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삶은 끝없는 여행,
그리고 보잘것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
뉴델리의 칸마켓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붉은 돌담 너머로 작은 묘지가 보인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만큼 평범한 곳이지만 정문에 붙은 표지판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파르시공동묘지.’ 악마가 깃들여 오염되기 전에 독수리들에게 죽은 몸을 맡긴다는 침묵의 탑에 이르지 못한 망자들일까, 아니면 파르시 공동체의 풍습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선택일까? 살며시 철문을 젖히고 들어서자 로힌턴 미스트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익숙한 이름들이 묘비에 새겨져 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인도로 건너와 정착한 지가 천 년도 넘었다. 일명 배화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를 지금도 믿고 사는 소수 인종 파르시인들은 전 세계에10만여 명, 인도에만 약7만 명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인구 연구 조사에서는 15년 후쯤이면 인도내의 파르시 인구가 2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토록 먼 여행』은 바로 이 멸실의 위기에 처한 파르시 공동체를 중심 무대로 정치적,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는 평범한 개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로힌턴 미스트리는 파르시인들의 삶과 처지를 이국적으로, 혹은 인류학적 호기심의 측면에서 다루지 않는다. 또한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인도 현대사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개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사실적인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훗날 방글라데시가 되는 동파키스탄의 독립 운동과 그로 인해서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벌어지는 1971년이다. 1962년 중국과의 전쟁, 1965년 파키스탄과의 전쟁의 흔적이 채 가시지도 않은 뭄바이 파르시 공동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소시민들의 삶에 이러한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위협 때문에 아파트 창문에는 시커먼 등화관제용 종이가 붙어 있고, 밀려드는 난민들 때문에 세금은 늘어나고 물가는 치솟는다. 또한 극우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의 커 가는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일상의 폭력과 위협에 노출된 채 위축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인공 구스타드 노블은 이러한 팍팍한 생활 속에서 수입과 지출을 걱정하고 가족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평범한 가장이다. 위태로운 시대를 살아가며 박봉에 허덕이는 은행원인 그에게 일자리를 지키고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일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직장을 위해 헌신하는 그의 모습은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의 삶은 가족, 공동체, 사회, 국가라는 복합적인 틀 속에서 딜레마에 부딪히고 실존적 고뇌에 빠지게 된다.
친구의 갑작스런 배신의 아픔을 묵묵히 달래고 있던 그에게 골치 아픈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라진 친구의 간절한 부탁으로 본의 아니게 권력형 비리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명문 IIT에 합격한 아들은 입학을 거부하고 가출하며, 어린 딸은 병마에 시달리고, 절친한 은행 동료가 사망하며, 아파트 단지를 지키던 돌담은 당국에 의해서 강제 철거되고, 자신을 따르던 절름발이 저능아는 시위대의 난투 속에서 사망하고 만다.
무엇이 평범한 샐러리맨을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하게 만드는가? 개인에게 가족, 공동체, 사회, 국가는 구속이요 한낱 덫일 뿐인가? 길거리 화장실로 전락한 아파트 담벼락을 신과 성자들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건 거리의 보잘것없는 화가이다. 하지만 이 돌담을 기어이 무너뜨리고 마는 장본인은 공권력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인 예술가 출신의 공무원이다. 파르시인들을 화장하거나 매장하는 것을 절대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파르시 원리주의자들은 극우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편협한 다수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는 파르시 공동체의 위기는 근대화를 거부하는 내부의 수구적 모습과 맞닿아 있다.
침묵의 탑에서 행하는 조로아스터교 예배 의식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을 포용하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보편적 인간애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뜨거운 인간애는 침묵의 탑 밖에서도 존재한다. 어머니, 은행 동료, 첩보원 친구의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구스타드가 버려진 절름발이 저능아의 시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불완전한 시대와 삶을 수용하고 화해하는 순간이다. 모두가 외면한 시신을 홀로 지키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갖추도록 만드는 그의 또렷한 윤리적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를 떠난 조로아스터교 조상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토록 먼 여행을 했듯이 구스타드의 내면적, 외면적 여행도 그 끝이 없어 보인다. 정치적, 사회적인 구조적 모순 속에서도 꿋꿋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그의 모습은 위대하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보잘것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뛰어넘고 구조적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 방안임을 평범한 가장이자 아버지인 구스타드는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평범한 영웅들이 우리 주위에 많아질 때 아픔으로 넘쳐 나는 삶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으리라.
끝으로 로힌턴 미스트리의 장편소설『적절한 균형』에 이어서 이 책을 펴낸 도서출판 아시아에 감사를 표하며, 사랑으로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아내 캐서린과 아들 지홍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호주 시드니에서 손석주
그는 나이 든 사제들을 불러 모아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왕들에 관하여 물었다.
“처음에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렸기에, 우리가 이렇게 비참한 상태로 떠맡게
됐는지 그대들은 아는가?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아무 걱정도 없이 자유롭게
살면서 영웅적인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대들은 아는가?”
피르다우시의『샤나메』중에서
추운 길을 우리는 갔었다.
