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최근 대입 수능시험에서 적정기술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고, 정부에서도 적정기술 관련 프로젝트를 재정 지원하는 등 한국에서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에 발맞춰서 적정기술에 대한 입문서가 몇 권 우리말로 출간되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한 형편이다. 특히 적정기술의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본격적으로 기술된 책은 아직 없다.
적정기술에서는 ‘만남’이 매우 중요하다. 적정기술이 현지에 잘 정착되기 위해서는 적정기술을 현지에 제공하려는 사람과 적정기술의 수요자인 현지인의 허심탄회한 만남이 필수적이다. 현지에 대한 정확한 문제 파악이 선행되지 않으면 현지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면서도 지속가능한 적정기술 제품 개발은 불가능하다.
또한 적정기술 개발은 발전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이지 개발 자체가 최종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적정기술 개발은 ‘발전을 위한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정기술이 디자인, 비즈니스, 국제개발협력 등의 다양한 영역과 서로 만나야 한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장에서는 적정기술의 의미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적정기술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본다. 현대 적정기술의 역사를 ‘적정기술의 태동기’, ‘적정기술의 1차 부흥기’, ‘재도약을 위한 준비기’, ‘적정기술의 2차 부흥기’의 4단계로 나눠서 서술했다.
2장에서 6장까지는 ‘적정기술과 디자인’, ‘적정기술과 비즈니스’, ‘적정기술과 지속가능한 발전’, ‘적정기술과 국제개발협력’, ‘적정기술과 국제 자원활동’이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본다. 각 장에서 다룬 내용은 향후 보완 발전시키면 별도의 단행본으로 나오기에도 충분한 주제들이다.
각 장을 저술한 저자들은 적정기술미래포럼의 스태프(대표, 사무국장, 매니저), 적정기술미래포럼에서 실시하는 ‘적정기술 아카데미’ 강사, 적정기술미래포럼과 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가 공동으로 발간하는 국내 유일의 적정기술 논문집인 <적정기술>의 편집위원 등 적정기술미래포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다.
저자들은 ‘적정기술과의 만남’이 적정기술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갈증을 다소나마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책의 출간을 흔쾌히 결정하고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에이지이십일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홍성욱 적정기술미래포럼 대표,
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지금 세상은 이전과 매우 다릅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의 손에 모든 종류의 인류의 빈곤을 없앨 수 있는 힘과
모든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이 동시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J. F. 케네디, 1960년 1월 20일 신년 연설 중에서
1. 적정기술이란1
개발도상국은 농업사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소득 수준이 낮고, 문맹률이 높으며, 빈약하거나 불충분한 사회 기반시설을 가지고 있고, 불충분한 보건시설 및 만성 재정 적자 등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이런 국가들은 풍부한 노동력, 막대한 농촌 자원, 잠재적 농업, 광산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개발도상국의 사회경제적 저발전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술 이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여 년간 선진국의 기술이 개발도상국에 지원되었지만, 이들 국가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에 기술을 이전하기 위해서는 이들 국가의 특징을 고려했어야 했으나 이런 과정 없이 선진국의 기술을 바로 이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비주류 경제학자인 슈마허E. F. Schumacher는 1965년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발전에 있어 과학기술의 응용’이라는 주제로 열린 유네스코 회의에서 적정기술의 원조 격인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그는 이 기술이 대중에 의한 생산기술로서 개발도상국의 토착 기술보다는 훨씬 우수하지만 선진국의 거대 기술에 비해서는 값싸고 소박하다는 의미에서 중간기술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는 중간기술의 목표를 1)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존재해야 하고, 2)일반적인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저렴해야 하며, 3)희소 자원의 낭비가 적어야 하며, 4)분산형 에너지를 사용하고, 5)상대적으로 간단한 기술과 현지 재료를 사용하여 제품을 만들고, 6)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작업장을 만드는 것으로 정의했다.
