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외로움에 지친 벗들에게
1995년《58년 개띠》시집을 내고, 17년 만에 다시 보리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30대인 그때와 50대인 지금, 생각과 삶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때는 노동자로 살면서 시를 썼지만, 지금은 농부로 살면서 시를 씁니다. 그때는 도시에서 누가 시키는 대로 일하고 누가 주는 월급으로 살았지만, 지금은 산골 마을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하고 하늘이 주는 곡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사람한테 잘 보이기 위해 살았지만, 지금은 하늘한테 잘 보이기 위해 삽니다. 그때는 황금보다 귀한 똥오줌을 생각도 없이 ‘수세식 변소’에 버렸지만, 지금은 ‘생태 뒷간’에 모아 거름을 만들어 사람을 살리는 논밭에 뿌립니다.
그때는 늙고 병든 농부들이 목숨 걸고 농사지은 곡식을 얻어먹고 살았지만, 지금은 내 손으로 농사지어 먹고삽니다. 그때는 상추 이파리 하나조차 돈이 있어야 사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문만 열고 나가면 산과 들에 먹을거리가 많아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는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적은 돈만 있어도 한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때는 사람이 워낙 많아 내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워낙 적어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웃과 이웃이 닫혀 있어 이웃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웃과 이웃이 늘 열려 있어 아무리 작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서로 마음을 풀지 않으면 결코 편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때는 내 존재가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논밭 어디에서나 늘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어렵고, 가끔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아서 떠들어 대는 내 모습을 내가 보고 있으니 어찌 사는 게 어렵고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여태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으려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 길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티끌만큼 깨닫는 데도 어언 오십사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늦게나마 조금씩 조금씩 내 마음을 내가 볼 수 있으니 참 다행입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한 곳에 가장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조차 여태 모르고 살았습니다. 세상 속에 나를 함부로 맡기고, 겉으로 내세우기 좋아하며, 철없이 살아왔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부디 용서하시기를…….
이렇게 철없는 농부의 글을 귀하게 여겨, 곱게 시집을 펴내주신 보리 식구들과, 기꺼이 사진을 시집에 쓰게 해 주신 최수연 선생님, 지리산 넉넉한 품속에서 소나무처럼 살고 있는 박남준 시인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시집을 달랑 불알 두 쪽밖에 없는 사내를 만나 삼십 년 세월 동안 온갖 가난과 서러움을 참고 견디며 살아온 아내와, 질기고 모진 삶에 지친 젊은이들과 벗들에게 바칩니다. 부디 삶과 죽음과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함께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나무실 마을에서
맑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서 정 홍
1부
이름 짓기
단 한마디
유기농 당근즙 42%(미국산)
유기농 오렌지과즙 25%(이탈리아산)
유기농 사과즙 22%(터키산)
유기농 토마토즙 8%(이탈리아산)
채소혼합즙 2%(국산)
레몬과즙 1%(이스라엘산)
유명한 가게에서 파는
유기농 채소 과일즙 병에 적힌 이 글을
한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오신 어머니한테
읽어드렸더니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지랄하네. 그걸 누가 믿노!”
2부
아내는 언제나 한 수 위
편지 한 장
읍내 볼일 보고
밤늦게 돌아왔다.
내 책상 위에
비뚤비뚤
맞춤법 틀린 편지 한 장
“아버지, 오늘도 애썻습니다.
아들 먼저 자겠습니다.
안영히 주무세요.”
3부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상남동에서 만난 하느님
따뜻한 구들방이 그리운 겨울밤
대낮보다 더 환한
상남동 번화가
할아버지 한 분이
낡은 손수레에
종이 상자를 키보다 높게 쌓아
건널목을 지나가신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는데도
천천히 천천히
절뚝거리며 걸어가신다.
겨울 찬바람이 등을 떠밀고
자동차들이 빵빵거려도
갈 길을 가신다.
4부
못난이 철학
보는 눈에 따라
함박눈이 밤새 내려
나뭇가지마다
소복이 쌓였는데
사람들은 보기가 좋단다.
밤새 내린 눈 때문에
찢어질 것 같은데,
나뭇가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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