여행을 하기에, 그토록 먼 여행을 하기에
마침 일 년 중에서도 가장 힘들 때에
T. S. 엘리엇의『동방 박사들의 여행』중에서
낡은 말이 혀끝에서 사라지자,
새로운 선율이 나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낡은 길이 멀어져 갈 때, 새로운 나라가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기탄잘리』중에서
1부
1
구스타드 노블이 아후라 마즈다에게 기도를 올리려고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어슴푸레 동이 트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 여섯 시쯤이었다. 매일 아침 구스타드가 쿠스티로 기도를 암송할 때면 아파트 단지에 하나뿐인 나무에 참새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그 소리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참새들에 이어서 까마귀들의 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솥과 냄비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사방의 정적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우유 장수가 커다란 알루미늄 통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낙네들이 가져온 통에 우유를 따라 주었다. 그는 갈고리 모양의 긴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국자로 우유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재빨리 통에 따랐다. 아낙네들이 우유를 다 받고 나면 그는 국자를 통에 걸고 허리에 두른 도티의 매무새를 고친 다음 맨무릎을 문지르며 셈을 치러 주기를 기다렸다. 그때 손가락에서 마른 때꼽재기가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아낙네들이 역겨워서 몸을 움찔했지만 상큼한 햇살 덕분인지 이른 아침의 평화는 아직 깨지지 않았다.
구스타드는 주름이 쭈글쭈글한 넓은 이마에서 기도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잿빛 머리 위에다가 가볍게 얹었다. 검정 벨벳 모자는 잿빛 구레나룻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지만, 잘 다듬어진 그의 더부룩한 콧수염은 벨벳처럼 검고 매끄러웠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구스타드는 건강에 관한 한 친구와 친척들의 부러움을 샀다. 50년 동안 온갖 세상 풍파를 헤쳐 나온 사람치고 그는 무척 건강한 편이라고들 했다. 몇 년 전에도 심각한 사고를 당했지만 다리를 약간 절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딜나바즈는 그런 말을 듣는 게 싫었다.
“부정 탈라, 말조심해야지.”그녀는 혼잣말을 하면서 액막이로 손가락을 두들길 탁자나 의자를 찾았다. 하지만 구스타드는 큰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 기목숨을 걸었던 그날의 사고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알루미늄 통이 쉴 새 없이 달그락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도둑놈아! 네놈을 경찰한테 넘기고 말 테다! 경찰에게 팔이 부러지고 나서도 물을 타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쿠트피티아의 목소리였다. 결국 이른 아침의 평화는 달갑지 않게 끝이 나 버렸다. 그렇게 또 다시 시끌벅적한 하루가 시작됐다.
쿠트피티아는 확실한 근거도 없이 협박을 해 댔다. 그녀는 절대 우유 장수에게 우유를 사 먹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한 번씩 확인을 해서 정신을 차리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롭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그녀는 이곳 코다다드 아파트에는 사기꾼들이 등쳐 먹을 만한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흔 살 먹은 쭈그렁 할머니이자 아직 노처녀인 쿠트피티아는 날이 갈수록 뼈가 굳어 간다면서 요사이에는 좀처럼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심술궂고 괴팍한 탓에 코다다드 아파트에는 그녀가 뼈나 다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에게 그녀는 동화책 속에 등장하는 마녀와 같았다. 아이들은 그녀가 투덜대고 욕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마녀로부터 도망쳐라! 어서 도망쳐!”하고 외치며 그녀의 집 앞에서 줄행랑을 놓곤 했다. 그녀는 뼈가 굳어 간다고 불평을 늘어놓다가도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호기심이 생기면 언제나 놀라운 속도로 창문에서 발코니로, 계단으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우유 장수는 얼굴 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데 익숙했다. 그는 일부러 손님들 들으라고중얼거렸다. “내가 우유를 만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우유는 소가 만드는 거고, 사장님이 우유 팔러 가라고 하면 나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인데. 나처럼 불쌍한 사람을 괴롭혀서 무슨 소용이람?”
이른 아침의 희미한 햇살 덕분에 삶에 찌들려 체념하고 사는 데 이골이 난 아낙네들의 얼굴이 잠시나마 온화하게 바뀌었다. 그들은 물을 탄 희멀건 우유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시작해야 했다. 딜나바즈는 한 손에는 알루미늄 냄비를, 다른 손에는 돈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가냘픈 몸매의 그녀는 8년전 로샨의 돌잔치 때 짙은 갈색 머리를 단발로 자른 후 여태껏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구스타드는 단발머리가 그녀에게 썩 어울린다고 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취향을 결코 믿을 수 없었다. 언젠가 미니스커트가 유행할 때 그녀는 장난삼아 치마를 치켜들고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로샨은 웃음을 터뜨렸고, 구스타드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마흔네 살의 여인이 상상이 간다면서 그녀에게 진짜로 한번 입어 보라고 권유했다. “유행은 젊은 사람들이나 따라 하는 거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굵직한 목소리로 냇 킹 콜의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신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한
당신은 결코 늙지 않을 거야
당신이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꿈을 꾸고 있을때
시간이 당신의 짙은 갈색 머리를 은빛으로 물들일지도 모르지
구스타드가 ‘금발 머리’를 ‘짙은 갈색 머리’로 바꿔 부르는 것이 좋았던 그녀는 그 가사를 들을 때면 항상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냄비에는 어제 산 우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구스타드와 함께 남은 우유로 차를 만들어 마시고 나서 냄비를 씻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신문을 읽어 준다고 해서 듣고 앉아 있다 보니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겼던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인도 공과 대학(IIT)에서 공부하게 될 큰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랍은 유명해질 거야. 두고 보라고.” 구스타드는 큰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우리의 희생이 결국은 빛을 보게 될 거야.”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가하게 앉아서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낭비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처럼 좋은 소식이 큰아들에게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아낙네 몇 명이 떠나고 자기 차례가 다가오자 딜나바즈는 자리를 조금 앞으로 옮겼다. 구스타드와 딜나바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관청에서 우유 배급 카드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배급 카드가 발급되기 전까지는 딜나바즈도 우유 장수의 단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유 장수는 머리의 한가운데를 조금 남기고 빡빡 깎았는데 그 모습이 꽤 볼만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것은 힌두교 어느 카스트의 풍습이었고, 딜나바즈는 그것이 영락없이 쥐 꼬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머리에 기름이라도 바른 날이면 쥐 꼬리에서 반들반들 윤이났다.