슈마허는 그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1966년 영국에 ‘중간기술개발집단Intermediate Technology Development Group(ITDG)’을 설립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중간기술’이라는 이름이 열등하거나 저급 기술인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고, 발전의 사회적, 정치적인 요인에서 분리되어 기술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다. 왜냐하면 ‘중간기술’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기술은 시간과 장소에 ‘적정한appropriate’ 기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슈마허가 중간기술이란 아이디어를 처음 구상했을 때, 중간기술은 개발도상국의 자원과 필요에 적합한 소규모이며 간단하며 저자본의 기술을 의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선진국에서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 적정기술이 저발전에서 기인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부상한 것과는 달리, 선진국에서 적정기술이 부상하게 된 것은 정치, 사회적 배경의 영향이 컸다. 미국에서 적정기술 운동이 대두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술 원조 노력의 실패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내 기술에 대한 비판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2 1960년대와 1970년 초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이 동기가 되어 기술에 대한 급진적인 접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시민권 운동, 신좌파 정치운동, 반전운동, 반문화운동, 환경주의 등을 촉발시킨 우려와 열정 중 많은 부분이 궁극적으로는 현대 산업사회의 근본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로 이어졌다.
1970년 초반부터는 적정기술의 개념이 발달된 산업사회의 문제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사회 운동가들은 적정한 기술이 널리 사용된다면 공해, 환경 파괴, 에너지 가격의 급격한 상승, 자원 고갈, 소외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병폐가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3
한편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점차 확산되면서, 영감 있는 기술 전문가들이 과학과 공학에서의 새로운 해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존 토드John Todd가 매사추세츠에 ‘신연금술연구소New Alchemy Institute’를 설립했으며, 캘리포니아에는 ‘패럴런 연구소Farallon Institute’가 설립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적정기술은 1)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저렴할 것, 2)쉽게 운전하고 수리할 수 있도록 단순할 것, 3)소규모 운전에 적합할 것, 4)인간의 창의성에 부합할 것, 5)환경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을 것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적정기술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면 바커 한스Bakker Hans는 그의 논문 <스와데시 혹은 적정기술에 대한 간디적 접근>에서 적정기술을 ‘인간의 기본적 필요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기술’로 정의하고, 이것은 긍정적 발전을 이끄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식주, 건강, 교육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기술은 적정한 기술이라고 볼 수 없으며, 하위 20%의 사람을 혜택받지 못한 상태로 방치한 경제 성장 전략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은 적정기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4한편 미국의 국립적정기술센터(NCAT)는 적정기술을 ‘활용되는 상황에 비추어 비용과 규모 면에서 적합한 도구 또는 전략’이라는 상대적으로 넓은 개념으로 정의한다.
기술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기술이 지역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과 공존 가능하고, 지역적으로 물질과 에너지원이 이용 가능하며, 지역민에 의해 그 도구와 과정들이 유지, 작동할 수 있을 때 이 기술은 적정한 것으로 여겨진다.5
다시 말하면, 각 지역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한 지역에서 적정한 기술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듯 보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적정한 기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적정기술의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아부바카 압둘랄리Abubakar N. Abdullalli는 “적정 기술은 자립적이고, 문화적 혼란을 거의 야기하지 않아야 하며, 지역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기술의 적절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으며,6 피터 듄Peter Dunn은 “적정기술은 특정 커뮤니티의 소망, 문화, 전통과 양립 가능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파괴적 영향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7
앞에서 언급한 정의와 특징으로부터 적정기술을 기존의 기술과는 다른 관점을 가진 또 하나의 기술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적정기술의 범위를 크게 제한하는 것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고체계’를 의미하며, 이 사고체계는 실로 하나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하다. 적정기술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지향, 개인의 ‘자유로서의 개발’을 위한 이해를 포괄한다.
즉, 적정기술의 개념은 기술을 적정한 수준으로 한계 짓는 데 있지 않고, 기술사용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와 태도를 고양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8 듄이 언급한 바와 같이 적정기술은 ‘스스로 진화하고, 역동적이며, 발전에 관한 완벽한 시스템적 접근’이며, ‘지식, 기술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철학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발전에 관한 한 가지 접근방식’이다.
