.
매일 드나드는 집.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 가족, 매일 보는 사물들, 매일 걷는 동네. 우리 몸에 안테나를 세우고 보면 놀라운 세상이 보인다. 놀라운 사람들이 보인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황수선화 |
황수선화가 찍은 딱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딱풀뚜껑이다. ‘내가 관찰한 것 찍기’ 시간에 만든 작품이다. 최소한의 색상과 단순한 형태로 대상의 본질만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했다. 미니멀리즘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황수선화의 작품 접근에 내심 놀랐다.
눈은 이미 작은 뇌의 기능을 한다. 눈으로 빨아들인 정보는 뇌에 화석처럼 박혀 어떤 사물을 봤을 때 연상하고, 이미지화한다. 눈은 모든 감각 중 가장 중요하면서 파워풀한 감각이다. 눈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식의 틀에 갇히면 보기는 하나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자유와 구속의 경계이다.
황수선화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난 눈으로 딱풀을 바라봤다. 딱풀을 찍었지만 또한 딱풀을 찍은 것이 아니다. ‘보름달’일 수도 있고, ‘자신이 되돌아갈 둥지’일 수도 있다.
수선화는 풀 너머 그 이상의 것을 봤다.
자유롭게 보고 잘 찍었을 뿐이다.
황수선화 |
어떤 시인에게 물었다.
“선생님처럼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잘 보면 돼.”
딱 한마디! 나도 아이들에게 꼭 같은 말을 전한다.
“잘 보면 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 창의력이다.
또 하나의 나, 뒷모습
친구의 뒷모습, 박나리 |
눈, 코, 입이 있는 얼굴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뒷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타인에게 무심히 노출되는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이다. 내 마음대로 표정을 지어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뒷모습은 대체로 솔직하다.
평소 무심하게 지나치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찍기로 했다.
“표정 있는 뒷모습을 찾아서 찍어보자.”
“샘! 어떻게 뒷모습에 표정이 있어요?”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아이들. 반응은 당연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나 타인의 뒷모습에 큰 관심이 없이 살아간다.
뒷모습은 단순하다. 복잡한 디테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몸의 한 공간이자 그 공간의 전체일 뿐이다. 어쩌다 문득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친구의 뒷모습에서 마주보며 나눈 표정이나 말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를 발견할 때가 있다.
“얼굴에 표정이 있지? 뒷모습도 또 하나의 얼굴이야. 잘 관찰해봐.”
뒷모습을 찍은 친구들의 사진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두 장의 사진이 있다. 요리실습이 끝난 후 마무리하는 친구의 뒷모습. 무언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 친구의 뒷모습이다. 발랄하고 유쾌해야 할 10대의 뒷모습에 외로움과 고민이 잔뜩 묻어 있다. 그들도 같이 느끼고 있었다.
“친구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하고 고단해 보여요.”
창문 너머 렌즈를 통해 바라본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떤 주제를 주면 처음에는 힘들어해도 곧잘 찍곤 하는 아이들의 재기 발랄함, 시각의 발칙함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빛났다.
사진은 관찰하는 도구다. 과학이자 예술이고 문학이자 음악이다. 사진 한 장에 시간의 상처와 시간의 영광이 다 함축되어 있다. 사진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이라기보다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이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
자신의 시간의 상처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중이다.
친구의 뒷모습, 황수선화 |
어! 보이네?
‘숫자를 찾아라!’ 시간이었다. 사진 수업에서 많이 활용하는 커리큘럼이면서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사물들을 꼼꼼히 관찰하는 일은 사진수업의 가장 기본이기에 그 만큼 중요한 수업이다. 늘 바라보던 사물, 공간, 사람들 안에서 숨어있는 이미지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사진 찍는 또 하나의 매력 중 하나이다.
이곳 친구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운동장, 조그만 정원, 교실이 전부다. 담장 너머로 나갈 수 없으니 갑갑할 노릇이다. 해마다 친구들은 바뀌지만 나는 4년째 이 공간에서 사진 수업을 하고 있다. 수업을 이끄는 나로서는 꼼수 부릴 시간도 없이 머리를 짜내야 친구들이 싫증 내지 않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닫힌 공간.
어쩌면 사진 찍는 데 최악의 조건이자 최선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 친구들과 수업하면서 이런 최악의 조건들이 어떻게 최선이 되는지 보게 되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몸으로 부대끼면서 느꼈다.
최악의 조건은 항상 실험의 대상이다.
실험들은 번번이 실패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성공할 때도 있다. 그 성공이 지금껏 아이들을 이끌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 자체를 즐기면서 사진에 재미를 배워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달님아! 만들어서 찍었니?”
“아-뇨. 자세히 보라고 해서 봤더니 보이던데요.”
달님이가 찾은 숫자는 3과 6이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숫자가 또 있을까? 놀랍다. 더 이상 찍을 게 없을 것 같은데도 새로운 것들이 자꾸 나오니! 신기하다. 나도 사물의 디테일한 변화를 이곳에서 새롭게 느끼고, 이 친구들을 통해 눈뜬다.
우달님 |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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