딜나바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전에는 배급 카드가 가난한 사람과 하인들에게만 발급되었고, 우유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도 않았으며, 크림이 풍부하고 질 좋은 파르시 농장의 우유를 사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쿠트피티아는 여전히 파르시 우유를 사 먹었다). 그녀는 쿠트피티아가 우유 장수에게 소리 지르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 봐야 그를 더욱 화나게 할 뿐이고, 그가 우유에다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유 장수처럼 빈민가 판잣집이나 뭄바이 인근의 불법 거주지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빛에서 종종 집있 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읽었다.
오랫동안 쿠트피티아에 대한 괴상한 소문이 나돌았지만 딜나바즈는 그녀에게 나쁜 의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구스타드는 가능한 쿠트피티아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미친 헛소리 때문에 멀쩡한 사람조차도 영원히 공중제비를 돌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마도 딜나바즈는 쿠트피티아의 유일한 친구일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공손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던 터라 쿠트피티아의 기행을 받아들이는 데도 아무 문제 없었다. 짜증나거나 불쾌하기보다는 재미있고, 가끔 귀찮을 뿐이었다. 절대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사실 쿠트피티아는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도움을 주거나 충고를 하려고 할 뿐이었다. 그녀는 저주와 마법을 거는 법과 푸는 법, 선의의 마술과 저주의 마술을 사용하는 법, 길조와 흉조를 판단하는 법, 꿈을 해석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과 우연한 일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는데, 이처럼 기상천외하고 기이한 그녀의 상상력이 때로는 흥미롭기도 했다.
딜나바즈는 쓸데없이 그녀의 기운을 부추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쿠트피티아처럼 나이가 들면 자신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 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초자연적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멀구슬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구스타드는 흰옷을 입은 풍채가 아침 햇살에 더욱 당당해 보였고, 우유 장수 주변의 웅성거림과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구스타드는 알맞은 구절을 암송하면서 매듭을 지어 허리에 두르고 있던 쿠스티를 풀었다. 2.7미터 길이의, 손으로 짠 얇고 성스러운 허리띠를 모두 풀고 난 후, 그는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쿠스티를 채찍처럼 세 번 휘둘렀다. 그렇게 해야 악의 신인 아리만을 쫓아 낼 수 있었다. 물론 쿠스티 기도를 자주 올린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능숙한 손놀림이 필수였다.
쿠스티 기도 중에서 그 부분을 가장 좋아하던 구스타드는 어렸을 때 힘센 사냥꾼이 되어서 강력한 쿠스티만을 몸에 지닌 채 미지의 정글로 용감하게 돌진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성스러운 띠가 공중을 가르면 괴물의 머리가 잘려 나가고, 이빨이 날카로운 호랑이의 배가 갈리고, 야만적인 식인종이 전멸되었다. 언젠가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서점의 책장을 살피다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용 사냥꾼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그 이후로 그는 기도할 때마다 영국 수호성인 성 조지로 변신한 파르시 조로아스터교도가 되어 식탁 밑, 벽장 속, 침대 밑, 건조대 뒤에 숨어 있는 용들을 찾아내어 믿음직스러운 쿠스티로 두 동강을 내 버렸다. 불을 뿜어내는 괴물들의 잘린 머리가 사방에서 피를 튀기며 굴러다녔다.
문이 열렸다가 쾅, 닫히더니 동전 소리가 들렸다. 우유 장수에게는 주의를 주었다. 누군가는 비아냥거렸다“이봐, 아저씨. 우유하고 물은 따로 팔아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손님한테도 좋고, 아저씨도 물을 섞을 필요가 없으니까 일하기도 편할 테고 말이야.”그 말에 우유 장수는 늘 그렇듯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어느 열린 창문에서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전 인도 라디오 방송의 아침 뉴스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아침 공기를 타고 흐르는 청명하고 매끄러운 힌디 어 발음은 곧이어 이웃집에서 무례하게 끼어든BBC 월드 서비스 단파 라디오 소리와 확연한 대조를 이루었다.
하지만 구스타드의 기도는 길거리의 잡담이나 라디오 방송의 지지직거리는 소리 따위에 방해를 받거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늘 뉴스는 그가 엉뚱한 생각을 할 만큼 유혹적이지 못했다. 그는 이미『인도 타임스』를 읽었기 때문이다. 구스타드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양치질을 하려고 수돗물을 틀자 물이 요란스럽게 튀었다. 깜짝 놀란 그는 뒤로 물러섰다. 시 당국이 하루치 물 공급을 끝낸 어제 아침 일곱 시부터 수도관이 텅 비어 있었던 탓에 공기가 빠져나오느라 그런 것이었다. 그깟 수돗물 때문에 겁을 먹다니, 구스타드는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갔다가 다시 천천히 틀었다. 그래도 물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뿜어 나왔다.