결론적으로 적정기술은 “해당 기술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그 사용이 환경이나 타인에게 가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술”로서 적정기술의 가장 정확한 기준은 ‘인간’이며, 적정기술은 ‘기술의 진보가 아닌 인간의 진보를 우선시’하는 사고체계 또는 철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9 다시 말해, 적정기술은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줌으로써 인간의 실현을 강화하는 일련의 목표와 과정, 사상, 실천으로 정의될 수 있다.
2. 적정기술이 걸어온 길
적정기술의 태동을 위한 준비: 1965년 이전
적정기술의 정신을 제시한 간디
많은 사람들이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를 적정기술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간디의 사상은 인도의 ‘스와데시swadesh’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와데시는 ‘모국母國’을 뜻하는 힌디어로 외부 시장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피하고자 하는 국산품 애용운동이다. 외부 시장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마을공동체의 자립경제 체제가 매우 취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간디가 물레를 사용해서 실을 뽑는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개발된 방적기계를 사용한 대규모의 공장이 도시에 생기면서 여기서 제조된 저렴한 제품들이 농촌으로 전파되어 농촌 직물 경제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이에 간디는 직접 물레를 사용하여 실을 뽑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농촌의 가내 직물업을 소생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디에게는 당시 인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의 경제적 자립이 위협받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간디가 과학기술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인도 기업의 혁신 사례를 연구한 프라할라드(C. K. Prahalad)와 마셀카(R. A. Mashelkar)는 이러한 현상을 ‘간디 식 혁신’이라고 명명했는데10 그 이유는 간디가 생전에 말한 두 가지 교리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개발된 모든 과학적 발명을 높이 평가한다.”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게 제공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까지 채워주지는 않는다.”
프라할라드와 마셀카는 ‘적정한 가격affordability’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 이미 60년 전에 간디가 제시한 기준이었지만 인도의 기업은 이 능력을 최근에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러한 정신은 후에 ‘적정기술’ 운동이 전개되는 데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러한 이유로 슈마허는 1973년 실시한 간디 추모 연설에서 간디를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간적인 경제학자”라고 말했다.
미국의 개발도상국 과학기술 지원 사업11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포인트 포Point Four 프로그램을 발표함으로써 개발도상국 과학기술 원조를 시작했다. 1949년 6월 24일 발표한 연설에서 트루먼은 저개발국에서의 극심한 빈곤이 그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발전’이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미국이 ‘생산적인 투자를 위한 기초를 놓는 데 필요한 기술적 원조’를 할 것을 제안했다. 이 원조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경제 개발을 위한 기술적, 과학적, 경영학적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기업을 설립하기 위한 생산 기구와 재정 보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조 계획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국가가 똑같은 형태의 산업화 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전제이다. 따라서 거대한 공장, 기계화된 영농, 천연자원의 급속한 개발, 공학적 인프라 시설(특히 대규모 전력 시설)의 추진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 하에 이루어진 댐의 건설로 서식하던 어류가 사라지고, 경제의 양극화로 인하여 지역 유지들만 이득을 얻게 되고, 새롭게 도입된 기계가 연료 및 관리 인력의 부족으로 사용되지 않는 일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결과로 사람들은 선진국에서는 유용한 기술이 다른 장소와 환경에서는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기술을 이전받는 개발도상국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적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선진국 입장에서의 일방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미국의 개발도상국 기술 지원 사업은 막대한 예산 지원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간 차원에서는 1959년 일련의 과학기술자가 저소득 공동체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필요한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기 위한 ‘기술 원조를 위한 자원봉사자들Volunteers in Technical Assistance(VITA)’을 만들었다.
또한 1963년에는 ‘아시아의 자원봉사자들Volunteers in Asia(VIA)’이라는 조직이 샌프란시스코 만에 만들어졌다. 이들은 미국인이 아시아 국가에 거주하면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업과 동아시아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미국에 와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VIA의 초기 프로그램에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VIA의 후기 사업 중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1975년에 시작한 적정기술 프로젝트이다. VIA는 ‘적정기술 도서관Appropriate Technology Library’이라는 이름으로 천 권이 넘는 적정기술 관련 책을 수집해서 125개국에 보급했다. 이 사업은 나중에는 콜로라도 주립대학으로 이전되어서 빌리지 어스Village Earth라는 NGO에 의해서 지속되었다.
적정기술의 태동: 1965~1969년
중간기술의 도입을 주장한 에른스트 슈마허(1965)
독일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인 슈마허는 20년 이상 영국국립석탄협회British National Coal Board(NCB)에서 선임 경제학자와 경제 자문가로서 일했다. 여기서 슈마허는 석탄협회가 진폐증 환자가 탄광에서 일하면서 발병한 직업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법정 투쟁 끝에 승리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비단 영국석탄협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규모 조직이 피할 수 없는 결과로 인식하고 대규모 조직에 대한 지지에 회의를 가졌다. 슈마허는 1955년부터 미얀마에서 유엔의 경제자문가로서 일하면서 미얀마 인이 소득은 낮지만 일상생활을 행복하게 영위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슈마허는 “경제학의 문제는 고정된 하나의 해결책을 갖지 않는데 그것은 인간의 문제이고, 따라서 오직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환경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슈마허가 미얀마에 있을 때 발생한 중요한 사건은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과 간디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미얀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슈마허는 1965년에 ‘라틴아메리카의 발전에 있어 과학기술의 응용’이라는 주제로 열린 유네스코 회의 연설과 <옵저버>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선진국의 거대 기술을 개발도상국의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바로 도입하는 기존의 기술 원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 중심의 기술인 ‘중간기술’의 도입을 주장했다.
슈마허에 의하면 기술의 적용에 있어서 그 지역의 사회적, 환경적, 경제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러한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위치한다. 그래서 슈마허는 이러한 기술을 속성상 ‘대중에 의한 생산기술’이라고 칭하면서, 이것이 선진국의 거대 기술과 저개발국의 원시 기술의 중간에 위치했다는 의미에서 ‘중간기술’이라고 명명했다.
중간기술개발집단(ITDG)의 설립(1966)12
1965년 슈마허는 <옵저버>에 글을 기고하고 자본집약적인 선진국의 거대 기술을 자본, 기술력, 수용할 시장이 없는 개발도상국에 이전하는 전통적인 기술원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중간기술’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제안에 동의한 ‘아프리카 발전 위탁위원회Africa Development Trust’에서 기부한 100파운드를 자본금으로 하여 슈마허는 1966년 영국 런던의 뉴로(New Row)에 ‘중간기술개발집단Intermediate Technology Development Group(ITDG)’을 설립했다.
비주류 경제학자인 슈마허는 단순히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이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 ITDG는 보다 포괄적인 이름인 ‘실용적 행동Practical Action’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ITDG의 설립 목적은 ‘기술의 지속가능한 사용을 통해서 개발도상국의 빈곤을 퇴치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한다.
①개발도상국의 빈곤층을 둘러싼 경제적, 기술적 힘이 생계에 영향을 미치므로 그들의 생계를 지속시켜줄 수 있는 기술적 변화를 관리한다.
②새로운 기술을 적정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하면서 빈곤층의 생활에 새로운 기술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③개발도상국의 빈곤층에게 대안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모델의 중요 요소인 적정기술이 지닌 잠재력에 대해서 설명한다.
④지역 협력을 통해서 빈곤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에 대해서 설명한다.
⑤지역 참여자들의 삶과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연결한다.
[ITDG의 목표] |
①관련 자료를 문서화하고 체계화한다. |
②체계화된 정보를 서적으로 출간하고,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을 장려하고, ITDG의 서비스를 홍보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한다. |
③빈곤층의 자립에 필요한 중간기술의 실질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지원해나간다. |
ITDG 활동의 핵심 원리
①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사람이 중심의 기술 활동.