마치 씩씩거리다가 내뱉는 듯한 그 소리에 딜나바즈는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 옆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피식 웃었다. 오늘은 남편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직 잠이 덜 깬 그녀는 시곗바늘이 보일 때까지 시계를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2
그날 아침 태양이 떠오르기 한참 전, 기도를 앞둔 구스타드는『인도 타임스』가 배달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아직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으로 인해 모든 것이 또렷하고 잘 정돈된 듯이 보였다. 구스타드는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매만지며 수십 년 전 할아버지가 가구점에서 손수 만든 의자임을 떠올렸다. 그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가게 간판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노블과 그 아들들, 훌륭한 가구 장인들.’ 그것은 마치 눈앞에 펼쳐진 사진 같았다. 그는 그 간판을 맨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간판의 글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주위에 걸려 있던 그림들은 알아볼 수 있었다. 윤이 나는 체리색 목재로 만든 장식장, 사면에 커튼이 달린 커다란 침대, 조각 장식 등받이가 있는 의자들, 균형이 잘 잡힌 구부러진 가구 다리들, 위엄 있는 검은 책상. 그 모든 것이 어릴 적 그의 집에 있던 가구들과 닮았다.
그중에 몇몇은 지금 그의 집에 있다. 조각칼처럼 날카로운 파산의 톱니바퀴에서 구해 낸 것들이었다. 파산은 집행관의 징 박은 구두 소리처럼 잔인하고 날카로우며 냉혹했다. 징 박은 단화는 석조 타일 위에서 악랄한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집행관은 그의 더러운 손길이 닿는 대로 마구 집어 갔다. 불쌍한 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었다. 구스타드는 말콤의 도움으로 가구 몇 점을 낡은 승합차에 실어 건질 수 있었다. 집행관은 알아채지 못했다. 말콤 살단하는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안타깝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빌리모리아 소령과 마찬가지로 그도 진실한 친구였다.
빌리모리아의 이름이 떠오르자 구스타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망할 놈. 그렇게 염치없이 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히 청탁 편지를 보내다니. 죽을 때까지 답장을 받지 못할 테다. 질서 정연한 어둠이 깨질까 봐 구스타드는 소령이 보낸 뻔뻔한 편지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다시 한 번, 어린 시절 가구들이 그를 위로하려는 듯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구들은 평생토록 온전한 정신 상태를 지켜 주는 파수꾼과도 같았다.
그는 우편함의 금속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신문의 하얀 윤곽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자신이 신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챌까 봐 배달원이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정확한 이유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자전거 페달 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사방이 조용해졌다. 구스타드는 불을 켜고 안경을 썼다. 파키스탄과 관련된 암울한 머리기사가 있었다. 그는 그 기사를 무시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반라의 어머니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난 몇 주 동안의 사진들과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사진 설명조차 읽지 않았다. 군인들이 총검 연습을 하는 데 벵골 인 아기들을 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신에 구스타드는 IIT의 입학시험 결과가 실린 면을 찾아내 식탁 위에 펼쳤다. 그는 벽장에서 소랍의 수험 번호가 적힌 종잇조각을 가지고 와서 확인한 후 딜나바즈를 깨우러 갔다.
“어서 일어나! 합격했어!” 그는 자고 있는 아내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애정과 조바심이 담겨 있었고, 편지로 인한 죄책감도 있었다. 그는 빌리모리아 소령한테서 온 편지를 그녀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딜나바즈는 침대에서 몸을 돌리며 미소지었다.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합격한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 거예요.” 오늘은 양치질을 먼저 하고 차를 끓일 시간이 충분했지만, 그녀는 화장실로 가 드럼통에 물을 채우기 위해 투명 플라스틱 호스를 연결했다. 아직 새벽 다섯 시밖에 되지 않아 수돗물이 끊기려면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놋쇠로 만든 수도꼭지를 틀자 수압을 받은 물이 호스를 타고 쏟아졌다. 공기 방울들이 긴 꼬리를 이루며 바싹 붙어 따라 나왔다. 마치 둘째 아들의 작은 수조에서 뿜어 나오던 공기 방울 같았다. 한때 다리우스는 잠시나마 자기 우주의 중심이었던 각양각색의 작은 물고기들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거피, 블랙 몰리, 에인절피시, 네온테트라, 키싱구라미등예쁜이름들을자랑스럽게외곤했다.
그러나 지금 수조는 텅 비어 있다. 새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소랍의 나비 수집 상자와 함께 화장실 옆 창고의 검은색 선반 위에서 먼지와 거미줄에 덮여 있다. 또한 그곳에는 소랍이 오래전 상으로 받아 온 곤충 학습 어쩌고 하는 제목의 별 볼일 없는 책도 있었다. 딜나바즈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죽이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했지만, 구스타드는 소랍을 격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일을 끈기 있게 하다가 대학에서 전공이라도 하게 되면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이면서.
녹슨 못들이 아직도 나비 몇 마리의 가슴에 박혀 있다. 이국적인 꽃잎처럼 생긴 날개들은부러진 더듬이와 작은 머리들과 함께 뒤섞여 수집 상자 밑바닥에 흩어져 있었지만, 흉부에서 떨어져 나온 나비의 작은 머리들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때 딜나바즈는 까만통 후추가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갔는지 궁금했었는데, 그 동그란 것들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는몸서리가 쳐졌다.
물이 넘치고 물줄기가 솟구쳐서 호스가 요동치면 그녀는 늘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물줄기가 잦아들면 드럼통에서 호스가 빠지지 않도록 쥐고 있는 손바닥에서는 가벼운 떨림만 느껴질 뿐 그것은 텅 빈 관이나 다름없었다.