②함께 일한다: 수동적인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참가
③미래 세대에 대해 고민한다: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제도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을 목표로 하는 ITDG의 프로젝트
④다양성을 존중한다: ITDG의 프로젝트는 성별, 민족, 종교, 육체적 능력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하며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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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6월:<사람의 손과 동물로 작동하는 장비를 위한 사전> 출판 |
1968년: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조사 서비스(Enquiry Service) 설립 |
1973년:중간기술 출판사를 설립하고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출판 |
1975년:슈마허, 미국 강연 투어 실시. 백악관 방문, 세계은행의 임원들과 토론 |
1977년:영국 정부는 ITDG가 제안한 ‘적정기술’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3년간 50만 파운드를 매년 지원하기로 함. 슈마허 사망 후, 조지 맥로비(George McRobie)가 ITDG의 새로운 의장이 됨 |
1980년:영국의 황태자 부부, 신필드(Shinfield)에 위치한 중간기술센터 방문 |
1984년:럭비(Rugby)에 새로운 사무실 설립 |
적정기술의 1차 부흥: 1970년대
소외된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제안한 빅터 파파넥(1971)
영국에서 급진적인 비주류 경제학자인 슈마허가 적정기술의 이론적인 기초를 확립하고 ITDG를 만들어서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 1927~1998이라는 디자이너가 소외된 사람을 위한 디자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쿠퍼유니언 대학과 MIT에서 공부한 파파넥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학,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뉴욕 주립대학 등에서 강의했으며, 유네스코의 국제 디자인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파파넥은 소비문화에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단순히 심미적인 만족을 위한 디자인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디자인을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드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정의하면서 디자이너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디자이너들의 시간의 10%를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을 위해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개발도상국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적정기술을 사용해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디자인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사상을 정리한 책이 1971년에 발간된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다.13 이 책에는 문맹인을 위해 색깔로 표시된 체온계, 맹인용 점자 필기구, 정신 및 지체장애인을 위한 자전거, 아프리카 인을 위한 저가 TV, 인도네시아 원주민이 화산 폭발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고안된 깡통 라디오 등 다양한 소수를 위한 디자인 제품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서문에서 특허나 저작권의 개념에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에 의하면, 신체가 불편한 아이들을 위해서 운동 치료가 가능한 장난감을 디자인했을 때 이 디자인이 특허권을 얻기 위해서 1년 반 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인간을 위한 디자인>에 소개되는 디자인 제품을 위해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디자이너는 세계의 절실한 여러 요구를 해결하는 데 자신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에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other 90%’ 또는 ‘인간 중심의 디자인human centered design’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발간(1973)
1965년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을 처음 주장하고, 1966년 ‘중간기술개발집단(ITDG)’을 설립한 슈마허는 그동안 해왔던 강연과 논문을 모아서 1973년 <작은 것이 아름답다-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발간한다. 이 책을 통해서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모두 1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중간기술’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장은 1965년 유네스코 회의(칠레)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중간기술 개발을 요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와 1971년 ‘타일하르트 센터’ 연차총회(런던)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인간을 위한 기술’이다. ‘인간을 위한 기술’은 이후에 적정기술의 애칭으로 널리 사용된다.
특히 흥미로운 장은 불교에 심취했던 미얀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된 ‘불교 경제학’이다.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서 그 지역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경제생활’이라는 ‘불교 경제학’은 ‘중간기술’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1973년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출간한 슈마허는 1975년에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적정기술 강연회를 실시하고, 1977년 스위스에서 강연 여행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66세의 인생을 마감한다. 슈마허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슈마허 칼리지’, ‘슈마허 학회(지금은 신경제 연구소)’, ‘신경제 재단’ 등이 설립되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발간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널리 읽히고 있으며 <타임>지가 선정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100권에 선정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매년 9월 ‘국경없는공학자회(EWB)’ 영국 지부와 ‘프랙티컬액션’ 등의 주최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축제’가 열리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한국의 공학도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의 윤제용 교수는 2009년 12월 서울대에서 있었던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 창립총회에서 대학 재학 중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접하고 그의 연구 분야를 ‘환경공학’으로 정했다고 술회했다.
영국 대안기술센터의 설립(1973)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출간한 1973년에 제러드 모건Gerard Morgan은 영국의 웨일스에 ‘대안기술센터Centre for Alternative Technology (CAT)’를 설립했다. 모건이 대안기술센터를 설립할 당시 이 단체는 친환경 원칙을 추구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위한 일종의 ‘실험실’과 같은 것이었다.
대안기술센터의 설립 목적은 전 지구적으로 지속가능하고, 온전하며, 환경적으로 건강한 기술과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사람들의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달성할 수 있도록 다양한 범위의 대안을 탐색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대안기술센터는 토지의 사용, 주거지, 에너지의 보존과 사용, 음식과 건강, 쓰레기 관리와 재활용 등과 관련된 통합적 아이디어 및 이의 실행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안기술센터는 1975년 16만 제곱미터 규모로 전시관을 개관했다. 전시관에는 저에너지 하우스, 태양광, 수력, 풍력시설, 램 펌프, 스트로베일 하우스, 친환경 원예법 등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대안기술센터는 대안기술 자체에 노력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지구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도전인 기후변화, 환경오염, 자원 낭비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기술과 삶의 방식을 연구하고 훈련하며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대안기술센터에서는 학생, 교사, 일반인을 대상으로 솔라파워, 풍력발전, 신 재생에너지 등의 전문 과정 외에도 지속가능한 삶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단기 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안기술 관련 정기 간행물인 <클린 슬레이트Clean Slate> 및 서적을 발간하고 있다.
또한 대안기술센터는 2000년부터 동런던 대학과 함께 환경과학 관련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8년에는 건축학 분야의 전문 학사 과정을 시작했다. 경남 산청에 있는 민들레 공동체에서 대안적인 삶을 살던 이동근은 이곳에서 유학한 뒤 한국에 ‘대안기술센터’를 설립했다.
미국 국립적정기술센터의 설립(1976)14
1973~1974년에 석유 파동이 발생하자 미국인은 지금까지 항상 값싸고, 풍부하고,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왔던 석유가 어느 날 갑자기 고갈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대응하고자 지미 카터 대통령은 ‘커뮤니티행동국Community Action Agencies(CAAs)’을 통해서 다양한 에너지 보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76년에는 몬태나 주에 ‘국립적정기술센터National Center for Appropriate Technology(NCAT)’를 설립하는 계획이 제시되고 약 3백만 달러의 예산을 확보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제리 브라운Jerry Brown 주지사가 주정부 내에 ’적정기술국Office of Appropriate Technology (OAT)을 설치했다.
국립적정기술센터(NCAT)의 설립 목표는 저소득층 공동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돕는 데 있었다. 당시 저소득 가정의 가장 큰 걱정은 에너지 비용 지출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에 NCAT는 대체 에너지 개발에 집중했다. 이런 이유로 NCAT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는 적정기술의 의미가 ‘저소득 가정의 필요와 자원에 적절한 기술 및 공정’으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NCAT는 적정기술의 특징을 ①적용하기 간단한 것, ②자본 집약적이지 않을 것, ③에너지 집중적이지 않을 것, ④지역의 자원과 노동력을 사용할 것, ⑤환경과 인간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정리했다.
NCAT의 초기 프로그램에서 다룬 분야 |
①NCAT 직원이 지역의 필요를 파악하기 위해서 마을 지도자를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교육 및 기술을 지원한다. |
②정보 교환의 결과로 파악된 기술에 대한 연구, 개발 및 기술적 지원을 한다. |
③기술적 지원과 평가를 포함하는 기술 시연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
NCAT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370개의 적정기술 시연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50여 회의 실용 워크숍과 커뮤니티 활동 리더와 저소득층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개최했으며, 100여 부의 적정기술 관련 소비자 간행물을 발행했다.