구스타드는 소랍을 깨우고 싶었지만 딜나바즈가 말렸다. “자게 내버려 둬요. 한 시간 후에 합격 소식을 듣는다고 해서 설마 결과가 바뀌겠어요.”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에도 그는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잠버릇이 사납던 소랍을 위해 침대 옆에 달아 준 널을 댄 문짝이 보였다. 처음에는 식탁 의자로 침대 옆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지만 소랍이 자꾸 그것을 밀쳐 내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널을 댄 문짝을 달아 주었다. 그러자 소랍은 자신의 침대를 ‘문짝 달린 침대’라고 이름 붙였고, 덧베개, 담요, 베개들을 끌어 모아서 침대에 집을 만들 때 새로 달린 문짝이 매우 쓸모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문짝 달린 침대를 로샨이 쓰고 있었다. 널 사이로 앙상한 팔 하나가 비어져 나와 침대 위에 걸쳐 있었다. 얼마 후면 딸의 아홉 번째 생일이다. 로샨의 가냘픈 몸매를 내려다보던 구스타드는 딸이 딜나바즈의 몸매와 꼭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소랍이 자고 있는 좁은 간이침대로 눈을 돌렸다. 낮 동안에는 간이침대를 접어서 다리우스의 침대 밑에 넣어 두었다. 구스타드는 적당한 크기의 세 번째 침대를 들여놓고 싶었지만, 좁은 방에는 그럴 만한 여유 공간이 없었다.
소랍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기쁨과 자부심으로 빛났다. 열아홉 살 아들의 얼굴 표정 또한 어린 시절 문짝 달린 침대에서 잘 때와 마찬가지로 근심 걱정이 없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세월이 지나면 저 모습도 사라질까? 구스타드에게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서점이 배신으로 인해 약탈당하고 파멸되던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충격과 수치심으로 앓아누웠다. 가난은 하루가 다르게 엄습해 왔고, 그들은 명예를 잃고 몰락했다. 어머니는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당시 구스타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은 그에게 행복이기보다 근심이 증폭되고 초점 없는 야릇한 분노가 끓어오르며 무기력해지는 시간일 뿐이었다. 탈진 상태로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는 또다시 밝아오는 하루를 저주하곤 했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소랍. 열다섯 살이라 아직 어리고 키가 작긴 하지만 구스타드의 근육질 체형을 닮은 다리우스. 두 갈래로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가 베개 위에 비스듬히 걸쳐 있고, 문짝 달린 침대의 극히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는 꼬마 로샨. 구스타드는 그들을 차례로 바라보면서 아들과 딸의 인생에서 밤이 언제나 평화와 고요로 충만하기를 기원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장가로 들려주려고 개사한 군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모두들 복 받아라, 모두들 복 받아라
우리 소랍도 다리우스도 모두들 복 받아라
우리 소랍도 다리우스도
그리고 로샨도……
소랍이 몸을 뒤척이자 구스타드는 노래를 멈췄다.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 방에도 창문과 환기창에 검은색 등화관제용 종이가 붙어 있어서 어두웠다. 중국과 전쟁이 벌어졌던 9년 전에 구스타드가 붙인 것이었다. 그는 그해에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졌는지를 떠올렸다. 그해 로샨이 태어났으며, 그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으나 부서진 엉덩이뼈를 접골사의 모래주머니로 감싸고 12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도심에서는 시위가 일어났고 통금이 시행되었으며, 여기저기서 곤봉이 난무하고 버스가 불에 탔다. 1962년은 끔찍한 해였다.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패배했던지 사람들은 중국군이 밀려올 때 인도 군인들은 마치 양철 깡통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한심하게도 양측은 끝까지 평화와 형제애를 주장했다. 특히 ‘인도와 중국은 형제’라는 구호를 좋아했던 자와할랄 네루는 저우언라이가 인도인의 형제이며, 두 나라는 훌륭한 친구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고 국경에 사단 병력을 몇 군데 배치했을 때조차 그는 전쟁에 대한 소문을 일축했다. 정말로 인도와 중국이 형제가 될 것처럼 네루는 틈만 나면 “인도와 중국은 형제다”를 외쳤다.
중국군이 산을 넘어 물밀듯이 밀려들자 배신이 황인종의 천성임이 입증됐다고들 말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과 미용실은 손님이 끊겼고, 중국인은 공공의 요괴가 되었다. 딜나바즈는 다리우스에게 “음식을 남기면 나쁜 중국 사람이 잡아간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무서워하기는커녕 그 말을 믿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다리우스는 친구들과 황인종이 아이들을 잡아다가 쥐나 고양이, 강아지와 함께 넣어서 국을 끓인다
는 이야기를 나눈 후에 전투 계획을 세웠다. 우선 디왈리 축제 때 사용하던 장난감 권총을 꺼내 총알 한 통을 장전한 뒤, 중국인이 집 가까이에 오면 빵빵, 총을 쏘아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코다다드 아파트 근처에는 중국 군인이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에 기금을 모금하는 정치인들이 조를 이루어 돌아다녔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정파에 따라 국민회의 정부가 대담한 태도를 취했다고 칭찬하거나, 인도의 용감한 젊은이들에게 구식 무기를 주고 여름옷을 입혀 히말라야 산맥으로 보내 중국 놈들 손에 죽게 만들었다면서 정부의 무능을 비난하기도 했다. 정당의 깃발을 단 트럭들은 독창적인 현수막을 내건 채 도시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기금 모금원들은 확성기에다 대고 자신이 속한 정파와 군인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모국을 지키기 위해 히말라야의 눈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인도 젊은이들의 희생을 본받아야 한다고 목이 쉬도록 외쳐댔다.