초기 프로그램의 주요 분야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보존이었지만, 이후 주거, 식량 생산, 운송, 경제개발과 직업 등 다양한 분야로 관심사를 넓혔다. 최근 NCAT에서는 ‘활용되는 상황에 비추어 비용과 규모 면에서 적합한 도구 또는 전략’이라는 넓은 개념으로 적정기술을 정의한다.
하지만 석유 파동의 위기가 감소하고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 차원의 적정기술 운동에 대한 지원은 중지되고 말았다. 시장중심주의와 함께 강한 미국을 표방하는 미국의 재남성화Remasculinization 흐름에서 적정기술은 시민권 운동, 여권 운동, 환경주의 운동, 베트남전 패배 등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여성화의 한 부분으로 폄하되어 쇠퇴하고 말았다. 한때를 풍미했던 적정기술은 레이건이 취임한 지 몇 달 안에 학회, 미디어, 학술 프로그램, 서적에서 전혀 다루지 않는 개념으로 전락했다.15
재도약을 위한 준비: 1980~1999년
IDE를 설립한 폴 폴락(1981)
레이건 정부에 의해서 국립적정기술센터에 대한 재정 지원이 중단된 즈음, 콜로라도 주에 살던 정신과 개업의인 폴 폴락Paul Polak은 아내가 다니던 교회 선교팀과 함께 방문한 방글라데시에서 극심한 빈곤을 목격했다. 이때의 충격으로 하루에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한 폴락은 1981년 국제개발회사International Development Enterprises(IDE)를 설립했다. IDE의 설립 목적은 빈곤층의 수입을 증대시켜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IDE는 주로 소작농에게 초점을 맞춰 ‘관개와 소규모 시장을 통한 빈곤 감소’라는 독특한 모델을 사용했다.
폴락은 적정기술 제품을 디자인할 때 명심해야 할 것 3가지를 제시했다.16 첫 번째가 “적정기술 제품을 디자인하기 전에 열린 마음으로 25명의 고객과 만나라.”이다. 고객과의 만남을 통해서 고객이 처한 상황과 고객의 니즈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최근에 언론과 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1981년부터 매년 개발도상국에 사는 100여 가구를 방문해서 자세한 인터뷰를 진행해왔고‚ 현재까지 3,000 가정 이상을 만났다고 말했다. 폴 폴락이 적정기술 제품의 보급에 있어서 고객과의 만남을 중시한 이유는 정신과 의사 시절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는 콜로라도에서 정신과 의사로 개업하고 20여 년 동안 환자들이 처한 상황을 보다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틈만 나면 환자의 가정을 방문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디자인한 제품을 구입한 사람이 1년 안에 원금을 회수하도록 하라.”이다. 폴 폴락은 일반인이 개발도상국에 사는 사람들은 구매력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과는 달리 이 사람들도 구입한 제품을 통해서 소득이 증대되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기꺼이 제품을 구매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돈을 저축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1년이 지나기 전에 원금을 회수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의 제품을 제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세 번째는 “100만 개 이상 팔릴 제품을 디자인하라.”이다. 적정기술 제품이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이것을 판매하는 유통망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유통망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여기에만 전념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0만 개 이상의 물건이 팔려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젊어서부터 딸기 농장을 경영하고, 아파트를 사서 되팔고, 작은 석유시추회사를 운영하는 등 기업가적 정신이 있었던 폴락은 적정기술 개발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던 이상적인 발명가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적정기술 운동에 처음으로 비즈니스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후 폴락은 디자인 혁명을 뜻하는 ‘D-Rev’이라는 적정기술 개발 기업과 ‘Windhorse International’이라는 벤처기업을 설립하기도 한다. 또한, 2008년에는 30여 년간의 적정기술 활동 경험을 다룬 <빈곤으로부터의 탈출Out of Poverty>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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