이에 감동한 사람들은 밀려드는 황인종 침략자들을 막아 내기 위해 일어섰다. 그들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트럭에다 담요, 스웨터, 스카프를 내던졌다. 일부 부유한 지역에서 실시된 모금 운동은 돈 많고, 애국심 강하며, 인정 많다고 평가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경쟁으로 변질됐다. 여자들은 몸에 지니고 있던 금팔찌, 귀걸이, 반지를 빼 주었고, 수표나 잔돈은 손수건에 싸서 모금원들의 손에 건네주었다. 남자들은 입고 있던 셔츠나 신발을 벗고 허리띠를 풀어서 트럭에 던져 주었다. 정말 대단한 광경이어서 이러한 단결과 관대함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부심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기부한 물건들 가운데 일부가 암시장과 보석 시장, 거리 행상에서 팔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사람들은 이같이 추잡한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국가 단결로 인한 흥분된 마음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고,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너나없이 중국과의 전쟁으로 자와할랄 네루의 마음이 얼어붙었고, 결국에는 부서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배신으로부터 결코 회복될 수 없었다. 인도가 가장 사랑하는 선생님, 모든 사람의 아저씨, 불굴의 인도주의자, 위대한 공상가였던 네루는 증오로 가득 찼고 악의에 불탔다. 그는 이제 어떤 비난도 참지 않았고 어떤 충고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중국과의 전쟁 이전에도 독단적이고 심술궂은 기질이 보이긴 했지만, 철학과 꿈에 대한 갈망을 완전히 상실한 네루는 자신을 정치적 음모와 내부 투쟁에 내맡기고 말았다. 그의 정치적 고통의 원인이었던 사위와의 불화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네루는 페로즈 간디가 정부의 부정을 폭로한 일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한때 핍박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며 보호하는 역할을 열정적이고 성공적으로 해냈던 그는 이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지 않았다. 네루의 단 한 가지 관심사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며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서 쓸모없는 남편까지도 버렸다고 믿었던 사랑스러운 딸 인디라가 자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배신으로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고 암울해진 그의 낮과 밤, 밤과 낮은 이러한 편집증적인 집착에 사로잡혔지만, 전쟁이 끝나자 창문에서 종이를 걷어 낸 도시에는 다시 빛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스타드는 등화관제용 종이를 그대로 두었다. 아이들이 잠을 잘자도록 해 주기 위해서였다. 딜나바즈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시아버지가 노인 요양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굳이 따지지 않았다. 어둠이 그에게 위안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보, 준비되면 언제라도 검은 종이를 걷어 내요. 절대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종이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거나 바퀴벌레가 알을 낳기에 완벽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집안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했다.
검은 종이가 빛을 차단한 채 몇 달이 흘렀을 때였다. “이제 이 집에 아침은 절대 찾아오지 않을 모양이구나.” 딜나바즈는 투덜댔다. 이윽고 그녀는 먼지와 거미줄과 집 안의 벌레들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냈다. 식구들은 마치 등화관제용 종이가 애초부터 창문에 붙어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사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때때로 딜나바즈가 일상적인 문제로 괴로울 때면 검은 종이가 욕구 불만의 표적이되었다. “정말 대단해. 아들은나비와 나방을 수집하고, 아버지는 거미와 바퀴벌레를 끌어 모으다니. 머지않아 코다다드 아파트가 거대한 곤충 박물관으로 변하겠군.”
3년 후, 파키스탄이 인도와 분할된 직후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카미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침공했다. 또다시 등화관제가 선포되었고 구스타드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딜나바즈에게 자신의 결정이 현명했음을 주장했다.
3
구스타드는 신문을 마저 읽기 위해 자고 있는 아이들을 두고 돌아섰다. 아직 기도할 시간이 되지 않았다. 태양은 여전히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딜나바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에게 ‘동파키스탄의 공포 정치’라는 제목을 읽어 주었다.
“잠깐만요. 큰 통에다 물부터 채우고요.”세차게 흘러나오는 수돗물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수압이 낮아서 드럼통을 채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루치 마실 물을 걸러 담을 반들반들하고 네모난 천을 헹구면서, 딜나바즈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는 젖은 천을 항아리의 열린 주둥이 위로 던졌다. 물이 표면에 닿으면서 찰싹, 날카로우면서 젖은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손가락을 천 가운데 대고 솜씨 좋게 아래로 밀어서 깔때기 모양을 만들었다.
“아와미 연맹당이 방글라데시 공화국을 선포했다는군.” 수돗물이 잠기자 그가 말을 이었다.“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동료들에게 말한 대로 일이 벌어졌어. 야히아 칸 장군이 무지부르 라만에게 정부를 구성하도록 할 거라고 떠들어 대더군.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런 광신도들과 독재자들이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구스타드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공포와 야만, 고문과 살인, 사지 절단과 같이 끔찍한 일들을 겪으며 국경을 넘어오는 벵골 난민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지막이 읽어 내려갔다. 여자들은 유방이 도려진 채 하수구에 버려졌고, 아기들의 주검에는 총검이 꽂혀 있었으며, 불에 까맣게 타 버린 시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마을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찼다. 딜나바즈는 자주색 용액 여섯 방울을 따랐다. 그녀는 식수를 끓이지 않는다는 점이 늘 마음 에 걸렸다. 그러나 구스타드는 물을 거르고 과망간산칼륨을 넣으면 예방 조치로는 충분하다고 했다. 딜나바즈는 색이 바랜 꽃무늬 잠옷의 젖은 부분을 쥐어짰다. 그러자 급격히 늙어 가는 그녀의 손등에 돌출된 정맥이 더 도드라졌다.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의 뚜껑이 가볍게 흔들리며 달각달각 소리를 냈다.
“빌리모리아 소령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요.” 브룩 본드 홍차 세 스푼을 떠 넣으며 그녀가 말했다. 주전자의 꼴꼴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딜나바즈는 주전자에 직접 차를 끓이는 것이 싫었지만, 20년 넘게 써 온 짙은 갈색 영국 찻주전자가 깨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솜이 흰곰팡이처럼 삐져나온 낡은 보온 커버도 새로 사야했다.
“빌리모리아 소령? 무슨 생각 말이야?” 그는 그녀가 숨겨 둔 편지에 대해서 눈치챈 것은아닌지 조마조마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파키스탄 문제 말이에요. 사람들이 전쟁이 날 거라고 하던데, 소령은 군대 경험이 있으니까 좋은 정보가 있겠죠.”
지미 빌리모리아 소령은 노블 부부만큼이나 코다다드 아파트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구스타드는 항상 아이들에게 소령을 좋은 본보기로 들며, 아저씨처럼 가슴을 밖으로 내밀고 배를 안으로 넣어 꼿꼿이 걸으라고 충고하곤 했다. 퇴역 장교인 그는 소랍과 다리우스에게 화려했던 군대 시절과 전쟁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었다. 1948년 카슈미르에서 인도 군인들과 맞닥뜨리자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던 비겁한 파키스탄 인들과 대영 제국 시절 막강한 영국 육군이 그들의 천적인 서북 국경의 무시무시한 원주민들을 격파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는 어린 청중에게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거칠고 사나운 원주민들에게 싸움과 살인은 단지 즐거운 놀이일 뿐이었다고 했다. 파키스탄 인들이 풀어놓은 원주민들은 술에 취해서 뉴델리로 진격하는 대신에 맨 처음 마주친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돈과 보석, 여자들을 찾으러 집집마다 샅샅이 뒤지고 주민들을 난도질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즐기며 놀고 있을 때 인도 지원군이 도착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고 소령 아저씨가 말했다. 카슈미르는 안전했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때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수를 쳤다. 바니할 고개 넘기, 바라물라 전투, 스리나가르 봉쇄와 같은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어서 구스타드와 딜나바즈도 넋을 잃고 듣곤했다.
그런데 지난해 빌리모리아 소령이 코다다드 아파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에게도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 버려서 그의 행방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짐을 옮겨 달라고 했는지 트럭 한 대가 그의 집 열쇠를 가지고 도착했다. 뒤 범퍼에는 페인트로 신을 믿어라. 추월하려면 경적을 울리시오, 라고 소용돌이 모양의 화려한 장식 서체로 쓴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이웃들의 질문에 운전사와 그의 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들을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우린 아무것도 모릅니다”가 전부였다.
소령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구스타드에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직딜나바즈만이그고통의깊이를느낄수있었다. “오랜 세월 이웃으로 지냈는데 이런 식으로 떠나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군. 우라질, 도무지 예의가 없어.”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더는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구스타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미 빌리모리아는 그에게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다. 소령은 사랑하는 형제 같은 존재였다. 가족과 다름없었고, 아이들에게는 또 한 명의 아버지였다. 심지어 구스타드는 자신과 딜나바즈에게 불상사가 생긴다면 유언장에 그를 아이들의 후견인으로 지명하는 일을 고려한 적도 있었다. 소령이 사라지고 일 년이 지났지만, 구스타드는 여전히 그를 생각할 때마다 옛 상처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구스타드는 딜나바즈가 그의 이름을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편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다. 그 편지를 생각할 때마다 피가 끓었다.
그는 무심하게 대응하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빈정거리고 말았다. “지미가 파키스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아? 우리한테 새 주소도 안 남겼잖아, 안 그래? 혹시 그랬더라면 편지를 써서 그의 전문가다운 식견을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아직도 화가 안 풀렸군요.” 딜나바즈가 말했다. “하지만 난 그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떠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언젠가는 그 이유를 알게 되겠죠. 좋은 사람이었잖아요.” 그녀는 알루미늄 주전자에 든 차를 저으면서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맞은 색깔이 나온 듯하자 그녀는 찻잔 두 개에다 차를 따랐다. 그런 다음 냉장고에서 어제 먹다 남은 우유를 가져왔다. 아직 우유 장수가 도착하기 전이었지만, 일단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구스타드가 받침 접시에 차를 부어서 입바람을 불었다. 신문을 다 읽고 나자 얼추 기도할 시간이 되어서, 그는 검정 벨벳 모자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단지 안의 유일한 나무에서 지저귀고 있는 참새 소리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쿠스티 기도 암송을 절반쯤 마쳤을 때 어디선가 힌디 어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더니 곧 BBC 월드 서비스 방송과 뒤섞였지만, 그는 이미 뉴스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의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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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디 어 뉴스 방송이 끝나자 라디오에서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광고가 나왔다. 아물 버터( ‘……정말로, 끝내 주는 버터 맛……’), 하맘 비누, 벚꽃 구두약 등등. 우지직부지직소리를 내는, BBC에 맞춰 놓은 라디오는 꺼져 있었다.
쿠스티를 허리에 다시 묶은 구스타드는 평소처럼 두 끝의 길이가 딱 맞아 떨어지자 기분이 좋았다. 그는 수드라가 몸에 편하게 들어맞도록 어깨를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했다. 어깨의 움직임에 따라서 제사복이 쿠스티 밑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복부 주변이 마침맞게 헐렁해졌다. 등 아래쪽에서 바람이 솔솔 스며들자 구스타드는 그 부분이 세로로 찢겨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에게 있는 대부분의 수드라가 찢어져서 딜나바즈가 새 제사복이 몇 벌 더 필요하다며 걱정하던 참이었다. 수선을 해 봐야 소용없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면직물인 모슬린으로 만든 옷이어서, 찢어진 곳을 기워 놓으면 얼마 안 가서 또 다른 곳이 찢어졌다. 구스타드는 딜나바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했다. “에어컨 바람이 약간 들어와도 아무 문제 없어.” 항상 그렇듯이 그는 궁핍한 흔적을 웃음으로 날려 버렸다.
눈을 감은 채 다시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나지막이 사로시 바즈기도를 암송하기 시작했을 때, 디젤 엔진의 굉음에 코다다드 아파트의 살림 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졌다. 트럭인가? 몇 분 동안 엔진이 공회전했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아침 기도가 중간에 끊어지는 게 제일 싫었다.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 중에도 무례하게 말을 끊지 않으려고 하는 그가 어떻게 감히 신에게 그럴 수 있겠는가? 특히 오늘은 소랍이 IIT에 합격함으로써 신의 경이로운 은총으로 그의 모든 노력과 고난이 보상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야 할 것도 많은 날이었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트럭이 떠난 후에도, 아파트 단지 정문에는 디젤 배기가스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곧 코를 찌르는 듯한 매연 냄새가 아침 공기에 실려 왔다. 구스타드는 코를 찡그린 채 사로시 바즈 기도를 이어갔다.
기도가 끝났을 때 그는 트럭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구스타드는 검은 돌담 맞은편 자신의 집 창문 아래 건조한 땅뙈기에서 자라고 있는 관목 두 그루 앞으로 가서, 매일 조금씩 하고 있는 원예 일을 시작했다. 잎에는 종이 부스러기가 엉켜 있었다. 빈카만 직접 심었고 박하는 어느 날 저절로 싹을 틔운 것이었지만, 그는 매일 아침 그것들을 보살폈다. 처음에는 박하의 싹이 잡초인 줄 알고 하마터면 뽑아 버릴 뻔했다. 때마침 위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쿠트피티아가 박하의 의학적 효능에 대해서 입심 좋게 설명했다. “그거 귀한 박하야, 정말 귀한 거야!” 그녀가 밑에다 대고 소리쳤다. “꽃향기가 고혈압을 막아 줘!” 못처럼 곧은 줄기에서 자라는, 꽃잎이 두 개 달린 작은 흰 꽃의 씨를 물에 담갔다가 섭취하면 각종 위장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딜나바즈는 박하를 그냥 두라고 했다. 설령 약효가 없다고 할지라도 쿠트피티아를 기분 좋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약재의 소문은 금세 번져서, 아파트 사람들은 너나없이 신비한 효능이 있는 잎이나 씨를 얻으려고 했다. 구스타드에게 큰 기쁨을 주는, 꽃잎이 다섯 개 달린 분홍색 빈카를 전멸시킬 수도 있었던 박하의 원기 왕성한 성장은, 하루가 멀다하고 손을 내미는 이웃들 덕분에 그나마 억제되었다.
구스타드는 종이 부스러기, 셀로판 사탕 포장지, 콸리티 아이스크림 막대 따위를 치우고 장미를 살펴보았다. 그는 그림을 걸 때 쓰는 굵은 철사로 까다로운 올가미와 매듭을 만들어서 장미 화분을 현관 입구의 기둥에 묶어 두었는데, 꽃을 꺾으려면 복잡하게 얽힌 것을 푸는 데만 족히 몇 시간은 걸리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는 시든 장미 꽃잎들을 주웠다. 그때 다시 디젤 배기가스 냄새가풍기자, 그는 아파트 단지 정문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작고 검은 기름 웅덩이가 트럭이 멈춰 섰던 자리를 알려 주었고, 기둥에는 통지서가 붙어 있었다. 시 당국에서 온 공식 서류는 접착제와 기포 때문에 여러 군데가 울룩불룩했다. 통지서를 읽고 난 그는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빌어먹을 나쁜 놈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먼. 길을 도대체 뭣 때문에 넓힌단 말인가? 그는 큰 걸음으로 서둘러 땅을 재어 보았다. 아파트 단지가 지금 넓이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게 되면, 일 층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검은 돌담이 마치 산처럼 거대하게 보일 터였다. 양이나 닭처럼 비좁은 우리에 갇힌 신세가 되면 아파트가 아니라 포로수용소와 다를 바 없었다. 도로에서 나는 소음이 훨씬 가까워지고 이래저래 성가신 일도 많아질 것이다. 지금도 파리 떼와 모기 떼가 우글거리고, 염치없는 놈들이 담벼락에다가 똥오줌을 싸 대는 바람에 지독한 냄새가 났다. 한밤중에는 담벼락이 영락없이 공중 화장실로 변했다.
그러나 통지서는 단지 제안일 뿐이므로, 그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건물주는 절대로 시 당국에서 제안한 ‘공정한 시장 가격’으로 단지의 절반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정부의 공정한 시장 가격보다 더 불공정한 것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건물주는 반드시 소송을 할 것이다.
디젤 냄새는 가시지 않았고, 구스타드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파트 단지에서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디젤 냄새 때문에, 그는9년 전 사고를 당해서 차가 달려오는 길바닥에 엉덩이뼈가 부서진 채 누워 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는 코를 찡그리며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다리를 절게 만들었던 엉덩이뼈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본문1장 전문,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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